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한 남자와 두 여자

[청해]

<조선시대 대하소설>

삼각관계 (한 남자와 두 여자)

송나라 원풍 5년 항주 반월촌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성은 진 씨이고 이름은 승이었다. 진승은 세대로 명문가의 사람으로 약관의 나이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시랑에 있었다. 집안에서는 효성스럽고 나라에는 효성스러우며 정사를 볼 때는 강직하니, 천자께서는 국사의 일을 늘 공(진승)과 의논하였다. 이처럼 천자의 사랑이 크고 청렴한 성품이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아, 세상의 복을 다 가진 듯 보였으나 공은 늘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음을 한하였다.

하루는 부인 유 씨와 함께 자식 없음을 서글퍼하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이미 사십에 이르렀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가 죽은 후에 후사를 누구에게 전하며 지하에 계신 조상님을 어찌 뵈어야 할지 모르겠소.”

부인이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불효 중에서 대를 끊는 불효가 가장 크다고 하였습니다. 미천한 첩이 귀한 가문에 시집온 지가 벌써 십 년이 지났사온데, 아직 자식이 없사오니 어떻게 얼굴을 들고 상공을 뵙겠습니까? 바라옵건대, 공께서는 다른 가문의 어진 여인을 얻으시어 후손을 보옵소서. 그렇게 하여 첩의 칠거지악을 면하기 바라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은 얼굴빛을 바로 하고 부인을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식이 없는 것도 다 나의 팔자소관이오. 어찌 부인을 탓하겠소? 앞으로는 그런 말씀은 마시오.” 하였다.

이때는 청명을 전후한 춘삼월이었다. 부인은 시비를 데리고 구월산에 있는 백천사를 향했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갑자기 몸이 피곤하여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부인은 맑은 연못가의 바위 위에 몸을 기대고 앉아 햇볕을 쬐었다. 경관을 둘러보니 매화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고 눈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붉은 꽃잎이 꽃망울을 보이고 있었다. 계절은 이미 청명절을 지나있어 버들은 가련한 가지를 흔들고 꽃은 어지러운 향기를 피우고 나무에는 찬 기운이 사라졌다. 옛 제비가 벌써 돌아오니 꽃은 사람을 맞아 웃고 풀나비는 나부끼며 길을 인도하는 듯 어지러이 나는데 백천사의 풍경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따뜻한 햇살 아래 연못의 물결 무늬가 잔잔히 움직이는데, 갑자기 물길을 열고 한 여인이 부인에게로 나아왔다. 여인은 무명으로 만든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손에는 붉은 주머니와 푸른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여인은 부인 앞으로 와 재배를 하고 말하였다.

“소첩은 동해용왕의 시녀이옵니다. 용왕께는 여덟 분의 왕자와 네 분의 공주께서 계시온데, 그중 여섯 째 왕자님과 빈 마마께서 아끼시는 화초를 잘못 돌본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내치라는 벌을 받으셨사옵니다. 이에 태후마마께서 안타까이 여기시어 저를 시켜 어진 인간을 택해 두 분을 의탁하라 하셨사옵니다. 이 푸른 주머니에 계신 분이 왕자마마이옵고, 붉은 주머니에 계신 분이 빈 마마이시옵니다. 오늘 제가 빈 마마를 부인께 의탁하기 위해 왔으니 부인께서는 기쁘게 받으옵소서.”

하고는 붉은 주머니를 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붉은 주머니를 받아 소중히 가슴에 품었다.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깜짝 놀라 여인을 잡으려는데 갑자기 시비가 부인의 몸을 흔들었다. 부인이 눈을 뜨고 잠시 생각하니, 이것은 분명 자식을 얻을 꿈이었다. 부인은 백천사에 올라 기도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좌승상 강회의 부인 이 씨도 백천사에서 제를 올리고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부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산길을 내려오는데 따르는 시비들이 봄 경치에 반하여 한없이 길이 늦어지고 있었다. 부인은 그들을 탓하지 않고 홀로 숲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이때, 소나무 숲 사이에 여자 도인이 베로 만든 깃발을 메고 흰옷을 단정히 입고 육환장을 끌며 내려와 부인을 보고 합장을 했다. 도인은 눈썹이 은실을 드리운 듯 시원시원하여 아름다웠고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갈 듯 신비로웠다. 이 씨는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소승은 백천사에 잠시 기거하는 해운(海雲)이라 하옵니다. 어젯밤 우연히 장안을 굽어보다가 푸르고 붉은 빛이 백천못에서부터 나아와 장안의 대갓집을 비추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필시 두 가문에 상서로운 일이 있을 조짐이었사옵니다. 소승이 천문을 살펴보니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가 좌승상 댁을 빌려 태어날 것이 분명하였사옵니다. 혹시 현몽을 받으신 것은 없으신지요?”

이 씨는 놀라고도 반가운 기색으로 해운이라는 도인을 바라보았다. 이 씨 부인도 잠시 전 경내에서 푸른 주머니를 받는 꿈을 꾼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것이 귀한 자식을 얻을 꿈이었단 말입니까?”

해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태어나시는 분은 분명 귀한 분이 될 것이옵니다. 다만, 혼인을 잘 이루지 못하면 그 뜻을 펼치기 힘들 것이오니 잘 헤아려 그 짝을 만나게 해주옵소서.”

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산길을 올라갔다.

한편, 유 씨 부인은 그 달로부터 태기가 있어 열 달이 지난 뒤 해산을 하였다. 이날, 별당을 오색구름이 감쌌고 향기로운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여 집안 사람들이 모두 상서롭다 하였는데 태어난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아이가 탄생하자, 한 여인이 옥항아리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서는데, 부인이 보니 꿈에 보았던 그 여인이었다. 여인은 항아리의 향기로운 물을 부어 아기의 몸을 씻고는 다시 절하며 밖으로 나갔다.

“부인께서는 이 아기씨를 잘 기르시어 복을 받으시옵소서. 훗날 뵈올 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여인이 나간 뒤 진공이 들어와 아이를 보니, 갓 낳은 아이의 얼굴답지 않게 복숭아 빛이 가득하였고, 눈이 초롱초롱 맑아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았다. 유 씨 부인이 아들이 아님을 송구스러워하자 진공은 아이를 안아들며 말하였다.

“옛날 도연명이 말하기를, 딸아이가 아들은 아니라도 마음을 달래기엔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소. 더구나 이 아이는 하늘이 특별히 내린 보물이 아니오. 내 이 아이를 사내아이 못지 않게 귀하게 여길 것이니 부인은 그런 말씀은 마시오.”

하고는 종이를 내어 주향(珠香)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 부인에게 내보였다.
“주향이라, 어떻소? 갓 태어난 아이가 이렇듯 향기를 품고 있으니 이야말로 향기로운 보물이 아니겠소?”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이때를 전후하여 좌승상 강회의 부인 이 씨 옥동자를 낳았다. 승상 강 공은 맑은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을 보고 기뻐하여 이름을 창성(昌成), 자를 지소(志昭)라 하였다. 창성은 두 살에 글자를 이해했고, 세 살이 되자 경서를 소리 내어 외울 수 있었다. 창성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강 공은 벼슬에서 물러나 친히 창성을 가르쳤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에 통하고 열 가지를 배우면 백 가지를 깨달았다. 창성은 아침마다 아버님께 나아가 학문을 익혔는데, 한 번 가르치면 새겨들어 곧 외우므로 가르치는 데 힘들 것이 없었다.

창성은 나이 열여섯에 소년 등과하여 그 이름을 떨쳤는데 풍채와 용모가 더욱 볼만하니 윤택한 옥 같은 얼굴은 붉은 해가 부상에 오르매 만국에 광명을 비추는 듯 하고 청명한 이마는 채색이 영롱하여 강산의 빛난 것을 머금었고 풍류 있고 멋스러운 기품과 도량은 외로운 구름과 들의 학과 같았다. 신기한 기상은 기산의 허유와 푸른 바다의 신기한 용과 같아 그 품격이 부친의 풍모 외에는 대적할 이가 없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사랑함과 부귀영화 속에 살았으나 엄격한 위의는 날로 숙연해졌으니 재치 있고 유창한 말씀은 비록 근심을 품은 자라도 생을 보면 웃음을 지었으니 하물며 그 부모의 마음이 어이 평범하겠는가? 그러나 아버지인 강 공은 늘 기뻐하면서도 엄히 가르치며 사랑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으니 공자는 엄한 가르침 속에서 학행과 문장이 더욱 훌륭해졌다.

어느 날, 강 공의 집에 한 여도사가 찾아왔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자 여도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구월산에서 도를 닦는 사람으로 법명은 해운이라 합니다. 아드님에 관한 일로 아뢸 말씀이 있어 찾아온 길입니다.”

여도사가 말을 마치자 문지기는 잠시 머무르게 한 뒤 내당에 이 일을 고하였다. 이 씨 부인은 혼사에 관계되었다는 말에 집히는 바가 있어 여도사의 외모가 어떠한지 물어보았다. 문지기는 여도사의 나이가 사십여 세는 되어 보이고 법명은 해운이며 기골이 맑고 강개하여 속세의 먼지가 머물지 않는 듯 하다고 하였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오라 하고는 사랑으로 사람을 보내 강 공을 오시게 하였다. 내당으로 들어오는 여도사를 보니, 십 칠년 전에 산에서 보았던 그 도사임에 틀림없었다. 부인은 세월이 비껴간 듯 맑은 기운을 뿜는 해운도사의 눈빛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강 공은 부인에게 창성의 태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 고로 해운의 말을 경청하였다. 해운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비록 산 속에 있는 사람이지만 이 댁 공자님의 명성이 자자하여 그 부모님의 노고를 익히 잘 알고 있었사옵니다.”

“과찬이십니다. 이 모두가 도사께서 맺어주신 인연이 아닙니까?”

이 씨 부인은 감사의 마음을 다하여 대답을 했다.

“제가 맺어준 것이 아니라 두 분의 덕이 이룬 복이시지요. 허나 아직 제 할 일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이렇게 두 분을 찾아뵈었습니다.”

“혹시 혼인에 대한 말씀이신지요?”

“그렇사옵니다. 혹여 혼처를 정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여러 매파가 다녀왔으나, 꿈속의 연분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 아직 못 정하였습니다.”

“아드님의 짝이 되실 분은 붉은 주머니에 갇혀 세상에 나오신 분이지요. 다행히 그 분도 아직 혼처를 정하지 않았사오니, 청혼을 하셔도 무방할 것이옵니다.”

“어떻게 그 처자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은 지금 조정에서 병부좌랑에 계시는 진 공의 무남독녀시옵니다.”

“진 공의 무남독녀라면...”

해운의 말에 강 공 부부의 얼굴이 일시에 환해졌다. 병부좌랑 진승의 무남독녀라면 고금에 없는 요조숙녀로 이름이 자자한 처자였기 때문이었다. 해운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혼인을 청하면 진 소저의 집에서는 아드님의 태몽에 대하여 물어볼 것이옵니다. 그러면 꿈에 본 것을 그대로 대답하소서.”

해운이 돌아가자 강 공의 집에서는 매파를 보내 혼인을 청하였고 해운이 말한 대로 푸른 주머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쉽게 혼인이 결정이 되었다.

한편, 항주 학촌에는 고명한 학사가 살고 있었는데, 성은 박 씨이고 이름은 규정(圭整)이라 하였다. 박 학사의 집안은 대대로 소문난 부자였는데, 박 학사 대에 이르러 벼슬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집안이었다. 박 학사는 십여 년 전 병을 칭하고 조정에서 나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는데, 조정의 젊은 관원들 중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

박 학사에게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손녀가 하나 있었는데, 올해 나이 십 사세였고 이름은 자선(紫璿)이었다. 자선은 어려서부터 화용월태의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나이가 들수록 옥 같은 얼굴이 화사해지고 겸하여 가야금을 잘 타니 박 학사의 끝없는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박 소저는 여자로서의 숙덕을 배우지 못하여 성정이 활발한 것이 거의 사내에 비견할 정도였다.

하루는 박 학사의 집에서 젊은 관원들이 모여 시를 짓고 있었다. 박 소저는 할아버지를 뵙기 위해 외당에 들었다가 박 학사께서 누각에 나아가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

“학사께서 젊은 관원들을 데리고 글을 쓰게 하시나이다.“

이 말을 들은 박 소저는 별채로 돌아가려다가 유모를 시켜 시를 짓고 있는 선비 중에 소년 등과한 강창성이라는 관원도 있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유모는 얼른 시비를 시켜 후원을 훔쳐보게 하고 강 공자가 시를 짓고 있음을 아뢰었다. 박 소저는 문득 강 공자를 한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소저가 비록 규방의 처녀였으나 나라에 칭송이 자자한 강 공자의 이름은 익히 들어보았기 때문이었다. 박 소저는 유모와 의논하여 남장을 하고 유유히 후원으로 나아갔다.

후원에는 많은 선비들이 각자의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박 학사는 조심조심 누각으로 올라오는 젊은 선비를 보고 적이 놀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선비였는데, 언뜻 보니 아름다운 사람이 머리에 푸른 비단 두건을 쓰고 구름 같은 머리 위에는 맑은 풍채가 은은히 빛났다. 흰 비단으로 만든 옷에 붉은 띠를 허리에 두른 모습이 시원시원한 자태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았고 귀한 모습과 온화한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았다.

달빛처럼 맑은 눈빛은 새벽 별보다 빛났으며 부드럽고 온화한 양 볼에 복숭아 같은 입술이 절묘하고 깨끗하여 그 아름다움에 비교할 사람은 강 공자 뿐인 듯 하였다. 우연히 새로 온 선비를 본 다른 관원들은 눈을 떼지 못하였다. 하지만 창원은 주위의 동요와 관계없이 오로지 글쓰기에만 주력할 뿐이었다.

새로온 선비에게 다가가던 박 학사는 놀라고 말았다. 누각을 올라오는 선비는 바로 자신의 손녀인 박 소저였던 것이다. 비록 남장을 하고 있다고 하나 그 이목구비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는 박학 사였다. 박학 사는 엄한 눈빛으로 박 소저를 내려다보았으나, 박 소저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개의치 않고 선비들의 시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박 소저는 특히 강 공자의 시에 눈길이 멎었는데, 어린 나이인데 높은 관직을 제수 받았다는 명성에 걸맞게, 붓을 놀리는 모습이 용과 같고 그 웅대한 뜻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관 아래로 비치는 귀밑이 희고 윤택하여 마치 꽃이 반쯤 핀 것 같았다. 박 소저는 순간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조부인 박 학사가 박 소저를 꾸짖기 위해 박 소저의 곁으로 다가왔다. 박 소저는 몸을 굽혀 예를 표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지만 후원 뒤에 숨어 강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박 소저가 공자의 나가는 거동을 보니 풍채가 좋고 신장이 훤칠한 데다 용모가 수려하여 마치 가는 버드나무 같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목련 같았다. 고운 손에 홀을 잡고 흰 얼굴에 고개를 숙였으니 봉황의 날개에 붉은 도포를 입힌 것 같았다. 박 소저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자 황홀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박 소저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유모에게 말했다.

“할아버님께서 나의 혼처를 알아보신다 하셨는데, 매파가 알아온 곳에 강 공자의 집안도 있느냐?”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유모는 안타깝다는 말투로 아뢰었다. 박 소저는 놀란 눈으로 다시 유모에게 물었다.

“하면, 공자께서 이미 혼인을 하셨다는 말이냐?”

“그렇지는 않사오나, 공자께서는 이미 정혼하신 분이 계시다 들었사옵니다.”

“정혼을 했다니……. 뉘 집의 처자가 나에 비할 수 있다는 말이냐?”

박 소저는 얼음이 깨진 듯 날카로운 말투로 언성을 높였다. 박 소저의 불같은 성정을 아는 유모는 몸을 더욱 얼른 대답을 하였다.

“지난 달, 병부좌랑 진승 대감 댁 진 소저와 정혼하셨다 하옵니다. 곧 혼인을 치를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진 소저라면 박 소저도 익히 들은 이름이었다. 할아버지인 박 학사도 진 소저의 아름다움과 부덕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박 소저는 진 소저가 자신 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비록 조실부모하였으나, 이 나라 최고가는 가문의 사람이며, 학자로서 이름을 떨치신 할아버님의 사랑하는 손녀이다. 할아버님께서는 늘 훌륭한 선비에게 나를 보내겠다 하셨으니 강 공자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오늘 강 공자를 보니 이는 곧 내가 평생 원하던 사람이다. 내 반드시 할아버님께 말씀을 드려 나의 소원을 이룰 것이다.”
하였다.

박 소저는 그날 밤으로 할아버지인 박 학사께 자신의 의중을 말하였다. 박 학사는 지나치게 당돌한 박 소저를 꾸짖으려 했으나, 소원을 말하는 가련한 눈빛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 두 사람의 혼사는 이미 정해진 일이거니와 혼인날이 임박하여 진 소저에게 큰 잘못이 없는 한 번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그만 마음을 접고 조신하게 부덕을 익혀 좋은 인연을 기다리라."

하지만 박 소저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물러 나왔다. 며칠 후, 창성과 진 소저는 혼인식을 열었다. 진 소저의 집에는 오후가 되면서 외당 가득 손님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신랑은 혼인 예복을 입고 예식을 미리 익히고 있었는데, 관옥과도 같은 얼굴은 아름답고 풍채와 태도에는 해와 달 같은 기상이 흘러 이보다 더 훌륭한 신랑은 본 일이 없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가운데 공이 매우 기뻐하며 예식을 재촉하니, 한림원의 선비들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신랑과 신부를 이끌고 진 씨 댁으로 안내했다. 일행이 도착하자 큰 연회가 시작되었는데 신랑을 맞이하는 예식의 화려함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신랑은 전안의 예를 하고 신부가 가마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진 공은 창성의 빼어난 기질과 우아한 골격이 예복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하자 일찍이 그러한 비범함을 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늘 엄숙했던 공의 얼굴에는 기쁨의 웃음이 가득했다.

신부가 가마에 오르자, 창성은 가마의 문을 닫은 뒤 신부의 행렬을 지휘하여 집에 도착하였다. 신부가 아리따운 발걸음으로 강 공 부처에게 나아가 폐백을 올렸다. 강 공자의 어머니 이 씨는 슬픔과 기쁨을 번갈아 느끼며 신부를 보았다. 신부의 빼어남은 한림의 학사들보다 더한 듯 밝게 빛났다.

신부의 양 볼은 하늘에 높이 뜬 반달 같고, 자태는 무릉도원의 복사꽃이 이슬을 떨어뜨리는 듯 청초했다. 얼굴의 영롱한 빛이 사방에 빛나고 나이가 어린 까닭에 가냘픈 자태의 몸놀림은 조심스러웠다. 타고난 덕과 도량이 옛 여인네의 틀을 갖추고 있어 공이 크게 기뻐하며 웃음을 머금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중당에서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폐백을 받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신부의 아리따운 자태는 이슬을 머금고 아침 햇살에 떨어진 삼색 복사꽃 같았고 여유로운 기질은 초록색 잎에 싸인 흰 배꽃과도 같았다. 신부의 남풍에 실려 오는 연꽃 향기를 머금은 듯한 얼굴과 아름다운 자태는 견주어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자리를 가득 메운 여인들은 그 빛을 잃는 듯 했다. 이날 혼인식을 구경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하강한 사람처럼 아름다웠던 신랑과 신부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를 했다.

이러한 소문은 학촌의 박 소저에게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박 소저는 강 공자가 이미 혼인을 했음에도 공자와 혼인하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박 소저는 생각 끝에 유모를 불러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였다.

박 소저의 유모는 칠선이라 하였는데, 원래 박 소저 외가의 시비였다가 주인이 죽자 박 소저를 모시고 박 학사 댁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원래 간악하고 다른 사람이 못되는 것을 즐기는 위인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박 소저 만큼은 자식 같이 아끼고 있었다.

칠선은 저의 주인을 공주보다도 고귀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보다 못한 진 소저가 세상에 이름을 떨친 강 공자와 혼인을 맺게 되자 마음속으로 분하게 여기고 있는 참이었다. 칠선은 박 소저의 뜻을 듣고 기뻐하며 한 계교를 생각하여 말하였다.

“마침 강 공자의 집에 저의 육촌뻘 되는 춘화라는 아이가 시비로 있습니다. 얼마 전 그 아이가 강 씨 댁의 새 며느리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 아이를 끌어들이면 반드시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칠선의 이야기를 들은 박 소저의 얼굴이 환해졌다. 칠선은 웃음을 띠며 박 소저에게 다가가 계략을 말하고는 보화를 가득 넣은 비단 주머니를 받고 물러났다. 그날 밤은 마침 달도 없는 밤이었다. 유모는 비단 주머니를 품에 넣고 어둠 속으로 재빨리 사라져갔다.
 
어느 날, 퇴청하던 창성은 별채 쪽 담 위에서 어떤 자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창성과 비복들이 놀라 뒤를 쫓아갔으나 사내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창성은 비복들을 물리치고 은밀히 별채로 갔다. 그러나 별채는 여느 때처럼 조용하였고 문 밖에서 보니 진 소저는 서안을 대하고 있었다. 창성은 진 소저가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주위를 살펴보다가 중문을 지났다.

이때, 중문을 지나던 시비와 부딪쳐 시비의 손에 들었던 바구니가 땅에 떨어졌다. 시비는 창성을 보고 놀라 머리를 조아리고는 얼른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바구니에는 비단 천과 바느질 도구가 어지러이 담겨 있었다.

“너는 별채에 있는 춘화가 아니냐? 바구니에 있는 것은 무엇인고?”

창성은 의아한 듯 시비에게 물었다. 혼인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창성은 진 소저의 가지런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진 소저는 작은 비단 조각이나 실 꾸러미 같은 것들도 단정하게 보관해두곤 했었던 것이다.

“새아씨께서 남은 비단이 있거든 가지고 오라 하셔서 가져가는 길입니다.”

“남은 비단이라……. 옷을 짓지도 못할 것을 무엇에 쓰실고?”

“새아씨께서 비단은 귀한 옷감이라 작은 귀퉁이라도 잘 모으면 귀한 분께서 쓸 주머니라도 만들 수 있는 법이라 하셨사옵니다.”

춘화의 말에 창성은 미소를 지었다. 단정하고 조용하기만 한 진 소저가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 창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나섰다. 창성이 지나가자 춘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구니를 들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한편 강 공과 이 씨 부인은 종복들을 통해 장안에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문인즉 강 공의 새 며느리인 진 소저가 도성의 파락호들과 연분을 맺은 사이이며 아직도 은밀히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강 공과 이 씨 소문을 전한 종복을 꾸짖고 다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진 소저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음에도 성품이 정숙하여 떠들썩하거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명문가의 여식답게 여자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어 남편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정성을 다했다. 또한 진 씨의 천품이 영리할 뿐 아니라 매사를 다스림에 있어 이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까지 잘 알아 처리할 줄 알았다. 노복을 다스릴 때에는 위엄과 덕을 함께 행했고 시부모를 공경함에 온 마음을 다해 받드니 집안 사람들 모두가 다 화목하였다. 강 공 부처는 아름다운 며느리와 행복한 집안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지나는 말이라 일축해버렸다.

박 소저와 유모 칠선은 소문이 퍼졌음에도 강 공의 집에서 아무 소식이 없자 춘화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 소저에 대한 강 공과 창성의 믿음이 굳어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칠선은 춘화로 하여금 진 소저의 필체를 알 수 있는 글을 훔쳐오라고 한 뒤 계책을 일러주었다.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강 씨 댁은 화평하기만 하였다. 창성과 진 소저의 금슬은 아름다웠으며 두 부부가 시부모에게 효순을 보이는 것 또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루는 창성이 별당 후원에 있는 아름다운 누각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곳은 부인인 진 소저가 자주 소풍 나오는 것이라 일부러 온 것이었다. 시어머니 이 씨의 침소에 다녀오던 진 소저는 시비 춘화와 함께 누각에 오르다가 창성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랍고 어려워 부끄러워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진 소저가 내려가려고 하자, 창성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내 경치를 즐기려고 했는데 마침 부인이 왔으니, 잠깐 앉아 쉬었다 가는 것이 옳거늘 어찌 들어가십니까?”

진 소저는 창성이 낮에 말을 거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더욱 부끄러움을 느껴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듯하여, 창성이 그 모습을 보고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부부가 공경해야 한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것은 아니오. 이리 올라와 앉으시지 않겠소?”

창성의 말에 진 소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춘화도 영문을 몰라 하며 진 소저의 뒤를 쫓았다. 창성은 그 유순하고 순종적인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눈길로 진 소저를 배웅하던 창성은 누각 계단에 뭔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창성은 계단에 떨어진 것이 종이임을 알고 얼른 펼쳐보았다. 진 소저의 필체로 씌어진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 밤, 사창을 열고 온밤을 새웠습니다. 옥난간에 기대어 달빛을 보았으나 기다리는 그대는 저를 찾지 않으시더이다. 저의 비단 주머니는 아직도 매화나무에 걸려있는데, 그대는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인지요? 이렇듯 아무 방도가 없었다면 차라리 출가하는 편이 시집가는 것보다 나았을 것을. 규방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자유스럽게 나중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대여, 아직도 저를 사랑하신다면 저를 찾아오세요."

창성은 편지를 보고 놀랐으나 아무리 보아도 진 소저의 글씨체였다. 창성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바로 어머니 이 씨를 찾아갔다. 마침 내당에는 아버지인 강 공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상기된 얼굴을 한 창성이 내민 편지를 펼쳐보았다. 글씨는 진 소저의 것이 분명했으나, 그 내용은 진 소저의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강 공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창성을 꾸짖었다.
 
“네 안사람의 정숙함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너희와 같은 명문가의 자제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기가 쉬워, 남들이 뭐라고 해도 스스로 아껴야 하거늘, 네 이리도 경망하단 말이냐?”

이 씨 역시 태몽에 정해진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창성을 달래었다. 창성은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 나왔다. 부모님의 말씀대로 진 소저의 행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속의 의혹을 지우기는 힘들었다. 창성은 그 길로 별채로 향했다. 진 소저가 기거하는 별채에는 편지에 씌어진 대로 매화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창성은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다가 담에 가지를 걸친 나무 한 그루에 교묘히 매어진 비단주머니를 발견하였다.

그 비단은 얼마 전 춘화가 들고 왔던 그 비단임에 틀림없었다. 창성은 편지를 비단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분노를 억누르기는 힘들었으나, 확실한 증거도 없이 진 소저를 다그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창성이 조용히 별채를 나간 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춘화가 매화나무로 다가왔다. 춘화는 주위를 살펴보며 조심스레 비단 주머니를 끄른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날부터 창성은 매일 밤 비복을 시켜 별채를 감시하게 하였다. 춘화는 그 소식을 칠선과 박 소저에게 알렸다. 박 소저와 칠선은 크게 기뻐하며 다음 계책을 실행하였다.

며칠 뒤, 칠선은 춘화와 함께 진 소저가 기거하는 별채의 화원에 숨어 있었다. 칠선의 손에는 개용단(改容丹) 몇 알이 놓여 있었다. 개용단이라는 약은 먹으면 자기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 되는 약이었다. 다시 본 얼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회면단(回面丹)이 필요했는데, 이것을 파는 자들은 두 가지 약을 함께 팔았다.

칠선은 박 소저의 보물로 개용단과 회면단, 그리고 미혼단을 구했는데, 미혼단이라 하는 약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약이었다. 이 약들은 그 값이 천금이나 할 정도로 비싸고 귀했으나 박 소저는 돈이 아까운 줄을 모르고 칠선에게 내어주어 일을 꾸미도록 하였던 것이다.

칠선은 고개를 내밀어 창성의 명을 받은 비복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비복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별채를 감시하고 있었으나, 춘화는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칠선과 춘화는 원래 의논한대로 개용단을 먹었다. 개용단을 먹자 칠선은 장안에 이름난 파락호의 모습이 되고, 춘화는 아리따운 진 소저의 모습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일부러 달빛이 잘 비추는 매화나무 가지 아래로 나아가 혹은 서로 손을 잡고 혹은 귀엣말을 하며 한동안 서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비복은 바람처럼 창성에게 가 그 사실을 고했다. 창성은 횃불을 들고 재빨리 별채로 나아갔다. 그러나 창성이 도착했을 때는 담을 뛰어넘고 있는 한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을 뿐, 진 소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창성은 비복들과 함께 담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낯선 사내는 잡을 수 없었다. 창성이 비복을 다그쳤으나, 비복은 분명 진 소저와 외간 남자가 만났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창성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요란하게 별당으로 뛰어가 방문을 열어 젖혔다.

갑자기 들어온 창성을 보고도 진 소저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창성은 소저를 바라보았다. 소저는 수수한 푸른 치마에 초록 비단 저고리를 단정히 차려입었는데, 버들 같은 눈썹 밑에 달 같은 얼굴은 맑게 빛났고 검푸른 머리카락은 구름처럼 쪽을 지어 백옥 비녀를 단정히 꽂았다. 옥으로 깎은 듯 희고 투명한 피부와 가늘고 아름다운 자태는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는 정숙한 여인의 것이었다.

“오셨습니까?”

진 소저가 공손한 말투로 창성에게 물었다. 창성은 흐트러짐 하나 없는 진 소저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부인의 행실이 이 정도인지는 몰랐소.”

창성의 퉁명스러운 말에 진 소저는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인지는 내일 아침 알게 되리다.”

창성은 화를 참으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창성이 강 공과 어머니 이 씨께 나아가니 이미 진 소저가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와 있었다. 창성이 부모님께 먼저 문안을 여쭌 후 머리에 쓴 관과 허리 두른 띠를 벗고 꿇어앉아 죄를 청했다. 이에 부모가 놀라서 말했다.

“무슨 연고냐?”

“소자는 전 번에 아내의 행실에 대한 소문이 못내 의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명을 받아 그 실상을 캐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짐작되는 바가 있어 비복으로 하여금 별당에 외간 남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라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제 밤에 진 씨는 저를 속이고 다시 외간남자와 정을 통했습니다. 복의 말을 듣고 제가 도착했을 때는 외간남자가 담을 넘고 있어 잡을 수는 없었사오나 저의 의심을 풀기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양 위께서는 진 씨의 죄를 다스리시고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저의 죄도 또한 다스리소서.“

곁에 있던 진 소저는 이 말을 듣고는 영문을 몰라 하였으나 곧 자신의 행실에 대한 엉터리 말임을 알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이 씨가 말했다.

“너는 허무맹랑한 말을 그만 두라. 정말 너의 아내였느냐?”

“제가 무슨 일로 진 씨를 모함하리까? 비복이 정황을 낱낱이 보았나이다.

강 공은 곧바로 비복을 불러 물었다. 비복은 진 소저와 외간남자의 행동을 말하였으나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씨 한참을 생각한 후 말했다.

“새아기는 들으라. 너는 무엇이 부족하여 이런 패악한 행실을 하였느냐?”

진 소저는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말했다.

“첩이 이런 망극한 변을 만나오니 하늘의 미움을 받은 것인가 하옵니다. 비록 그 이야기가 황당하여 변명을 할 이유가 없사오나, 서방님과 시부모님께 더러운 이름을 얻음이 두렵사옵니다. 청컨대 저를 죽이시고 진상을 명확히 하소서.”

강 공은 진 소저의 모습을 보자 그 진실함을 믿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강 공은 창성에게 말하였다.

“너는 새아기가 더러운 짓을 하였다고 하나, 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니 확실치도 않은 일로 며느리를 내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사돈 진 공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니, 너희는 돌아가 다시 생각함이 마땅하도다.”

창성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미 제 눈으로 진 씨의 더러운 행실을 보았는데, 어찌 그대로 두신다 하옵니까? 다시 생각하소서.”

그러나 강 공과 이 씨 부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창성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고, 진 소저 역시 돌아서는데 너무 놀란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내당 밖에서 안의 기척을 살피던 춘화는 진 소저가 쫓겨 가지 않게 되자, 칠선이 시킨 대로 강 공 부부의 밥에 미혼단을 은밀히 풀었다. 강 공과 이 씨는 아무 것도 모르고 조반을 받았다. 춘화가 담 밖에서 기다리는 칠선에게 강 공 부부가 미혼단을 먹었음을 알려주자 칠선은 그 길로 박 소저에게 가 그 사실을 아뢰었다.

박 소저는 약을 만든 요승이 가르쳐준 대로 진언을 외며 진 소저를 쫓아내도록 하라고 마음속으로 명령하였다. 조반을 마친 강 공과 이 씨 이상하게도 몸이 피로해지며 정신이 자꾸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진 소저의 의심스러운 행실을 말하던 창성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강 공이 말했다.
“아무래도 창성이 없던 일을 가지고 며느리를 구박할 까닭이 없는 것 같소. 만약 며느리의 행실이 그와 같다면 가문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아니겠소? 두 사람이 비록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하나, 며느리의 행실이 그렇다면 진실로 잘못 찾은 배필이 아니겠소?”

강 공의 말에 이 씨가 대답했다.

“저 역시 공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물증은 없으나 일단 친정으로 돌려보냄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하고는 바로 별채로 건너가 진 소저에게 말했다.

“잠깐 동안 친정에 가 있어라. 네가 정녕 깨끗하다면 나중에 다시 만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진 소저는 망극하여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행장을 차려 약간 의복을 수습한 후, 집안 사람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천고에 없는 오명을 쓰고 친정으로 쫓겨나는 것이니 그 경색이 어찌 참담치 않으리오.
박 소저는 진 소저가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칠선은 기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박 소저에게 말하였다.

“아직 기뻐하실 때가 아닐 줄 아옵니다.”

“무슨 말이냐? 진 씨는 이제 쫓겨난 것인데, 그 다음에 매파를 청하면 내가 그 집 사람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느냐?”

“진 씨가 비록 쫓겨났다고는 하나, 언젠가는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후환을 없애버리소서.”

“후환을 없애다니,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박 소저의 말에 칠선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기만 하였다.
한편, 새벽에 장안을 내려다보던 여도사 해운은 오늘이 진 소저의 명운이 걸려있는 매우 중요한 날임을 알게 되었다.
“진 씨가 봉변을 만난 후, 친정에 가는 길에 악인을 만나 죽게 될 것이다. 이는 하늘의 뜻에 합당치 않으니 내가 구하리라.”

해운은 은신법으로 몸을 숨긴 채 나아갔는데, 이때 칠선의 사주를 받은 무뢰배 수십 명이 진 소저가 탄 가마를 공격하더니 모시던 사람들을 전부 베고 상하게 하여 쫓아내었다.
진 소저는 시끄러운 무뢰배의 소리침을 듣고 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마 속에서 단검을 빼 자살하고자 하였다.

해운도사가 놀라서 신행도로 빨리 달려 나가 진 소저의 몸을 구한 뒤 구름에 태우고 주술을 외우자 풀로 만든 인형이 진 소저로 변하여 자결한 모양이 되었다.

진 소저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양가에 알려졌다. 진 소저의 어머니 유 씨 부인은 딸의 이름을 부르다 기가 막히어 쓰러져 정신을 잃었고 진 공 또한 그 자리에 얼어버린 듯 멈추어 서 있었다.

한편 조정에서 늦게 퇴궐하여 창성은 뒤늦게야 그 소식을 들었다. 창성이 집에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처참하고 모두들 자기를 피하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진 소저가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창성이 비록 그동안 진 소저에 대해 철 같은 단단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소식을 접하고는 참담한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양 눈썹에 수심의 기운이 가득한 채 아버지 강 승상에게 물었다.

"진 씨가 죽었다 하나 이 집의 사람인데 예를 갖추어 장사를 치러야 하거늘 어찌 그 시신이 이리로 오지 않는 것이옵니까? 마땅히 택일하여 장사를 지냄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강 승상이 말하기를,
"그러나 더러운 이름으로 쫓겨난 길에 액을 당한 것이라 차마 진 공께 말씀 아뢰지 못하였다."
하였다. 창성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친히 진공 댁으로 가 그 장례를 강 씨의 집에서 치를 수 있도록 해주기를 허락 받았다.

이렇게 하여 진 소저의 싸늘한 시신은 다시 강 공 댁에 도착하였다. 진 소저가 액운을 당한 정황을 보니, 진 소저는 무뢰배들에게 능욕을 당할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미혼단으로 인해 명석한 판단력을 잃었던 강 공과 이 씨 부인의 후회는 말로 다할 수 없었고 창성 또한 한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창성은 진 씨의 빈소가 있는 하벽당을 수시록 둘러보았는데 그때마다 심중에 참연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원래 성품이 희로애락을 남이 모르게 하는 편이고 이제 와서 자기가 새삼스럽게 슬퍼하는 것은 남의 조롱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여 평상시처럼 행동하였다. 다만 혼자 누워 있을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비 오듯 흘리고 잠을 자지 못하였다.

강 공 댁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진 소저의 장례를 준비하였다. 상여가 나가는 날, 흰옷을 입은 노복이 진 소저의 이름을 쓴 붉은 명정을 바람에 날리며 나아 왔고 그 뒤에 진 소저의 시체를 실은 꽃가마가 섰다. 강 공과 이 씨는 예전 진 소저의 덕행이 떠올라 몹시 한탄하였고, 진 소저를 의심했던 창성은 관을 두드리며 슬퍼하였다.

또한 노복과 시비들의 처절한 곡성은 짐승들조차 놀라게 하고 슬픈 바람과 외로운 구름도 머뭇거리게 하였다. 장례가 끝난 후, 창성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창성은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학문에만 전념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한편 박 소저는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자 장례가 끝나기를 기다려 매파를 불러 강 공자에게 혼담을 넣으라고 하였다. 매파는 이 씨 부인을 찾아가 박 소저를 천거하였으나 창성은 한 마디로 혼담을 거절하였다.

창성은 이후로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나라를 위한 인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씨는 비록 아들의 뜻을 이해했으나 후사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하루는 매파를 불러 혼담에 대해 자세히 말하라 일렀다.

"박 소저의 집안에 대해서는 공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한때 아드님이신 공자께서 박 소저의 조부이신 박 학사께 가르침을 받은 일도 있었지요. 비록 높은 벼슬을 하고 계시지는 않으나 고매한 선비가문이오, 규수의 모양을 말씀드리면 관세음이 연꽃에 앉은 듯하고, 재주를 말씀드리자면 여와씨가 하늘을 꿰매는 듯 하오니 이보다 더한 혼처는 찾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허나, 나의 아들이 이토록 혼인을 꺼려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씨의 근심스러운 말투에 매파는 좋은 묘안이라며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공자께서 나라에 제일가는 선비시오나 선녀와도 같은 규수를 보시면 달리 생각해보실 것이옵니다. 짐짓 만나보게 하심이 어떠하올지요?"

이 씨 부인은 매파의 교묘한 생각에 기뻐하였다. 어느 날, 창성은 후원 고루에 올라 책을 읽고 있었다. 이때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박 소저가 나아오고 있었다. 창성이 보니 그 아름다움이 천하 비할 데가 없어 햇빛과 빛을 다툴 정도였고 밝은 보름달이 무색할 만 했다.
진 소저와 같이 이 세상 사람답지 않은 아름다움이 빛이 났으나 박 소저는 옥으로 만든 화분에 심은 하늘의 꽃처럼 가녀린 자태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향기로웠다. 그러나 창성은 그다지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였다. 창성은 그 모습에 교태가 흐름을 보고 그다지 기쁘게 여기지 않고 생각하기를,
일찍이 부덕이 뛰어난 태임태사(太姙太　)에게 자색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천한 조비연과 양귀비에게 자색이 있었다고 하니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은 나라와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진 소저가 다시 돌아온다 해도 저렇듯 교묘한 빛을 띠고 있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창성은 원래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는 성품이었으므로 말없이 책을 읽었다. 박 소저는 창성과 눈이 마주치자 웃어보였으나 그 뒤 창성이 일별도 않자 그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한동안 서 있어야 했다. 박 소저는 냉정한 창성의 모습만을 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박 소저의 이야기를 들은 칠선은 분해하며 말하였다.

"우리 소저께서는 금지옥엽이신데 귀한 분을 아내로 맞게 될 것을 분수에 넘친 복으로 알아야 하거늘 그런 망신을 주다니, 강 공자라 하여도 용서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칠선의 말에 박 소저도 동조를 하였다. 박 소저는 솜씨 좋은 자객을 찾으라고 칠선에게 시키고, 자신에게 이토록 창피함을 준 창성과 그 집안을 반드시 망하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때 천촉 태수 풍랑에 의한 반란이 있었다. 반란군이 기세가 무서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었는데 승상 강회가 자원 출전의 의사를 보였다. 이때 좌승상 강 공이 엎드리며 아뢰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성덕이 깊고 넓어 나라가 태평하고 민심이 안정하니 천하가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였나이다. 그러나 지금 미친 도적이 하늘의 때를 알지 못하고 창궐하였으나 저것들은 개와 같은 무리이니 지략과 용맹함을 갖춘 두 장수를 정하여 보내시면 한 번에 도적을 깨뜨릴 것이니 어찌 옥체에 근심을 끼치리이까. 비록 신의 나이가 많고 재주가 적으나 한 무리의 병사를 폐하께서 주신다면 그 도적을 잡아 용상에 바치리이다."

강 공의 말을 듣고 천자가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경의 충언(忠言)은 아름다우나 경이 국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므로 하루라도 조정을 떠날 수 없도다. 다만 짐이 박덕하여 문무(文武)의 신하들이 그런 작은 산적 무리를 두려워하여 한 명도 장수의 소임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을 한탄하노라."

천자의 말을 들은 신하들이 크게 황공하여 얼굴이 상기되었더니 서반(西班) 쪽 아래에서 소년이 붉은 명주옷을 끌고 어전에 나아가 아뢰었다.

"미친 도적이 시기를 알지 못하고 일시에 창궐하였으나 이곳의 장수는 남산의 맹호 같고 살찐 말은 북해의 창룡 같은지라. 폐하께 원컨대 근심하지 마소서. 소신 양인(兩人)이 나이 어리고 재주가 적어 혹시나 모든 백관이 망령되이 여길까 두려워 발언하기를 주저했더니 한 마리 파리를 보고 큰칼을 빼는 것은 우스운지라. 신에게 약간의 병사를 주시어 도적을 물리치게 하는 것이 혹시나 군명을 욕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이다."

그 말하는 목소리가 맑고 높아 하늘의 학 울음소리 같으니 용의 눈썹에 봉의 눈이요. 사람들 중에 으뜸이라. 그 뛰어난 용모가 가을 하늘의 달 같으며 수양한 모습이 뛰어난 옛 성인 같았다. 또한 그 키가 팔척 오촌이오. 옛적 진 승상 같은 지모와 두사인과 같은 풍모를 오히려 우습게 여길 정도이며, 이는 천하의 큰 영웅이오 만고의 군자였다. 이는 비서각 학사 겸 우부도어사 장희와 춘방 한림 중서사인 강창성이니 그 나이가 십칠 세를 넘지 못한 나이였다.
천자가 크게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뛰어난 충렬(忠烈)이 있으므로 그 아들의 아름다움이 범상치 않음을 알았으나 창성의 아름다운 뜻이 크게 칭찬할 만하도다. 다만 반생(半生)동안 무예를 익힌 자라도 능히 불모지에 나아감을 어렵게 여기거늘 너희들은 어린 나이부터 붓대를 잡아 글만 지으며 성장하였다. 또한 그 신체와 얼굴이 연하고 약하여 옷과 살이 여리고 부드럽거늘 어찌 굳은 것을 입으며 날랜 것을 잡아 적진사이에서 공을 이루리오."

창성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뢰었다.

"신이 비록 나이가 어리고 재주가 적으나, 군명을 받자와 만일 역적의 머리를 베어 용전에 드리지 못하면 신체를 말가죽에 싸서 돌아와 불초한 충의로 성은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나이다."

이부시랑 진 공이 사위의 재주를 빛내고자 하여 나아가 부복하여 아뢰었다.

"강창성이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재주가 충분하고 또한 그 아비에게 경륜한 재주를 배웠으니 저 두 사람은 평안한 세상에서는 현명한 신하요 어려운 시대에서는 유능한 신하라. 원컨대 폐하는 양인에게 절월(節鉞-장수의 상징)을 주어 함께 도적을 깨뜨리게 하소서."

천자께서 또한 영재(英才)들을 시험하고자 하여 승상을 돌아보아 말씀하셨다.
"창성이 나라를 위한 충심이 이렇게도 기특하지만 그 나이가 어리고 기골이 맑고 빼어나니 승상이 멀리 보내는 것을 어려워하고 아들들이 떠나고 나면 슬하에 적막할지라. 혹시나 경이 안타까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니 그대의 심사를 솔직하게 고하라."

승상이 도로 절하며 아뢰었다.

"폐하께서 신하를 쓰시는 것은 스스로 뽑아서 쓰시는 것이 마땅한지라. 임금은 큰 아버지요, 아비는 작은 아버지오니 신에게 비록 다른 자식이 없사오나 나이는 노년이 아니오니 후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더구나 잠깐 이별을 그리 어려워 하리이까."

천자께서 드디어 창성에게 통군대원수병마절제사를 내려 모든 군과 현을 통제하게 하신 후 상방검을 주시고 천자의 활인 신비전을 내리시니 그 은혜와 영광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한 장주사 장명으로 하여금 궁중 참모를 명하시어 삼일 간 채비하여 발행하게 하시니 강창성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였다.

그리고 바로 교장(敎長)으로 가 군사를 점검하고 장졸들을 점호 받을 때, 승상이 바로 본부에 돌아와 부인을 향하여 아들의 출전함을 전하니 부인이 아들이 불모지에 나아감을 크게 우려하나 심정이 깊으므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안하더라.

통군대원수겸 병마절제사 창성은 천자의 어명을 받아 경진삭 신미일에 맹장 원성과 십만 대군과 함께 발행하기로 하였다. 그 행렬을 보건대, 원수가 백면서생(白面書生)인데다 어린 나이에 중한 벼슬을 맡았으나 밝음이 신명 같고, 어질음이 일월(日月)같아 그 위엄과 덕이 함께 높으니 작고 큰 주·현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매우 정성들여 천자의 사자를 접대하고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개와 닭조차도 놀라지 않으니, 인자한 군이라고 일컬었다.

풍랑은 강회가 출정하여 온단 말을 듣고 아예 싸울 의욕을 상실하였을 뿐더러 백성들이 강회와 창성을 따르고 대원수의 능수능란한 진법과 관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패하였다.

대사가 이미 정하여 졌으므로 회군하려 하자 창성은 예전부터 진 소저가 촉땅의 산천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두어 달 말미를 얻어 산천을 유람하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강 승상이 허락하여 창성은 촉땅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창성이 부친을 하직하고 종자 수십 인과 장수 수삼인과 더불어 산천을 찾아 사천 땅에 이르렀다. 이곳의 산 중 특히 아미산과 청성산, 적갑산, 금병산, 정군산은 더욱 기이하고, 신비한 풀과 신기한 짐승이 곳곳에 있어 인간 세상을 망각하게 하였다. 창성이 여러 곳을 두루 유람하고 청성산 아래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쉴 곳을 찾아서 한 초라한 초가에 이르매 백발 노파가 나와 맞아 초당으로 인도했다. 저녁상을 올리니 음식이 정결하고 맛이 뛰어나 주인에게 사례하고 장수와 함께 앞으로의 행로를 상의하고 있었는데, 바람결에 글 읽는 소리가 낭연하여 들어보니 마치 봉황이 읊는 듯했고 산 위에서 옥소를 부는 것 같았다.

창성이 놀라 귀를 기울여 들으매 성음이 처절하고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창성은 즉시 일어나 글 읽는 소리를 찾아가니 촛불 그림자가 비치는 초당 방안에 한 소년이 창을 등지고 앉아 육도서를 읽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 성음이 이미 맑고 청아하여 분명 속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창성이 기이하게 여겨 문 앞에서 기침을 했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글만 읽었다. 창성은 주저하다가 생각하기를,
이 산 아래 모옥에 이같이 기이한 사람이 있으니 어찌 인재를 버림이 아깝지 아니 하리요. 반드시 산 속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는 무리로다.
하여 창 밖에 서 있은 지 한참 만에 결국 참지 못하고 들어가 글 읽는 책을 앗으며 말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이건대 밤하늘의 밝은 달을 보지 않고 속절없이 위수 노옹의 글을 읽느뇨? 당금에 성천자가 위에 계시고 고요히 직간하는 신하들이 좌우에서 보필하니 병서를 읽음이 때가 아닌가 하노라."

그 소년이 머리를 돌려 쳐다보았는데 소년은 일개 옥인의 신선 같은 풍채로 서 있었다. 소년은 크게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존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책을 앗고 참견하심이 어찌 이토록 심하십니까?"

창성이 웃고 손을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생은 이름 없는 사람으로 천하를 유람하며 막힌 마음을 쾌히 하고 이태백의 문장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유람 끝에 종적이 오늘 이곳 사천 땅에 이르러 선생의 독서를 들으니 글이 비록 좋으나 음성이 처절하고 외로우니 반드시 흉중에 소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유백아가 배 위에서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가 바위 위에서 능히 그 속마음을 알은 지라. 고인의 지기함을 오늘 우리 양인에게 비하리니 당돌함을 잊고 소회를 베푼 것이니 여 예의가 없었다면 용서하소서."

그 소년이 창성의 유창한 언변을 듣고는 일어나 자리를 내어주고 상대하여 서로 성명을 통했다. 창성이가 자기 성명을 이르고 소년의 성씨를 물으니 소년이 대답했다.

"성은 진이오 명은 벽향이오 자는 주강이라.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친척이 없으므로 주인 노고에게 의탁하여 글을 읽으니 문무의 재주를 약간 통하는 고로 재주를 익혀 경사에 나아가 과장을 구경하려 하되 주머니가 비어 길을 떠나지 못하고 청풍명월에 흥이 없어 속절없이 병서를 읽어 회포를 위로하나이다."

창성은 그 선비의 풍채가 달을 가리고 꽃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고움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한편 경복하여 말했다.

"선생이 만일 버리지 아닐진대 나와 함께 경사로 가서 입신양명하고 현달하면 부모에게 영광을 돌림이요 선생의 허리춤의 녹슨 검이 마침내 쓰일 곳을 찾으리니 금의환향이 어찌 어려우리요."

소년이 척연히 사례하며 말했다.

"존객이 만일 이런 후의를 베푸신 즉 어찌 은덕을 갚지 아니 하리요.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사귐이 깊지 못하거늘 이런 후의를 감당하지 못할까 하나이다."

창성이 웃으며 말했다.

"선생은 고귀한 선비거늘 어찌 아녀자의 녹녹한 말을 하느뇨? 사해(四海)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형제라. 성천자 치세에 우리 등이 다 친소(親疎)를 이를 바 아니오, 학생이 비록 어질지 못하나 의협을 자부하여 천하에 지기를 구하더니 요행히 존사를 만났으니 원컨대 유종의 지음과 관포의 사귐을 본받아 사생을 함께 하길 맹세하여 서로 의심을 푸는 것이 어떠 하뇨?"

소년이 연망이 사례하며 말했다.

"존객이 산야인(山野人)을 보고 대접하심이 이 같으니 소생이 황감하여 감히 당치 못하리이다. 그러나 아직 공부가 끝나지 않았으니 그저 익힐 따름이오이다. 허나 생의 유람을 안내하는 영광을 주시기 바랍니다."

창성이 한편으로는 아쉬웠으나 한편으로는 대희하여 나이를 물으니 15세였다. 창성은 드디어 형이 되어 소년의 사배를 받고 어깨를 함께 하고 앉으매 서로 기뻐함이 평생 알던 바 같아 친해함이 동포골육 같았다. 밤이 새도록 담화를 나누니 제자백가와 구류삼교에 통하지 못할 것이 없고 십팔무예와 육도삼략에 모르는 것이 없으니 창성이 크게 칭찬하며 말했다.

"현제는 진실로 신인이라. 우형이 미치지 못하겠다."

소년이 겸양하더라. 벽 위에 한 자루 보검을 걸었거늘 창성이 말했다.

"이것은 현제가 차는 검이냐?"

소년이 웃고 대 말했다.

"심사가 울적할 때 부질없는 검무로 소일하나이다."

창성이 웃으며 말했다.

"금일 서로 만나 마음이 심히 즐거우나 주찬과 풍악이 없어 무류한지라. 현제의 검무의 장한 재주를 보고자 하노라."

소년은 머뭇거리거늘 태우가 다시 권하매 소년이 억지로 보검을 뽑아 태정곡을 추니 흰 날이 서리 같아 눈이 아득하고 찬바람이 일어나더니 이윽고 일 척 검이 변하여 긴 무지개가 되어 사람을 볼 수 없으니 태우가 마음에 경탄함을 마지않았다. 진벽향은 재주를 다하지 않은 채 던지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소제의 용렬한 재주로 형은 놀라지 아니 하시냐?"

창성이 그 손을 잡고 칭찬하며 말했다.

"현제의 높은 재주는 우형이 미칠 바 아니라. 신기한 묘술이 옛 사람들보다 더하도다."

드디어 밤새도록 단란하여 다음날 아침에 주인을 하직하고 진벽향과 함께 경사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창성은 저녁을 물리치고 여느 때처럼 진벽향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벽향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창성은 외로운 등촉을 앞에 두고 경서를 읽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창성이 진벽향인가 하여 뒤를 돌아보니 복면을 한 도적이 들어와 있는데 비수를 겨누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성을 노리는 자객임에 틀림없었다. 자객은 보통 사람보다 큰 체격을 가지고 있어 골격이 크고 단단하였다.

"넌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데 나의 목숨을 탐하느냐?"

"곧 죽을 목숨이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너는 내 칼을 받으라."

자객은 호랑이가 바람을 타고 산을 내려오는 듯 한 기세로 비수를 들었는데 칼에서 나온 빛이 사방의 벽에 밝게 빛이 났다. 담대한 창성이라 하더라도 창졸간의 일이라 손을 쓸 새가 없었다. 창성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한 백색 섬광이 당상에 뻗치더니 자객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창성이 놀라 눈을 뜨자 자객은 창을 통해 도망을 가는데, 한 왜소한 몸집의 복면을 한 검객이 그 뒤를 보고 있었다. 창성은 정신을 수습한 뒤 물었다.
 
"보아하니 여자의 몸인데 낭자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 나를 구한 이유는 무엇이오?"

여자는 구름 같은 머리털을 위로 올려 금비녀를 꽂았고 소매가 좁은 전포(戰袍)에 패랭이꽃을 수놓았고, 발에는 봉황의 머리처럼 아름답게 수놓은 신발을 신었고, 허리에는 용천검의 칼집을 차고 있었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이마와 눈빛에는 타고난 아름다움이 흘러 마치 한 송이 해당화 같아 만일 전쟁에 나섰다는 목란(木蘭) 같은 여인이 아니라면 황금상자를 도적질하던 당나라 때의 여도둑 홍선(紅線)일 것이었다. 여자는 얼굴을 외로 하고 조용히 말했다.

"뒷날 아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여검객은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날랜 몸놀림으로 창밖으로 사라져 갔다. 창성은 꿈이라도 꾼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성은 방금 전 여검객의 목소리가 예전 진벽향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창성이 진벽향의 방으로 가보니 진벽향은 간 곳이 없고, 단지 그가 입고 있던 옷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창성은 그제야 진벽향이 소년이 아니라 여자였음을 깨달았다.

한편 자객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 박 소저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창성의 집안을 몰살시킬 계략을 꾸몄다. 박 소저는 칠선을 시켜 은밀히 곤룡포를 만들게 한 뒤, 저잣거리에 창성의 집안을 모략하는 노래를 퍼뜨리게 하였다. 며칠 뒤, 저잣거리에는, ‘머리에 양을 인 여인이 나라를 구하리라.’ 라는 아이들의 노래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천자의 귀에도 그 노래가 들려왔다. 천자는 이를 역성혁명의 노래라고 하고는 그 노래를 퍼뜨린 자를 발본색원하여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정의 신료들은 매우 망극해 하며 그 노래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찾았으나, 장안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뿐 누가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중에 박 소저는 드디어 스스로 개용단을 먹어 창성의 모습으로 꾸몄다. 창성의 모습을 한 박 소저는 곤룡포를 입고 장사치들이 모이는 객점이나, 굶주린 백성들이 많은 곳에 쌀을 풀고 자신이 양을 인 여인의 아들이며 나라를 구하리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에 장안에는 그 노래가 가리키는 사람이 명석하기로 유명한 강 공의 아들 창성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천자는 대노하여 강 공과 창성을 잡아들이라 명령했다. 천자는 강 공과 창성을 금의옥(錦衣獄)에 잡아들여 직접 그들을 문초했다. 또 창성이 새로 나랏님이 될 것이라 말하던 자들을 잡아 대질하게 하였다. 잡혀 온 자들은 창성의 얼굴을 보고는 하나같이 창성이 곤룡포를 입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말했다고 말하였다. 창성이 아무리 부정하여도 소용없었다. 천자는 강 공 부자를 바로 죽이려하였으나 강 공의 충성심을 아는 신료들은 물증이 될 곤룡포를 찾은 뒤에 처형하실 것을 아뢰었다.

천자는 못마땅하였지만, 강 공과 창성의 공이 컸던지라 하는 수 없이 물증을 찾을 것을 허락하였다. 금의옥 관리들이 창성의 집을 낱낱이 뒤졌으나 곤룡포는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천자는 그대로 둘을 처형하려 하였으나, 신료들은 거듭 증거를 찾으시기를 권했다. 이렇게 강 공 부자의 처형이 늦어지자, 소문을 통해 그 소식을 들은 박 소저는 초조하였다.

박 소저는 춘화를 시켜 곤룡포를 들고 금의옥에 가라고 하였다. 춘화는 역모를 고변한 자에게는 부귀영화가 따른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곤룡포를 들고 금의옥으로 갔다. 곤룡포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신료들은 모든 희망이 허사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천자의 명을 따를 준비를 하였다. 천자는 진노하여 곧바로 금의옥으로 행차하셨다.

천자가 노하여 창성에게 말했다.

"내 너의 재주를 어여삐 여겨 아끼었거늘, 네 무엇이 못 마땅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느냐?"

창성은 문초를 받아 이미 기진하였으나, 고개를 들어 천자를 보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폐하, 소신 비록 미천하오나 충성을 목숨처럼 여기었사옵니다. 맹세코 제가 한 일이 아니옵니다."

천자는 창성의 말에 더욱 분노하며 명하기를,
"내 저 요사한 혀를 베고 싶지만 지레 죽어 그 형벌이 가벼워질까 봐 못하겠노라. 신료들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저 요사한 것들의 목을 베라. 그런 후에 머리를 저자에 효수하여 다시는 이러한 불측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니라." 하였다.

금의옥의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창성과 강 공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때 하늘에서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한 도사가 근두운을 타고 금의옥 형장에 도착하였다. 금의옥 관리들과 천자는 놀란 눈으로 구름에서 내리는 도사를 살펴보았다. 안개와 같은 구름 속에서 나오는 도사는 여도사였는데, 바닥에 엎드려 떨고 있던 강 공의 부인 이 씨는 여도사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랐다. 여도사는 바로 해운이었던 것이다.

"신인은 누구이기에 구름을 타고 땅에 오셨습니까?"

천자가 해운도사에게 공손히 물었다.

"저는 백천사에서 도를 닦는 해운이라 하옵니다. 어젯밤 천문을 보니 나라에 요사한 기운이 있어 용왕이 맡긴 나라의 동량이 불에 타는 형국이라, 나라에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 이렇게 급히 찾아온 것입니다." 천자와 신료들은 무슨 영문인줄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해운은 미소를 지으며 금의옥의 관리들에게 "너희들은 지금 곧 학촌 박 학사의 집으로 가 박 소저와 칠선이라는 유모를 잡아오라. 또한 칠선이 쓰는 방바닥을 뜯어 그 안에 있는 바구니도 함께 가지고 오도록 하라."

말하며 근두운을 타고 가게 하였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천자가 말했다.

"도사께서는 어찌하여 이들의 처형을 막는 것이오? 신인이라 하더라도 역모를 행한 자를 살릴 수 없소."

"그러하옵니다. 허나 만일 진범이 따로 있다면 천하의 인재를 잃는 일이온데, 그 또한 한을 남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근두운을 타고 갔던 관리들이 박 소저와 칠선을 잡아왔다. 박 소저와 칠선은 뜻밖의 일에 당황한 듯 천자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해운은 천자에게 절을 하고 박 소저와 칠선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네 어찌하여 진 소저를 죽이려 하였느냐?"

박 소저는 속으로 놀랐으나 태연히 말하였다.

"진 소저가 누구입니까? 저는 규방의 여인이라 밖의 일은 알지 못하오."

박 소저의 말에 해운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하면 무슨 이유로 곤룡포를 만들어 민심을 어지러뜨렸느냐?"

"우리 아가씨는 그런 것을 만든 일이 없소."

이번에는 칠선이었다. 해운은 관리가 가져온 바구니를 열었다. 바구니 안에는 쓰다 남은 노란색 비단실과 천이 남아있었다. 칠선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으나, 박 소저는 침착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주머니를 만들고 남은 천이오. 괜한 누명을 씌우려 하지 마시오."

해운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바구니 속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진 소저께서는 그만 나오시지요."

해운의 말에 창성과 강 공자, 이 씨 부인은 놀란 눈으로 구름 속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죽은 줄만 알았던 진 소저가 생전에 하던 대로 얌전하게 금의옥 뜰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해운은 창성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이오? 진 소저는 나의 안사람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오."

해운은 약상자에서 작은 환약을 꺼내 황제 앞에 놓았다.

"이는 사람의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개용단이라는 약이옵니다. 지금 제가 이 약을 먹어 진 소저의 모습이 되겠습니다."
하고는 개용단을 먹었다. 그러자 해운은 진 소저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금의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진 소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진 소저의 모습을 한 해운은 다시 한 알의 환약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 약은 회면단이라는 약으로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약이옵니다."
하고는 약을 삼켰다. 그러자 도사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 요사스러운 물건이 진 소저를 모함하고 강 씨 집안을 모함했으며 나아가 세상을 어지러이 한 것이옵니다. 이 모두를 진 소저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진 소저는 천자 앞에 나아가 절을 하였다.

"저는 전 병부좌랑 진승 공의 무남독녀로 이름은 주향이라 하옵니다. 강 공자와는 전생의 인연이 있어 부부가 되었는데, 박 소저의 모함으로 시가에서 쫓겨가던 중 무뢰배를 만나 자살을 할 결심을 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런데 이때 용궁의 부탁을 받으신 해운도사께서 저를 구하시어 이날까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사옵니다."

진 소저는 박 소저의 악행과 지나간 일을 소상히 아뢰었다. 진 소저의 말이 끝나자 박 소저와 칠선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였고 창성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천자는 이야기를 듣고 큰 소리로 명하였다.

"진 소저야말로 나라의 충신이며 아름다운 여인이로다. 내 마땅히 상을 내려야하나 우선은 죄인에게 죄 주는 일이 더욱 급하다. 너희들은 지금 곧 저 간악한 것들을 처형하되, 말에 사지를 묶어 차열형에 처하도록 하라."

관리들은 박 소저와 칠선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칠선이 비명을 질렀으나 곧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자는 강 공과 창성을 묶던 줄을 풀게 하고 말하였다.

"어진 아내와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한 죄 또한 작다고 할 수 없으나, 진 소저로 인해 그대들과 같은 인재를 잃지 않게 되었으니, 내 이번만은 용서하리라. 또한 진 소저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를 감동케 하였으니 이제부터 진 소저를 나의 딸로 삼을 것이다. 진 소저는 구름에서 내려온 공주이니 하운공주라 할 것이다. 창성은 다시 살아온 진 소저와 다시 혼인식을 하여 나의 부마가 되도록 하라."

천자의 말에 창성과 진 소저는 황공하여 사은하였다.

천자는 친히 흠천감에 일러 길일을 택하라 명했다. 흠천감에서 택한 길일은 팔월 초순이었는데, 천자께서는 이 날 많은 백성을 불러 함께 즐기라 하셨다. 천자께서는 승상부인 이 씨와 시랑부인 유 씨를 함께 불러 친히 혼인식을 열 궁을 살펴보았다.

궁은 금은보화로 꾸며졌는데 만 여 간(間)이나 되는 금으로 만든 벽과 넓은 방이 휘황찬란하여 눈이 멀 지경이었다. 문마다 기이한 진보로 꾸민 큰 전각 안의 천장은 거북이의 등으로 반자를 했으며 섬돌은 호박으로 만들었다. 난간에는 산호 진주와 누렇게 빛나는 밀화로 오색꽃을 아로새겨 반짝이는 오색빛이 아른아른한 모습이 천자께서 거처하시는 궁보다 더욱 화려하였다.

이 씨 부인과 유 씨 부인이 크게 기뻐하시며 황제께 감사를 드리니 천자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되,
"이 혼인은 진 소저의 덕과 창성의 충을 기리는 잔치이기도 하니 온 백성들과 함께 축하잔치를 열 것이다. 그 잔치의 풍류소리가 삼일 동안 끊이지 않을 것이고 제왕, 공주, 황친 등 황가의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함께 기뻐하며 경축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혼인식이 열리니 수많은 백성이 구경을 하는 가운데 혼인이 시작되었다. 유 씨 부인은 하운공주가 된 진 소저를 데리고 홍경궁에 나아가 친히 나아가 맞이하니 이날 황족들과 벼슬의 높은 벼슬아치들이 부마를 데려오는 요객이 되어 부마가 된 창성이 쓸 의복을 내리셨다. 대궐의 내시들이 도로에 이어 부마의 의복을 받았다.

창성은 머리 위에 머리 위에 통천(通天)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붉은 비단으로 만든 망룡포(　龍袍)를 입고 허리에는 보석으로 만든 허리띠를 두르고 두 마리의 봉황이 춤추는 모습을 새긴 가죽신을 신었다. 창성이 금으로 만든 안장을 얹은 백마를 타고 음악소리가 울리는 대궐 안으로 향하자 문관들의 붉은 옷과 비단으로 만든 오사와 칼을 빗겨 찬 무관들의 갑옷이 한꺼번에 빛을 잃는 듯 하였다.

천자께서는 황후와 함께 홍경궁에 행차하시고 천자의 아드님이신 경왕은 용포에 옥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창성의 길을 인도하여 자리에 이르게 하였다. 쌍쌍이 무리 지은 궁녀들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화촉을 잡고 있었다. 대신들과 궁녀들의 칠보비단옷이 물결을 이루어 태청전은 여러 빛깔로 오색찬란하니 태양빛도 빛을 잃은 듯했다. 옥으로 만든 상 위에 기러기를 올려 천지에 예를 표한 뒤 진 소저가 가마에 올랐다.

천자는 창성의 태양 같은 자태와 비범함과 진짜 공주보다 아름다운 진 소저의 자태를 보시고 기뻐하셨다. 진 소저는 하운공주라 이르신 천자께 절을 하고 이별하였다. 창성은 순금 자물쇠로 가마의 문을 잠근 뒤 말에 올라 일행을 이끌었다. 이에 무수한 궁녀들이 그림을 그린 가마에 올라 진 소저를 에워싸고 금으로 만든 옥절을 내세우고 길을 인도하였다. 나졸들은 앞뒤로 진 소저 일행을 호위하고 만조문무백관들이 뒤따르니 바다와 산이 길을 덮은 듯 하여 백성들 또한 하운공주의 혼인식을 즐겼다.

이날 결혼식의 성대함과 위엄은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었으며 온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며 천자의 덕을 칭송했다.

-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대하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