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과 군인은 오랫동안 인제의 상징이었다. 인제 땅 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했다. 겨울은 길고 추위는 혹독했다. 오죽하면 군인들 사이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넋두리가 생겨났을까. ‘땅은 넓고 사람은 적은 곳’이라는 인제는 여전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오지로 꼽힌다.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혀 있고, 다른 쪽은 모두 험한 산을 두르고 있다. 설악산을 비롯해 향로봉, 응봉산, 점봉산, 대암산, 방태산, 소뿔산, 주억봉, 구룡덕봉, 가칠봉, 한석산, 매봉, 안산, 가리봉, 가마봉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즐비하다.
"인제 가면 좋을시고,원통에서 살자꾸나"
<강원총람>에 따르면 인제에는 1000m가 넘는 산이 무려 96개, 800m가 넘는 봉우리는 강원도 전체의 5분의 1인 200개가 넘게 솟아 있다. 산이 많고 가파른 만큼 주민들은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곰배령, 박달령(단목령), 북암령, 조침령, 광치령 같은 고갯길을 넘어야 대처로 나가고, 장을 보러 다닐 수 있었다. 전체 면적의 91%가 산과 강일 정도로 궁벽한 산골. 현대화는 이처럼 열악한 환경의 깊은 산골 인제 땅에서 사람들을 떠나게 했다. 강원도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인제군의 인구는 1970년대 6만여 명, 80년대 4만여 명, 90년대 이후 3만 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온 나라가 개발의 몸살을 앓던 때도 인제는 가장 뒤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인제에는 아직도 공장이나 흔한 대규모 위락단지, 특급호텔 하나 없다.
달라진 세상은 인제가 처한 교통·산업·자연의 악조건들을 새롭게 바꿔놓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접근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인제를 가르는 국도는 왕복 4차선 도로로 확 넓어졌다. 군축령, 미시령, 조침령, 광치령 등 험한 고갯길은 대부분 터널이 뚫렸다. 산촌 오지까지 아스팔트길이 연결됐다. 지긋지긋했던 북풍한설은 이제 주민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소양호는 겨울철 100만 명 넘게 다녀가는 국내 최고의 빙어낚시터다. 용대리 덕장에서 겨울바람에 말리는 황태는 국내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오염과는 거리가 먼 자연환경도 웰빙(참살이) 시대의 큰 자산이 됐다. 최근 환경부의 대기오염 측정에서 인제는 전국 제일의 청정지역으로 꼽혔다. 서울대는 우리나라 남성 최장수 지역으로 발표했다. 인제 사람들은 벌써부터 “인제 가면 좋을시고, 원통에서 살자꾸나”라고 자랑한다.
백두대간 고산지대의 점봉산 자락 진동계곡 <김석종기자>
모험과 레포츠 천국으로 거듭난'제일산촌'
인제군은 ‘청정과 모험’을 관광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다. ‘설악산’ 편에서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설악산의 70%를 차지한 인제군 내설악 지역은 이 군의 대표적인 명소다. 주봉인 대청봉을 비롯해 백담사, 봉정암, 오세암, 백담계곡, 가야동계곡, 용아장성, 대승폭포 등 내설악 명소들이 등산객과 불교 참배객을 불러 모은다.
생태계가 잘 보존된 맑은 계곡 내린천 <김석종기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내린천은 국내 래프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합강정 강변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번지점프대가 있다. 내린천 지류의 산악지대는 트래킹과 산악자전거, 패러글라이딩, 암벽·빙벽타기 등 짜릿한 모험과 체험 레포츠의 명소로 꼽힌다. 산악자전거대회, 마라톤대회, 모의전투대회(서든어택 얼라이브) 대회, 얼음축구대회, 빙벽등반대회 등이 열린다.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야생화 천국 곰배령, 눈꽃이 화려한 진동2리 설피밭은 트래킹 명소로 인기가 높다. 인제군은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 자동차경주장을 포함한 ‘국제오토테마파크’ 관광지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현대판 피장처'가 바로여기
내린천을 따라가는 31번 국도는 옛날만큼 평화로운 풍경은 아니다. 경치 좋은 곳마다 펜션이라는 이름의 숙소가 밀집해 있다. 그나마 포장도로가 자연을 크게 해치지 않고 구절양장 강마을 산마을을 잇는다. 내린천의 지류를 따라 산중으로 들어가면 양지바른 곳마다 집들이 한두 채씩 앉아 있다. 약초와 산나물을 캐거나 토봉을 치는 화전민의 후예들이 산다. 산사람, 치병자, 도사, 산장지기, 화가 등 도시를 버리고 들어온 은둔자들도 진동계곡, 미산계곡, 개인동계곡, 아침가리계곡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멋진 통나무집이나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여유를 즐기며 사는 가족도 많다. <정감록>은 이 일대의 삼둔사가리를 피장처로 꼽았다고 한다. 달둔·살둔·월둔의 삼둔은 내린천 최상류인 홍천 쪽에 있고, 아침가리·곁가리·적가리·연가리의 사가리는 인제 쪽 방태산 북쪽에 있다. 이중한은 <택리지>에서 계곡이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250년의 시차를 두고 심신의 평화와 행복한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인제 계곡을 찾아드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요즘의 도시생활이 전쟁터 아닌가. 줄곧 줄던 인제 인구가 2003년 이후 해마다 몇 백 명씩 늘어난 것도 이곳을 새 삶터로 삼는 사람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제뗏목아리랑과 산촌문화
인제 지역 삼림은 나라에서 황장금표를 세울 정도로 울창했다. 산에서 베어낸 질 좋은 목재는 합강에서 뗏목을 만들어 소양강, 북한강을 거쳐 한양으로 옮겼다. 북한강의 인제 뗏목은 남한강의 영월 뗏목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뗏목이었다. 심산유곡 사람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숯을 굽고, 함지박·남박 같은 기물을 만들고, 산삼·약초·목청·석청을 채취하며 살았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산촌 마을이 만들어낸 독특한 생활사·민속사는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히 2003년 국내 최초로 개관한 인제읍내의 인제산촌박물관에서 귀틀집(토막집)과 디딜방앗간, 뗏목, 숯가마, 세시풍속, 음식 등 이 고장 산촌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다.
남면 김부리의 김부대왕각, 옥쇄바위, 다물마을, 김부대왕묘터, 한계산성 등에는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운동을 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이곳은 마의태자가 세상을 등지고 숨어들었다는 금강산과 가까운 곳이다. 김부대왕각에서는 주민들이 1000년 동안 대동제를 이어왔으며, 지금은 마의태자 후손인 통천·부령김씨 문중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인제는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1926-1956)과 <부초>의 작가 한수산이 태어난 곳이다. 합강정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세월이 가면>이 새겨진 박인환 시비가 있다. 북면 한계1리에 자리한 ‘내설악 예술인 마을’은 서양화가 강명순, 김종상씨 등 예술인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인제에서 가장 유서 싶은 정자인 합강정 <김석종기자>
본디 특산물을 되살린다
옛날 이 고장에서만 나는 ‘무심이’라는 씨 없는 배는 조선시대 진상품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배나무가 완전히 사라졌다. 무심이와 함께 인제 특산 영약이었던 산삼, 석청, 목청을 보기도 어렵다. 그래도 인제의 청정 자연은 여전히 이 고장의 보물창고이자 곳간이다. 환경 오염과 거리가 먼 방태산, 가칠봉, 응봉산 숲에서 따고 캐낸 더덕, 참나물, 두릅, 곰취, 고비 같은 산나물과 송이버섯, 느타리버섯, 석이버섯 같은 버섯류, 산양삼, 토종꿀 등 산중 산물들은 시장에서 최상품으로 쳐준다. 최근에는 황태와 함께 고산에서 키운 치커리와 인진쑥, 방태산 고로쇠, 질이 좋은 참숯, 남원목기와 쌍벽을 이루던 인제목기의 맥을 이은 목공예품이 인제 특산물에 추가됐다. 인제군은 인제의 쌀과 밭곡식을 포함한 이런 농특산물을 ‘하늘내린’이라는 브랜드로 특화하고 있다. 하늘이 내린 천혜의 자연과 내린천을 합쳐 만든 상표다. 군은 부가가치가 높은 고산지대의 산양삼과 토종꿀(목청) 생산량을 늘려 인제 명품 특산물로 내놓을 계획이다.
천년 고찰 백담사 스님들의 참선 수행 <이다일기자>
고구려 때 저족현이었던 인제는 신라 때 희재현이었다가 고려 때 ‘기린 린(麟)’자를 쓴 인제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린면과 내린천도 기린에서 연유했다. 기린은 상상의 동물이다. 인제 지역에는 사슴이 100년 묵으면 기린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향토사학자 최병헌씨는 “관청의 문서 등 인제 지역 사슴의 밀렵을 금한다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며 “개인산 등에서 사슴을 목격했는데 광복 직전에 사라졌다는 노인들의 증언도 있다”고 말했다. 인제군과 환경단체들은 요즘 멸종된 토종 사슴 복원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원시림과 깊은 계곡 사이로 사슴이 평화롭게 뛰어다니는 인제를 꿈꾼다.
깊은산 맑은 물이 21세기 희망이다
인제군청 마당 커다란 돌에는 ‘제일산수(第一山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인제군은 산림청과 함께 산촌생태마을 조성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원시림과 청정계곡의 장점을 생산·문화·관광에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사업이다. 박삼래 인제군수는 “천혜의 산림자원을 바탕으로 생산·문화·관광에 최대한 활용해 주민들의 삶의 질이 높은 산촌, 도시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산촌, 고소득을 올리는 산촌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21세기의 화두로 녹색, 친환경, 삶의 질을 꼽는 사람이 많다. ‘무공해 인제’는 그런 꿈을 실현하기에 가장 맞춤한 곳이다.
글 김석종 / 경향신문 부국장, 편집국 문화부 선임기자
경향신문 트래블팀장, 매거진 x팀장, 생활레저부장, 문화부장을 지냈다. 여행, 문화 분야 기사와 인물 관련 기획물을 주로 담당했으며, 현재 종교 분야 취재를 맡고 있다. 쓴 책으로는 [트래블, 오늘 우리는 이곳으로 떠난다](공저)시리즈,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공저),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공저)가 있다.
첫댓글 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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