문화의 전달자, 수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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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pp.290-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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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전달자, 수도사들
수도사들이 없었다면 이시도루스의 전집은 유럽 곳곳으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사들은 전문적인 필사 능력과 시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서방 세계에서 유일한 지식인 집단이었던 것이다. 고대문헌들을 필사하는 작업은 투르의 주교인 마르티누스 밑에서 일했던 수도사들에 의해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본격적인 수도원 필사실은 #카시오도루스 에 의해 6세기 중엽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에 서방에서는 주로 양피지를 사용하여 책을 제작했는데, 이는 이집트에서 생산된 파피루스나 동방에서 생산된 종이에 비해 양이나 송아지,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양피지가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피지는 내구성이 강한 반면 값이 비싸고 작업하기에도 매우 까다로웠다. 당시에는 보통 4장을 겹쳐 반으로 접고 꿰매는 식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은 총 16쪽으로 각 장을 4등분해 기록했다. 이것을 ‘4절판’이라고 부른다. 이를 필사할 때에는 한 장씩 분리하여 필사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필사실에는 20명가량의 필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발걸이에 발을 얹어놓은 상태에서 앞 책상에는 필사할 책을 펴놓고 옆 책상에는 펜촉, 잉크, 칼, 지우개, 각도기와 자 등을 놓고 작업했다. 필사작업은 언제나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원본이나 편지를 받아쓰는 방은 따로 있었다). 필사작업은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필사본 귀퉁이에 간혹 필사자의 심경을 토로한 부분이 발견되곤 했다. “그리스도여, 나의 작업에 호의를 베푸소서.” "오직 세 개의 손가락만이 사용되고 있다. 내 몸의 나머지 부분은 지치고 괴로움에 빠져 있다.” "이 작업은 더디고 어렵다.” “벌써 밤이 되었구나. 저녁 먹을 시간인데." 필사자는 최고의 포도주를 마실 권리가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위대한 여백의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필사본에 남겨놓기도 했다. "이 여백 위에 오늘 태양의 반짝거림이 즐겁다. 태양은 그렇게 어른거리고 있다.”
#필사작업 은 7-8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에서는 캔터베리, 리편, 위어머스-재로, 요크와 린디스판 등이, 아일랜드에서는 뱅고어, 버로, 켈스, 골에서는 오툉, 뤽세유, 코르비, 생메다르드수아송 수도원 등이 필사작업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에흐테나흐, 생갈, 보비오, 노안톨라 수도원 등에서도 필사작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필사는 매우 더딘 작업으로, 속기사로 유명했던 아이오나의 콜룸바는 하루에 20-30쪽을 필사하여 12일 만에 <더로의 책(Book of Durrow)>을 완성했다고 한다. 성경을 필사하는 데에는 만 1년이 걸렸다. 보통 필사작업이 끝나면 최고 필사 책임자가 필사본을 일일이 꼼꼼하게 대조했으며, 이 작업을 거쳐야 제본실로 넘겨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극소수의 책만이 생산되었다. 코르비 수도원에서는 5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도서관 중에는 소장하고 있는 책이 18권 혹은 33권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8세기에 수백 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라면 이는 아주 우수한 도서관에 속했다. 필사작업에 힘입어 도서관들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9세기에 왕실의 후원을 받은 랭스의 생레미 도서관은 600권이 넘는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도사는 문화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전달자였다. 그들 가운데 박식하고 모험심이 강한 인물들(재로 수도원의 비드가 가장 좋은 본보기다)은 성경의 번역과 주석, 연대기나 역사서술에 관심을 보였다. 9세기에 이르면 역사 편찬을 주도하는 수도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생드니 수도원의 #힌크마루스 는 프랑스 왕실과 수도원의 이야기를 소설 형태로 기록했다. 그는 랭스의 대주교가 된 이후에는 #생베르탱 수도원#을 프랑스 학문의 중심지, 특히 역사, 기록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지성인들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힌크마루스는 861-882년에 간결하고 무미건조하게 씌어진 <생베르탱의 일생(Annals of St. Bertin)>을 풍부하고 감미로운 문체로 바꾸는 일을 했다. 힌크마루스는 비드처럼 프란시스 지역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모든 자원들을 총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시도하려 했던 것, 즉 역사를 사색적이고 창조적이며 해설을 곁들여 기록하려는 시도는 실제로 실현되지 않았다. 역사 서술은 성경과 고전적 관례들, 그리고 확실히 뛰어난 모델로 인정받았던 라틴 모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 수도원은 대학의 역할을 감당했으나 이곳에서 실시한 교육은 한계가 있었고 교육목표도 소박했다. 왜냐하면 요한네스 카시아누스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 교리의 창조적인 탐구는 이미 끝났으며, 남은 과제는 이를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에 #히에로니무스# 나 #아우구스티누스# 처럼 교리 연구를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이 같은 주장은 말 그대로 기독교 교리 연구가 정점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고전 세계의 성과물들을 온전히 전해 받지 못한 열등감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로마 제국 시대에 인류가 탐구할 수있는 지식이 거의 모두 이루어졌으며, 자신들은 이 지식을 온전히 전수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그나마 전수된 지식을 되도록 충실하게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 저술활동을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전 기독교 사회의 지성인들에게 매우 소박한 역할만을 남겨놓았다. #펠라기우스 사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근본 원리들을 탐구하는 전통을 몰아내고 이미 결론이 난 문제들을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행위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는 말했고 토론은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기독교 세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기 때문에 이 말 또한 다음과 같은 식으로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넓게 이해되었다. "고대 세계와 교부들이 이미 중요한 교리들을 다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토론은 필요 없다." 토론은 가능했으나 과거의 결론을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수도사들의 역할은 단지 결론을 전하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결국 중세 문명은 지적인 자기비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수도사들은 현존하는 과거의 자료들을 보존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책을 저술하는 창조적인 일보다는 과거의 저술들을 필사하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필사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료들이 그만큼 더 잘 보존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년에 비드가 필사자에게 “좀 더 빨리 쓰라”며 재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필사작업과 관련해서 일종의 우울한 긴박감이 감돌았다. 왜냐하면 로마가 멸망했듯이 라틴 학문도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9세기 말에 앨프레드 왕은 라틴어로 씌어진 중요한 책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영어로 번역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8-9세기에 이르면 고대 문헌들의 필사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필사작업은 로쉬, 쾰른, 비츠부르크, 라이헤나우, 생갈 등 주로 독일의 대형 수도원들에서 이루어졌다. 이 중에서도 라인 강 동쪽에 위치해 있던 풀다 수도원은 특히 유명했는데, 이곳을 통해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암미아누스, 비트로비우스, 세르비우스 등의 저술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라비누스 마우루스는 세비야의 이시도루스의 뒤를 이어 백과사전을 편찬했으며, 그의 제자였던 세르바투스 루푸스 또한 당대에 가장 진보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따. 그럼에도 그들의 학문은 그다지 독창적이지는 못했다. 라바누스의 백과사전은 새로울 것이 없었으며, 루푸스 또한 비기독교 사회의 법들을 모아 편찬한 것에 불과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수도사들이 고전이라고 해서 아무것이나 필사하여 전수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비기독교적인 작품들, 특히 그리스 작품들 중에 필사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주로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그레고리우스 대제 같은 교부들의 저술과 비드의 저작을 필사했으며, 이와 더불어 성경과 성인들의 전기, 예배와 관련된 작품들, 즉 성사, 예식서, 성구집, 미사 예식서, 교송집과 노래집, 찬송가, 시편과 서품서, 순교자들의 전기, 주교의 기능을 다루고 있는 주교의 직무서, 고해성사 세칙들을 필사했다. 당시에 필사된 책들 가운데 기독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책은 1%정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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