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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래법문은 청화(淸華)큰스님께서 성륜사(聖輪寺)
정기법회(2003년 5월 4일)에 제방스님과 재가불자들에게 설하신 법문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금구직설(金口直說)입니다.
금구직설이란 것은 무슨 말인고 하면
다시 변동할 수 없는 결정적인 말씀이란 그런 뜻입니다.
세속적인 논리 전개라든가 이론 같은 것은
그때그때 변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 말씀 또는 성자님 말씀은 변동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성자는 항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가령 무아(無我)라, 무아는 여러분들 잘 아시는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無我)아니겠습니까.
불자님들이 그때그때 무아를 극복 못하면 참다운 불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무아가 되어야 불법(佛法)인 것이고 무아가 못되면 불법이 못됩니다.
내 존재란 것이 지금 내 몸뚱이 이대로 존재하고 내 생각은 나대로 생각이 있고,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왜 이것이 무아가 될 것인가, 이렇게 의단을 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나(我)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보고서 착각하고서
나(我)라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합니다.
모든 인연(因緣)이 화합되어서 잠시간 나라는 것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어제나 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我)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하는 아(我)를 집착하면 그때는 아집(我執)
그래서 우리 범부(凡夫)가 부처님 법을 그릇 해석하는 망집(妄執)이 됩니다.
망상(妄想)이 됩니다.
부처님 법은 아집이라 하는, 나(我)라 하는 주관적인 집착과 또는 대상적인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대상적인 존재에 집착하면
법집(法執)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집착인 아집과 객관적인 집착인 법집을 떠나야
그래야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승경전을 설하실 때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요,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법화경에도 있고 다른 대승경전을 설할 때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건 무엇 인고 하면 천고자연명이라,
하늘 천(天)자, 북 고(鼓)자, 하늘의 북이 자연명(自然鳴)이라,
하늘의 북이 저절로 울린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의 인식되는 범위만이 전부이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소박한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가령 천상(天上)도,
현실적인 것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천상도 긍정하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욕계(欲界)천상만 해도 욕계 6천이라, 색계(色界)천상은 18천이라,
무색계(無色界)천상은 4천이라, 욕계ㆍ색계ㆍ무색계 해서
28천의 하늘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정도의 업장(業障)을 지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지
인간이 최상의 그러한 복지(福祉)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우리 공부가 되어서 익어진다거나 또는 대승경전에 대해
신비로운 황홀경에 젖으면 그냥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고자연명이라,
하늘의 북소리가 어디서 난데도 없이 항시 우리한테 울려온단 말입니다.
천우만다화! 하늘 천(天)자, 비 우(雨)자,
또 하늘에서는 만다라화(曼茶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茶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하늘의 꽃이 그때그때 항시 비가 내리듯이 대승경전을 축복하고
우리 중생의 마음이 그만치 맑아지면 우리 업장이 녹아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런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마하만주사화!
이런 꽃비가 우리를 감싸고 그러는 것입니다.
법화경에도 법화경을 설할 때는, 대승무량경(大乘無量經)을 설하십니다.
대승무량경을 설하실 때 부처님께서 상서로운 모습을 우리한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 공부가 익어지면,
우리가 공부할 때 어느 때는 싫증도 나고 그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난데없이 청정미묘한 북소리가 울려오고 또는 찬란한 꽃비가 내리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봤을 때는 그때는 우리 피로라든가 싫증이 가신데 없이
몽땅 다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극락(極樂)이라, 극락 그러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으로 인생고(人生苦)가
하도 많으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해서 사무칠 극(極)자, 즐거울 락(樂)자,
아주 행복한 극락세계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한테 이상(理想)을 제시하는 것이지
실제로 극락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통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극락세계를 말씀한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거짓말이 되겠지요.
우리는 항시 우리 중생의 지금 알고 있는 인식범위(認識範圍)가
얼마만치 좁은 것인가 이걸 느껴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의 아버지라 하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레스폰 신전의 주랑에 가서
“먼저 그대 스스로를 알라” 그런 말이 기둥에 새겨져 있단 말입니다.
단순히 자기반성을 하고 함부로 경망한 짓을 하지 말라는 그런
경고적인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소크라테스 같은 진지한 분,
정말로 내 스스로가 무엇인가. 내 자아(自我)가 무엇인가,
이렇게 자기를 천착(穿鑿)하고 파고들어 가는
그런 철학적인 인간으로 해서는 보통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진정으로 나(我)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그걸 파고 들어가고 또 더욱더 깊이 천착하고, 그래서
드디어는 엑스터시(Ecstasy), 이른바 망아(忘我)로 든 게 아니에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깊은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었단 말입니다.
삼매란 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서
다른 산란스런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 이른바 삼매의 소박한 풀이 아닙니까.
헌데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자기탐구를 하던 끝에, 그때 기록을 좀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느 날에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가지고서
한일동안 한발도 옮기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명상에 잠겼다고 그래요.
사람들이 구경 와서, 더러는 하도 자리를 안 떠나니까
이불을 가지고와서 이불을 깔고서 거기서 자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느 때나 떠나는가 보려고 했다고 그래요.
그럴 정도로 지독한 집념이 강한 그런 걸로 해서 이른바 망아라,
황홀한 자기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엑스터시의 그런 경지에 몰입했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기를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자신을 가지고 아테네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다니면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또 나중에는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고발을 당해서 옥중가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독배(毒盃)를 마시면서 그야말로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자기 생을 마친 분이
이른바 철학의 아버지라는 소크라테스 아닙니까.
우리는 종교철학에 있어서 아주 깊이 기억해둘 또 하나의 위대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누군가 하면 서기 3세기 전에 나온 플로티노스(Plotinus B.C 269-205),
이집트 태생인데 로마에 나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한 분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우리 종교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꼭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귀감 삼을 만한 위대한 분입니다.
우리 불교인이사 부처님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도 남지만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말씀을 저는 하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 철학은 주로 어떠한 것인가 하면, 여러 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주목할 만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그 일자(一者, nous, the one)라,
한 일(一)자, 놈 자(者)자, 일자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와서 다시 하나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와 가지고 다시 하나로 본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도리야 우리 불교에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도리 아니겠습니까.
플로티노스가 한말 가운데서 중요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영식(靈識)이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일자라는 본래 근본자리로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맑고 맑아지면 드디어는 그때는 하나로 딱 일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라는 근원적인 도리하고 신비적합일(神秘的合一)이라,
그것보고 신비적 합일이라 그래요. 직관적(直觀的)하나가 된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플로티노스를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 인고 하면,
사실은 플로티노스가 이른바 자기 스스로 모두를 다 독창적으로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Platon B.C 427-347), 플라톤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단 말입니다.
플로티노스 학파를 가리켜서 신플라톤주의 그래요. 신플라톤주의라.......
그런데 사실은 서구 서양철학을,
저는 불교인이라 아직도 제가 철학서를 깊이 연구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어디 가서 말하려고 하니까 그때그때 봐야겠지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는 대체로 신플라톤주의를 표방을 했어요.
가사 기독교인(基督敎人)도 위대한 신학자(神學者)가 많이 있습니다.
맨 처음 초기에 4세기경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그분도 위대한 교부(敎父)철학의 완성자인데 그분 철학에도 플라톤주의가 있습니다.
그분 철학에도 이른바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거기에 상당한 분야를 차지한 단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교로 부터서 기독교로 온전히 개종할 때는
신플라톤주의를 영향을 대단히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세기에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tus Eriugena, A.D 810-877),
이분도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에리우게나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그 뒤에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D 1225-1274),
이분은 신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5세기에 유명한 신비철학자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A.D 1260-1327),
또는 15세기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A.D 1401-1464)
이분은 추기경입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도 굉장히 위대한 추기경입니다.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플라톤주의를 한마디로 하면 어떠한 것인가.
제가 주로 말씀하고자하는 것은 신플라톤주의가 의지하는 사상적 핵심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범신론(pantheism)이라.......
우리가 현대를 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不在)라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잘 모른단 말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잘 모르는 그것이 이른바 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알아야 참다운 세계관 인생관이 되어서
자기도 바르게 지도하고, 또는 가족문제라든가 모든 인간의 갈등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데, 그 본질적인 문제를 모르면 그때는 역시 똑같이
혼란한 가운데 혼란한 지식정보 가운데 우리가 파묻히고 맙니다.
범신론(汎神論)은 무엇 인고 하면
천지우주, 자연계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다, 이런 사상이란 말입니다.
범신론을 우리 불자님들은 잘 모르는 분들은 잘 외어두십시오.
사상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그러한 하나의 주장이고 진리의 중요한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고, 천지우주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다는 것은
천지우주가 하나님이 아님이 없고, 또는 천지우주가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가 내내 모두가 다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따라서 그 범신론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범신론입니다.
따라서 범신론을 가지면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계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사상입니까.
그래서 자고로 위대한 분들은 대체로 적고 많고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범신론적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인이사 모두가
다 부처인지라 새삼스럽게 범신론을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또는 이슬람 인이나, 그런 분들은 그 중세기에서는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범신론을 긍정한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창조했으면 자연이 종말이 있어야겠지요.
종말에는 이른바 최후의 심판도 있어야 되고 누가 구제를 해야겠지요.
모두가 다 똑같이 신이 아님이 없다 그래버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겨를도 없단 말입니다.
중세기 이른바 기독교 철학이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아닙니까.
중세 스콜라 철학이라든가 기독교 제도권의 기독교에서는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께서 한 분 위대한 분을 기억하시라고 제가 말씀드립니다마는
17세기 브르노(Giorda Bruno, 1548-1600), 브르노란 분은 이태리분인데
그 분은 도미니크라는 기독교 수도단체에서 아주 유력한 인물입니다,
그런 단체가 두 가지가 있어요. 한 가지는 도미니크회(Dominican Order)가 있고
하나는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가 있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진지한 수행단체입니다. 될수록 어디에 구속받지 않고 제도권의
기독교에서도 될수록 간섭받지 않고, 아주 순수하게 검소하게
그야말로 청빈하게 수도만 주로 하는 기독교의 자유스러운 단체입니다.
그런데 브르노란 분은 도미니크회의 수사란 말입니다. 수도인 입니다.
수도인 인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15세기에 나온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이 사람이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이 분이 이른바 범신론적 사상을 가지고서 자기가 기독교 추기경인데도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진리를 제약 없이 그만치 아주 자기 소신대로 밝히신 분입니다.
그런데 브루노는 그러한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의
직접 제자는 아니지만 영향을 많이 받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범신론을 신봉하니까
제도권 기독교인으로서 범신론을 신봉하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지동설, 천동설 그래서 기독교사회에서는 천동설이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은 지구의 주변을 돈다는 그런 것이
이른바 제도권 기독교의 하나의 신조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지금 현대같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라는 태양중심설을 누가 밝힌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지동설이라, 그때는 대단히 기독교를 반역하는 사람으로 해서
무거운 이단으로 몰아붙인단 말입니다.
브르노는 그와 같이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
그야말로 대단히 원수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범신론을 숭앙했단 말입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래가지고서 이른바 그 당시로 말하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천동설, 천동설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거 저런 거로 해서 그분이 로마 교황청에서 반역죄로 해서 체포를 당했어요.
그래가지고 자기 학설을 폐지하라고 교황청으로부터 여러 차례 권유가 있었으나
끝끝내 자기주장을 안 버렸습니다. 7년간이나 옥중에서 살다가 1600년 2월 달인가
로마의 화형장에서 불에 태워져서 화형을 당했어요.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이른바 브르노인데, 그런 소신에 가득찬 분이 있을 정도로
이른바 범신론이라 하는 것은,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참말로 하느님을 옳게 믿는
사람들은 범신론을 신봉하고, 참으로 옳게 믿지 않고서 그냥 제도권의 권위에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이른바 범신론을 따르지 않고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스콜라철학 중세철학에 있어서는 기독교사회에서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우리 불교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我)가 있고 나라는
아집(我執)이 있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고,아집이 없어야 비로소 불교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망하단 말입니다.
현재 자기 지위(地位)라든가 자기 명망(名望)이라든가 자기 재산(財産)이라든가
이른바 자아(自我)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자기 소유가 있어야 되고
거기에 따른 모든 것에 자기 권한이 있어야 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허망함을 느낀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我)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라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우리가 느끼는 물질은 있다고 보는 것인가.
부처님 사상에는 물질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아닙니까. 모두가 다 마음 뿐이란 말입니다.
유물론자(唯物論者)는 모두가 다 기본적인 것은 물질뿐이다,
그런데서 이루어진 체제가 유물론 아닙니까.
막스엥겔스의 막스주의라든가, 또는 레닌주의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철학도 내내야 이른바 유물주의(唯物主義)란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없다고 그러면 사실은 막스엥겔스라든가 또는 레닌주의라든가
그런 사회주의적인 원칙이 설래야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중공사회(中共社會)도 있지 않습니까.
또는 소비에트가 붕괴가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도 역시 사회주의 사회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사회가 설려고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란 것이
실존적으로 우리가 지각(知覺)하듯이 우리 감각을 통해서 있는 대상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이렇게 이해되어야 물질이 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물질을 부정해 버립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물질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좀 서운하게 생각되시지요. 금 쪽같이 아끼는
자기 몸뚱이, 요새 사람들은 유난히도 몸뚱이를 아끼지 않습니까.
손도 그냥 반들반들하고 포동포동하게 잘 가꾸려고 하고 손이 시리지도 않는데
장갑도 끼고 여러 가지로 하여튼 자기 몸뚱이 금쪽같이 아낍니다.
그런 분들한테 당신 몸이 헛것이다. 허망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본래 없는 것이다. 이래 놓으면 굉장히 섭섭할 것입니다.
그러나 섭섭하다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더 높은 행복이나 더 높은 기쁨을 몰라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들이 마음이 정화가 되어서 우리가 보다 높은 고차원의 세계로
올라갈수록 우리 행복감과 우리 환희심(歡喜心)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주 극도의 최상의 행복이 이른바 극락(極樂) 아닙니까.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니까 극락이라고 그래요.
내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 아무리 말씀을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 같이 보이니까
제가 다시 또 말씀을 드립니다.
나라는 것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본래 이것은 다 빈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봐서 투철하게 보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決定說)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변동할 수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가 하면.......
이 나(我)라는 것은 이것을 우리가 우선 분석적으로 봅시다.
지금 원소, 지수화풍(地水火風) 현대말로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원소가
그때그때 우리 업장에 따라서 잠시간 이 모양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잠시간 모양같이 보이면서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른바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가화합이라.
지수화풍 사대와 거기에 우리 업장이 달라붙어서 이것이 내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그것이 즉 말하자면 나(我)라는 실체란 말입니다.
아무리 아껴봐도, 아무리 소중히 여겨도 나(我)라는 것은 결국은 갈 때는
소식도 없이 제 멋대로 가버립니다.
어느 순간도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나(我)라는 집합체는 그대로 가만히 있지가 않습니다.
찰나, 찰나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니까
순간순간 변화무상한 것은 변화하여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내 몸을 구성한 세포 덩어리나,
또 뒤에 다시 신진대사해서 구성된 세포 덩어리나,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어느 때나 언제나 우리 잘 때나 어느 때나 그 신진대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면 그때는 금생의 목숨은 그만 아닙니까.
이렇게 변화해 마지않는 것을 우리 중생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참말로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허망하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이 살 필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는가.......
참말로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진여불성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우리 마음의 심리(心裏)를 파고들어가서 우리가 찾아본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보다 더 잠재적인 깊은 마음을 아뢰야식이라고 그래요.
아뢰야식(vijnana)이라. 또 아뢰야식은 그러면 근본이 무엇인가
그렇게 들어가서 보면 그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장 이것은 부처님이란 뜻 아닙니까.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보면 지금 현재에서 이 제한된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
종당에는 부처님이 거기에 꽉 들어있는 거기에 도달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여래장은 바로 법신(法身)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는 진여(眞如)라고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말도 하고, 또는 법계(法界)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는
말도 하고, 또는 실제(實際)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파고 들어가면
종당에는 아무것도 없어지는 허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우주의 참 생명입니다. 우주의 참 생명이 진여불성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지만 진여불성은
바로 여래(如來) 부처 또는 법성(法性), 법계(法界) 다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그래서 이 진여불성은 그때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생명의 본바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란 것은 진여불성이 근본 성질입니다.
우리가 가령 참선(參禪)을 한다하더라도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덮어놓고 의심한다고 참선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염불(念佛)한다하더라도 부처님은 우리가 애쓰고
부처님을 외면 우리한테 가피(加被)를 주시겠지,
이러면 참다운 염불이 되시겠습니까.
우주의 실체가 우주의 실상이 바로 진여불성인지라.
우리가 염불을 하든, 화두공안을 참구하든 또는 잠자코 명상을 하든,
우리 마음자리가 항시 진여불성이라는 본래의 자리를 안 떠나야 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가 진여불성인데,
진여불성을 떠나서 아주 의심한다고 그래서 참선이 되겠습니까?
참선이란 것은 우리 본래면목을 찾는 것인데 말입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란 말이나 본래면목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면목을 안 떠나야
그래야 참다운 참선이 되고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우리가 한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아미타불의 가피가 나한테 와서
나한테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주겠지, 이것은 방편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다운 염불은 아미타불이 바로 내 본래면목이고, 우주가
아미타불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미타불을 왼다고 생각할 때는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
그렇게 되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불자님들은 기왕이면
단순한 염불뿐만 아니라 염불참선을 하시고 싶겠지요.
염불참선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우리 본래면목자리,
우리 생명의 당체, 생명의 본질자리인 진여불성자리, 불성자리를
놓치지 않고 하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이 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한다하더라도 덮어놓고
무슨 문제를 의심만 죽자고 한다고 해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면목자리, 본래 진여불성자리.......
일체존재의 근본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그 자리에다 항시 마음을 두고
우리가 화두를 의심하고 그래야 이제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묵조선(黙照禪)에서 명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우리가 경을 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생명의 실상인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간경(看經)인 동시에 참선이고
모두가 그 가운데 다 포섭이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선은 우리가 철학적으로 범신론을, 사상으로 투철하게
이른바 우리 사색을 그쪽으로 포괄을 다 시켜야 됩니다.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고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돼 가면 그때는,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사실은
원래 진리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닌지라 모두가 똑같은 진리,
하나의 그야말로 참 아름다운 진리의 전당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지금 제일 두려운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념적인 대립, 이념적인 대립이 제일 무서운 것인데,
이념적인 대립은 사실은 대립할 건더기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우리 중생의 분별시비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억지로 대립을 하는 것이지 본래 진리의 자리는 대립이 없습니다.
본래가 다 하나고 또 위대한 선각자들은 다 그런 도리를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3세기 때 나온 이집트 태생의
로마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os)는 아주 모범적인 분이고,
서양철학의 어떠한 위대한 신학자들은 대체로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섭렵하고 연구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 우리 불교가운데는 그런 저런 모든 교설이 다 들어있고,
그보다도 플로티노스가 말한 일자(一者)보다도 훨썩 더 근원적인
즉 말하자면 본래 불성자리, 본래 불성자리는 이것은
꼭 불교만의 불성이 아니라, 불교에서 보면 불성(佛性)이고
기독교에서 보면 그때는 신성(神聖)이고 말입니다.
이슬람교에서 보면 그때는 알라의 그런 하나의 근원적인 생명체가 되겠지요.
이렇게 하셔서 우리가 사상적으로 조금도 마음에 갈등이 없이
부처님의 결정설을 공부하셔서 우리 마음이 항시 안심입명(安心立命)과
평화스러운 기분으로 행복스럽게 공부해 나아가시도록 하십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첫댓글 좋은 말씀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