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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의 매력 중 하나는 수많은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11-12시즌을 돌아본다면 어떤 스토리로 기억될까요?
전 단축시즌, 킹 르브론의 첫 우승. 그리고 제레미 린 열풍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평범해보이는 아시아인이 펼쳐낸 영화와 같은 NBA입성스토리와 극적인 활약상은 NBA와 농구에 별 관심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주목을 이끌어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NBA의 벽을 낮추는 큰 역할을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야오밍으로 대표되는 아시아와 NBA의 역사를 되돌아볼 동기를 마련해주었고요. 지금부턴 간단한 기준으로 구분한 아시아인의 NBA 도전견문록을 조사한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 소개해보겠습니다.
NBA 입성에 성공한 선수들
1.순수 아시아 국적의 선수
Wang Zhizhi 최초로 NBA에서 뛴 아시아 국적의 선수.
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길목을 막았던 친숙한 선수이다.
216cm의 77년생 센터는 95년에 최연소 선수로서 프로농구에 데뷔함과 동시에 95년에 열린 19세이하 FIBA World Championship에 역시 팀 내 최연소 선수로 참여해 경기당 22.3득점으로 전체 2위, 60% 야투로 전체 5위, 86% 자유투로 전체 4위, 4.6공격리바운드로 3위, 6.5의 수비리바운드로 3위를 기록하며 All-Tournament team에 선정되었다.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 96년 아시아 선수로서 최초로 Nike Hoop Summit Game에서 주전으로 뛰었으며 조지타운의 농구장학생 제의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96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 경기당 11.1점, 5.6리바운드 41%의 야투성공률과 90%의 자유투성공률을 기록하며 중국의 8위 등극을 도왔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엔 13.5득점 5.0리바운드 3점 41.7% 자유투 90%를 기록했고 중국은 10위에 올랐다.)
97-98시즌부터 00-01시즌까지 중국리그 4년 연속우승을 이뤄내며 절대자로 군림하던 중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NBA에 대한 도전의 꿈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꿈을 향해 99년 드래프트에 참가했었고 2라운드 36번픽으로 댈라스의 부름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중국 국가대표위원회와 구단의 허락은 2년동안이나 미뤄졌고 그는 결국 2001년 4월 5일이 되어서야 10게임도 남겨두지 않은 NBA에 -순수 아시아인 최초로- 데뷔할 수 있었다. (그가 떠난 뒤에야 야오밍은 CBA우승을 경험할 수 있었다)
2001년 시즌이 종료된 뒤 그는 NBA 적응과 훈련을 위해 미국에 머무르려했고 중국 농구협회는 그런 그에게 2002년 부산아시안 게임을 위해 소집을 촉구하는 2개의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이후 중국 농구협회는 국가대표에서 그를 계속해서 제외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매버릭스, 클리퍼스, 히트에서 05년까지 활약했으나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는데 초반 댈러스에서 노비츠키, 주완 하워드, 라프렌츠에 밀림은 물론 팀의 에너지였던 나헤라의 경쟁에서 뒤쳐진 게 아쉬운 부분이다.
05년 자유계약 선수가 된 그는 06년 중국으로 돌아와 06년 4월 10일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국가대표 복귀를 원한다고 밝혔고 협회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농구선수 출신인 196의 아버지와 186의 어머니를 둔 그는 야오밍 이전의 최고의 중국 선수이자 최고의 인기 농구선수였다. 8번의 중국 올스타이자 올스타 투표 1위 출신의 현역 왕즈즈의 농구 인생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레이스가 끝난 뒤에도 왕즈즈는 중국농구의 한축이자 아시아 농구의 계보로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NBA에서 왕즈즈는 야오밍과 5번의 경기를 했는데 왕즈즈가 더 많은 득점과 리바운드를 한 경기는 1경기뿐이다.
*왕즈즈는 방콕아시안게임 때 박정은에게 사진을 찍고 맥주를 마시자며 호감을 표시한 적이 있고 이 사실은 당시에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Mengke Bateer 최초로 우승반지를 얻은 아시아 선수.
210cm의 키에 132kg 1975년생인 이 선수는 최초로 주전으로 출전한 중국선수이다.
그는 1999년 피닉스에서 열린 프리드래프트 토너먼트에 참가하면서 NBA와 인연을 시작했고 그 후 2001년 덴버의 프리시즌 트레이닝 캠프에 합류, 10월 25일 방출되었지만 부상과 라프렌츠의 트레이드로 부족해진 빅맨진을 보강하기 위한 덴버의 결정으로 베이징 덕스에서 뛰었던 그는 2002년 2월 26일 덴버에 합류하게 된다.
바로 다음날 27일 NBA 데뷔전을 치룬 그는 남은 경기 중 10경기를 주전으로 출전하며 시즌을 마무리한다.
2002년 인디애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중국의 대부분의 경기에서 득점을 리드했다- 그를 눈여겨 본 Gregg Popovich가 2라운드 픽으로 여름에 그를 데려왔고 샌안의 02-03시즌 우승으로 인해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반지를 얻게된다.
그 후 03년 토론토와 계약했지만 04년 1월 매직으로 트레이드 된 뒤 방출되었고 그 뒤 닉스에서도 트레이닝캠프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는 NBDL에 참가해 16번 픽으로 Huntsville Flight에 합류. 24경기 동안 12점 5.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기회를 엿봤지만 결국 2005년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사실 96년 00년 올림픽, 02년 세계선수권에 이어 부산 아시안 게임에까지 중국국가대표로 활동한 그였지만 국내 팬들에겐 그리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그는 왕즈즈 야오밍과 걸어다니는 만리장성으로 알려졌으며 중국에서는 9번의 올스타와 2번의 MVP에 선정된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몽골출신으로 이름의 뜻은 Eternal Hero다.
*2002년 3월 3일 왕즈즈와의 경기는 400만명의 사람들이 생방송으로 CCTV를 통해 시청했다.
*09년 KBL 트라이아웃에 참가하려했다.
*배우로 활동 중이다 ‘8인 최후의 결사단’에 출연했다.
Yao Ming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
1980년 상하이 출신의 7피트 6인치 센터는 2002년 1번픽, 8번의 올스타, 5번의 ALL-NBA팀에 선정되며 정상급선수로 활동했다.
201cm의 아버지와 190cm의 어머니사이에서 5kg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10살에 165cm이었으며 2.20cm까지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9살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10대부터 고향 팀인 Shanghai Sharks에서 뛰었으며 17살에 성인 팀에 합류해 평균 10점 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플레이오프에선 평균 38.9점, 20.2리바운드, 76.6의 야투성공률을 기록했고 그 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NBA커리어를 가진다.
야오밍은 17살 때 만난 농구선수 Ye Li와 2000년 올림픽이후 교제를 시작하여 2007년 8월 6일 결혼해 2010년 5월 21일 첫 번째 딸을 휴스턴에서 낳았다.
현재 그는 고향 팀 상하이 샥스의 구단주이자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야오밍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시드니 올림픽 때 그가 각국의 팀핀을 모아서 고백한 후 받아들였는데 사실 그녀는 야오밍이 데이트한 유일한 여자라고 한다.
*야오밍은 2004년 Ric Bucher와 공동으로 자서전과 다큐를 찍었으며 두 작품다 제목은 Yao: A Life in Two Worlds이다.
Yuta Tabuse 일본에서 태어난 최초의 NBA선수
175cm에 75kg의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선수로 만화 같은 스토리로 일본농구계에 데뷔했었다.
1980년생의 그는 사상 최초로 일본의 모든 전국대회를 3년 동안 무패의 기록으로 모두 우승시킨 장본인이다. 그 3년간 그는 MVP를 독차지했었고 일본의 조던으로까지 불리었다. 그리고 99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국으로 떠난다. 이건 뭐 슬램덩크에서도 찾기 힘든 스토리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최연소나이로 국가대표 선정된 그였지만 사실 그의 탄탄대로는 미국에서 끊겨버렸다. NCAA 2부리그였던 BYU 하와이 분교에 입학한 그는 규정 때문에 1학년 땐 뛰지 못했고 2학년 땐 주전으로 7.6득점 6.6어시스트로 활약하며 팀의 지구우승을 도왔다. 그후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리그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02-03시즌 신인왕에 이어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성공적인 모습을 보냈지만 그는 다시 미국무대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03년 서머리그를 위해 바다를 건넌다. 이듬해 04년 덴버의 트레이닝캠프에서 참가했다가 방출되어 ABA 롱비치 잼과 계약했다가 다시 피닉스의 부름을 받게 되고 결국 개막로스터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방출되는데 그는 그사이 꿈의 코트에 4경기 발을 디딘다.
다시 롱비치 잼으로 돌아간 그는 05년 클리퍼스와 계약하지만 역시 방출되고 NBDL에서 34게임동안 6.5점 4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그 이상의 성과를 얻진 못한다. 08년까지 디리그와 서머리그 등에서 노력하다 결국 일본으로 돌아갔고 2010년 소속팀이 우승하는 등 일본에서 활약 중이다.
*타부세 유타는 4경기 동안 단 7점을 올렸는데 그것은 모두 그의 데뷔전인 11월 03일 경기에서 1개의 3점과 4개의 자유투로 기록한 것이다.
Ha Seung-Jin NBA에서 뛴 최초의 한국 농구선수.
7피트 3인치의 85년생 선수는 한때 한국농구의 미래로 불렸던 선수이다.
농구선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004년 국내 NBA팬들의 기대를 업고 드래프트에 참여해 46번픽으로 포틀랜드에 지명된다. 05년 1월 7일 데뷔전을 가진 뒤 래틀리프와 프리지빌라가 부상으로 빠졌을 때 4경기를 스타팅으로 나오는 등 05-06시즌까지 포틀랜드에서 뛰었지만 전혀 활약하지 못했고 이전부터 이어진 3번의 서머리그에서도 부진하면서 결국 06년 7월 31일 벅스로 트레이드 되었다가 10월 28일 방출되며 NBA을 떠나 NBDL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Anaheim Arsenal에서 31경기를 뛰었지만 평균 2.6득점 2.9리바운드에 그쳤고 그 후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 모두가 아는 제 2의 농구 인생을 열게 된다.
*하승진 가장 크게 활약했던 국제대회는 청소년 월드 챔피언쉽이 아닐까 싶은데 그때 그는 19.2분을 뛰면서 평균 11점 9.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Yi Jianlian 아시아 최고의 운동능력.
03년 "The Next Yao Ming"으로 타임지에 실렸을 정도의 대륙의 특급 유망주이자 현 중국 국가대표의 중심선수이다. 6-5의 아버지, 5-8의 어머니 모두가 프로 핸드볼 선수였던 그는 길거리 농구를 하다가 농구코치에게 발견되어 선수가 되었다.
02년 유망주로서 아디다스 ABCD캠프를 참여한 뒤 프로로 데뷔한 그는 02-03년 신인왕을 수상했고 Guangdong Southern Tigers를 5년동안 3번의 우승으로 이끌고 4번의 올스타에 선정된 뒤 NBA행을 결정한다. (05-06엔 올스타 투표1위) 특히 06년 파이널에선 MVP를 수상했으며 07년엔 우승엔 실패했지만 24.9점 11.5리바운드로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07년 드래프트에서 6번째로 벅스에 픽된 그는 빅마켓을 선호한다는 기존 생각대로 계약하길 꺼려하다가 8월 29일에야 계약을 성사한다. 신장대비 최고의 운동능력을 지닌 이 선수에 대해 04년 중국 국대 감독이었던 Del Harris는 가장 운동능력이 뛰어난 7피트선수라 칭찬했고 그것은 드래프트 전 운동능력 측정 수치에서도 드러났다. 기대 속에 데뷔한 이 지엔리엔은 12월에 12.1점 6.6리바운드로 이달의 루키를 수상하고 루키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등 성공적인 발걸음을 시작했지만 그 후 크게 성장하지 못한 채 08년 넷츠로 트레이드, 10년 위자드로 트레이드 된다.
직장폐쇄 기간동안엔 원래 팀으로 1년동안 돌아갔는데 NBA로 돌아가는 옵션을 넣고 계약했었다.
2012년 댈러스와 계약했지만 미약한 입지 속에 NBDL에서 경기를 뛰기도 하였다.
그는 초반엔 84년생이라는 나이 논란이 있었다. 07년 08년 몇개의 중국문서에서 84년생으로 등록된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지엔리엔은 언급하길 거부했고 그의 측근들은 인쇄상의 문제라고 해명했다. 2006년엔 피바 월드 챔피언쉽에서 베티에에게 24살이라고 말했다는 루머도 있었는데 베티에가 그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 해명했다. 고의로 위조했다는 루머 속에 몇몇 증명서가 87년생임을 확인해주었고 현재 그는 87년 10월 27일생으로 확인되어있다.
*이지엔리엔의 첫 데뷔는 1억명, 야오밍과의 첫 맞대결은 2억명이 시청했는데 이는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한 경기 중 하나이다.
*그는 2011 아시안 토너먼트에서 16.6점, 10.8리바운드, 1.4블록으로 MVP에 선정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Sun Yue 대륙의 호수인.
85년의 6-9의 장신가드는 NBA에서 플레이한 5번째 중국선수이자 한족 중에 첫 번째로 우승반지를 가진 선수이다.(멍크 바티에는 몽골출신)
그는 2007드래프트에 40번 픽으로 레이커스에 합류했고 올림픽을 위해 지연하다 08년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2009년 7월에 방출되었다가 9월에 닉스와 계약했지만 다시 10월에 방출되었다.
Hamed Haddadi NBA에서 플레이한 최초의 이란선수
아시아와 NBA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시아 최고의 선수이다.
85년 생인 그는 7피트 2인치의 키로 08년 8월 멤피스와 계약하면서 NBA에 데뷔했다.
이란을 아시안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끌고 08올림픽엔 16.6점 11.2리바운드 2.6블록을 해내며 전체선수 중 유일하게 더블더블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BA에선 4년동안 큰 출전시간을 얻지 못하며 제한된 역할만을 하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과거에 그는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 때문에 NBA입성이 어려웠는데 미 연방정부가 NBA사무국에 이란인과의 사업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고 있음을 알렸다고 한다.
*2011 직장폐쇄기간동안 고향의 팀과 계약을 맺었다,
2.이중 국적 및 이민자의 아들
Wat Misaka NBA에서 뛴 첫 번째 백인이 아닌 선수.
66년전 NBA에서 뛴 첫 번째 아시안 혈동의 선수이다. 그리고 NBA에서 뛴 첫 번째 백인이 아닌 선수이다.
1923년생인 미사카는 이민 2세로 유타에서 태어난 미국국적의 농구선수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주립 챔피언이 됨에 이어 유타대학을 1944 NCAA, 1947 NIT 우승으로 이끌었고 1947 BAA드래프트에서(NBA의 전신) 뉴욕닉스에 픽되어 47-48시즌 닉스에서 3경기를 뛰었다.
5피트 7인치의 포인트 가드였던 상징적인 인물은 99년 유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됨은 물론 08년엔 다큐멘터리 영화
“Transcending: The Wat Misaka Story.”로 제작되어 개봉되기도 하였다.
*BAA는 46년 시작되었고 NBA는 BAA가 NBL이라는 단체와 합병하면서 49년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Tom Meschery 중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nba선수.
38년생인 톰 머셔리는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간 러시아 혈통의 선수이다
61년부터 71년까지 10년동안 NBA에서 뛰면서 한번의 올스타에 선정된 그는 골든스테이트의 첫 영구 결번 선수였다.
그의 본명은 읽기도 힘든 Tomislav Nikolayevich Meshcheryakov인데 1917년 부모가 볼셰비키혁명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기에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쯤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시도하지만 중국을 점거한 일본에 의해 도쿄근처의 집단수용소로 보내졌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5년 동안 잡혀있게된다.
그 후 미국으로 이민 온 그의 가족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을 의식해 성을 Meschery로 바꿔 살아간다.
61년 7번픽으로 NBA에 합류한 그는 6-6의 키로 파워포워드를 소화했고 "the Mad Russian"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터프한 선수로 활약했다.
*머셔리는 체임벌린에게 달려들 정도로 터프한 선수였는데 체임벌린은 쉽게 정리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NBA에 진출한 첫 번째 러시안 선수라고도 주장한다.
*은퇴 후 코치, 학교 영어선생, 시인으로 활동했는데 아내도 문학적인 활동을 했고 부부 모두가 Nevada Writers Hall of Fame에 선정되었다. (그는 2002년 아내는 1999년)
Sam Bowie 레바논이민자의 아들.
역대 최악의 선택에 자주 등장하는 7피트 1인치의 61년생 센터는 레바논이민자의 아들로 펜실베니아의 레바논출신이다.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로 불리는 84년의 1번 2번 3번은 4번지명자 샘 퍼킨스에 비해 너무도 많이 유명한데, 올라주원과 조던이라는 해피한 엔딩의 주인공사이에 실패와 실수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새드한 엔딩의 주인공이 된 샘 보위도 이런 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시절 경기당 28점 18리운드를 기록하며 All-American과 올해의 선수에 선정,
또다른 특급유망주인 랄프샘슨과의 맞대결에서 우위를 가지며 실력을 증명,
모스코바 올림픽에 대학을 거치지 않은 선수로서 선발됨. (미국의 보이콧)
대학시절 2번의 NCAA Basketball All-American팀 선정(2학년 때 써드팀, 4학년 때 세컨드팀)
포틀랜드는 샘 보위의 이러한 이력과 팀의 드렉슬러와 짐 팩슨을 고려하며 선택한 결정을 크게 자책하진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샘 보위가 10점 8.6리바운드로 루키팀에 선정될 때까지만 해도 유효했을 터이다.
그러나 포틀랜드엔 부상이 있었다. 사실 샘 보위는 대학 때 정강이뼈 부상으로 3학년 시절의 대부분을 놓쳤었는데 프로에서도 부상은 그와 친근했다. 그는 단 한번도 풀 시즌을 뛴 적이 없었고 특히 85시즌 이후 4시즌 동안 단 63경기만 뛰며 (86-87은 5경기 87-88은 시즌 아웃인데 이정도면 누군가가 생각난다.) 성장이 멈추게 된다. 결국 그는 평범한 활약을 하다 94-95을 마친 뒤 레이커스에서 은퇴하게 된다.
*현재 켄터키에서 말과 관련된 사업을 하며 살고있다.
Rony Seikaly 레바논 태생의 첫 번째 NBA선수.
1965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6-11의 세이컬리는 9살부터 17살까지 그리스에서 미국인 학교를 다니며 생활했다. 그는 유로리그클럽인 파나시나이코스에서 먼저 선수생활을 시작했지만 문제가 생겨 미국으로 넘어왔고 대학시절에 시라큐스에서 결번될 정도의 뛰어난 활약을 펼침은 물론 미국 국가대표로 1986 FIBA World Championship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이며 88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9번픽으로 마이애미로 향하게 된다.
그는 포스트에서의 움직임에 의해 "The Spin Doctor"라는 닉네임을 얻었으며 89-90시즌엔 16.6득점 10.4리바운드로 MIP로 선정되었고 5시즌 연속 15점 10리바운드을 기록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해내었다. 그는 99년 8월 뉴저지에서 방출된 후 2000년 은퇴한 뒤 스페인 FC Barcelona와 계약하기도 했다.
현재는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클럽 DJ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싱글을 발매하기도 하는데 이젠 그의 별명 'The Spin Doctor'가 새로운 커리어에서 더 어울리는 듯하다. (그는 14살 이후부터 디제잉과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레바논의 요청으로 국대에 선정되기도 했지만 86년 미국국대경력이 문제가 되어 FIBA의 승인을 받지 못했었다.
*세이컬리는 HIV가 신체접촉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직존슨에게 1대1을 도전하기도 했다.
Steve Kerr 레바논 태생의 미국농구선수.
스티브 커는 1965년 생으로 세이컬리와 같은 해에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레바논의 베이루트 태생이다.
그는 중동의 저명한 정치전문가인 Malcolm Kerr의 아들로 레바논에서 태어나 미국인 학교를 다녔었다. 그 후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Malcolm Kerr는 82년 베이루트 미국인대학의 총장이 되어 다시 레바논으로 향하게 된다.
88년 그는 2라운드 50위로 NBA에 입성해 15년 동안 45%의 3점 성공률을 기록하며 5번의 챔피언이 되었고 현재도 NBA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고 있다. 스티브 커는 98불스에 이어 99년 스퍼스에서 우승했는데 두팀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은 NBA역사상 2번째 일이었다. 첫 번째는 Frank Saul이다.
*스티브 커가 18살이던 84년 1월 18일 새벽 3시 비극적인 전화를 받는다. 바로 그의 아버지가 이슬람인에 의해 저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Joe Alexander 대만 태생의 최초의 NBA 농구선수.
뛰어난 점프능력을 지녔던 6-8의 조 알렉산더는 대만에서 86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2살 때 메릴랜드로 넘어왔다가 그의 아버지가 Nestle의 중국회사로 옮기면서 8살부터 2002년까지 중국에서 살았다. (중간에 6개월은 홍콩에서 살았다. 당연히 북경어에 능통하다.) 베이징에서 국제학교를 다니며 농구를 처음 배우고 2002년에 메릴랜드로 돌아와 2년동안 고등학교에서 플레이했다.
NBA엔 08년 8번픽으로 밀워키에 픽되었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채 2010년 2월 18일 시카고로 트레이드 되었고 시즌을 마친 후 뉴욕과 계약하지만 2010년 11월 13일 방출된다. 디리그에선 53경기 동안 19.1점 8.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Jeremy Lin 이민자의 아들에서 Linsanity까지.
6-3의 제레미 린은 중국 혹은 대만혈통을 지닌 미국인 중 최초로 NBA에서 플레이한 선수이다.
그는 70년대 중반 대만에서 이주한 부모에 의해 1988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는데, 5-6의 아버지Gie-Ming Lin은 퍼듀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한편으론 열렬한 NBA의 팬이었다. 그는 3명의 아들 모두를 어렸을 적부터 YMCA에서 농구를 배우게 했고 그 중 제레미 린은 두각을 나타내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32승 1패를 기록한 팀의 주장으로서 경기당 15.1점 7.1어시스트 6.2리바운드 5스틸을 기록하며 활약했지만 그는 디비전 1의 학교로부터 장학금 제의를 받지 못했고 인종적인 인식이 영향을 주었다고 린은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학교는 Stanford와 UCLA였지만 결국 그에게 관심을 보인 학교는 Harvard와 Brown뿐이었고 하버드의 Bill Holden코치는 린의 4.2의 학점이 그의 학교와 어울린다고 판단해 그를 찾아왔다. 홀든은 처음에 그를 보고 디비전 3의 레벨이라 판단했지만 경기를 계속 보면서 그의 능력을 깨닫고 린의 스탠포드가 알아채기 전에 최우선순위로 리쿠르트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비 리그엔 운동선수 장학금이 없었지만 린은 하바드를 택하게 되었고 2년차에 All-Ivy League Second Team에 선정되고 3년차, 4년차 때 All-Ivy League First Team에 연속으로 선정되었다. 특히 4년차 땐 16.4점, 4.4리바운드, 4.5어시스트, 2.4스틸, 1,1블록을 기록하며 John R. Wooden Award와 Bob Cousy Award의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때 UConn, Boston Collge, Georgetown과의 경기가 있었는데 린은 강팀들과의 대결에서 평균 23.3점 5.3리바운드 3.6어시스트 2스틸 63%야투성공률을 보이며 이름을 알렸고 코네티컷 명예의 전당의 Jim Calhoun은 린의 30점 9라운드의 활약을 홈에서 보며 그를 극찬했다.
그리고 린은 아이비리그 역사에서 1450점 450리바운드 400어시 200스틸한 첫 번째 선수가 되며 학교를 졸업한다.
1995년 Jerome Allen이후로 아이비리그선수는 NBA에서 드래프트 된 적이 없고 하바드 출신의 선수는 1954년의 Ed Smith가 마지막이었다. 제레미 린도 8팀이 워크아웃에 초대했지만 2010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했다. 그는 워크아웃이 5대5보단 1대1 2대2 3대3으로 진행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ESPN의 Chad Ford도 워크아웃 전엔 린을 대학 때문에 과소평가 당하는 선수라며 높게 평가하다가 워크아웃 후엔 신체적인 능력을 이유로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린은 캠프에서 활약하며 매버릭스, 레이커스와 동부 어느 팀 그리고 워리워스의 계약을 제시받고 워리워스를 선택하며 2010년 10월 29일 데뷔전을 치루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디리그에서 활동했으며(21 G, 18.5 PPG, 6.0 RPG, 4.7 APG) 결국 11년 12월에 9일에 방출, 그 후 로켓츠를 거쳐 12월 27일 뉴욕닉스와 계약에 성공한다. 그리고 2012년 2월 주전이 된 제레미 린은 동부 컨퍼런스 이주의 선수에 선정되는 최고의 활약으로 팀을 연승으로 이끌며 세계적인 명성과 함께 가장 뜨거운 운동선수로 주목을 받는다.
린은 어린시절부터 인종차별적인 이야기들을 들으며 커왔지만 그의 부모가 대만에서 온걸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정도 중국어를 알아듣지만 말할 때는 도움이 조금 필요한 수준이며 조금 읽거나 쓸 수 있다고 한다.
*대만은 이중국적이 가능해 린을 아시안 게임 24인 후보명단까지 올리기도 했는데 부상으로 성사되진 않았다.
*2012년 초반에 린은 맨하탄 근처에 있는 형의 원룸 아파트 소파에서 자거나 경기 전날엔 랜드리 필즈의 소파에서 잤는데 2월이 지난 후엔 럭셔리 콘도에 짐을 풀게 되었다.
3.혼혈선수
Raymond Townsend NBA에서 플레이한 최초의 필리핀계 미국인 선수.
그는 미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1955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74년 고등학교 때 경기당 27.2점으로 올 아메리칸 팀에 선정된 그는 전설적인 감독 존 우든의 UCLA시대의 마지막 제자로 입학하여 그의 10번째 NCAA우승을 함께했다.
6-3의 가드는 78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마지막인 22번으로 워리워스에 픽되었는데 이는 1라운드에 드래프트된 최초의 아시안계 미국인으로 기록되어있다.
78년부터 81년 12월 방출될 때까지 워리워스와 페이서스에서 뛰었으며 12월 이후엔 유럽으로 향했다. 85년 이탈리아에서 경기 당 25점을 넣으며 활약했지만 얼마 후 88년 은퇴한다.
*현재 그는 출신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해 일하며 필리핀계 사회에도 공헌하고 있다.
*그의 형제 Kurtis Townsend는 캔자스의 코치이고 08년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대학 때 야구도 했는데 4학년 때 Cincinnati Reds에 125번째 픽으로 선발되었었다.
Corey Yasuto Gaines 일본계 미국인 선수.
6-3의 가드는 아프리카계 아버지와 일본계 어머니로부터 65년 L.A에서 태어났다.
1988년 65번째로 3라운드에 시애틀 수퍼소닉스에 픽되었지만 바로 방출되었고 89년 2월 9일 어렵게 데뷔해 수많은 방출과 계약 속에 5시즌을 뛰었다. 2000년 초에 일본에서 뛰기도 했고 은퇴 이후 WNBA's Phoenix Mercury의 코치로 우승을 경험하는 등 제 2의 인생에서 성공을 맛보고 있다.
Rex Walters 일본계 미국인 선수2.
6-4의 가드는 뛰어난 슈터로 백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70년에 태어났다.
1993년 뉴저지에 16번 픽으로 뽑힌 뒤 2000년 히트에서 방출된 것을 끝으로 NBA경력을 마무리했다. 스페인에서 선수생활 마지막을 보냈으며 현재는 은퇴 뒤 샌프란시스코대학에 코치로 있다
Robert Swift 고등학교이후 NBA로 직행한 최초의 혼혈선수
시애틀의 7피트 시리즈 중에 한명인 스위프트는 오키나와의 혼혈 일본인의 아들이다.
04년에 12번 픽으로 수퍼소닉스에 입성했지만 부상을 달고 다녔고 06-07엔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결국 09년 12월 22일 오클라호마로부터 방출되었고 현재는 이전 시애틀 감독이었던 Bob Hill.밑에서 일본에서 뛰고 있다.
4년동안 그가 뛴 NBA경기는 총 71게임뿐이다.
NBA 입성에 실패한 선수들
1.드래프트 된 선수
Yasutaka Okayama 드래프트된 최초의 아시아 선수.
54년생인 오카야마는 NBA역사상 드래프트된 가장 큰 농구선수로 239cm였다고 알려져있다.
81년 워리워스가 8라운드 171번픽으로 선택했지만 계약하진 못했다.
고등학교 때 유도 검은 띠였고 늦은 나이인 18살 때 농구를 시작했다. 당시 일본팀의 기둥으로 아시아에선 꽤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90년에 은퇴해 현재 코치로 일하고 있다.
Song Tao 부상으로 NBA입성에 실패.
1987년 3라운드에서 애틀랜타에게 픽되었지만 심각한 무릎부상으로 뛰지 못했다. 6-10의 이 선수는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중국의 기수였으며 91년 국가대표 은퇴, 93년 선수로서 은퇴한 뒤 코치로 활동했었다.
Xue Yuyang 국가의 방해로 인해 입성 실패.
212cm의 포워드 겸 센터는 82년생이다. 03년 공식적인 허락없이 드래프트에 참가해 57번픽으로 댈러스에 픽된 뒤 덴버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중국의 거부로 미국에서 뛸 수 없었다. 01-02시즌 CBA 신인왕 출신으로 현재도 중국에서 뛰고 있다.
2.서머리그 및 기타 도전
Ri Myung Hun 미국과 북한관계에 의한 실패.
67년생인 리명훈은 235cm로 알려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농구선수였다.
90년대 NBA에 대한 꿈을 갖고 캐나다에서 몸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몇 팀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꿈이 좌절되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거부했고 미국도 적성국교역법에 의거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키가 큰 농구선수로서 내 능력을 테스트해보고 싶다. 나는 돈이나 정치엔 관심이 없고 스포츠맨으로서 도전해보고 싶다.”라며 뜻을 밝혔지만 결국 성사되진 못했다.
*가장 좋아하는 농구선수가 마이클 조던이라 Michael Ri라고 불리기도 했다
*김정일의 장례식이 열린 2011년 12월 28에 이명훈의 모습이 잡힌 걸로 추측된다.
Hu Weidong 부상으로 인해 NBA입성 실패.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중국조던 후 웨이동은 농구영재로 육성된 선수였다. 70년생인 그는 198cm의 키에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며 87년부터 02년까지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우리나라를 괴롭혔다. -02년 제외-
CBA에서 3번의 득점왕과 2번의 MVP, 1번의 올스타전 MVP를 차지한 전국적 스타였으며 99년엔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에서 MVP를 수상하기도하였다.
전성기였던 98년엔 매버릭스, 2000년엔 올랜도로부터 계약을 제의받았지만 모두 부상 때문에 결렬되었고 결국 첫 번째 중국인 NBA선수가 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은퇴 뒤 05년부터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후에 도니넬슨에게 댈러스 8번 유니폼을 선물받기도 하였다.
Ma Jian 미국 대학농구에서 플레이한 첫 번째 중국국적선수.
69년 생인 6-7인치의 포워드는 유타대학교의 주전으로 키스밴혼과 함께 플레이했었다.
그후 95년 서머리그에서 클리퍼스소속으로 플레이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필리핀과 중국등에서 활동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중국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었다.
88년 중국에서 UCLA 코치들의 클리닉이 열렸고 청소년 대표였던 마 지안은 그곳에서 코치들과 대화를 나눈 뒤 원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여권을 얻기 위한 4년 동안의 싸움은 CBA뿐 아니라 정치적인 것들과도 대립해야했기에 힘들었고 결국 그는 올림픽 때 얻은 여권을 이용해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후 마 지안은 고향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신 국대로 뛰지 못했으며 한참 후에야 그 제약이 풀리게 되었다.
*그는 현재 영화배우로도 활동 중이다.
Chen Hsin-An 대만의 코비.
80년생 196cm 가드 첸신안의 NBA도전은 당시 킹스의 스카우트였던 잭 메이가 대만인이기 때문에 수월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대만에서는 확실히 뛰어난 농구 선수였다. 길거리 농구를 하다 98년 고 1때부터 정식농구를 배운 그는 바로 청소년 대표가 되었고 아시아 농구협회에 의해 야오밍과 함께 아시아의 유망주로 선정된다. 그리고 99년엔 성인대표로까지 발탁된다.
그 후 02년 03년 NBA서머리그에 킹스 소속으로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03년 창설된 대만의 SBL리그에 참여 초대 파이널 MVP는 물론 04년 05년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07-08시즌엔 득점왕까지 차지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해낸다.
또다른 도전 정신이 생긴 그는 대만 농구협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CBA에 도전해 09년에서 11년까지 뛰었다.
Lee Seung-Jun
2005년에 레이커스 소속으로 서머리그를, 킹스 소속으로 프리시즌을 소화했다.
이상이 나름 조사한 결과인데 전부라고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서머리그와 프리시즌을 소화한 아시아계 선수는 더 많을 수도 있겠죠. 내용이 길게 느껴지는 분들을 위해 살짝 정리하며 마무리합니다. 재미있는 자료가 되었길 바랍니다.
NBA 입성에 성공한 선수들.
1.순수 아시아 국적의 선수
Wang ZhiZhi
Mengke Bateer
Yao Ming
Yuta Tabuse
Ha Seung-Jin
Yi Jianlian
Sun Yue
Hamed Haddadi
2.이중 국적 및 이민자의 아들
Wat Misaka
Tom Meschery
Sam Bowie
Rony Seikaly
Steve Kerr
Joe Alexander
Jeremy Lin
3.혼혈선수
Raymond Townsend
Corey Yasuto Gaines
Rex Walters
Robert Swift
NBA 입성에 실패한 선수들.
1.드래프트 된 선수
Yasutaka Okayama
Song Tao
Xue Yuyang
2.서머리그 및 기타 도전
Ri Myung Hun
Hu Weidong
Ma Jian
Chen Hsin-An
Lee Seung-Jun
순수 아시아인 드랩프트순서
1981년 171번픽 워리워스 Yasutaka Okayama
1987년 3라운드 호크스 Song Tao
1999년 36번픽 매버릭스 Wang ZhiZhi
2002년 1번픽. 로켓츠 Yao Ming
2003년 57번픽 매버릭스 Xue Yuyang
2004년 46번픽 블레이저스 Ha Seung-Jin
2007년 40번픽 레이커스 Sun Yue
2007년 6번픽 벅스 Yi Jianlian
첫댓글 본문 내용중 왕즈즈의 훕서밋에 대한 내용에 약간 오류가 있네요. 왕즈즈보다 1년 먼저인 95년도에 우리 현주엽 선수가, 훕서밋에 월드올스타로 출전한 적 이 있습니다. 96년에는 왕즈즈와 함께 조우현 선수가 월드올스타로 참가했구요. 아, 그리고 잠시지만 프리시즌을 소화했던 선수중 중국 국가대표 리우 웨이 도 있습니다.
수정했습니다. 현주엽이 참가한건 알았는데 첫 개최경기에 초대받았었군요. '리우 웨이' 정보도 고맙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린이 불과 몇개월만에 소파에서 벗어났군요
그러게요. 그래도 편한 소파였을거에요...ㅎ 고맙습니다
정말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이승준ㅠ
다행입니다.ㅎ 고마워요
찜해놨습니다^^ 좋은글 거듭감사드립니다
제가 알기로 예~~~~~~전에 일본 선수가 NBA 에서 뛰었던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아닌가요?
아 본문에 언급이 되어 있네여...
오랜만에 훕서밋 리캡들 살펴보는데 99년도에 유타 타부세도 출전했었네요...
덕분에 저도 찾아봤습니다. 무득점이 아쉽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ㅎ
재미있는 글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걸 다 정리하시다니...ㄷㄷㄷ
매우 천천히 조금씩 정리한거라 저도 긴가민가한 기분입니다.ㅎㅎ
흥미롭네요 잘 봤습니다ㅎㅎ 야오밍 10살때 165....난 17살때 167이었는데...
고맙습니다. 키..뭐 별거 있나요..저도 17살때 167정도 였어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마지앙 사진이 잘못 걸린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확인해보니 님 말이 맞는거 같아요. 왜케 비슷하게 보였는지 ㅋㅋ..맞나 ㅋㅋ
글 잘봤습니다. 추천 드립니다.~
추천 고맙습니다^^
재미있고 유용한글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던님 고맙습니다.
이야.... 너무 좋네요. 이런글, 잘 봤습니다. 흥미진진.
지루할 수도 있는데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당!
와.. 이건 정말 재밌고도 유용한 정보네요.. 잘읽었습니다.. 허재 선수와 이충희 선수는 협상 결렬되어서 뺀건가요? ㅎㅎ
고맙습니다. 다른선수들은 깜빡했거나 조사범위내에서 놓쳤나봐요ㅎ 이승준도 뒤늦게 생각나서 추가했습니다.ㅎ
글잘봤네요 이승준 비주얼은 쩌는듯..
고맙습니다ㅎㅎ 원주동부팬으로서 올시즌 더 잘생겨보입니다.
대단하시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고맙습니다.^^
좋은 정리 감사합니다.. 추천!!
나중에 누군가가 정리할때 도움되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추...
감사..ㅎ
정말 잘 봤습니다. 정리 하느라 고생 하셨겠네요.^^
고맙습니다. 천천히해서 재미있게 했습니다ㅎ
와 이건 정말 대박이라고밖에 ㄷㄷ
추천!!!
고맙습니다. 칭찬받으니까 보람이 있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