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 1
문덕수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 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란 우주(宇宙)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 앉는다.
(시집 『선(線) · 공간(空間)』, 1966)
[작품해설]
이 시는 이른바 ‘무의미의 시’ 게열의 작품으로, 일체의 관념과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의한 순수 조형물로서의 시를 보여 주고 있다. 문덕수가 그의 시에 동원하는 이미지들은 대부분 기하학적인 형상을 드러낸다. 기하학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시작 태도는 선과 공간으로 요약되는 이미지의 원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시는 이러한 이미지의 결합에 의해 창조디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물론 새로이 창조되는 공간, 새로운 세계는 앞서 지적한 대로 조형적이며, 균제의 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형상들을 놓고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철학적인 관념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의 시는 이미지 그 자체를 하나의 실체로 보려고 하는 모더니즘적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시작(詩作) 방법은 소재 중심주의적인 시가 갖고 있는 좁은 한계를 벗어나 좀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이미지와의 연쇄반응, 즉 이미지의 자율성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자유 연상과 자동기술법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원용하는 한편, 거시에 모더니즘의 특성인 분석적 언어 해체의 묘를 가미시키고 있다.
이 시에서 ‘선’은 ‘실뱀’이 되기도하고, ‘빗살’이 되기도하고, 다시 ‘꽃’과 ‘불꽃’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유 관념들로서 다만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서 자유 연상에 의해 우연히 추출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비를 찾아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뿐더러, 왜 이러한 표현을 했느냐고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문덕수(文德守)
심산(心山), 청태(靑苔)
1928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홍익대학교 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시 「침묵」, 「화석」, 「바람 속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64년 현대문학상 수상(평론부문)
1971년 『시문학』 창간
1978년 현대시인상 수상
1981년 아카데미 학술상 수상
1985년 펜 문학상 수상
홍익대학교 교수 역임
시집 : 『황홀』(1956), 『선(線)·공간(空間)』(1966), 『새벽마다』(1975), 『영원한 꽃밭』(1976),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1980), 『다리 놓기』(1982), 『문덕수시선』(1983), 『조금씩 줄이면서』(1985), 『그대, 말씀의 안개』(1986), 『꽃밭 속의 벤치』(1988), 『빌딩에 관한 소문』(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