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루카 1,39-56
이웃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법
오늘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서 인사하실 때 성령으로 가득 찹니다.
성모님의 인사말과 함께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모님은 엘리사벳에게 성령님을 주시러 가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모님은 성령님을 주실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 안에도 예수님께서 계시고 성모님 안에도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1897년 11월 8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데이는 명목상 종교적인 성공회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에는 무신론자였습니다.
데이는 저널리스트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고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항의하고,노동 분쟁에 대해 보도했으며 그녀는 국가의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적 생애였습니다.
전통을 벗어나 관습적인 사회적 기대에 대한 무시, 사회적 투쟁에 대한 참여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영적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1926년 딸 테레사(Tamar Teresa)의 탄생은 데이에게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자신이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크나큰 사랑으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딸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이는 확고한 무신론자인 남편 포스터 배터햄과의 이별을 의미했습니다.
데이는 배터햄을 사랑했지만, 배터햄은 데이를 떠났습니다.
데이의 신앙은 그녀가 자신의 사회적 행동주의와 가톨릭 신앙을 결합할 방법을 찾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열망은 1933년 가톨릭 노동자 운동(Catholic Worker Movement)을 설립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 의복이나 쉼터를 제공하는 환대의 집입니다.
데이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은 자발적 빈곤, 비폭력, 노숙자에 대한 환대를 강조하면서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내부 분쟁과 외부 비판을 포함한 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애 동안 운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또한 전쟁 반대를 포함하여 평화 운동으로 인해 여러 번 체포되었습니다.
가톨릭 노동자 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했으며 오늘날까지 미국과 해외의 200개 이상의
공동체가 사회 정의 문제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전념하고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삶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성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오늘의 가장 큰 도전은 어떻게 마음의 혁명, 우리 각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혁명을
가져오는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큰 혁명은 결국 내적인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성체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알았고 그것이 그녀에겐 가장 큰 혁명이었습니다.
이러한 혁명을 거친 뒤에야 이웃에게 그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녀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우리는 모두 오랜 외로움을 알고 있었고, 유일한 해결책은 사랑이며,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혼자 무엇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안다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도 그렇게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 하느님께서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자신 안에서 깨어나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죽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또 말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사람들이 스스로 먹고, 입고, 거처하는 일이 좀 더 간단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 때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데도
그분에게서 성령의 힘이 나올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풍랑을 이겨보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내 힘으로 사람들에게 잘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잘되지 않습니다.
나에게서 좋은 능력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풍랑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방법은 자신들 안에 계신 분이 하느님임을 인식했을 때입니다.
그때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풍랑을 가라앉히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체를 영하더라도 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인식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누가 계신지 인식할 때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이웃에게 힘든 사람이 되거나 이웃 때문에 내가 힘들어집니다.
성령을 베푸는 사람이 됩시다. 마음의 혁명을 먼저 이룹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루카 1,39-56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세계 총회 때의 일입니다.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저희 살레시오회이기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0명의 청소년들을 초대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대의원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떠나는 날, 자신들이 쓴 편지를 총회 석상에서 공개했습니다.
대표 청소년이 낭독한 편지글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살레시안들은 집단적 성찰과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솔직히 저희는 지금 두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저희들의 삶은 하루 하루 힘겨운 투쟁의 연속입니다. 저희에게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에게 다가오는 것을 제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그 누구도 풀지 못할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희와 함께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외로워 울고 있는 저희 옆에 그저 현존만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친애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편안하고 쾌적한 사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저희가 지금 서 있는 이 거리, 이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맞아 청소년이었던 마리아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위로했으며, 격려하고 동반했던 엘리사벳의 지혜로운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복음: 루카 1,39-56: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신다. 마리아의 이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아주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고,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이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즉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 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 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후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사람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 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마리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