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암소와 돼지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돼지가 아주 불만스럽게 불평을 늘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항상 암소인 너의 온순함과 친절함에 대해서만 칭찬하는지 모르겠어!
물론 네가 우유와 크림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은 알아. 그러나 생각해 봐.
따지고 보면 나도 사람들에게 암소인 너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있지 않느냐 ?
나는 베이컨, 햄, 그리고 털도 주고 있어.
게다가 사람들은 내 발까지도 소금에 절여서 알뜰하게 먹어치우지 않니 ?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하면서 돼지는 낙심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야기를 조용하게 듣고 있던 암소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습니다.
글쎄,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아마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우유와 크림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우화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크신 은혜안에서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죽고 난 뒤에 한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죽을 때 희사 한번은 진정한 구제가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능력이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선을 베풀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귀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흔히들 사람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서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채권자로 생각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받기만 하려고 합니다.
돈을 빌려 줬으니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그런 자세로 말입니다.
일하고 봉급 받는 것 그저 당연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자기는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받기만 하고, 베풀줄 모르는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요,
주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둘째는 고립주의 자요, 독립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받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남의 호의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남에게 베풀줄도 모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시베리야처럼 썰렁합니다.
셋째는 윤리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도덕을 중시합니다.
질서를 잘 지키고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삽니다.
그런데 이 의무감은 어느듯 자만심으로 변해서
나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자기 과시를 내세우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매사에 돕는자로 생각해서 우월감과 도덕적 향략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기를 모든 사람들의 채무자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일평생 다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서 곳곳에 자신은 빚진자라고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이 땅에 살면서 신세를 얼마나졌습니까 ?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받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
빈손으로, 발가벗은 채로 이 땅에 왔는데,
우리는 오늘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로 은혜를 입고 살았습니까 ?
그럼 여기서 진지하게 묻고 대답해 보십시다.
어떤 유형의 인간이 가장 이상적이냐 ? 합리적이냐 ? 바람직하냐 ? 묻지 말고,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물어보십시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신 이야기입니다.
요즈음 새정부가 들어서서 나라를 위해서 일할 각료들를 선임하고 있는데,
그들의 면면을 보면 경력이 대단합니다.
최고대학에 엘리트 코스를 거쳐서 장관에 기용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기가 팍 죽습니다.
똑똑한 사람들만 다 모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
대다수가 고기잡는 어부입니다.
조금 잘나간 사람이 세리 마태 정도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판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름받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명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일을 맡겨주신 것, 이것 또한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열둘을 내어 보내시면서 한가지 큰 주의 사항을 주십니다.
그것은 본문 8절 하반절 말씀으로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것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직분 주신것도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오늘까지 산것도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은혜로 여기십니까 ?
내가 잘나서, 잘 배워서, 뭔가 있어서 이 만큼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
은혜를 망각할 때 불평하게 됩니다.
은혜를 잊어버릴 때 잘못을 범하고, 문제에 봉착하게 되며,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들이 거져 받았다고 하는 은혜의 자세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도 깊이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까 ?
우리에게 주신 가정만 생각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
특별히 본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하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
우리들이 이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 은혜로 인해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칼빈 선생을 들 수 있습니다.
칼빈 교훈을 종합해서 요약하면 다섯마디 말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1. 인간의 저적인 타락.
2.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3. 제한적인 속죄
4. 불가항적인 은혜
5. 성도의 견인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 타락한 자의 모습 아닙니까 ?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순간 순간 얼마나 다른 길로 나아갔습니까 ?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엄청나서 우리를 강권적으로 붙들어서
오늘의 내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은혜요, 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권능으로, 용기로, 그래서 구원의 기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 이하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이런 뜻에서 거져주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모든 것을 우리들이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은 곧 당연히 줄 것을 주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 시간, 명예, 사랑 등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곧 보상을 바라지 말고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칭찬받고자 일하는 것은 잘못 입니다.
복받고자 선한 일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알아주라고 요구하지도 말며,
순수한 마음으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요구하 시는 진정한 선행이요, 구제입니다.
또 내가 있는 것으로 베풀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3장 성전내에 앉은뱅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우리가 잘아는대로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한 평생을 다 바칠 수 있는 일을 가진것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을 남을 위해 일하고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혜의 보고인 탈무드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한일을 할 때는 주는 사람도 몰라야 하고, 받는 사람도 누군지 몰라야 한다.
최대의 보수는 한번 더 선행할 기회를 준 것이다. "
어떤 사람, 주고 받은 것 기름 종이에 적어놨습니다.
어떤 선생님, 촌지 list 작성해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자기가 베푼 것 기억도 안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 먼저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월감이 없어야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낫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는 자 되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복임을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죤 웨슬리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32살이었을 때 수입이 30 파운드였다.
이 30 파운드 중 28파운드는 내가 쓰고 2파운드는 구제비에 썼다.
내가 중년이 되었을 때 수입은 100 파운드로 늘었났다.
이 100파운드 중 28파운 드는 내가 쓰고, 72파운드는 구제비로 썼다.
내가 말년이 되었을 때 수입은 300파운드가 되었다.
이 300파운드 중 28파운드는 내가 쓰고, 272파운드는 구제비에 썼다.
즉 웨슬레는 수입이 늘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자기에게 꼭 필요한 28파운드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비에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참다운 선행을 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물질로부터 진정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의 어려움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함께 나누어 쓰는 길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은
어려운 우리 이웃들을 향해서 사랑의 손길을 펼치는 것입니다.
경제적 파탄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서 고통받고 있는 바로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다시한번 들어보십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