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요가원 갈 수 있어, 새벽에 눈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아홉시가 다 됐네요.
손빨래 비눗물에 담가놓고,
오늘 아니면 며칠 또 차도 시간도 안날 것 같아,
과천 신선생네 오전에 다녀오기로 합니다.
지난번에 덜 찾아온 포도즙(언니가 주문한 것) 찾으러요.
출발하기 전에 전화 걸고 갔는데,
달콤한 잠 더 즐기고 있었는지
한참만에 문 열어줍니다.
방안엔 아직 이부자리 깔려 있고, 머리맡엔 교정지
놓여 있습니다. 사계절에서 내는 어린이책..
문익환 선생님에 대한 책이라고 해요.
그 옆에 삼각형 모양의 산 몇 개 겹쳐진
단순한 그림의 흑백 표지 책, 눈에 띕니다.
'풍물굿과 코로 숨쉬기', 김삼태 씀..
삼태형 책이 이제사 나왔네요.
풍물굿을 건강 면에서 살펴본 논문을
우리 말 바로쓰기에 맞춰 가다듬고,
딱딱한 논문투도 부드럽게 바꾸어,
그리고 책꼴도 크고 무거운 논문 식이 아니라
자그마하고 가벼운 모양새로 하여 새로 펴낸 겁니다.
작년 가을부터 여러 사람 손 거치더니
거의 일 년 만에 나왔네요.
시간이야 뭐 상관 있나요, 때맞춰 팔려고 만든 책도 아니고..
그것보다.. 시간 들인 만큼 잘 나왔어야 되는데..
언뜻봐도 책 표지가 쫌 아니다 싶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본디 생각하던 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신선생이 설명하면서 많이 속상해합니다.
됐다고, 어차피 나온 건데 뭐 그만 생각하라고 했지만,
제목도 없는 하얀 책등 보니 쫌 그렇네요..
표지 때문에 한 달 이상 끌었다는데, 이렇게 나왔으니
어지간히 속상할 만도 합니다.
그 사이 '산처럼'이라는 출판사 사장님한테서 전화 왔는데,
이오덕 선생님이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무슨 상을 받게 되었답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요. 장소는 국립극장이라든가..
산처럼 출판사에서는 얼마 전에 선생님 책을 새로 펴냈거든요.
그러니 사장님은 더 기분이 들뜨겠지요.. 나도 좋은데..
이번 주말에 무너미에서 글쓰기회 편집회의 있는데, 어떡해야 하나
궁리하는 신선생 보면서, 차 때문에 빨리 집에 돌아가야 된다 하고
나옵니다. 포도즙 두 상자하고, 니어링 부부가 쓴 새 책
'조화로운 삶의 지속' 두 권하고, 보리에서 나온 어린이책
'팥죽할멈과 호랑이' 챙겨들고.. 신선생한텐 늘 고맙습니다.
좋은 책 싸게 사주고, 또 일거리도 물어다주고..
집에 돌아오니 12시 20분.. 딱 맞춰 들어왔네요.
이내 걷기팀에서 만난 유하 씨 전화 와서 약속 정합니다.
오늘 낮에 변산으로 돌아간다기에 고속터미널에서 얼굴 보자
어제 당부했거든요.
땡꾸 산책시키고 돌아온 윤경이가 혼자 밥 후딱 챙겨먹고,
차 끌고 일터로 갑니다.
자투리 시간에, 지난 주에 사놓고 계속 미루었던 애호박 썰어
말린 호박 만들기로 합니다. 호박전 할 때처럼 동글납작하게 썰어
소쿠리에 담아 볕 좋은 데서 바짝 말리기만 하면 되는데,
일 핑계 대고 자꾸 미루었더니 남들 다 끝낸 담에 뒤늦게 이럽니다.
호박 말리는 거 처음 해보는 거라, 얼만한 두께로 썰어야 될지
잘 모르겠네요.
큰 소쿠리 없어 옥상에 두꺼운 종이상자 펼쳐서 놓고
그 위에 동글동글 썬 호박 하나하나 겹치지 않게 펴놓습니다.
후다닥 끝내고, 떡이랑 상추랑 챙겨들고 뛰어나갑니다.
내방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하 씨 만나 지하철 같이 타고 갑니다.
고속터미널까지 한 정거장입니다.
부안 가는 차표 끊고, 차 시간까지 얘기 좀 나누다가 빠이빠이하며
헤어집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린 서로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린 헤어지기 아쉬워 차 떠나는 순간까지
서로 눈길 맞추고 있습니다. 인연이란 참...
그 친구 떠나보내고, 신림동 언니 일터에 잠깐 들립니다.
걷기팀 해산하던 날 집도 가깝고 해서 남은 음식들 챙겨왔는데,
상추는 너무 많아 이칠 것 같고, 그래서 언니네랑 나눠먹을려고요.
언니네 집 갈 시간 없어, 나온 김에 일터로 가져다 주기로 했지요.
....
집으로 돌아오니, 4시 조금 넘었습니다.
빨래 빨기 시작! 한번에 많이 못 빨 것 같아 아까 담가놓은 것만
빨기로 합니다. 헹구는 물 채워질 동안 방에 들어와 잠깐잠깐씩
청소합니다. 내 방.. 엄청나군요. 바닥에 깔린 책들, 가방들, 우편물들..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물건들.. 요즘 집 떠나 왔다갔다하면서 더
정신없게 되어 있네요. 청소한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책에 가구에 먼지는 소복하고.. 한 번에 되지도 않겠습니다.
그래, 적당히 한 곳에 몰아놓고 바닥만 쓸었습니다, 청소기로.
아버지 밥 챙겨놓고 또 후다닥 나옵니다. 요가원 가려고요.
퇴근시간이라 지하쳘 타기로 합니다.
운동시간 직전에 도착해 바로 운동 시작합니다.
저녁시간에 나오면 젊은 친구들, 스님(비구니, 비구승)들하고
함께 운동하니 좋지요. 아침에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강도도 있고..
일주일에 두세 번만 이렇게 할 수 있어도 좋을 텐데, 지금은 한 번밖에
못 합니다. 그것도 일 있어 빠지면 2주에 한 번 하기도 하구요.
그래도 지금은 할 수 없지요. 하긴 아침운동도 괜찮습니다.
혼자 넉넉히 구룬트를 하거나 베개동작하는 것도 괜찮고,
또 아침에 오는 분들(회장님, 교수님, 로사님) 얘기하시는 거
운동하면서, 차 마시면서 듣는 것도 좋지요.
다들 저보다 훨씬 연세 많으시고 연륜도 있으신데다
각자의 삶 열심히, 바르게 사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참 많거든요.
오늘도 운동 끝나고 몇 분 둘러앉아 차 마시며 얘기 나눕니다.
인제 다시 날씨가 쌀쌀해지니 선생님이 차 마시고 가라고 권합니다.
찻상이래야 따로 없고, 운동하는 바로 그 방 한쪽 구석, 바닥에
조그만 다포 둘 깔려 있고, 그 위에 다구들 놓여 있지요.
선생님은 벽 등지고 항상 같은 자리에 앉고,
그리고는 되는 대로 그 둘레로 앉아 차 마십니다.
두어 명이든, 너댓 명이든, 또 더 많을 땐 얼마든지 크게 원 그리며
둘러앉으면 되니 얼마나 편리한 찻상인지요..
음악도 거의 언제나 나오고.. 치우치지 않고 여러 가지로..
얘깃거리도 다양합니다.
오늘은 성형 얘기, 수술 얘기.. 주로 하다가,
나중엔 죽음 얘기 나누었지요. 죽음을 맞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서..
죽음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그것을 진실로 알아야 우리가
준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다는 거..
끝까지 정신 놓지 않고 갈 수만 있다면..
요가에서는 죽을 때 꼿꼿이 앉아서 가는 경우 많답니다.
불교에서도 그런 선승들 있지만, 그것도 몸이 되어야지 가능하다고..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린 수행 생활로 들어가야 된다고요.
너무 늦어도 힘들고.. 선생님도 그러실 거라고..
아까 산 니어링 부부의 그 책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헬렌과 스코트 부부에 대해 사람들이랑 얘기 나눕니다.
그렇게 준비한 그들도 죽음 앞에서는 꽤 힘들었다는 거..
그리고 세상엔 그들처럼 아름답고 바르게 사는 이들 많다는 거..
알려지지 않아도.
.....
10시 반 좀 넘어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저녁 먹고,
불린 생땅콩 까서 땅콩현미죽 끓이고, 낼 도시락 쌀 준비해놓고
컴퓨터 켜서 우체통 열어보고 편지 읽고,
가입한 카페도 들어가 보고, 백일걷기 홈페이지도 방문하고..
지금 이 일기 쓰면서는 차도 마시고 있지요.
오랜만입니다, 집에서 차 마시는 거..
....
백일다방이 생각나는군요. 백일걷기의...
...그리고, 함께 걷지 못한 우리 친구들 생각합니다.
꽤 오랫동안 나만 기분좋은 꿈속에 빠져 있었더니, 여러 사람들 원성..
들립니다. 감히 크게는 말 못하고 있지만요.^^
윤희가 대표(?)로 말했다 옴팍 뒤집어썼지요.
윤희야, 미안해..
나한테 전화도 안 한다 하면서, 핸드폰이 없으니 어쩌니, 또 걷고 달리고
점점 내 생활이 저랑 멀어지는 거 같아 위화감을 느끼니..
그래, 내가 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치는 말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선이 말마따나 투정부린 거였을 텐데, 만날 시간도 안 내고 하니..
.....
미안하고... 나도 너네들이랑 넉넉한 마음으로 함께했으면 참 좋겠다.
예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 소외감이나 위화감 들게 하지 않고..
윤희야, 우리 처음 만난 십여 년 전 생각나니?
넌 그때 스무 살 소녀였는데.. 맑고 아름다운 모습의..
언니들보다 더 언니 같은 너그러운 아이..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 윗사람 눈치 보느라 힘겨워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꿈 간직하고서 노력하는 네 모습 보면서
정말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런 가운데서도 밝은 빛 뿜어내는
니가 고맙고..
우리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모두..
이번에 내가 걷기에서 정말 크게 얻은 건 어쩌면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실낱 같은 거일지라도..
어린 아이들 보면서, 어른과 아이 중간에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 보면서
흔히들 말하는 현실적이지 못한 어린애 같은 어른들하고 얘기 나누면서..
윤희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
사람만이 희망이라고도 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거 같어.
멀리서 찾을 거 없이 내 가까이에..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인지도..
아니, 아름다운 사람 맞을 거야. 내 속의 진짜나는 확실히..
....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말만 자꾸 길어지는 것 같구나..
생각해 보니, 일기글이 편지글로 되어 버렸네.
....
이렇습니다, 제가..
앞뒤도 없고, 시작과 끝도 모르고, 맨날 잃어버리고, 헤매고..
인간적이잖아요? 귀엽게 봐주세용.^^
안녕히 주무시구요..(모두 다 잠들고, 이제 나만 자면 되나..)
그리고 평안하세요. 행복하시구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