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환입니다 / 이삼우
약방 처방전을 받으려 병원에 갔다. 간호사의 지시로 혈압을 재었더니 혈압계 액정의 숫자가 깜빡거리다가 멈추어 선다. 수축기혈압이 129이고 이완기혈압이 55, 맥박이 60이었다. 최저혈압은 낮은 편에 속하고 맥박은 건강한 사람의 심장박동에 턱걸이하고 있다. 눈앞의 전자혈압계가 미심쩍어 다시 재려고 하니 간호사가 그럴 필요까지 없다며 곧장 진료실로 이끌다시피 안내한다.
의사와 마주 앉았다. 그는 몇 년째 나의 잔병을 돌보아 주는 단골 내과의다.
“선생님, 제 확장기혈압이 너무 낮은 것 같은데요?”
의사에게 사뭇 서운한 듯 볼멘소리한다. 그는 혈압수치가 기록된 메모지를 잠시 훑어보더니 내 팔뚝에 수동식 혈압계 압박대를 감아 두르고 손으로 공기주머니를 쉭쉭 가압한다. 혈압계 눈금 사이로 수은이 힘겹게 오르다가 쪼르르 흘러내린다.
“저혈압이 맞네요.”
의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혈압이 갑자기 낮은 원인이 뭔가요?”
나는 그의 예사로운 표정이 못마땅해 따지듯 물었다.
“나이가 있어서….”
나를 힐끔 쳐다보는 안경 속 눈매가 퍽이나 안 됐다는 눈길이다. 혈관 벽이 두껍고 노쇠해 수축과 팽창하는 탄성을 잃고 맥압이 약해지면서 피가 헐렁하게 흘러내려 저혈압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 현기증 증세가 있으면 약 처방 강도를 조절해야 하니 관찰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나들목을 드나드는 몸속 핏줄 곳곳이 노폐물이 쌓여 있는 상태라니 더는 뭔 말이 필요할까. 몸이 부실하여 병원을 가끔 찾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이 든 게 무슨 벼슬도 아닌데 ‘너 자신을 알라’며 넌지시 일깨워준다. 나에게 있어서 병원은 생명의 끈을 이어주는 희망의 불씨가 아니라 소금에 절인 배추같이 기죽어서 나오는 곳이다.
언젠가 심신이 녹작지근하고 무력증이 심해 대학병원에서 이틀에 걸쳐 종합검사를 마치고 긴장한 채 의사 앞에 숨을 모으고 있을 때였다. 혈청 검사 결과와 전송되어 온 부위별 단층촬영 영상을 건성건성(내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훑어본 젊은 의대 교수는 단칼에 병명을 선언했다. 죽어가는 이도 살린다는 편작도, 최첨단 AI 진단 의학으로도 손 쓸 수 없고 막막하여 처방전도 없는 고약한 병명이었다.
“노환입니다.”
입도 뻥끗 못 하고 그것으로 끝이다. 시르죽어야 살아남는 병, 세월이 시들어야 비로소 사는 얄궂은 병이다. 백약이 무효다.
당뇨 상담도 받았다. 며칠 전 채혈하여 혈액검사를 의뢰해 놓은 상태였다. 최근, 달콤한 것이 입에 당기고 물맛이 꿀맛인 데다 화장실 들락거리는 횟수가 부쩍 잦았다. 주변에 이 병을 우습게 알고 방치했다가 고통받는 지인들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터였다. 우려했던 대로 당뇨 판정의 주요한 지표가 되는 당화혈색소 수치가 ‘내당능 장애’에 해당한다는 소견이다. 나이가 들면 대사증후군의 증세가 호시탐탐 쭈뼛거린다. 기회만 되면 반란을 일으켜 주인의 무분별한 식생활 태도에 어깃장을 놓고 경고장을 들이댄다. 묻지 않아도 될 시건방 떠는 질문을 나도 모르게 던지고 말았다.
“당뇨약을 복용하면서 식사 조절해야 할까요?”
의사 선생은 내 의중을 탐색하려는 듯 잠깐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뗀다.
“솔직히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라며 짐짓 정중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모습은 낯설기도 하지만 대체로 불길하다. 그의 진지한 눈빛에 바짝 긴장한다.
“서운하게 듣진 마세요. 환자분께서 솔직히 나이가 육십 대라면 당뇨 처방을 받아 식단 조절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 관리하는 게 옳겠지만 선생님의 경우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귀가 솔깃한 말이었지만 경로우대라고 의료수가가 할인되는 것도 아닌데 헐값으로 매겨지는 느낌이 든다. 슬며시 언짢은 기분이 들어 엉겨 붙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불경스럽다.
“왜요?”
“환자분은 내일모레면 팔십 고개인데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하시면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음식 가린다고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방치하면 합병증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생이 딱하다는 듯 말을 끊는다.
지금 당뇨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당뇨 합병증의 예후가 나타나려면 이래저래 칠팔 년쯤 걸릴 것 같은데요.
“…”
형광등이 늦게 깜박거렸지만, 빠르게 알아듣겠다. 의사 소견대로라면 언제 올지 모르는 당뇨 합병증을 두려워하지 말고 노환으로 찾아든 손님이니 담담하게 맞이하라는 뜻이다. 혹여 간당간당 목숨 줄 붙들고 있어도 쭈글쭈글 말라 비뚤어진 대추 모양새와 별반 다르지 않을 여생이 아닌가. 전문 의학 용어로 쫀득쫀득 이것저것 짚어가며 은근히 겁을 주는 의사는 돌팔이보다 무섭고 피곤하다. 톡 쏘듯 시원한 코카콜라 맛 같이 직진하는 화법은 과연 명의名醫롭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랬다.
집으로 가는 길, 어느덧 해는 떨어지고 마음 한 자락에 헛헛한 바람이 인다. 지금 딱히 뭐랄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묘한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슬금슬금 부아가 치미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소중한 것이 저잣거리에 팔려나간 듯 허전하다. 오늘따라 내 형색이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에 홀로 너덜거리며 서 있는 허아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한창때는 황금 들판의 파수꾼으로서 참새들이 두려워하던 존재이었거늘. 나는 지금 슬픈 것인가. 아니면 슬퍼하는 것인가.
첫댓글 오랜 날들이 지난 것 같습니다. 형님을 뵈온지가...
슬픈 것도 슬퍼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살아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 아직은 술과 안주를 많이 자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날 건강하실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늘 좋은 날 되십시오
우리들은 시간이라는 채권자 앞에서는 영원한 채무자의 신분입니다. 세월은 사람을 봐 가며 늙음과 병듦을 면제해 주거나 유예해 주지 않지요. 그저 시간과 같이 걷는 도리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듯요.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