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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교수 <웰빙학습 카페, 거리의 파토스>
오징어 게임과 라캉, 그 벌거벗은 '나'의 욕망
“평생교육에서 물어야 할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여야 한다.” 지난 주 ‘저자 특강’에서 필자는 이 점을 강조하였다. 이성을 가졌다는 보편적인 류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면서 배우며 행복을 추구하는 각자 각자로서의 ‘나’에 대한 물음이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평생학습의 우선적 관심은 나 자신의 행복이지 보편적 인간의 행복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들 학습의 궁극적 목표는 ‘나를 찾는 것’ 혹은 ‘각자성의 회복’이라 말한다. 이 말은 찾거나 회복해야 할 ‘나’라는 어떤 고정적인 주체가 있음을 전제한다. 마치 조개 속에 감추어진 진주처럼 자기동일성을 지닌 ‘나’가 있다는 믿음이다. 전통적인 이성 중심주의에 기반한 정초주의적定礎主義的 사유방식이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등장하는 19세기 이후 이런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삶과 학습의 주체는 ‘나’이다. 따라서 ‘나’에 대한 지식과 성찰이 없는 평생교육, 나를 모르는 삶은 정말로 허망한 그림자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데카르트와 라깡 -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하지 않는 주체
나에 대한 이해의 양극단에 위치하는 것이 데카르트와 라캉이다. 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입각한 데카르트의 인간이해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그러나 라캉은 ‘생각과 언어’에 관한 소쉬르 및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을 빌어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소쉬르에 의하면 ‘나의 생각’은 모두 남의 말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주체’라는 ‘나’의 전통적인 믿음이 무너진다.
라깡-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깡은 소쉬르의 언어구조학을 상징계의 주체 형성에서 재현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니까 존재한다.’고 하지만, 라캉에 의하면 ‘나는 언어에 의해 생각을 당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언어에 의해 생각을 당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I think where I am not, therefore I am where I do not think.)고 단언한다.
나의 주체 형성에 언어가 절대적이듯, 라캉은 언어가 욕망의 전제 조건이자 욕망을 지속시키는 근본 원인이란 점을 강조한다. 언어로 구성된 상징계에서 완전히 충족되지 않는 ‘존재’의 발현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은 언어에 의해 표현되면서도 언어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들은 특정한 대상을 통해 그 욕망을 채우려고 처절하게 투쟁한다. 최근에 등장한 오징어게임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편적 인간이 아닌 우리 개개인으로서의 ‘나’의 실존적인 욕망의 심층을 발가벗기는 것이 오징어 게임이다.
라캉에 따르면 ‘나는 욕망이다.’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문제는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기훈은 어릴 적 친구들과 즐겨했던 오징어 게임에서 승자가 됐을 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 때 그 순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었다.” ‘행복했었다’는 과거형에 주목해보자. 지금은 아니라는 것, 여전히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그들 또한 기훈과 같은 욕망과 현재의 결핍을 공유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긴 드라마를 시청하는 우리들도 지금 이 순간 오징어 게임을 하며 산다. 누군가는 명품 핸드백을 게걸스럽게 구입하고, 누군가는 갭 투자로 아파트를 미친 듯이 사들이며, 누군가는 ‘Yuji박사’라도 얻기 위해 학문적 사기를 치며, 어느 정치인은 아들의 퇴직금 명목으로 ‘50억’을 받아내기 위해 음습한 뒷거래를 한다. 그렇게 하면 욕망이 채워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라캉에 의하면 욕망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에게 영원한 타인’일 수밖에 없다. 「오징어 게임」에서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이 시작되자 한 중년의 참가자는 1번을 선택하면서 기훈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저는 평생 한 번도 내 인생을 주인공으로 살아 본 적이 없어요.’ 이번만이라도 자신이 주도적이 되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케팅과 광고에 휩쓸리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뿐 자기주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럼 타자의 욕망은 무엇이며 나는 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라캉은 욕망의 심리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세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상상계 - 엄마의 욕망이라는 상상된 이미지
욕망은 아기와 엄마 관계[이자관계]인 상상계에서 시작된다. 아기는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무의식중에 발생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를 보여준다. 엄마에 대한 욕망은 무의식 속에 억압이 된다. 현대소비 사회 속에서 타자는 명품이, 아파트가, 좋은 학벌이 나의 욕망이란 착각을 지속적으로 주입시킨다. 상상계는 아기가(어른도 마찬가지다) 거울에 의해 지각된 이미지건 아니면 엄마의 욕망이라는 상상된 이미지건 간에 그 이미지가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다.
상징계- 언어로 구성된 욕망
상상계를 지나 현실세계인 상징계에 들어선 인간은 언어로 구성된 욕망의 대상을 얻게 된다. 인간은 일상의 언어를 통해 타인과 사회에 의해 형성된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나타낸다.
실재계-공허 혹은 결핍이 바로 욕망의 대상
하지만 여전히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남아서 그 다음 대상을 찾아나서는 데 그것이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는 언어로 구성된 상징계 밖에 있기에 표상할 수가 없으며 실체도 없고 물질성도 없이 텅 빈 공간[공허the void]이다. 이 공허 혹은 결핍이 바로 욕망의 대상이다. 결핍 자체가 욕망이니 채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욕망이란 결핍에 대한 욕망이며, 아무것도 없는 것을 원하니 그 욕망이 채워질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미끄러지는 욕망-명품이나 고가 주택 같은 ‘기표의 욕망은 영원히 미충족
오징어 게임의 또 다른 주인공 ‘일남’ 노인의 말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을 극명하게 묘사한다.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란 대상을 통해 욕망이 채워질 거라 생각했지만, 돈을 벌어도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남 노인이 또 다른 욕망의 대상으로 여러 게임들을 기획했듯이, 사람들은 또 다른 연인을 찾아, 명품이나 승진, 권력 등의 대상을 찾아, 끝없이 가고 또 가는 환유metonymy를 한다. 명품이나 고가 주택 같은 ‘기표(記表, 시니피앙)’에 눈독을 들이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럼에도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의 말대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신경증환자- 바라봄의 주체만 있고 보여짐의 주체는 상실된 상태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인간은 타자로부터 소외된 신경증 환자가 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당당한척 허세를 부리는 ‘한미녀’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으로 타인을 바라볼 줄만 알고 자신의 욕망이 남에게 보여짐을 당하는 줄은 모른다. 즉 바라봄의 주체만 있고 보여짐의 주체는 상실된 상태다. 나란 존재에게는 수동적인 주체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남몰래 누군가의 행동을 몰래 숨어서 훔쳐볼 때 나는 바라봄의 주체가 된다. 반면에 나의 그 모습을 누군가가 뒤에서 바라본다면 그때 나는 보여짐의 주체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 순간 나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물화物化 되는 것이며, 나의 몸은 대상화[즉자존재화] 혹은 객관화된다. 이렇게 ‘나’라는 주체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란 두 개의 주체가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바로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이다.
극 중의 ‘한 미녀’처럼 자신만의 욕망의 환상 속에 갇혀 타인과 세상을 바라볼 때 자기객관화가 되지 못하는 소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또 다른 주인공 ‘상우’는 동네선배 ‘기훈’의 거듭되는 인간적인 모습과 행동을 보며 고립된 주체의식에서 벗어나 ‘타자의식’을 갖게 된다. 욕망의 대상에 대한 왜곡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이 필연적인 오인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돈에 미쳐있었으며, 그런 자신을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는 자기 객관화의 눈을 다시 뜨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타자의식 혹은 자기 객관화가 바로 라캉의 이론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라캉이 분석하는 욕망이론은 나의 ‘좋은 삶(well-being)’과 학습을 위한 필수적인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다양한 대상을 추구하고 획득함으로서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 개개인, ‘나’의 벌거벗은 자화상이다. 그러나 욕망은 좋거나 혹은 나쁜 것이 아니다. 가치중립적인 나의 본성일 뿐이다. 욕망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욕망이 없는 삶은 죽음이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며 욕망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행하는 삶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학습에서 필요한 지혜는 욕망에 대한 자각과 태도일 것이다.
욕망이 지닌 오인의 구조를 인식하여 끝없이 환유하는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라
무엇보다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라캉에 의하면 욕망은 대상이 없다. 우리는 욕망의 원인과 대상을 혼동하기 쉽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욕망의 원인으로부터 등 떠밀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욕망은 그 자체가 결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욕망이 지닌 오인의 구조를 올바로 인식하여 끝없이 환유하는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의 욕망의 대상 그 자체를 즐기며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밤중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살육행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일에 일생을 바친 극중의 노인 ‘일남’의 입에서 터져 나온 단발마의 미명은 이를 경고한다. “제발....그만해!.....나 너무 무서워...이러다가는...다 죽어...!”
노인의 외침 속에서, 최근 덩치 큰 플랫폼 기업들의 욕망의 회로 속에 수없이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스쳐간다. 일남 노인은 그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난 것일까? 극중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 나가던 일남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는 돈 같은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절대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삶의 게임, 그 과정 자체에 만족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타자에 대한 시선과 의식을 갖게 된다. 상상계의 아이처럼, 욕망의 대상을 실재로 믿고 욕망의 회로 속에 갇힐 때, 인간은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로 머물 수가 있다. 그러나 대상이 허상임을 인식할 때 그것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 집착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는 타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