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치과에서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길을 잡아 나선 김에 남편의 고향이었던
사천의 옛집 터에 들러 보기로 하였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옛집은 황량한 빈터만 남아 있고 그 아름답던 연꽃밭은 사람들이 살기좋은
아파트를 늘리느라 절반이나 잡아 먹은 그 배부른 땅 가난한 아름다움의 땅으로.
이 곳이 바로 남편의 고향 집터이다.
지금은 모르는 아이들이 그 땅에 사람이 살았단 흔적처럼 예쁘게 소꼽살림을 살고 있지만,
아파트가 집들의 흔적과 길들의 맥을 모두 바꿔놓은 입구에 비하면 그나마 알아보기라도 쉬워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옛집 터를 찾는 것이 더듬더듬 겨우 들어서는 샛길의 길이를 가늠하며 알게 되는 것이란 서글펐다.
낡은 하늘색 대문이 있고 흔하디 흔한 감나무와 담장이 있던 자그마했던 시댁의 첫인상.
이웃집과 오손도손 두 채 붙어 무엇이든 나누었을 듯싶고 옆집 또래와 사소하게라도 다투었을 남편의 유년이 잡히는 곳.
그곳은 지금 이렇게 바람만 안고 옛 주인의 냄새를 알 리 없는 모르는 아이들이 새로운 추억을 쌓는 곳이 되었다.
집앞을 나서면 못둑이라고, 연꽃밭을 빙그르르 두르며 펼쳐진 둑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곳에서 불어오는 들판의 바람을 맞으며 한여름의 더위도 잊고 살아가는 시름도 잊었을 테지만,
못둑도 이제 새단장을 한 동네에 걸맞게 포장길도 다듬었고 못보던 우람한 정자도 앉혔다.
그러나 내 눈엔 포장된 이 모든 길도 아름드리 정자도 어여쁘지 않았다.
사람이 더이상 놀지 않는 그 가식적인 길도 놀 곳도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냥 길섶에 평상 하나 마련하고 그도 아니면 그냥 풀석 주저앉아 불어오는 바람 맞으면 안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그토록 아름답던 연꽃밭을 저버렸을까. 조금 남겼으니 괜찮다 하실까.
왜 자연적으로 오래오래 아름다웠던 연꽃 웅덩이를 보살피지 못하고 눈앞의 땅값 보상비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자연의 풍요로운 눈맛을 잃고 마는 것인지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얻게 된 몇십억 보상비, 몇억대 아파트가 그리 좋은지, 그래서 행복한지...
좀 소박했지만 연꽃밭따라 둥글게 호를 그렸던 마을이 그립진 않던지,
그 마을의 울고웃던 사람들의 살냄새 부대끼고 싶어 괜스레 헛기침한적 없던지,
그냥 그런 안부 따위가 잠시잠깐 그래도 시집 올 때마다 혹은 남편과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듣던 사람들 얘기로도
내 고향처럼 살가웠는지, 이렇게 변하고 만 동네 마주하니 비로소 한탄스러웠다.
그냥 아파트를 지으려거든 이 곳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나 지을 것을 말이다.
연이파리 흐드러지게 피었던 초여름 어느 날, 순박했으나 호기심 많았던 한 소년이
날마다 눈만 뜨면 보는 연꽃이 이상하게 아름다웠단다.
푸른 치마를 한껏 하늘로 펼친 연이파리가 초록끼리 섞여 자아내는 아름다운 융단을 펼쳤으니
그곳에 뭉개뭉개 호기심의 야릇함이 부풀어 올랐단다.
저 곳에다 책가방을 날리면 가방 쯤이야 연이파리가 튼튼히 받쳐 주겠지?
재밌겠단 생각으로 눈망울을 굴리던 소년은 작은 돌멩이로 물수제비 뜨듯 책가방을 날려 보낸다.
풍덩, 아니면 꼬르르르륵? 아니면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고요히?
순간 많은 것을 깨달았을 테지.
그 시절엔 날마다 듣다시피 했을 다리몽댕이를 부지를 엄마나
아이의 마음일랑 아랑곳않을 선생님의 편애어린 매타작, 아...
혼이 날 상황들에 제아무리 겁을 먹어도 야속한 웅덩이는 말이 없다.
어떠한 위로도 소년의 몫이 아니었다. 그저 망연히 저 속깊은 웅덩이를 바라보는 수밖에.
그 소년은 어른으로 자라 쑥스럽게 국민학교 1학년 그 날의 이야기를 들려 주며
아들이 다소 엉뚱한 얘길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해도 다 그러려니 받아주는 너그러운 아빠가 되었다.
남편의 유년 중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었다.
못둑은 남편의 추억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갓 시집온 내게도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으니
나는 그 시절의 이야기만 생각나면 아직도 목이 뜨거워진다.
94년의 여름, 유례없는 더위로 기상청이 생기고 처음 겪는 더위가 그해 있었다.
3월 20일 결혼한 우리들의 첫 여름휴가.
이천에서 휴가차 내려온 신혼의 나는 그 여름의 더위 앞에서 첫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이곳으로 여름을 피신해 왔다.
물론 아이를 가졌으니 입덧도 상당했고, 먹은 것을 다 토하느라 몸도 서글펐던 때였다.
시댁에서 벗어나면 얼른 친정으로 가야지.
가서 맘껏 맛있는 것도 먹고 부모님 형제 조카들 식구모두 새댁이 된 나를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인 내 집에 가서 얼른 실컷 놀고 실컷 짜부러지고 싶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선지 하루가 지나도 우리를 친정으로 가라 하지 않으셨다.
그때만 해도 신혼의 순수함으로 순종했던 착한 며느리였으니,
할 일도 없고 아무 친척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지만 그저 말못하고 참았다.
그 날, 동네 어른들은 늘 그랬듯이 뙤약볕을 피해 못둑에 나와 이러저러한 얘기로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다.
결혼은 했으나 시댁에 처음이나 마찬가지인 몸,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었기에
남편은 저 바닷가 마을에 놀러나 가자고 하였다.
남편의 지갑속엔 꽤 두툼한 휴가비가 들어 있었고 너무 더웠기에 그 지갑은 내 손에서 부채가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수표. 현금다발에 섞여 수표 몇장이 내 부채질에 빠져 나가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결국 수표는 길섶에 나란히 나란히 떨어졌고 하늘이 도왔는지 지나가던 이장님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경기도 이천에서 발행된 것을 안 이장님은 우리가 흘린 것임을 짐작하게 되었고 다행히 하나도 빠짐없이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표의 운명은 나에게 꼭 다행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또 어떤 방해로 인해 바람쐬는 것도 뜻대로 못하고 돌아와 집에 드러누워 있었지만,
이장님은 일단 확인차 어머니가 있는 못둑으로 들고 가셨던 것이다.
수표를 받아든 시어머니.
당신은 그것을 흘렸다 주운 다행보다 돈을 함부로 흘리고 만 내 경솔한 행위에
어떤 운명까지 점치느라 헛된 추측을 하고 마셨다. 내 그날의 비극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는 화가 있는대로 나 집의 방문을 벌컥 열며 소리부터 지르시고 잊을 수 없는 모멸감을 나에게 던지셨다.
뒤늦게 지갑을 열어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날 나는 임신한 몸으로 몇시간을 울어야 했다.
너무 울어 집이 빙글빙글 돌때까지 멈추지 못할 눈물이 흘렀지만 어머니는 달래주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건 부모님의 기다리는 얼굴, 언니 형부 조카들의 즐거운 단란함.
훗날에 나는 왜 그날 친정을 못갔으며 나를 왜 보내주지 않고 그렇게 울게 했을까, 그 운명이 서러워서 지우고 싶었지만
아이를 가진 몸으로 그 날의 서러움은 도저히 잊을 재간이 없게 각인되고 지워지지 않았다.
시집오고 처음 대면한 시어머니에 대한 첫인상이었고 잊을 수 없는 서러운 소리를 그저 견뎌야 했던 신혼이었다.
그 날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숱한 이야기는 나에게 변칙적으로 험구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으니
두고두고 속상한 일 겪을 때마다 이 이야기는 내 바가지의 원조로 평생 울궈먹을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아이를 임신한 몸일 때 특히 그럴 때는 모든 사람들이 도와야 한다는 진리를 나처럼 강하게 느낀 이도 없을 거라며
친한 사람들에겐 대단한 경험인냥 연사를 자처했으니, 나는 치사해졌는가 덕분에 떳떳해졌는가.
지나고 나니 그것으로 굳이 손해만 본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고소하다.
아파트를 세워 팔아야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이렇게 시골 목좋은 곳마다 세워지는 저 비슷비슷한 집채들에 그만 화딱지가 나는 것이다.
조경석으로 그 흔한 조경을 해 놓았지만 그곳엔 소박한 연꽃밭이었고 동네 사람들의 채마밭이 이어져 있었다.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재산분배 문제로 형제간에 등을 돌려 원수가 된 이야기도 여럿 있었고
개발의 혜택을 골고루 나눌 수 없었던 한 골목 사이의 집들은 아파트에 가려져 아름다웠던 조망권을 침해받기도 하였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왜 저 곳에 굳이 저 덩치들이 섰어야 했을까이지만 세상에 목소리 컸던 이들은
대개가 자연을 침해하거나 땅값을 부추겼거나 개발의 이익을 부르짖었던 것 같다.
아, 불편한 것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 진정 책속에나 나오는 말일런가.
못둑에 여전한 것은 바람 뿐이었다. 삼천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시원한 여름의 그늘을 연상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겨우 바람에 잠시 안도했지만, 아마도 남편도 어머니도 이제 다시 옛집을 들러보자고 하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 남의 땅이 되어버린 빈 집터를 보았고 황망히 잊고 싶은 낯선 동네를 만났으니,
이제 정들었던 고향은 이 시간 이후부터 마음에서만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연꽃을 보여 주려고, 아빠의 추억을 보여주려고,
아빠의 뿌리를 보여줄 어떤 날이 오면 다시 찾게 될런지... 무엇보다 나에게도 그때,
그 아팠던 하루도 진정 잊기 위해서 한 번 거닐어 보자고 마음이 부추긴다면, 다시 찾을 날 올지도...
첫댓글 내 나중에 읽어 보꺼마.
얼릉 읽어라 뭔 나중에
야단 맞아도 싸다 싸. 시어머님이 매우 좋으신 분이구나. 그런 며느릴 내쫓지 않고 함께 사는걸 보면....사실은 뭐, 슬비 같은 며느리도 델고 사는 시어머니도 계시니까 ...
언닌 꼭 요렇게 엇질러 놔야 속이 씨언하지요?
매우 좋으신 분 맞겠지요....
근데 오늘 뭔 댓글을 요렇게 달았대요? 난 또 여러 팬들이 난리를 쳐놨나 생각했네.푸하하...
근데, 키스야, 연이파리에 책가방을 날리는 키스의 신랑이 어릴때 부터 진짜 낭만 잇었다 그자? 그래서 니가 지금 뺑끼 들고 그림쟁이 하러 다니나 보다.
사실 뭐,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고 건물이 들어 찬게 어디 거기 뿐이겠느냐? 다 인간들의 욕심이다 욕심.
남편 고향은 사천, 너는 남해., . 의령에 왜 살러 왔니? 의령문협이랑 인연 맺을라고 왔니? ㅎ
종합으로 답글/ 신랑은 그때 낭만까지 한꺼번에 연못속에 던져버렸지요. 나를 만나 비로소 그걸 깨우쳤지만..
남편은 사천 나는 남해..흘러흘러 여기까지...문협과 맺은 인연? 언니 그러니까 참 멋적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