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의 표정
서상민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한 아이가 한 사내로 걸어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이 자란다
바람이 분다
먼지가 인다
운동장은 깊어지는 것이군
공은 찰 때마다 골대를 빗겨간다
공을 찾으러 그가 걷는다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공을 잃어버린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빈 운동장에 남은 골대가 중얼거린다
이런 풍경을 어떤 슬픔이라고 부르긴 어렵고
슬픔은 구체적으로 얼굴을 가진 적 없다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이제 곧 운동장에도 어떤 표정이 생긴다
나비잠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당신의 일요일이 불안한 건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꽃에는 별다른 뜻이 없고
향기는 맥주 한 캔을 따기에 적당합니다
애인이 유리컵에 꽂아놓은 꽃에는
뿌리가 없군요
벌써 물빛이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당신은 뿌리를 만드느라 지쳤군요
나른한 오후의 잠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엉킨 비를 피해 방으로 들어온 나비가
말린 혀를 돌돌 뽑아
한나절 꽃을 빨고 있군요
당신의 요일들엔 다량의 진통제가 필요합니다
거리에선 공사가 한창입니다
인부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 보도블록이 깔리고
꽃무늬 거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는군요
뿌리 없이도 꽃은 쉽게 지지 않을 겁니다
잠들었군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치켜드느라
당신은 참 많은 최선을 소비했군요
만세와 항복의 자세는 늘 닮았습니다
― 서상민 시집, 『』 (시인동네 / 2022)
서상민
경기 김포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2018년 《문예바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