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4일 (화) 촬영.

순교성지, 갈매못.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던 갈매못은 병인박해 때에 군문효수를 당했던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위앵 민 마르티노 신부, 오메트로 오 베드로 신부와 황석두 루가 회장, 그리고 장주기 요셉 회장과 그밖의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피로 물든(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 처형장이었다.
대원군이 이자리를 처형장으로 택한 것은 명성황후의 국혼이 예정된 시기로서 수도에서 20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 형을 집행해야 탈이 없으리라는 무당의 예언도 있었고,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가 침략을 시도한
서해의 외연도가 아스라히 바라보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인근의 오천성은 좌수영 및 우수영과 함께 영향력 있었던 충청수영이 있던 곳으로서 다른 지방과 다르게
전국의 죄인이 여기까지 와서 처형당하기도 했던 역사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견도 있다.
처형터임이 확인된 1927년부터 이곳이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했고,
1975년에 순교비가, 1999년에 경당이 완공되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전래적으로 무서운 곳으로 알려져 마을 사람들이 누구도 이 근처에 가지 말도록 해왔던 이 곳은 길도 없어
인근 오천성에서 배를 타고 오던 곳이었으나 성지로 개발되어 지금은 경당 앞 천수만변 도로를 통해 수많은
순례 단체가 줄을 이어 방문하고 있다.
단체 순례자들은 언제나 편리한 시간에 미사봉헌을 예약할 수 있으며, 매주 일요일 11시 30분에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서해의 섬들과 천수만이 바라다보이는 이 곳은 순교 성인들의 피를 연상시키는 듯, 낙조가 의미심장하고
아름답다. -백과사전-

순교터.
이곳이 1866년 3월 30일 수난 성금요일에
성 다블뤼 주교, 성 오매트로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회장, 성 장주기 회장께서 순교한 곳입니다.
200여명의 군인들이 둘러서있는 가운데 지역주민들과 신자들이 순교의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성인들은 망나니의 칼날아래에 한분 한분 목이 잘렸고 순교자들의 솟아오르는 피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짙붉게 물들여 놓았습니다.
다섯 분의 머리가 기둥 위에 걸렸을 때 은빛 무지개 다섯 개가 하늘에서 내려와 주위를 놀라게 하였답니다.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220번)
성인들이 순교한지 59년 후인 1925년에 금사리본당의 정규량 신부는 목격 증인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순교터와 장깃대(將基臺) 섰던 자리, 임시 매장지를 확인하고 부지를 매입 했습니다.
그 피의 순교터에 복자비와 성인비를 세워 성인들의 삶을 기리고 있습니다.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푯돌에 있는 문구-

순교성인비와 순교복자비.

청소역에서 이 곳 성지까지는 택시(13,000원)를 타고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답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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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입구입니다.

형장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성당에서 본 순교터입니다. 순교터너머로 바다가 보이는군요.

성당 내부.

다섯 분의 순교자 성인들의 그림들이 성당 벽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입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유해. 성 베르되 주교의 유해


성당에는 순교자들의 베어진 목을 달아 놓은 형상을 한 조형물도 있네요.

기도처로 올라가는 길에도 다섯 성인들의 흉상이 있습니다.

다불뤼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로 베드로 신부. 위앵 루카 신부. 장주기 회장. 황석두 회장.

기도처 입구입니다.

기도처 안의 스테인드글라스.

제대입니다. 뒤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열면 바다가 보입니다. 사전 신청을 해야 열어 준다고 합니다.

기도 드리는 님.


좌측 벽에는 다섯분의 성인 모습을 스테인드글라스로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기도처를 나와서,

건물 밖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앞쪽으로 오니 천수만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네요.

순례자들을 위한 휴식공간도 있습니다.

아직 음료는 팔지 않지만 사람은 나와서 준비중 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갈매못 성지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 해변으로 나갔어요.

지금은 순교자들이 처형 당했던 당시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했겠지만 길을 내기전에도 이곳은 바닷가였어요

순교자들도 마지막으로 이 풍경을 보았겠지요.

모래는 다 씼겨 나가고 자갈들만 남아 있는 해변이지만,

성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잠시 해변을 걸었습니다.

이제 이곳에 슬픔은 없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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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로 올라 왔습니다.

오천항을 향해 걸어갑니다.

길이 찻길밖에 없는것이 아쉬었지만 그래도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다행이었어요.

바다에는 끌배라는 예인선들이 많이 정박해 있습니다.


주변 풍경을 보며 이야기하고 걷다 보니 힘든줄 모르겠더라구요.





얕은 언덕을 넘으니



오천항이 보이네요.

오천항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습니다. 갈매못 성지도 오천면이지만 영보리에 있습니다.

오천항에 있는 수영성이 저 앞에 보이는군요. 갈매못 성지를 떠난지 40여분만입니다.

이제 확실히 보이죠.

우린 수영성부터 올라 갔습니다.

일부가 무너져버린 수영성 서문인 망화문의 아치형 석문입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진휼청이예요.

충청수영 진휼청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2호.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객사와
삼문만이 남아 있다.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 온돌방, 툇마루, 부엌 등이 있다.
충청수영 고지도 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휼청 뒤로 보이는 건물은 영보정입니다.

진휼청 성벽 위에서 본 오천항입니다.

영보정으로 올라갑니다.


영보정으로 가며 본 오천항.


영보정

영보정,永保亭.
영보정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李良)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며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였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 시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전도가
전해온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지만 영보정은 없어진지 137년만인 지난 2015년 11월에 복원 되었습니다)


영보정에서.





영보정에서 본 풍경.







충청수영성 천주교 순례길.
이곳 충청수영은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특히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순교성지에서 순교한 5명의 성인과 연관이 깊다.
이들은 서울에서 1866년 3월 23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충청수영으로 이송되어 장교청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866년 3월 30일 슬재고개(현 솟재고개)를 넘어 수영에서 약 10여리 떨어진
근처의 "바닷가 모래사장" 갈마진두(현 갈매못 순교성지) 로 가서 순교하였다.
순교 후 신자들이 성인들의 유해를 오천면 갈매못 순교성지부터 미산면 서짓골 성지로 바닷길과 산길을
통해 12일간 풍랑과 뇌우 속에서 운구하여 안장하였다. -안내문-
다섯 순교자는 말을 타고 수영으로 압송되었다....
성 목요일(3월 29일) 저녁에 그들은 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이 이튿날 길을 꽤 많이 돌아 이웃 읍내에 가서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서로 짜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그들의 말을 중단하며 외쳤다. "안돼오, 당신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오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시오. 왜냐하면 내일 우리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오."....
포졸들의 우두머리와 포졸들과 군사들모두가 한 마디 대답도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어김없이 시행하게
되었다.

충청수영성 객사 건물 앞에 있는 공덕비들, 이 공덕비들은 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입니다.

비석군과 내삼문.



내삼문(도유형문화재 제210호)에는 공해관이란 현판을 걸었습니다.





충청수영 장교청(도문화재자료 제411호) 건물의 뒷 모습입니다. 뒤로 영보정이 보이네요.

장교청은 1986년까지 오천면 청사로 사용되어 오다가 1987년에 현위치로 이전되었습니다.

성곽따라 오르는 길입니다.






성곽 높은 곳에서 본 오천항 풍경입니다.




내려 오는 길.



내려오는 길에 장교청(객사)에 들어 갔습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현재의 오천면사무소 자리에 있던 이 건물에서 순교자들이 하룻밤을 묵었다고 하니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충청수영 장교청(객사)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
조선시대 충청수영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1896년 폐영과 함께 대부분 없어지고 객사, 공해관의 삼문.
진휼청만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진 충청수영 객사이다.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이 객사의 이름은 운주헌이다.
이 건물 앞에 있는 삼문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으로
원래 객사와는 별도 건물인데 지금은 한자리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진휼청이 있는 곳으로 다시 내려 왔어요.

서문이 보이고 오천항도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네요.





이곳에 이런 비도 있네요.

유격장군 계공 청덕비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 연대 1598년, 선조31년.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했던 명나라 수군장수 계금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전쟁 중이던
1598년 4월에 세워졌다. 유격장군 계금은 명나라 절강성 출신의 수군장으로 왜란 당시 3천명의 수군울
이끌고 이곳에 상륙한 뒤 전라도로 이동하며 왜군을 토벌하였다.
비문은 당시 승문원 교리 안대진이 지었으며 장군의 덕을 칭송하고 왜적을 빨리 무찌르기를 기원하였으며
장군의 위엄을 빌어 바다에서의 안녕을 기도하자는 내용이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이
충청수영에 상륙하였음을 알려주고 당시의 민속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오천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탑. (2013년 11월 2일. 졸업생들이 세움)


오천농협.


오천면사무소.

면사무소 정문에 있는 이름모를 비.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한마리가 새겨진 이수와 비신은 한 돌이며 귀부는 다른 돌인데
비신과 귀부는 제 짝이 아니라고 합니다. 전면에서 보면 비신에 비해 귀부가 작아 보입니다.
비신도 아래 부분이 잘려진것 같고요. 여하튼 크기에 비해 비신이 짧습니다.
모양으로 봐선 신도비 같은데 이 곳 출신으로는 2품 이상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며 신도비가 아닐 것이라고
하지만 비문이 모두 닳아 판독 불가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면사무소 앞에는 소방서가 있네요.





오천면사무소 옆에는 경찰파출소와 오천성 서문이 있습니다.

오천면은 작은 면이지만 도서관도 있습니다.

오천항 가는 길.


오천항터미널입니다. 섬으로 드나드는 배를 타는 곳이예요.

한적한 오천항.



오천항 주변엔 주차된 차량이 엄청 많아요. 아마도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차들인가 봅니다.


청소에서 오천항으로 오는 버스는 많지 않습니다. 광천에서 오가는 버스는 하루 세 번 밖에 없습니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과 사진 잘보고 갑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가보고 싶네요
흔적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