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150 | 사진의 위력
Name : 박수경 Date : 2007/08/29 13:25:55 / Read : 64
친정 아버지의 유치원 졸업식사진이 있었지요
아버지의 백일 사진도 1935년생인 아버지가 유치원에 입학 할 당시는 일본 대판 대정구의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반장으로 일장기 밑에서 사진을 찍히는 영예(?)\를 안으신 아버지
1935년생이므로 2차대전이 한창인 시절에 유치원을 다닐 만큼의 호사를 부리신 아버지가 내심 부러웠지요
사진 안에 아동들 가운데 앉으신 분의 복장이 아무래도 눈에 들어오고 기모노를 입은 일본부인들이 작위를 받은 부인인 것을 알고
그 귀부인들만 보았지 그 옆에 서계신 부제님 옷을 입으신 분이나 수녀님의 모습은 보지 않았는데 남편이
그 사진안에 서 계신 분이 수녀님일거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고 눈을 보니 수녀님사진이 분명하구요
부제님은 서 계시고 신부님만 가운데 앉아 있는 60여명의 어린이가 앞에 앉은 어린이는 여자어린이거나 키가 작은 어린이이고, 뒤에 서 계신 아버지는 키가 큰 어린이들이었지요
대판의 산부인과에서 아버지를 낳으신 할머니는 탯줄에 적혀있는 글자도 모르셨겠지요
물론 할아버지도 신민이라는 뜻을 알리가 없었겠지요
돌아가신 고모의 말씀이 생각나는데 "너희 아버지는 요셉이고, 나는 베로니카였다".
그 말이 떠올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형님이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다시 밀선을 타고
일본에 도착하여 할아버지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주물공장에 취직하고
할아버지 형은 조선으로 돌아왔데요
할아버지 형이 전남 강진에서 농사를 지으시고 장손으로 살아야하며
이미 결혼을 하셨기에
할 수 없이 조선으로 돌아온것이겠지;요
전남 강진이나 장흥은 우리 조상들이 유배를 간곳입니다.
중구 필동에 살던 영의정 박승종이 인조반정 후 실각하여
자손들의 유배지가 진도와 장흥이었으니까요
못사는 미관말직의 일가붙이는 은평구 대조동에서 산 것이구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3학년까지 그 것도 일본인들과 함께 국민학교 공부를 할 무렵엔
2차대전으로 소년병으로 소년들을 끌고 갈까보아
아버지를 신학교에 넣으면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얼른 신학교에 입학시킬 마음을 먹으신것 같아요.
큰 고모가 아버지의 누나이므로 그 기억을 복원하여 모자이크 해보았지요...
공장 주인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형제처럼 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할아버지가 인품이 대단하였던
것이 아니라 일본인 천주교 신자가 인품이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고모와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일본에서 다니셨구요
고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는데 아마도 말이 서툴러 못다니신것 같습니다.
조선 이쁜이 조선에 가더라도 수녀가 되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라 했던 일본 수녀님은 아마도 돌아가셨겠지요..
해방이 되자 조선출국령이 내려져 조선인이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고모가 아버지
와 돌아가신 아버지의 동생손을 너무나 꼭 잡아 손아귀가 아프더랍니다.
그 동안 할아버지 형에게 보낸 돈 전부를 써버린 것을 알고는 다시 목포로 와서 장사를
시작하실무렵에 아버지의 동생인 겜보삼촌이 소년으로 돌아가셨지요 장티푸스로 그리고 6.25가 나고
목포에서 가장 가가운 곳인 전남 영암으로 이사오시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교우촌 지금도 마을 사람 60%가 교우들이니까 교우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겜보삼촌이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다시 절에 다니시고., 할아버지도 1957년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싫어하셨대요 신여성이 아니라구
신여성하고 결혼하고 싶다며 할머니를 구박을 많이 하셨대여
그러니 할아버지만 세례를 받으신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절에 다니셨는데
그 뒤 고모도 절에 가시고 겜보삼촌 돌아가신 것만 분해서 하느님이니 천부님이니 그런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아요
가끔 겜보가 보고 싶다고 우시는 할머니나 고모를 본적이 있으니까요.아버지도 시무륵해지시고...
고모는 아이를 못낳아 이혼을 하셨고 재혼을 하셨고, 보문동에 사시고 전처의 아들이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세례를 받고 교통사고로 인도네시아에서 죽어서 오고...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것 같아요
고모의 친구들 말에 의하면 "지비 고모만큼 이쁜 사람은 테레비에서 못 보았고, 영화에서도 못 봤고, 실제로도 보지 못했다하던데요., 우리 고모 참 미인이셨는데
우리 엄마는 겜보삼촌은 소름끼치게 잘생겼다고 사진에서 보았다고 하셨어요...
일본에 살 때엔 고국이 그리우면서도 자식들은 보호하시고 싶으시고,
조선에 입국하셔서는 일본에서 부유한 상인이시던 시절이 그립고
항상 양가 감정에 시달리셔야 했던 우리 친정아버지가 1972년도에 서울로 이사를 와서
살림집은 보문동이고 역곡에서는 목재상을 하시다가 그나마 망해서 수색으로 목재를
실어 나른 뒤 일일히 손으로 켜서 파셨으니까요. 1974년도에 수색으로 이사를 온 뒤에
삼종이 치면 삼종친다는 말을 하셨고, 저 종은 일본이나 목포나 영암이나 항상 친다는
그 말도 생각나구요
1993년에 돌아가실 때에 수색성당 주임신부님께 아버지는 이상하다. 자신은 성당에 다
니지 않으시면서 자식들은 성당에 보내셨고, 개신교에 다닐때는 야단만 치시더니 자식
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자 다닐라면 재대로 다니라 했던 말이 생각난다며 매우 울었어요
홍신부님께서 그럼 요셉이라고 일단 화세를 준다고 하시며 연령회회장과 레지오단원을
보내겠다던 그말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동안 전 아버지는 나 땜에 그나마 요셉이라는 본명을 얻은 줄만 알았는데 어느날 사
진에서 본 수녀님복색과 부제님 복색을 하신 일본인을 보고 고모가 "네 아버지는 요셉
이고 난 베로니카라는 말이 떠올라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만
그 사진속의 사람들과 일장기 밑에 모인 사람들은 신부님, 수녀님, 신자어린이였을 것이라는말
양가감정에 시달리신것 같은 아버지가 일본에서의 사신일들을 이야기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대신 가양동에 사시는 삼촌이나 고모들이 해주신 이야기지요
우리 큰 아이가 졸업을 하면
일본 대판 대정구(大町區)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을 찾아 볼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세례명과 삼촌의 세례명과 작은 고모의 세례명을 모두 찾을 것입니다.
작은 고모는 아녜스로 1987년에 세례를 받으셨어요... 아마도 일본에서의 세례명도 아녜스가 아니었을 까요...
아마도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던 유치원도 찾아 아버지의 유치원 졸업사진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은 성심수녀회가 많으니까요...
사진의 위력
바로 이런 것 아닐 까요
성심캠퍼스에서 시간제 등록생으로 들은 학점수만 해도 80학점이 넘거든요
참 묘하죠...
제가 졸업한 건대보다 더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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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사카의 한 성당에서의 오래된 유치원 사진
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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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0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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