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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을 들어서서 본 정자각 비각 건원릉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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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뒤에 세운 비석, '대한고황제건원릉'라고 쓰여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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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본 태조의 릉. 함흥지방의 억새풀이 능상에 수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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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 석마가 도열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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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의 비서실장 문인석(오른쪽)과 경호실장 무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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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풍석에는 세밀한 조각의 인물상이 있다. 보호하고 시중도 드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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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과 바닥에는 박석, 그리고 박석의 외부에는 난간석이 정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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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의 석호, 앉아서 주변을 살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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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의 주변 곡장과 석수 석마 문인석 무인석 난간석 바닥박석 병풍석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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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의 뒤에서 본 봉분과 주변 석물들, 봉분에는 억새풀이 수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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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의 배치도(건원릉). 각 릉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르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격동의 고려말 몽골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부흥을 이끌던 공양왕의 개혁이 실패한 뒤,
변방의 침입자들을 물리치던 장군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고려의 충신들을 하나 둘 처형하고,
고려 우왕의 뒤를 이어 왕이된 창왕을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고 우겨서 공양왕을 내세운 뒤,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양받는 형식을 취하여
공양왕을 몰아낸 뒤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국하였다.
그가 세운 조선은 왕의 '성(姓)을 바꾼 역성혁명으로 이룩한 새로운 왕조였지만,
그 정통성만은 옛날 한민족의 대제국이었던 옛 '조선'에서 따왔고,
그 이름이 똑 같았기에,
2000여년 전에 있었던 옛 '조선'은 '고조선'(古朝鮮)이라고 고(古)자를 덧붙여 부르고,
새로운 왕조는 그냥 '조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옛날 역사서에는 고조선도 '조선'으로만 씌여있고,
조선이후의 역사서에는 옛조선을 '고조선(古朝鮮)'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세운 조선의 초대왕인 태조 이성계의 릉을 '건원릉'이라 부른다.
건원릉을 처음에는 '조선태조건원릉'이라고 불렀다가,
조선말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다시 '대한고황제건원릉'이라고 고쳐부르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비문도 본래의 것과 새로 세운 비가 비각안에 함께 있다.
건원릉은 조선 초기에 세운 왕릉이지만
조선의 왕릉중에서는 가장 격식을 잘 갖추어 세운 왕릉으로 이후 왕릉의 기본이 되었다.
릉의 핵심인 봉분의 주위에는 귀가 접힌 곡장이 둘러있고,
봉분의 바로 아래는 약 1.0m 높이의 병풍석이 둘러있으며,
병풍석의바닥은 박석이 바닥에 깔려있다.
그리고 박석의 외부로는 1.0m 정도 떨어져
각방위를 가리키는 난간석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정면 난간석의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또 봉분의 바깥쪽 주변에는 옆과 뒷면에
석양 석호가 번갈아가면서 봉분을 수호하고 있고,
앞쪽에는 경호실장과 비서실장격인 무인석(무석인이라고도 부름)
문인석(문석인이라고도 부름)이 도열하고 있다.
건원릉의 릉제 형식은 이전 왕조인 고려의 왕릉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고려의 왕릉은 다시 신라시대의 왕릉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라의 도성이었던 경주 대릉원에 있는 많은 릉들은
목곽의 주변에 돌을 가득 채우고 위에 봉분에 잔디를 씌운 형식이었으나,
이를 발전시켜 주변에 호석과 난간석 박석등을 추가 하면서 발전시켜,
고려의 왕릉형식이 정형화 된 것이다.
본래 적석목곽형의 묘제는 한민족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의 묘제형식으로,
만주의 장군총을 비롯한 수많은 군장들과 임금들의 묘가 그렇게 되어있으며,
한강변에 있는 석촌동의 고분 또한 돌을 쌓아 시신을 보호하는 적석총이었다.
그런 왕릉이 신라시대에 둥근봉분형식으로 변하였고,
조선왕릉과 같이 돌을 채우는 형식이 변하여 석곽에 회벽으로 감싸고,
흙을 채우는 형식으로의 완성된 것은 고려시대이며,
조선의 왕릉들은 초기에는 형식으로 잘 갖추어져 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장식성이 떨어지고, 석물들도 규모면에서 차츰 격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국력을 낭비하지 말자는 시대적 요망도 있었지만
그만큼 국력이 쇠약해저셔 왕릉 마져도 간소하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