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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묵상글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 하씨 집안을 세우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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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28 04:15
- 하씨 집안을 세우라!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건물을 세우지 말고 집안을 세워라!
성전을 짓지 말고 하씨(氏) 집안을 세워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일 것이라고 오늘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다윗이 주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겠다고 할 때
그것을 하느님께서 마다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렇게까지 수고할 필요 없다고 사양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다윗의 수고를 덜어주시겠다는 사랑 표시인가요?
그런데 제 생각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대업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성전 건물을 세우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고,
그런 정도는 아들 솔로몬이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해야 할 진짜 큰 대업은 집안 곧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런 대업을 위해서라면 하느님께서도 돕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라시는 것은 다윗에게만이 아니고 늘 또 누구에게나 그러십니다.
프란치스코에게도 같은 것을 바라셨고 우리에게도 똑같이 바라십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께서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주셨을 때 그것은 성당 건물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하씨 집안 곧 하느님 공동체를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이것을 나중에 알았고,
그래서 처음에는 무너져가는 성당 셋을 고쳤는데,
우리도 비슷한 잘못을 지금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공동체를 하느님 공동체로 세우지 않고,
교회 건물이나 수도회 건물을 많이 세우고는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피정을 마치고 각자의 공동체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도 마찬가지인데 곧 하느님 공동체로 세우라는 것일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복음 말씀으로 바꿔 들으면
나의 집을 고치라는 하느님 말씀을 공동체가 같이 듣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아니라
들을 귀가 있는 공동체가 되어 말씀의 열매를 백 배 내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개인도 하느님 말씀을 경청해야겠지만
공동체가 하느님 말씀을 같이 듣고 같이 식별하고 같이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같이 듣고 같이 듣는 하씨 집안이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다윗에게 네 집안을 내가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시듯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같은 약속을 해주실 것입니다.
이 강론은 수도회 연피정 동반을 마치고 파견 미사 강론입니다.
양해해주시고, 우리 가정도 이러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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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기억하기 위한 책(성경)!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의 최초 독자들은 우리의 문화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인간성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성경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기억하기 위한 책(성경)
2026년 1월 27일 화요일
공적(공공) 신학자(public theologian) 레이첼 헬드 에반스(1981–2019)는 구약 성경이 형성되게 된 역사적 상황을 회상합니다:
우리의 성경은 신앙의 위기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와 잠언, 시편들이 구전 전통을 통해 전해졌음은 분명하지만, 학자들은 히브리 성경, 곧 구약 성경의 대부분이 다윗 왕 시대에 기록과 편집이 시작되었으며, 유다에 대한 바빌론 침공과 바빌론 유배라는 신앙의 위기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집대성되었다고 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강력한 이교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오늘날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일지라도, 그 국가적 신앙 위기가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절실합니다. 왜 의인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는가? 악과 죽음은 계속 승리할 것인가?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은 신실하신가? 하느님은 현존하시는가? 하느님은 선하신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단순한 명제로 제시하기보다, 성령께서는 이야기의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언자들의 기억을 일깨우시고 서기관들의 붓을 움직이시어, 길을 잃고 방황하는 백성을 불러 모아 함께 기억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공동 인간성을 기억하라는 부르심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집단적 기억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을 낳았으며, 성경이 낯설면서도 친근하고, 거룩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인간의 손자국으로 얼룩져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성경의 최초 독자들은 우리의 문화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인간성을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배한 하느님께서는 그 인간성을 그들의 신학과 기도, 노래와 이야기 속에 담아내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성경은 찬미의 시편뿐 아니라 원망과 분노의 시편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악의 본질과 고통의 원인에 대해 큰 질문을 던지지만, 언제나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다."(코헬렛 1,18)라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지혜를 얻어라. 이것이 곧 지혜의 시작이다."(잠언 4,7)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웃의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순간에는 하느님을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인간처럼 연약하고 가까운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 세기 동안 가장 뛰어난 체계적 신학자들조차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너무나 자주 우리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손에 쥔 성경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역동적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독백이라기보다 친밀한 대화처럼 읽힙니다. 우리의 가장 거룩한 이야기들은 관계의 균열, 치열한 신앙의 위기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믿음만큼이나 의심에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성경은 큰 위로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매일 묵상과 더불어 리처드 로어 신부, 미라바이 스타, 토머스 머튼의 저서를 접하면서, 저는 현실을 바라보는 데 있어 ‘양쪽 모두’라는 통합적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경 말씀과도 조화를 이루는 듯합니다. 여러 관점을 갈등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제 마음에 깊은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또한 용서가 참으로 실재한다면, 용서받은 사람들과 사물 역시 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리처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속해 있습니다"("모든 것은 각기 제 자리를 지니면서도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F.L.
References
Rachel Held Evans, Inspired: Slaying Giants, Walking on Water, and Loving the Bible Again (Nelson Books, 2018), 7, 12, 13–1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réj Richár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경과 우리의 관계는 때로는 분명하고, 때로는 신비로우며, 그럼에도 언제나 푸르게 자라나는 생명과 같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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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와 세상의 신비에 깊이 들어서게 해 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μυστήριον, mysterium)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parabola)로만 다가간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 "밖에 있는 이들"을 결코 배척하시거나, 제자들을 좁은 집단이나 폐쇄적인 교단처럼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군중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곧 이야기와 이미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셨습니다. 그분의 비유는 인류 문학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야기들 중 하나로 꼽히며, 설령 그분이 누구신지 모른다 해도 기억될 만한 작품들입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셨습니다. 그분의 비유는 인류 문학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야기들 중 하나로 꼽히며, 설령 그분이 누구신지 모른다 해도 기억될 만한 작품들입니다.
추상적인 진술은 그 순간 이해하지 못하면 놓쳐버립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릅니다. 이야기는 우리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당장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해도 기다려 줍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간을 줍니다. 이는 곧 "배려의 덕목"입니다.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이듯,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영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곧 땅(토양)의 준비 상태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사실 성서 학자들에 의하면 이 내용은 후대에 첨부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비유를 통해 하느님과 세상의 신비에 더 깊이 들어가도록 유도해 주기 위한 교육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신비"를 단순한 수수께끼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성령의 은총 안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신비를 직접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전통에서 비유는 "하느님 말씀의 성사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눈에 보이는 이야기와 이미지 안에 보이지 않는 은총과 진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단순한 교육 방식이 아니라, "인내와 자비의 표징"입니다. 교회는 이를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 Dei)"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비유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는 성사적 언어이며, 동시에 자비로운 기다림의 행위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비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씨를 뿌리러 나갈 때 씨를 땅에 뿌리기 위해 잘 포장을 하든가 아니면 그릇에 잘 담아서 흘리지 않게 조심을 다해 가지고 가서 일구어 놓은 밭에 뿌리지 않습니까?! 씨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씨 뿌리는 이의 주의 태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실패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씨앗을 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가 오늘날의 어두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을 상기시킵니다.
씨를 아무 데나 뿌리는 모습은 하느님의 은총이 제한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낭비"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은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때로는 거부당하고, 뿌리내리지 못하며, 세속적 욕망에 질식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씨를 뿌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감사의 마음으로 상기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씨가 길가나 돌밭에 떨어진 것은 "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차별적 사랑과 은총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교회는 실패와 거부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씨앗을 뿌리는 사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여러분과 짧은 묵상글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에도 씨앗은 떨어진다.
농부의 손길은 계산적이지 않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땅에 씨앗을 흩뿌린다.
사람의 눈에는 낭비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무차별적 흩어짐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풍성함이다.
사랑은 선택된 땅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사랑은 거부당할 가능성조차 품어낸다.
어머니인 교회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결실만을 따지지 않고, 거절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씨앗을 뿌리는 사명을 이어간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에게 먹히고,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햇볕에 시들어도,
그 순간조차 은총의 흔적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낭비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성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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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해설을 직접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선사된 것’(datum)이요, ‘먼저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열매를 맺는 권능 곧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물인 ‘말씀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고, 우리의 소명은 그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신이 죽어야 맺는 일이요, 또한 그 열매는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게 됩니다. 곧 형제들과의 관계가 열매를 맺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가 됩니다. 그러니 내 형제, 내 공동체, 내 나라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한편,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일구어집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단지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알아야 할 일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이요, 그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땅을 지배하려들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동시에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는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주님의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말씀이 지금 여기, 내 형제와 더불어 내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르 4,20)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라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게 하소서.
열매를 맺는데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도 방관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기꺼이 죽어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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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스에서 ‘환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저는 환율을 실감하며 체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1997년 IMF 때입니다. 당시 환율은 1달러에 600원가량 했습니다. 그런데 외환위기의 파도를 맞으면서 환율이 2,000원까지 급등했습니다. 당시 저는 소량의 달러가 있었습니다. 환전해서 부모님 전세금 마련에 사용했습니다. 2019년부터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급여를 달러로 받고 있습니다. 환율과 크게 상관없이 지냈습니다. 작년 10월에 한국으로 휴가 갔을 때 환전해서 사용했습니다. 예전에 환율이 오르면 수출하는 기업은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가격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수입하는 기업은 어려움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수입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환율은 한두 가지 원인으로 정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축 통화 국가인 미국의 경제 상황이 환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전쟁도 환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국가의 정책과 투명도도 환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는 ‘외환위기’와 같은 어려움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숫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식 지수, 금리, 물가, 그리고 환율. 뉴스를 켜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숫자들입니다. 그중에서도 환율은 한 나라의 경제 상황을 가장 예민하게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환율이 오른다, 떨어진다는 말 속에는 단순한 경제 정보가 아니라 사람들의 두려움, 기대, 불안, 그리고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환율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환율을 완전히 통제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정부와 치밀한 정책이 있어도, 전쟁, 금리 변화, 국제 정세, 자본 이동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환율은 늘 먼저 흔들립니다. 그래서 환율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율이 급변할 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찾고, 더 빠른 판단을 요구합니다. “지금 달러를 사야 할까?”, “이 선택이 손해는 아닐까?” 불안은 계산을 부르고, 계산은 또 다른 불안을 낳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히 말해 줍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계산을 늘릴수록, 불안은 오히려 더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만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집트에서는 고기 가마 옆에 앉아 있었는데, 이 광야에서 굶어 죽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시지만, 하루치 이상을 모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안 때문에 만나를 쌓아 두려다 썩은 냄새를 맡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나의 양이 아니라, 불안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입니다. 광야의 불안은 계산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신뢰를 배울 때에만 비로소 견딜 수 있었습니다. 환율이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정책이 잘못되었다.” “누가 책임져야 한다.” 물론 정책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환율을 단일한 정책이나 한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통제의 환상에 빠지게 됩니다.
축의 시대(Axial Age)에 인류의 현인들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삶으로 나갈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조로아스터교, 불교, 유교, 유대교, 그리스 철학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축의 시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황금률(黃金律)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남에게도 행하지 않는 겁니다.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인류의 문명, 문화, 역사, 경제, 예술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의 씨가 열매 맺은 겁니다. 그러나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메뚜기가 내년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영원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욕망과 두려움은 인류를 추락하게 하였습니다. 전쟁, 폭력, 살인, 굶주림은 인류의 희망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이 뿌리고 싶은 씨는 무엇일까요? 어떤 열매를 원할까요? 재물, 성공, 명예, 권력은 아닌지요?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도 아직은 아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향해 올라가지만, 그곳에서는 희망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뿌리시는 씨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 진리,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씨를 뿌리셨고, 제자들과 함께 그 씨가 열매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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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당신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 오늘은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 가장 탁월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중 한 분으로 손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꽤 잘나가는 가문에서 출생합니다. 당대 영향력 있던 인물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 있던 아퀴나스 백작 가문이었습니다. 세속적으로 미래가 장및빛이었던 토마스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모의 격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당시 신생 수도원이자 절대적 가난을 실천하던 탁발수도회인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합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갖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대학자이면서도, 진정 겸손하고 가난한 수도자로서의 길을 충실히 걸어갑니다. 1265년 토마스는 자신의 저작 중에서 가장 눈부신 걸작인 신학대전(神學大典)의 집필에 착수합니다. 이 신학대전의 완성은 오랜 투쟁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만큼 뼈를 깎는 오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 토마스의 노고를 아셨던지 하느님께서도 이 대작을 축복하셨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어느 날 하느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하여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토마스는 겸손하게도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주님, 당신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토마스가 수도회 총회 참석차 볼로냐에 체제하고 있던 때에 생긴 에피소드를 통해 토마스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수사’ 한 사람이 사색에 빠져 수도원 회랑을 거닐고 있던 토마스(이미 대학자로 교회와 수도회 안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를 붙잡았습니다. 토마스가 누군지 알 길 없던 ‘새파란 수사’가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지금 시내 볼일 보러 가는 중인데요, 맨 먼저 눈에 띄는 형제를 데리고 함께 가도 좋다고 원장 신부님께 허락을 받았거든요. 같이 가 주셔야겠는데요.” 토마스는 ‘새파란 수사’와 함께 길을 나섰는데, 대단한 거구였던 토마스는 걸음이 빠른 ‘새파란 수사’와 도저히 보조를 맞출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뒤쳐지는 토마스를 향해, 그때마다 ‘새파란 수사’는 “왜 그리 걸음이 늦냐? 살 좀 빼라!”고 수도 없이 야단을 쳤겠지요. 그러나 토마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최선을 다해 쫒아갔다고 합니다. 잠시 후에 그가 대학자 토마스임을 알게 된 ‘새파란 수사’는 얼굴이 샛노래지면서 그때까지의 무례를 사과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수도생활은 순명으로 완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년에 도달한 토마스가 1273년 리옹에서 개최될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의 일이었습니다. 꽤 심각한 질병에 걸린 토마스가 사경을 헤맬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 토마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간절한 부탁-진정 수도자다운 부탁-을 하였답니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근처에 있던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 열흘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임종 사흘 전 성체를 영한 후 토마스는 이런 장엄고백을 하였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양식인 그리스도여, 지금 나는 당신을 받아 모시나이다. 내가 배우고, 밤을 지새우고, 애를 쓴 것은 모두 당신의 사랑 때문이었나이다. 나는 당신에 관해 설교하고, 당신에 대해 가르쳤나이다. 나는 당신께 반함을 알면서 말한 것은 한 번도 없었나이다. 하오나 만일 이 성사와 다른 사항에 관하여 잘못 말했거나, 잘못 적은 것이 있었다면, 모든 것을 거룩한 로마 교회의 판정에 맡기옵고 교회에의 순명 속에 이 생을 마감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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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비록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지만......
태어나서 결혼을 전제로 사랑을 한 여인이 두 명 있었습니다. 20년 전 쯤에 한 번, 또 한 번은 영세를 받고 난 후에 성당 누나를 짝사랑한 경우입니다. 20년 전 여자는 개신교 때 만나 거의 결혼을 얼마 앞두고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암으로 그랬습니다. 만약 그때 결혼을 했더라면 전 가톨릭 신자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후로는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하도 걱정을 하셔서 몇 사람을 만났지만 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애가 눈에 밟혔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다 숨겼습니다. 혼자 제 가슴에만 간직했습니다. 제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대구 여자였습니다.
사투리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런 여자였습니다. 근데 그 애를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요.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여자를 잊고 있었던 저에게 사랑이 또 싹텄습니다. 처음엔 솔직히 약간의 연민으로 시작했던 것입니다. 처음엔 몰랐습니다. 저보다 조금 연상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띠동갑이었습니다. 딱 1년 정도 정말 매일 매일 가슴이 터지지 않을 날이 없을 정도로 거의 매일 그렇게 가슴 아프게 보냈습니다. 밤 늦게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가슴앓이를 하는 것입니다. 눈물로 애원도 해보고 애걸복걸도 해봤습니다. 언제는 성당 성전 감실 주위에서 그 누나는 기도를 잘 하는 누나라 그곳에서도 제 순정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고백에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저 누나라면 내 목숨을 준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이 성당에 소문으로 다 퍼졌습니다. 응원하는 분도 계시고 이건 아니다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남자들은 응원하는 사람이 많고 자매님들은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응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지금은 서울로 이사를 가신 자매님이신데 그분은 제가 영세를 받고 아마 채 2년이 안 돼서 서울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이사를 가신 후에 서울에서 두 번 제가 뵈었고 용산에서 유명한 식당에서 식사도 같이 했고 용산 성당도 덤으로 구경도 하고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유명한 근처 성지도 갔습니다. 불과 얼마되지 않는 곳입니다. 순간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 자매님은 제가 그런 사랑을 하니 제 마음이 순수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물론 제가 영세를 받고 본당 주보에 글을 올리는 걸 보시고 글에서 감동을 해 저를 좋아하시는 것도 있었는데 그분은 이런 것에도 저를 다르게 보셨나 봅니다. 제가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들어가게 됐을 때 소식을 전했는데 자매님이 저를 위해 밥을 사주시려고 서울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올 때 대녀도 있고 한데도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마산 근처 호텔에서 숙박을 하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저에겐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감정이 순간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돌이켜보면 비록 아픈 사랑이었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전에 사랑했던 애는 분명 사랑한 건 맞지만 어떻게 보면 조용히 동생으로 순수하게 사랑한 것 같았습니다. 뜨겁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근데 이 누나는 정말 민망한 표현이지만 뜨겁게 가슴이 타들어갈 정도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게 아닙니다. 왜 그럼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비록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이런 사랑도 저에겐 좋은 경험이었다고 표현해보겠습니다. 이걸 경험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하지 않긴 합니다. 어떻게 달리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언어가 부족해서 그럴 겁니다. 그 이유는 비록 이성간의 인간 사이에서 하는 일방적인 사랑이었지만 이게 대상은 달라도 이런 뜨거운 사랑을 해 본 사람은 하느님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불씨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제가 제 사례를 통해 일반화시키는 건 무리가 있다고 보지만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건 일리가 있습니다. 순간 가슴이 북받치기도 합니다.
마무리짓겠습니다. 이런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형제애로써라든지 아니면 이성간 사랑이든지 정말 가슴 아프게 내 심장이라도 줘도 아깝지 않다고 할만한 그런 사랑을 한번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는데에는 나이도 상관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말입니다. 그럼 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건 제가 확신을 하는 바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뜨거운 사랑을 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성모님을 더더욱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남자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일단 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매님들과 성모님은 성이 같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그렇게 전이되지 않을 거라서 아마도 남자보다는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순수한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한 뜨거운 사랑은 남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건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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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참신자에서 꼰대신자로 변신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도 그렇고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이 다 고령화가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개 보면 가장 고령화 속도가 빠른 게 천주교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는 생략하겠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당 다니면 당연히 개인 사적 모임이 아니더라도 공적으로 소모임을 가지게 됩니다. 소모임을 한 후에 다시 개인 모임을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공적인 모임에서는 서로 불협화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같이 모여야 하니 나중에 해산을 한 후에는 각각 평소 같은 생각을 하고 또 견해가 비슷하며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들끼리 또 모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꼰대'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꼰대짓'입니다. 언젠가 한번 다루고 싶은 주제였습니다. 굳이 꼰대가 무엇인지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보면 생각보다 성당 내에서 꼰대 신자가 좀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관찰을 한 건 아니지만 왜 그런 소리를 듣는지 조금 유심히 관찰해봤습니다. 일단 꼰대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나이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을 할 겁니다. 실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나이가 젊어도 꼰대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건 그 사람의 평소 생각이나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이건 배제하고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꼰대로 변한다는 사회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생각과 가치관이 유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기는 듣데 그걸 경시하고 무시하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대화를 할 때에도 남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고 중간에 가로채 불쑥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는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건 실례이고 결례입니다. 설사 그런 상황이 있어도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것조차도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미 이것부터서도 사리판단 능력이 부족합니다. 더더욱 문제는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지 그조차도 전혀 생각을 못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경우 나중에 그런 걸 공개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조금 실수가 있었다고 사과를 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런 경우는 거의 희박합니다. 또 설령 그런 걸 인식을 했다고 해도 사과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특징이 있지만 또 하나 대표적인 특징은 남을 가르치고 훈계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도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진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덕망 있는 행동을 하고 하면 그나마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는데 전혀 그런 행동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람들이 꼰대짓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소리를 듣는 신자들을 보면 굳이 제가 어떻게 말하고 싶은 건 없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게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신앙생활하면서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저는 그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차라리 무신론자이면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모를까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분들도 처음부터 그런 꼰대신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럼 처음엔 참신자였다고 한번 가정하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왜 그럼 참신자에서 꼰대신자로 됐는지 그 이유가 있다면 그게 과연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그것도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게 경청을 잘 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신앙의 성장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식물도 어떤 경우는 같은 종이라도 성장이 빠르고 느린 종이 있습니다. 그건 식물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앙인도 성장이 느린 사람도 있을 거고 또 빠른 사람도 있을 겁니다. 느려도 성장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조금이라도 성장은 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어야 할 텐데 흔히 신자들 중에서도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 신자는 그 속도가 거의 정지됐다고 보면 될 겁니다.
쉬운 표현으로 마당발 신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건 거의 정확한 팩트일 겁니다. 고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마당발 신자는 꼰대신자로 변할 소지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마당발 신자가 꼰대신자로 되는 건 아닙니다. 비록 마당발 신자라고 해도 꼰대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가장 기본적인 원칙 하나만 준수하면 됩니다. 그건 남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절대 꼰대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면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좀 비참한 것 같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그렇게 한다면 그야말로 더 비참한 것입니다. 결국 누구나 이런 걸 조심하지 않으면 꼰대신자가 되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저도 항상 경계를 합니다. 저 역시도 꼰대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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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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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카카오스토리에서 <07:30>
하느님의 약속 안에 뿌려진 말씀
2사무 7,4-17; 마르 4,1-20
오늘 제1독서는 다윗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을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 주시지, 다윗이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2사무 7,11 참조). 여기서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충실성 안에 세워지는 후손과 역사 전체를 뜻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약속이 솔로몬이 아니라 참된 다윗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고 설명합니다(신국론 XVII,8). 소명은 언제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권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십니다(마르 복음 4,3-9 참조). 이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힘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씨앗의 문제가 아니라 땅의 상태가 열매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마태오 복음 강해 44). 말씀의 실패는 말씀의 약함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저항에서 비롯됩니다.
최근 종교 실천에 관한 통계에 따르면,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세례받은 신자 가운데 60% 이상이 신앙을 일상적 결정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는 판단이 아니라, 분주함과 정보 과잉, 불안정한 노동 환경으로 굳어버린 땅을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씨앗은 뿌려지지만, 세상의 걱정에 의해 쉽게 질식됩니다.
그리스도교적 소명은 가끔 듣는 데에 있지 않고, 말씀이 깊이 뿌리내리도록 허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뿌리란 시련 속에서도 지속하는 인내라고 가르칩니다. 전쟁, 기후 위기, 제도적 불신의 뉴스가 가득한 시대에, 복음에 대한 일상의 충실함은 예언적 행위가 됩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나의 부르심으로 수렴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역사 안에서 당신의 집을 지어 가시며, 이를 위해 열린 마음을 찾으십니다. 오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구체적 결단을 뜻합니다. 실제적인 기도의 시간, 자기 직업과 일상 삶에서의 윤리적 일관성, 사회적 책임이 그 예입니다. 이렇게 할 때 씨앗은 헛되지 않고, 이 시대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뿌려주신 씨앗을 어떻게 키우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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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07:30>
■ 영부인의 눈물
| 어제 저녁 묵상글을 작성하다가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겨 어쩔 수 없이 급히 마무리를 짓고 원래 떠올랐던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약속 장소에서 잠시 유튜브를 봤는데 김혜경 여사님의 눈물을 영상으로 봤습니다. 대통령의 부인이지 정치인은 아닙니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정치와 관련된 인물이라고 하면 이건 말이 성립됩니다. 지금까지 정치와 관련된 인물 가운데에서 흘린 아니면 사회의 지도자 층에서 흘린 눈물을 본 것 중에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흘린 눈물 하나를 꼽으라면 김혜경 여사님의 눈물을 꼽고 싶습니다. 이 눈물을 꼽기 전에는 유시민 작가의 눈물이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예전 노 대통령님 서거 후에 봉화에서 흘린 눈물과 노회찬 의원 별세 때 본 눈물 두 번의 눈물을 보며 느낀 것이었습니다. 봉화에서 처음 서거 날부터 마지막 발인 때까지 봉사를 했는데 그때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아마 1년이 지난 시점에 우연히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봉화에서 잠시 얼굴을 본 게 처음이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혼자 마을회관 앞 근처 벤치에서 운동화 끈을 메는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그날 부산에서 집으로 가다가 서거 후에 처음으로 다시 봉화에 가 노 대통령님 참배하고 가려고 해서 갔는데 그날 아마 무슨 행사를 했나봅니다. 처음으로 유기농 농사를 하기 위해 오리를 방사하는 행사였지 싶습니다. 조금 전에도 과거 노회찬 의원 별세 때 했던 조사였던 것 같습니다. 이땐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얼굴 표정에는 진정한 슬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 얼굴 모습을 보면 진정 가슴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생활묵상 글을 올리겠다고 생각하고 제목을 생각했을 때 바로 생각한 제목은 '아름다운 영혼이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변경했습니다. 또는 '아름다운 눈물'도 생각해봤습니다. 제목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수정했던 것입니다. 눈물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차라리 슬픈 눈물이라고 하면 모를까 말입니다. 하지만 어제 숏츠에서 본 영부인의 눈물을 보고 저는 물론 슬픔이 가득한 눈물이었지만 전 이해찬 총리 영전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는 그 장면은 악어의 눈물이 아닌 그 어떤 배우가 눈물 연기를 해도 할 수 없는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진정으로, 진심어린 마음으로, 가득했을 때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눈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눈물은 마냥 슬픈 감정이 있다고만 해서 누구나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아닙니다. 슬프면 눈물이 나올 수는 있어도 누구나가 다 흘리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슬퍼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슴으로 흘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제 영부인께서 흘리는 그런 눈물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 맑은 영혼이 아니면 그런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흘리는 눈물만으로 그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 눈물을 보고 뭔가 영감이 떠올라 글을 작성하고는 있지만 그 너머에는 다른 무엇인가를 그리고 싶습니다. 바로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 이런 묵상을 해봅니다. 새로운 묵상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 그 신앙의 의미를 좀 더 색다르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맑고 아름다운 영혼이 되기 위한 훈련이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 무언가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력은 다양할 것입니다. 기도, 희생, 봉사, 극기, 사랑 무수히 많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한다면 타인의 슬픔에 진심으로 애도하거나 진심으로 슬픔을 같이 함게 나눌 수 있고 공감하는 영혼이 흘릴 수 있는 눈물도 그중 하나로 꼽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 눈물을 통해서 아름다운 영혼은 어떤 영혼이어야 하는가 하는 걸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유의미한 의미가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유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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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강만연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맑고 아름다운 영혼이 되기 위한 훈련(학습), 낮춤에서 위를, 다른 이에서 자기를 보는 과정이고 나눔이다. ??? . 평화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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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4,1-20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각각의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는 예수님께서 이미 성경 본문 안에서 충분히 설명해주셨으니, 오늘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거리’라는 관점으로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다윗 임금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머무르시도록 그분의 집인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 임금에게 큰 은총과 복을 베푸시는 한편, 그에게서 한 집안을 즉 그의 이름이 대대로 전해지는 위대한 가문을 세워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더 나아가 다윗의 자손들이 부족하여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들에게서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시겠다고, 그들을 ‘사랑의 매’로 훈육하시어 올바른 길로 이끄시며 끝까지 보살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 점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따르고자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올바른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부족하여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에게서 당신 자비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려고 오신 분이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신다니,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게 말씀하신 건 예수님이 무섭고 차가운 분이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분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지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귀기울여 들을 마음이 있는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될 때까지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길 인내가 있는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의지가 있는지를 보시려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똑같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데 왜 사람마다 맺는 열매의 양이 다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차별대우 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타고 난 능력의 차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태양계에 있는 행성들의 온도가 서로 다른 것은 태양이 각 행성을 차별하여 빛과 열을 다르게 내주어서가 아닙니다.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만큼 에너지를 덜 받아서 그런 것이지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지만, 하느님께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는가, 그분과 얼마나 깊은 친교를 맺고 있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그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와의 거리를 점점 좁혀 완전히 일치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이 내 안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싶다면,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들지 말고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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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카카오 스토리에서 <07:35>
<‘나쁜 땅’도 노력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14-20).”
1)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즉 신앙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이고,
신앙생활의 최종 결과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지금 ‘좋은 땅’이라고 해도, 즉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 말씀이고, 동시에 지금 ‘나쁜 땅’이라고 해도,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끝까지’ 가 봐야 압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꺾이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2)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신앙인들이 실제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나타내는 비유인데, 그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 즉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알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해결 방법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아 가면, 즉 사탄의 유혹이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은 ‘기도’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9,29).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을 유혹할 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를 숨기고
다른 모습으로 위장해서 유혹합니다(2코린 11,14ㄴ-15).
마귀의 유혹은, 식구들을 통해서도 오고, 친한 친구들을 통해서도 오고, 평소에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또는 사랑으로 하는 충고와 조언’의 모습으로 올 때가 많습니다.
그 진심과 사랑이 거짓이든 진짜든 간에, 그것 때문에 금방 무장해제가 되고, 그래서 마귀의 유혹은 대단히 강력하고 위험한 것이 됩니다.
또 마귀의 유혹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기 때문에, 평소에 꾸준히 기도하면서 저항력을 키워야 합니다.
3)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일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강하게 말렸습니다(마태 16,21-22).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면서(마태 16,23), 그를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 된 것도 아니고, 마귀 들린 것도 아니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아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시는 것을 걱정해서 그랬던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그것이 심각한 ‘사탄의 유혹’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사탄이 베드로 사도의 ‘선의’를 악용해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귀의 유혹은 그렇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실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4) 17절의 ‘뿌리’는 ‘실천’을 뜻합니다.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믿음과 실천이 일치되어 있는 사람은 환난과 박해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금방 무너집니다(마태 7,24-27).
<무너진다는 것은 믿음을 버리고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19절의 ‘세상 걱정’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인생살이에서 겪는 여러 가지 걱정들을 가리킵니다.
‘걱정을 극복하는 방법’도 기도입니다(필리 4,6-7).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길’이 될 때도 있고,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될 때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나쁜 땅’이었다가 ‘좋은 땅’으로 변화되어서
성인품까지 오른 분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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