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을 보낸 1980년대 후반, 책 속에 파묻혀 지냈던 나에게 네 출판사는 삶의 등불과도 같았다. 바로 한길사, 창작과비평사, 민음사, 문학과지성사가 그 출판사들이다. 그 가운데 특히 민음사의 책들은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내게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사상가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었는데,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된 <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반성완 옮김)은 그의 대표적 글들을 묶은 책이었다. 특히나 벤야민을 비롯하여 죄르지 루카치,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 프랑크푸르트학파 사상가들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한 <왜 유토피아인가>(임철규 지음)는 맛깔스런 문체에 서양 현대 지성사를 가늠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잣대로 나에게 읽혔던 중요 저작이었다.
이외에도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다니엘 모르네 지음, 주명철 옮김), <아날학파>(김응종 지음), <대학사>(이광주 지음), <거대한 변환>(칼 폴라니 지음, 박현수 옮김) 등의 '대우 학술 총서'는 책값이 비싸 자주 사볼 수 없었지만 항상 마음속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목록 일순위로 꼽혔었다. 아마도 1980년대 학번으로 책깨나 접했던 독자로서 위 네 출판사의 책들을 읽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상 당시 대학 교육보다 출판사의 양서들이 더 훌륭한 교육의 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그만큼 민음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꼭 챙겨보아야 할 목록의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사실 <박맹호 자서전 책>(민음사 펴냄)의 서평을 부탁받고는 짧은 순간 망설였으나, 위와 같은 개인적 경험을 되새기는 기회도 되겠다 싶어 흔쾌히 받아들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만드는 출판인으로서 정말 소중한 독서 경험이 되었음은 물론, 그동안 내가 책을 만들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겹쳐지면서 새삼 출판계의 대선배를 향해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 <박맹호 자서전 책>(박맹호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책을 받아들고 맨 처음 찾아 읽은 곳은 '대우 학술 총서'를 다루고 있는 부분(153~62쪽)이었다. 그 당시까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학술 출판 분야에서 이 시리즈는 학계는 물론 출판계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장장 16년 동안 무려 424권의 책을 펴냈다. 대강의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자세한 속 내용을 접하고 보니, 풍족한 출판 지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즉 민음사 자체에서도 많은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별도의 편집팀을 꾸려 인내심을 갖고 추진한 출판 프로젝트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행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 시대보다 한 발 앞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아울러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분야에 발을 디딜 때 쾌감을 느끼곤"(159쪽) 했다는 부분에서는 기존의 출판으로부터 새로운 영역을 모색하는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구태의연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정신이야말로 요즈음 같은 위기의 출판 상황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1966년 창사 이래 민음사가 지금까지 5000여 종의 책을 펴내왔으니 저자는 숱한 저자와 번역자들을 통해 사상과 이론을 논하고 문학적 향기에 취해 책속에 파묻혀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청년을 꿈꾸던 대학 시절, 등단의 집념이 무산된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면서 곧바로 '출판계'로 발을 내딛는 그의 내면 속 결기는 이후 그가 걸어온 출판 인생을 통해 정말 명석한 판단이었음이 증명된다.
'우리 시대의 풍운아' 고은을 비롯하여 빼어난 문학 평론가 김현, '시대의 지성' 김우창 등 사실상 우리 학계와 문단은 '민음사'라는 터널을 통해 새로운 대지로 나갈 수 있었다. 사람을 키워내는 혜안이야 익히 출판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책 디자이너 정병규를 끝까지 믿고 그가 출판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 수 있게끔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점은 요즈음 같은 삭막한 출판 풍토에서 귀감이 될 만한 일이다.
또 1990년대 초반, 이영준 주간(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과 이갑수 편집국장( 궁리출판 대표)을 근간으로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연 일은 출판이 보다 전문화되고 고도의 훈련을 통해 숙성되어야만 진정한 단행본 출판으로서의 위상을 지닐 수 있음을 예견한 것이다.
▲ '대우 학술 총서' 중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의 저자 M. 호팔과 함께한 박맹호 회장. ⓒ민음사
사실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기사화되어 다시금 언급하는 것이 지면을 낭비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그가 출판을 통해 이룩한 성과는 단순히 '민음사'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가 남긴 출판의 '공과'(功過)는 우리 출판계에 유의미한 자양분 역할을 할 것이다. 각별히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 속에서도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 한국 주빈국 행사를 착실하게 준비하고 성황리에 마쳐 우리 출판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업적은 근대 출판 100년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개인적으로 출판인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은 불을 켜고 찾아 읽는다. 가장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경험은 현대 프랑스 문학과 지성의 산실인 갈리마르 출판사의 창업자 가스통 갈리마르를 다룬 <가스통 갈리마르 :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피에르 아술린 지음, 강주헌 옮김, 열린책들 펴냄)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와나미 출판사 사장을 지낸 오쓰카 노부카즈의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와 개인 산문집이지만 자신의 출판 인생을 책 분량의 3분의 1 가까이 할애하여 소개한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전 대표의 <글에 숨은 글>(문학동네 펴냄), '탱크'(이 표현은 김병익 선생이 붙여준 것이다) 같은 정력으로 1980년대 한국 상황과 온몸으로 대결한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책의 탄생>(한길사 펴냄) 등이 있다.
이런 부류의 책들은 단순히 한 출판인의 개인적 경험담 차원을 넘어서 한 시대의 문화사이자 지성사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문헌 구실을 한다.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아주 특수한 분야의 전문가 세계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이번 박맹호 회장 책과 김병익 전 대표의 앞서의 산문집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1960~70년대 한국 문학사와 문단사가 단번에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이름을 거론하기 벅찰 정도로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작가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독자들로부터의 찬사와 사랑은 책을 쓴 저자의 당연한 몫이지만, 출판인은 숨은 조력자이자 코디네이터로서 '책'을 통한 문화 창조의 실질적 주체임을 이들 자서전과 평전은 잘 보여주고 있다.
올 한 해, 특히 출판계가 어렵다고 아우성들이다. 온라인 서점조차 매출이 처음으로 줄었다고 하고, 중견 출판사들의 매출액도 20~30퍼센트나 감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출판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구조적 문제이고 또 구조적으로 풀어야 하겠지만 박맹호 회장의 말처럼 "한없는 열정이야말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257쪽)임에 틀림없다.
이럴 때일수록 라틴 속담 가운데 "천천히 서둘러라"처럼 한 발 앞선 시대의 혜안과 열정이 필요하다. 1966년 청진동 옥탑방에서 시작된 박맹호 회장의 출판 역정은 이번 책의 행간 곳곳에서도 후배 출판인들에게 이런 점을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