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90)/ 그리스
코르푸 옛 마을(Old Town of Corfu; 2007)
알바니아와 그리스 서해안의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입구에 있는 코르푸 섬 동쪽의 코르푸 옛 마을은 코르푸 현[Corfu Prefecture] 이오니아 제도[Ionian Islands]에 속하며,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지역이다. 전략적 위치에 있는 이 마을의 세 요새는 베네치아의 유명 요새 공학자들이 설계했으며, 이 지역은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무역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차례 보수와 재건을 거듭했고, 일부는 19세기 영국 지배하에 재건된 것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옛 마을 주택 중 일부는 베네치아 시대에 지어진 것이고, 나머지 건축물은 19세기에 지은 것이다. 방어 시설을 갖춘 지중해 항구로서 코르푸 마을은 도시와 항구가 조화를 이루어 완전성과 진정성이 높은 유산이다.
아드리아 해로 들어가자면 이오니아 섬들 중 맨 첫 번째에 있는 코르푸는 기원전 775~기원전 750년 에레트리아(Eretrian) 인들에 의해 그리스에 합병되었다. 기원전 734년에 코린토스 인들은 현재 옛 도시가 있는 곳의 남쪽에 ‘케르키라(Kerkyra)’라는 식민지를 세웠고, 이 마을은 시칠리아로 가는 무역의 관문이 되었다. 코린토스 인들은 일리리아(Illyria)와 에피루스(Epirus)에 추가로 식민지를 더 건설하였다. 에피루스 해안과 코르푸는 로마 공화국(기원전 229)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 지역이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 영토 확장을 위한 출발점 역할을 하였다. 칼리굴라(Caligula) 지배 아래에는 사도 바울의 두 제자였던 이코니움(Iconium)의 주교인 성 야손[St Jason]과 타르수스의 주교인 소시파테르(Sosipater)가 이 섬에 기독교를 전했다. 코르푸는 336년 동로마 제국[Eastern Empire]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고트 족의 침입을 시작(551년)으로 오랜 기간 불안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옛 마을을 버리고 오늘날 고대 성채가 서 있는 두 봉우리[korifi] 위의 반도로 이주하였다. 아드리아 해 남부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던 베네치아 인들은 몰락하는 비잔티움(Byzantium)을 돕기 위해 찾아와서 노르만의 왕자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에 대항하여 편리하게 콘스탄티노플과의 무역을 방어할 수 있었다. 코르푸는 1081년 노르만 족에게 정복된 후 1081년 비잔틴 제국에 반환되었다. 4차 십자군과 1204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뒤이어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맞이하였고 군사 원조의 대가로 베네치아 인들은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안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모든 해상 기지를 차지하였으며, 이 중에는 1204~1214년에 잠깐 동안 점령했던 코르푸도 포함되어 있었다. 1214~1267년에 이 섬은 에피루스 폭군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는 나폴리의 앙주 왕가로 넘어갔고(1267~1368), 이들은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재건된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항하여 이들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이곳을 사용하였다. 이 작은 중세 마을은 탑으로 방어를 강화한 방어 방벽의 은신처에 있는 비잔틴 성과 앙게뱅 성의 두 요새 봉우리 사이에서 발달하였다. 13세기 초기에 쓰인 기록에는 성채에 살았던 사람들과 오늘날의 스피아나다(Spianada) 지역을 점령했던 외곽 지역 주민들 사이의 행정과 종교 세력 등의 분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남부 아드리아 해의 해상 세력과 상업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나폴리 왕국을 휩쓸었던 내부 분쟁을 이용하여 코르푸를 통제하였다(1386~1797). 네그로폰트(Negropont; Chalcis)와 크레타(Crete), 모돈(Modon; Methoni)과 함께 이곳은 오스만 해상 공격에 대항하는 기지 중 한 곳이 되었고, 루마니아와 흑해로 가는 선박에 식량을 보급하는 중간 정박 기지의 역할을 했다. 중세의 경계 요새의 범위를 정하고, 개선하고, 확대하기 위해 계속된 공사는 베네치아 점령기 4세기 동안의 코르푸의 경제적・전략적 역할을 반영한다. 15세기 초에 이러한 활동은 중세 마을에 집중되어 부두・방파제・무기고 등 항만 시설을 개발하고, 계속하여 방어 시설 공사를 혁신해 나갔다. 다음 세기 초에는 운하를 만들어 외곽에서 중세의 마을을 분리하였다. 1537년 터키에 의해 마을이 공격당하고 외곽은 화재를 입게 됨에 따라 성채를 추가로 분리하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작업이 착수되었다. 현재의 스피아나다에 해당하는 길게 뻗은 땅은 1516년에 개간하였고, 성벽을 마주 보고 있는 가옥을 철거하고, 운하의 강둑에는 새로운 보루를 세우고, 주위 벽의 높이를 낮추고, 2개의 성을 새로운 구조로 교체하였다. 베로나의 건축가 미켈레 산미켈리(Michele Sanmicheli; 1487~1559)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공사는 빠르게 발전된 기술로 만들어진 최신식 대포를 마을의 방어 시설로 축조하여 1558년 완공되었다. 1571년 다시 한 번 터키가 이 마을을 공격함에 따라 베네치아 인들은 이 중세 마을과 교외, 항구와 모든 군사용 시설을 아우르는 원대한 계획에 착수하기로 결정(1576~1588)하였다. 사보이(Savoy) 공국의 건축가 페랑 비텔리(Ferrante Vitelli)는 옛 마을의 서쪽에 성 마가의 낮은 언덕에 요새를[새로운 요새] 배치하였다. 이 요새에서는 주변의 육지와 바다와 함께 보루와 4개의 문을 통해 도랑벽으로 둘러싸인 24개 외곽 마을이 내려다보이도록 했다. 그리고 더 많은 군사용 건물과 민간 건물을 건축했고 15세기 만드라키 항구를 확대 재건하였을 뿐 아니라 중세 마을을 군사적 용도로 더욱 강화하여 옛 성채로 건설되었다. (대성당은 17세기에 새 마을로 이전되었다.) 1669년부터 1682년까지 방어 체계는 군사 공학자인 필리포 베르나다(Filippo Vernada)가 만든 두 번째 벽을 통해 서쪽으로 강화되었다. 1714년에는 터키 인들이 모레아(Morea)를 다시 정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터키 군대가 코르푸로 향하자 베네치아의 저항은 거셌다. 1716년 기독교 해군 함대의 지원과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의 승리 때문에 이 마을은 안전할 수 있게 되었다. 코르푸의 베네치아 군대 지휘관이었던 조반니 마리아 폰 슐렌부르크(Giovanni Maria von Schulenburg)는 필리포 베르나다의 계획에 영감을 받아 이 거대한 요새를 마무리하였다. 바깥의 서부 방어 체제는 높은 아브라함(Abraham)・살바토레(Salvatore) 산과 산로코(San Rocco; 1717~1730)의 중간에 있는 외보[outworks] 등 복잡한 방어 체계로 강화되었다. 1797년의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을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프랑스의 지배(1797~1799)를 받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터키가 동맹을 맺어 프랑스는 떠나가고 이오니아 섬 국가[State of the Ionian Islands]가 세워졌다. 이 국가의 수도는 코르푸(1799~1807)가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유럽의 영토 경계가 변하여 다음 반세기 동안은 영국의 보호령(1807~1814)이 되었다. 이오니아 섬 국가의 수도로서 코르푸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잃게 되었고, 1816~1824년 영국 고등판무관 토머스 메이틀랜드(Thomas Maitland) 경의 통치 하에 도시 개발은 스피아나다에 집중되었다. 그의 후임자 프레더릭 애덤(Frederic Adam) 경은 1924~1932년 공공사업을 추진했는데 주로 수로 건설, 옛 성채의 재편, 베네치아 건축물을 바꾸어 새로운 군사 건물로 추가 또는 재건, 마을의 주거지 늘리기 등을 추진했다. 그는 교육 체계 개편에 관심을 두어 1824년 새로운 이오니아 아카데미를 열었다. 이오니아 아카데미는 프랑스 점령기 동안 지적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영국은 마을의 서쪽 가장자리 바깥에 요새를 헐고 방어벽 바깥에 거주지를 지을 계획을 세우려고 하였다. 1864년 코르푸는 그리스에 소속되게 되었으며, 요새로서의 역할은 축소되고 주변 벽의 여러 구간과 방어물은 점차 파손되었다. 이곳은 유럽의 귀족이 좋아하는 휴양지가 되었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옛 마을은 크게 파손되었고, 독일과 이탈리아 군에 점령되어 인명 손실과 함께 많은 가옥과 공공건물(이오니아 의회, 극장 그리고 도서관)과 14개의 교회, 옛 성채 등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최근 수십 년 간 관광 산업이 발전하여 새 마을은 점진적으로 발전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