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1일(토) 빼빼로 데이에 지리산 청학동 뒷산인 삼신봉(1,294m)으로 등산을 갔다.
이 날은 회사 여직원 결혼식 세 건과 대구흥사단 벙개 회장 따님 결혼식, 그리고 지인 결혼 한 건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행 일정을 강행했다.
대구 산학연구원 회원 19명과 광주 한국산학협동연구원 회원 30명이 영호남 교류차원에서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지고자 산행을 한 것이었다.
이 산행은 이미 지난 봄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하루 전날 밤까지만 해도 일기예보에선 당일에 강풍을 동반한 비가 올 것이라고 경고를 했기에 단도리를 확실히 하고 갔다.
하지만 우리의 걱정을 훌쩍 날려 버리고도 남을 만큼 하늘은 더 없이 맑고, 푸르고, 햇볕은 따사로왔다.
물론 지난달부터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이미 산꼭대기를 마무리하고는 산자락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침엽수인 낙엽송과 활엽수인 참나무, 단풍나무들이 제각각 짙게 물들어 있었고, 길가엔 억새풀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이렇게 네 시간에 걸쳐 자연에 대한 눈요기, 살랑대는 공기와의 접촉, 그리고 사람과의 대화를 곁들여서 삼신봉을 다녀와서는 바로 산 아래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청학동으로 들어갔다.
청학동의 정확한 위치는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삼신봉 남쪽자락 해발 750~850m의 지리산 중턱이었다.
'儒佛仙三道合一更正儒道會'(도를 밝혀 좋고 맑은 유도(儒道)를 한 마음으로 교화하는 모임)라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살아온 곳이란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역사의 뿌리인 단군을 따르며 '유교, 불교, 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한 도'를 신봉하는 도인들이었고......
옛부터 풍수지세가 훌륭해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말년에 은거한 이후 수많은 묵객들이 이상향으로 보고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청학동엔 70여가구 300여명이 살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지리산 공비토벌로 疏開된 사람들과 전라도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지금의 청학동 마을주민의 모태라고 전해 온다.
이런 신비스런 동네에 들어선 첫 느낌은 실망부터 약간 앞섰다.
몇 년 전에 가족들과 옆에 있는 삼성궁에 들렀을 땐 신비감이 많았는데, 이곳 청학동은 그런 분위기는 훨씬 덜했다.
하늘 아래 첫 동네란 이미지, 즉 때묻지 않았겠지, 조용하겠지, 옛것을 고집하겠지, 그리고 순순하겠지 등의 이미지는 삭 가버렸다.
그냥 우리처럼 사는데, 단지 시골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산다고 하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이렇게 느낀 것은 이곳에 대해 과도한 신비감을 기대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마을을 들어서는 길목은 시멘트 포장으로 되어 있었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골목길도 돌과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도 그렇지만 길가에 늘어선 찻집과 식당들은 주인이 옛날 옷을 입었다는 것 말고는 여느 관광지에 온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골목을 지나가는 우리들에게 겨울 옷을 두툼하게 껴 입은 70대 할머니가, '엿 사세요, 호박엿이예요.' 라고 외치는 것조차도 보통 관광지와 똑 같았다.
듣자하니 마을주민은 1970년대까지는 양봉과 축산, 약초, 산나물 등을 캐다 팔며 식량을 자급자족하였고, 남은 것으로는 하동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더 이상 농업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민박, 서당, 목공예, 찻집 등을 통해 생계를 잇는다고 한다.
이렇게 살다 보니 마을 소득은 전국 농산촌 평균소득을 크게 웃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상업이 개입하다 보니 순수한 이미지는 이미 많이 탈색된 것 같았다.
마을을 지나서 제일 끝집이 동네 이장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할아버지 같은 젊은 도인이 계셨다.
양반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었다.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차분했을 뿐만 아니라 자세도 반듯했다.
그 분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일행 중 일부는 방 안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툇마루에 걸터앉고, 일부는 자갈 깔린 마당에 그냥 앉거나 섰다.
툇마루 한 켠에서는 어떤 분이 일어서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먹을 계속 갈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이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세요."
"공부하시는 데 괜히 방해가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곳은 청학동 20여 서당 중 대학생 이상만 가르치는 곳입니다."
"어쩐지 분위기가 좋다 싶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손수 끓여 주시는 전통차 한 잔씩을 죽 돌려서 마셨다.
그 때 분위기를 깨는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모두들 자기 것인 줄 알고 얼른 휴대 전화기를 확인했다.
그래도 계속 울렸다.
마루에서 났다.
잠시 후 도사님께서 나가서 전화를 받은 후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허허허' 하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잠시 수근거렸다.
청학동 도인과 휴대 전화라.
신비감이 또 약간 사라졌다.
"청학동이 무슨 뜻이예요?"
"청학은 없습니다. 학은 백학이나 황학이 있지, 청학은 없습니다. 청학이라 함은 옛날에 우리 나라를 상징할 때 푸를 청자를 많이 사용했으니까, 동쪽 나라의 학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일종의 이상향, 무릉도원이죠, 뭐."
"그럼 여기서 뭐 하세요?"
"이렇게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죠? 그렇게 생각할 필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전통을 지키고, 세계 평화를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쯤 우리 선대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나서, 미래를 설계해 온 이후로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공부 언제 끝납니까?"
"옛날에 우리 선대들이 공부는 이미 끝냈습니다. 정감록과 격암유록 같은 책에 다 나와 있잖아요? 우리는 그걸 언제 실현할까 공부하고 있죠. 앞으로 2~30년 내로 전쟁의 시대는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올 겁니다. 전세계가 지금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데 조만간 끝납니다. 우리 선각자들이 다 예언을 해 놓았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계 평화를 구현하죠?"
"이미 다 얘기했는데...... 그럼 제가 지은 책 한 권 사 보세요."
'세계평화를 위해 공부한다.'는 핵심은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고, 공부한 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아직 들은 바가 없는데 뭔가 설명하기가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루 한 구석에 쌓여 있는 책을 들어서 보여줬다.
15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원광 서형탁 저 '거울 내 안에 있다.' 라는 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도인이자 마을 이장님 성함이 바로 이 저자님이었다.
국토분단의 뼈아픈 역사를 청산할 통일백서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주역들에게 띄운 격문과 같은 평화구현의 메시지가 수록되어 있었다.
"저 나이요? 50년생입니다."
묻지도 안 했는데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 동안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이도 질문하는 것 같았다.
"여기 지금 이렇게 공부만 하고 있는 것은 단지 때를 기다리는 거죠. 옛날에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서 가니, 제갈량이 유비가 오기를 기다린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제가 공부한 것과 세상이 바뀌는 것이 다 일치해야 되는데, 앞으로 우리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장 와 닿지 않는 설명에 더 이상 질문하기엔 뭔가 따지는 듯한 느낌도 들 수 있으므로 모두들 조심스럽게 그만 작별 인사를 했다.
난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넘쳤으므로 끝인사를 질문으로 대신했다.
"나중에 조용한 시간에 언제든지 찾아와도 면담해 줍니까?"
"예, 물론입니다. 하지만 전화는 꼭 주세요. 출타중일 경우도 있으니까. 전화번호는 책에 나와 있습니다."
같이 간 산학연구원 원장님께서 책을 한 권 구입해서는 친히 사인을 받고, 삼신봉 오른쪽 편으로 넘어가는 해를 뒤로 하고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곳 청학동은 매년 5~60만 명씩이나 넘쳐나는 관광객으로 인해, 우리 것을 지키며 조용히 살려는 청학동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소박한 꿈은 없어진 것 같았다.
우리도 그간 고도 경제성장과 서구중심의 사회문화 모델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우리 얼과 혼과 예의범절 등 우리 것에 대한 재인식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과 겹치면서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 오는 바람에, 하늘 아래 첫동네라는 신선한 삶터는 이제 어디에도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물론 청학동의 서당과 같이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농산촌을 개발하는 것이 도시민과 농민을 만족시키는 훌륭한 개발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대부분이긴 하겠지만......
2006년 11월 15일
멋진욱 김지욱 서.
첫댓글 핫 청학이 그런 뜻이었군요. 봉황처럼 '상상의 새'로군요. 마을 이장님께 청학동에 대한 궁금한 많은 것을 배워 이렇게 다시 전해주니 감사함다. 모름지기 지식은 공유해야죠. 근데 좀 실망해서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