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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실린 장수현
◎ 長水縣: 本百濟雨坪縣(본래 백제의 우평현 이었는데) 新羅改高澤縣(신라에서 고택현 으로 고쳐서) 爲長溪領縣,(장계(長溪)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高麗改長水縣(고려에서 장수현으로 고쳐서) 爲南原府任內(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로 하였고)
本朝太祖元年壬申(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復分爲長水縣(다시 나누어서 장수현으로 하여) 與長溪郡兼監務(장계군(長溪郡)과 함께 감무(監務)를 겸하게 하였다가) 太宗十四年甲午(태종(太宗) 14년 갑오에) 置長水縣監(장수 현감(長水縣監)을 두고) 革長溪, 來屬(장계(長溪)를 혁파하여 내속(來屬)시켰다)
古屬縣一(옛 속현(屬縣)이 1이니) 長溪, 本百濟伯伊郡(장계(長溪)는 본래 백제의 백이군(伯伊郡)이었는데) 【一作海郡。】- 【일명 해군(海郡)이라 한다. 】 新羅改壁溪郡(신라에서 벽계군(壁溪郡)으로 고쳤고) 高麗改長溪縣(고려에서 장계현(長溪縣)으로 고쳐서) 爲南原任內(남원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後來屬(뒤에 내속(來屬)시켰다)
四境(사방 경계[四境]는) 東距慶尙道安陰三十七里(동쪽으로 경상도안음(安陰)에 이르기 37리) 西距鎭安二十三里(서쪽으로 진안(鎭安)에 이르기 23리) 南距南原十四里(남쪽으로 남원에 이르기 14리) 北距錦山四十六里(북쪽으로 금산(錦山)에 이르기 46리다)
厥土塉, 風氣寒(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춥다) 墾田一千七百七十三結(간전(墾田)이 1천 7백 73결이요) 土宜五穀, 桑、麻、楮、莞(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닥나무·왕골이다) 土貢, 狐狸皮、黃毛、漆、柿、梨、五味子、石茸、人蔘、芝草、蜂蜜、黃蠟、席 (토공(土貢)이여우가죽·삵괭이가죽·족제비털·칠(漆)·감·대추·배[梨]·오미장(五味子) 석이·인삼·지초·꿀·밀[黃蠟]·자리요) 藥材, 牧丹皮、白茯苓、茯神、白芍藥、前胡、白附子、當歸、獺膽、乾薑、麥門冬 (약재(藥材)는 모란뿌리껍질[牧丹皮]·백복령(白茯苓)·복신(茯神)·백작약(白芍藥) 바디나물뿌리[前胡]·흰바곳[白附子]·당귀(當歸)·담비쓸개[獺膽]·건강(乾薑) 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이다) 陶器所一(도기소가 1이다) 【在縣北板芚里。】【현의 북쪽 판둔리(板芚里)에 있다. 】 要害一(요해(要害)가 1이니) 六十峴(육십현(六十峴)이다)
【태백산사고본】 55책 151권 18장 B면 【영인본】 5책 662면
자주 접하지 못한 문헌들 이기에 좀 어려운 해석이 될것이오 옥편과 각종포털싸이트 역사편찬위 질의 응답등을 통하여 주관적인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려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실린 장수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본래 장수현은 백제 우평현 이었는데 통일신라 시절 고택현으로 고쳤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인원문제 재정문제 기타등등의 이유로 인하여 모든 행정구역에 중앙관리를 파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앙관리가 파견되어 있는 행정구역 내에서 가장 발달된 고을에 둘수 밖에 없었다 현재도 그렇지 않는가 ? 조그만 현들은 큰 행정구역에서 관리 감독을 받게 만들었다 이에 고택현을 인근 장계군(지금의 장수군 장계면)에 영현을 했다 이후 고려에서 고택현을 장수현으로 고치고 남원부에 임내를 받다가 임내(任內)(고려•조선 초 때 일종의 특수 행정 구역으로 일체의 부역•과세•공납 등을 위임 집행하는 곳)
조선시대 태조원년 임신년에 남원부에서 원상복귀하여 장계군 함께 감사와 법무를 통솔하다가 태종14년 갑오년에 장수현감을 따로두고 장계군를 없애고 장수현에 장계를 내속 시켰다
현에 군수는 하나뿐이다 장계는 본래 백제의 우두머리 이었는데 통일신라에서 벽계현으로 고려에서 장계현으로 고쳐서 남원에 지휘를 받다가 혁파(낡아서 못쓰게 되어 개혁하여 없앰)하여 훗날 장수현에 내속 시켰다 즉 장수현의 발달로 인하여 한때 백제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장계군은 서서히 몰락하면서 장계군을 장수현에 통합 귀속 시켰다
장수현의 동서남북 경계는 동쪽으로 경상도안음(安陰)-현(안의면)에 이르기 37리 서쪽으로 진안(鎭安)에 이르기 23리 남쪽으로 남원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금산(錦山)에 이르기 46리다(현재 쓰고 있는 십리,백리와 해석차이가 있음)
장수현은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춥다 간전(墾田)-(개간하여 밭을 만두곳)이 1천 7백 73결이(토지1결=토지상황과 농사기술 등을 고려해 당시 1결이라 하면 작게는 3만평정도에서 많게는 15만평까지 잡기도 한다 땅의 좋고 나쁨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니까 당연히 면적에 차이가 난다)
또한 오곡과 뽕나무·삼·닥나무·왕골에 알맞은 토질이다 토산물(지역특산품) 여우가죽· 삵괭이가죽· 족제비털· 칠(漆)· 감· 대추· 배[梨] 오미장(五味子) 석이· 인삼· 지초· 꿀· 밀[黃蠟]· 자리요 약재(藥材)는 모란뿌리껍질[牧丹皮]· 백복령(白茯苓)· 복신(茯神)· 백작약(白芍藥) 바디나물뿌리[前胡]· 흰바곳[白附子]· 당귀(當歸)· 담비쓸개[獺膽]· 건강(乾薑) 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이다)
현 장수읍 노하리 판둔마을에 도기소(그릇만드는곳) 1곳이 있었고 요해(要害)가 1이니, 육십현(六十峴)이다) 즉 지세가 험하여 적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곳 요충지가 1곳이니 현재의 육십령이다
이렇듯 장수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추운 지방 이었고 땅이 메말라 논농사 보다는 밭농사가 왕성함을 알수있다 지금의 장수오미자가 유명한 이유가 있다 오래전부터 장수의 특산물 이었다 근거없는 이유는 없다 -장수에서 호롱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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