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용수 목사 성찬의 목적 고린도전서 11:23-26
2. 지용수 목사 성찬의 축복 고린도전서 10:14-22
3. 이철신 목사 사랑의 성찬 마태복음 26:26-29
4. 변한규 목사 요 3:16의 성찬 요한복음 3:16
5. 이상민 목사 나를 기념하라 고린도전서 11:23-27
성찬의 목적
고린도전서 11:23-26
지용수 목사(양곡교회)
제가 두 개 노회 연합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문 앞에 있는 아주 귀한 난들이 다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이 귀한 난들이 다 죽었구나. 이렇게 시들었으니 회생될 수 없겠구나. 이제 버려야 되겠네.’하는데, 한 달 동안 화분에 물을 한 번도 주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때를 따라 화분에 물을 주던 아내가 미국에 간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제가 물을 한 번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난들이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화분의 난들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살아날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죽더라도 물을 실컷 먹어보기라도 하라고 물을 몇 바가지 퍼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너무 바빠 새벽에 나왔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니 또 화분의 난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제 생활이 얼마나 바쁜지, 여러분이 보내어 주신 성탄절 카드, 여기저기에서 보내어 주신 카드, 대통령께서 보내 주신 카드도 성탄절에는 읽지 못하고 1월 중순경에 읽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 또 서울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집에 갔더니 세상에 난들이 부활해 있었습니다. 누가 세워준 것도 아니고 막대기로 받쳐 준 것도 아닌데 푸릇푸릇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 “어서 오세요.”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확인하기 위해 그것들을 한 번 만져보았더니 힘이 있었습니다. 시들었을 때는 파김치 같았는데, 힘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물이 생명이구나.’
아무리 좋은 나무, 아무리 귀한 꽃이라도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한 달간 물을 주지 않아 다 죽어가던 난에 물을 주니 살아났습니다. 우리 믿음의 나무도 똑같습니다. 5대, 4대, 조상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좋은 집안의 사람이라도 때를 따라 은혜의 비를 맞지 않으면 죽습니다. 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 믿음의 향기를 날리는 사람이라도 몇 달간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영혼이 말라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화분의 나무가 물을 공급받아야 사는 것처럼, 우리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와 은혜의 비를 흠뻑 받아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우리는 주님의 화원에 꽃이어서 주님의 은혜의 비를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이미 하늘 문은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 있다는 말씀을 드리니 어떤 분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제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한 장로님이 하늘 문을 열어 달라는 기도를 아주 심한 사투리로 표현하셨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처남 되시는 분인데 ‘하늘 문을 열어재치시고…’라고 하셨는지 뭐라고 하셨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좌우간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어쨌든 예배 시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이 시간에도 목마른 영혼이 만족하게 되고, 시들은 영혼이 푸릇푸릇하게 되고, 힘없는 영혼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백화점의 마네킹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기계로 일하는 로봇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느낌, 감정이 있게 만드셔서 우리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대화를 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날마다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간식도 먹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먹는 재미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짓기 전에 먼저 오곡백과와 맑은 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생수의 강이 네 개나 흐르고 있었는데 비손 강바닥에는 금이 있었습니다. 금돌 위로 흐르는 물을 아담과 이브가 마셨던 것입니다. 또 기혼 강, 힛데겔 강, 유브라데 강도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도 주시고 마실 음료도 주셨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져 양식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비상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양식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마실 물이 없어 죽게 되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수원지가 좋아 늘 물이 흐르는 그릿 시냇가로 가게 하셨습니다. 물은 마셨지만 먹을 것이 없으니 까마귀를 시켜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도 사용하십니다.
40년 간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사막에서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떡가루,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살도록 해 주셨음을 감사합시다. 먹는 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대충 먹고 살자.’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먹는 것이 생명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또 먹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일이 있으면 잔치를 벌이고 먹지 않습니까? 귀한 손님이 오셔도 먹고, 아들이 군에서 휴가를 와도 먹습니다. 먹는 것이 삶의 기쁨인 것입니다. 원래 금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으로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부모는 걱정하게 됩니다. 자식이 잘 먹을 때 부모가 기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인생의 큰 문제, 큰 역경이 있어서 밥이 넘어가지 않을 때는 금식 기도해야 하지만, 평소에는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하며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면서 맛있게 드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식탁에 축복과 즐거움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 우리 회사가 잘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해고당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 가게가 잘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무엇을 먹고 살지?’하는 걱정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먹여 주십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26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할렐루야!
여러분과 저는 하늘의 새보다 귀합니다. 자식이 먹고 마시는 것은 부모가 다 예비하듯,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께서 염려하시고 예비해 두십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굶게 하지 않으십니다. 먹여 주십니다. 우리가 북한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교회를 불태우고 교회 문을 닫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굶게 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만나를 내려 주셔서라도 먹여 주시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먹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식이라도 그 음식을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육군소위와 함께 하는 식사와 육군 대장과 함께 하는 식사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장관과 함께 하는 식사와 대통령과 함께 하는 식사는 같은 미역국을 먹어도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면 가장 귀하고 가장 의미 있는 식탁은 어떤 식탁이겠습니까?
성찬의 식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찬은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직접 떼어주시는 것입니다. 군에서 휴가 나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듯,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시는 떡과 잔이 바로 성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찬의 자리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떡과 잔은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며 “이것을 받아라. 이것은 내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을 먹는 시간에 그것은 빵이지만 주님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은 능력과 신령한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뽑아 담은 것이 아닌 포도주이지만 그 잔을 마실 때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능력과 축복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4절, 55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한복음 6장 58절에는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대하면 우리가 얼마나 귀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몸처럼, 우리 혈관에 예수님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을 계속해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행해야 합니까? 천국에 갈 때까지입니다. 천국에 가면 성찬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성찬식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성찬식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성찬식을 행할 때 영적인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 받아 구원을 받고 마귀와 죄의 사슬에서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었지만 사는 것이 바빠서 그 믿음, 그 기쁨, 그 자유, 그 감격이 줄어들 수 있는데 성찬식을 할 때 그것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뿌리와 예표는 구약의 유월절 만찬에 있는데, 출애굽기 12장 1절에서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유월절에 친히 명하셨습니다. 식구 수대로 어린양을 준비하여 구워서 먹되 쓴 나물과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과 아울러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양을 잡을 때 그 피를 우슬초에 적셔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죽음의 천사들이 전 애굽을 샅샅이 뒤져 모든 집의 장남과 짐승의 첫 새끼를 쳐죽일 것인데, 그때 양의 피가 있는 집은 그냥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을 가져다 주는 천사, 축복을 가져다 주는 천사가 있는가 하면, 재앙과 채찍, 심판을 행하는 천사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는 죽음의 천사, 심판의 천사가 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축복하는 천사가 오기를 바랍니다. 기도 응답을 갖고 오는 천사가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도 축복의 천사, 기도 응답을 갖고 오는 천사만 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시면 그 천사들이 집집마다 들어가서 그 집의 장남과 짐승의 첫 새끼를 다 죽이는데,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피가 묻혀 있는 집은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집에 죄가 있어도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2장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 말씀은, 한 번의 식사로 끝내지 말고 매 유월절에 기념 식사를 해서 자자손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셨다. 애굽의 바로를 꺾으시고 바로의 사슬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택하셨다.”하는 것을 알려 주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계속해서 성찬식을 행하여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몸을 찢으셨구나.’하는 감격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쇠사슬에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죄의 쇠사슬에서, 지옥의 쇠사슬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에는 육신의 생명만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성찬을 먹을 때마다 그 감격이 새로워져서 기뻐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식은 매주일에 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매주에, 또는 밤마다 성찬식을 했습니다. 모이면 성찬식을 했습니다. 지금은 성찬식을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1년에 몇 번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하는데, 성찬을 먹고 마실 때마다 신비로운 은혜가 다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구나.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내가 자유를 얻었구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묘지를 정하면서도 잘못 정했다가 집안이 망할까봐 덜덜 떱니다. 결혼식도 궁합을 보며 날짜를 잡습니다. 이사도 조심해서 합니다. 박사가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도 쩔쩔매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구원의 감격이 더 새로워지고 찬송하게 되는 것이 성찬의 축복이고 목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 성찬을 먹는 사람은 스스로 죄를 끊게 됩니다.
은혜를 받아도 죄를 끊게 됩니다.
이번 집회 때, 최첨단 사업을 하시는 회사 사장님이 제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우들은 저를 좋은 크리스천으로 보고 있지만, 저는 죄인입니다. 이러이러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 첫날 은혜를 받고 그런 것들을 다 끊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바로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감격해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죄를 끊게 됩니다.
성찬의 은혜를 받으면 정말 죄를 끊게 됩니다.
내가 머리로 음란한 생각, 악한 생각을 한 것 때문에 주님께서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내가 해서 안 될 일을 내 손으로 했기 때문에 주님의 양손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내가 가서는 안 될 길을 내 발로 가서 지은 죄 때문에 주님의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내가 품어서 안 될 욕심을 품었기 때문에 주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리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성찬을 먹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 내 몸이 주님의 몸이고, 내 혈관에 주님의 피가 흐르는데…. 우리 주님을 슬프시게 하지 말아야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두 번 지시도록 내가 죄를 지으면 안 되지.’하는 새로운 각오,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목적이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깨달음이 옵니다.
제 비몽사몽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얀 옷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 직경 1cm, 길이 3m 정도 되는 큰 침을 갖고 나타나셔서 제 얼굴은 보지도 않으시고 제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욱’ 하시며 제 오른 발등을 꽉 찍으셨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양말을 벗고 발등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발등에 분명히 못 자국 같은 것이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일 동안 정말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오고가는 곳 중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곳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생각 없이 그냥 다녔는데,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가 그 곳에 발을 딱 끊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곳만 다니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들어가는 그 장소, 여러분이 들어가서 쉬는 그 곳을 아내가 알아도 좋고 아이들이 알아도 좋습니까? 방송국에서 비디오로 찍어 방송해도 좋습니까? 여러분이 잠시 쉬는 그 곳을 신문에 내어도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구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욥기 31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Does he not see my ways and count my every step?)』
우리가 성찬을 먹으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니 발로 죄를 지으러 가기도 어렵고 손으로 죄를 짓기도 어렵고, 또 변하여 죄를 끊고 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클라라라는 여인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쾌락을 누리기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세상을 즐기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습니다. 성찬식을 한 다음에는 아름다운 팔찌와 진주 목걸이를 버리고 팔과 목에 쇠사슬을 걸고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쩌다 형제를 비방하면 ‘정말 허물이 많은 내가,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내가 어찌 형제를 비방했나?’하고 마음 아파하며 삼일간 혀에 집게를 집어놓고 고통을 주면서 죄를 끊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귀걸이와 목걸이를 다 버리고 쇠사슬을 걸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정신 자세는 배워야 됩니다.
누구든지 성찬의 은혜를 알면 죄를 끊게 됩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십자가 상 앞에서 한 신사가 무릎 꿇은 자세로 두 손을 들고 눈물을 뚝뚝뚝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여행객이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점잖아 보이는 신사가 막 울며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직면하면 우리의 더러운 죄, 흉한 죄, 음란한 죄… 모든 죄가 미워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아 새 마음을 품게 되고 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백만 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가 되면 성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인이 백만 명인 교회의 목사님이라도 그 삶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면 그 목사님은 성공한 목사님이 아닙니다. 교인이 20명밖에 안 되는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라도 그 인격과 삶이 주님을 닮았다면 귀한 목사님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5만 명 사원을 거느린 사장이 되고, 200명 의사를 거느린 병원 원장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고, 군의 대장이 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꿈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부끄러워 도망을 갑니다. 모두 도망가고 아무도 없을 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으십니다.
“여인아,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은 “앞으로 계속 죄를 지어라. 내가 다 용서해 준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다시는 범치 않는 그런 끊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미국에 니미치라는 항공 모함이 있는데, 이름을 그렇게 붙인 사연이 있습니다.
한 해군 대장이 항공 모함을 방문하여 귀한 행사를 치르기로 되어 있는데, 대장 계급장이 그만 망가져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의 행사에는 계급장이 가장 큰 상징이니 계급장 없이 행사를 치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군함에 있는 해군들 중에서 대장 계급장을 갖고 있는 사람은 빨리 신고하라.'고 급히 전달했습니다.
마침 대장 계급장을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니미치라는 소위가 있어서 대장이 그 계급장을 달고 행사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대장이 니미치 소위를 불러 물었습니다.
“자네는 소위인데 왜 대장 계급장을 갖고 다니는가?”
“제가 소위로 임관하는 날, 앞으로 대장이 되라고 제 애인이 대장 계급장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다닙니다.”
“굉장히 훌륭한 애인을 두었구먼. 열심히 해서 자네도 대장이 되게.”
그 후 니미치가 열심히 복무해서 정말 대장이 되었습니다.
애인이 준 대장 계급장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나는 대장이 되리라. 나는 대장이 된다.’하며 열심히 복무하니 대장이 된 것입니다.
꿈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귀한 꿈은 호주머니가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 영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영혼에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 말이, 내 삶이 주님을 닮아야지.’하는 꿈을 갖고 사셔서 우리를 보는 사람이 주님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하면, 내가 죽을 자리에서 주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삶의 목적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마다 ‘나는 이제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하게 되는데,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6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따라 합시다.
“성찬 받은 자의 가장 큰 사명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중국의 한 주방장이 미국의 큰 식당에 초청을 받아갔는데 한 달 월급이 2만 불이었답니다. 한 달에 2만 불이면 약 2천 4백만 원으로 연봉이 약 3억 원이 됩니다. 우리 중 연봉이 3억 원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중국에 있는 그 주방장의 형이 어떤 실수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답니다. 중국 법은 형제가 대신 사형을 받을 수 있답니다. 형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주방장은 형을 대신해서 자기가 사형을 받기로 했습니다. 자신은 결혼하지 않은 혼자 몸이니 죽어도 괜찮지만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 형이 죽으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공한 주방장이 중국으로 돌아가서 형 대신 사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희생적인 동생입니까?
우리는 형제를 조금 도와 주는 것도 얼마나 어려워합니까? 남편이 동생을 도와 주려고 하면 아내가 싫어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형을 위해 생명을 대신했으니 그 형이 동생을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만일 그 동생이 형 대신 죽으면서 “형님,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것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형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일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면서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라.”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1장 38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우리 주님께서 제일 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먹을 때마다 ‘나도 전도해야지. 내가 전도해야지.’하며 복음 전도의 불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감동 깊은 글을 읽었습니다.
부산의 한 부자가 아주 영리한 진돗개를 길렀습니다. 그 진돗개가 길 건너편의 정육점에 가서 고기도 사다 주었습니다. 바구니에 고기 한 근 값을 넣어주면 고기 한 근을 사오고, 두 근 값을 넣어주면 두 근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그 집 앞에도 정육점이 있어서 주인은 바구니에 고기 한 근 값을 넣어주며 영리한 개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개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누군가 개를 도적질해 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오후, 시장을 보러 나간 부인은 건너편에서 개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막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개가 주인을 보고 푹 쓰러지더니 죽었습니다. 바구니에는 썩은 고기 한 근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개가 부산까지 갔다온 것입니다.
아무리 영리해도 개는 개입니다. 사람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정육점에 가지, 부산까지 가겠습니까?
그러나 그 개의 충성을 보십시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을 위해 고기를 먹지도 않고 목숨을 걸고 돌아왔습니다. 사명을 끝내고 죽었습니다. 개도 주인에게 그렇게 충성하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도 주시고, 피도 주시고, 성령도 주시고, 천국도 주시고,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너무 인색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정말 한 방울의 땀이라도 주님을 위해 흘리고, 1초의 시간이라도 주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결혼을 해도, 대학 교수가 되어도, 의사가 되어도, 사장이 되어도, 대장이 되어도, 대통령이 되어도 주님을 위해 되고, 또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찬을 대하면 그 속에 주님께서 계셔서 결국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어디에 가도 ‘내 몸에 주님께서 계신다.’하는 것을 아니 든든합니다. 그리고 살고 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큰 열매를 맺고 이렇게 큰 복음 사역을 이루셨습니까?”
“내가 이룬 것이 아니오. 주님께서 나를 써서 이루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도 감히, 감히 그렇게 말합니다. 어젯밤 8시 30분에서 9시까지 방송에 나오는 제 설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저런 신비로운 말씀이 나오나?’하고 놀랐습니다. 저는 그런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렸습니다.
우리가 살고 나면 ‘주님께서 하셨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제가 사는 것이 아주 작아도 주님께서 연주하시면 세계에 감동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메모해 두지 않아서 이름을 밝혀 드리지는 못하겠는데, 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인산인해를 이룬 청중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했습니다. 그 연주가 얼마나 기가 막힌지 모두 기립 박수를 하며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가 그 자리에서 바이올린을 발로 밟아 부수어 버렸습니다. 모두 놀랐습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보통 수억 원의 값이 나가는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는데, 어떤 바이올린은 이십억 원도 한다고 하는데, 부수어 버렸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때 바이올리니스트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주 값싼 형편없는 고물 바이올린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주 값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앞의 연주나 뒤의 연주나 거의 비슷했습니다.
어떤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가 하는 것보다 누가 연주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성찬을 먹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연주해 주십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산다싱의 전기를 읽어보면, 깜짝 깜짝 놀랄 일이 많습니다.
산다싱이 티벧으로 전도를 가는데 큰 냇물이 나타났습니다. 물은 깊고 날씨는 춥고 더구나 수영도 못하니 산다싱은 낙심하여 냇가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닥불이 보였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던 사람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도와 드리리다.”하더니 순식간에 산다싱에게 와서 “자, 내 어깨에 타시오.”라고 했습니다. 산다싱이 그 어깨에 타자마자 그 사람이 또 순식간에 시내를 건너 주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아이고, 감사합니다.”하며 얼굴을 들어보니,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닥불도 없었습니다. 천사였던 것입니다.
그때 산다싱은 ‘천사가 나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준 것처럼 나는 지옥 갈 사람을 천국으로 옮기는 일을 해야지.’하며 더 열심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을 모시고 가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천사가 직접 도와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길에 여러분이 건너지 못할 구렁이 있으면 하나님의 천사가 옮겨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먹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임마누엘의 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사실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해가 진 오후에 엄마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뒷마당에 가서 빗자루를 가지고 오너라.”
“무서워.”
“괜찮아. 주님께서 계신다.”
“아니야, 무서워.”
“어허, 주님께서 계신대도. 주님께서는 뒷마당에도 계시고 어느 곳에나 다 계신다.”
그러자 아이가 문을 열고 말했습니다.
“주님, 빗자루 좀 갖다 주세요.”
참 기가 막힌 아이입니다.
우리도 이 아이처럼 말할 때가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셔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어디에 가게 됩니까?
미국 미시시피 강은 굽이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갔다가, 왔다갔다합니다. 그러나 미시시피 강은 결국 멕시코만에 이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찬식을 행하는 우리도 거룩하다가 때로는 진창에 뒹굴고, 열심히 충성하다가 범죄하고, 희망차게 살다가 낙심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길이 동으로 서로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도 점점 천국에 가까워지고, 마지막에는 천국에 도착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도 먹고 귀한 것을 다 먹으며 살아도 성찬을 먹지 못한 사람은 망하지만, 이 세상에 살 때 가난하여 좋은 것을 먹지 못한 사람이라도 성찬을 먹은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최고의 축복은 성찬의 축복입니다.
성찬식에 늘 참석하시고 이 은혜를 영원토록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2월 23일
성찬의 축복
고린도전서10:14-22
지용수 목사(양곡교회)
우리가 주일 낮과 밤에 고린도전서의 소중한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고 하는 중에 어제는 사도 바울의 가슴에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막 흘러 넘치는 것을 깨닫고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교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다칠까 봐, 우상 숭배를 하다가 망할까 봐, 간음하다가 죽을까 봐, 원망하다가 마귀, 불뱀에게 물려 죽을까 봐, 또 하나님을 시험하고 저항하다가 하나님의 불에 죽은 고라 다단과 같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계속 편지를 쓰면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my beloved)’라고 부릅니다. beloved 라는 말은 love하고는 다릅니다. love가 그냥 사랑이라면 beloved는 몇 가지로 해석하지만 하나뿐인 사랑을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my beloved'라고 부릅니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하나(only one)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좌우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단지 하나뿐인 사람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귀한 것입니다.
특히 바울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최선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사랑이다.’라는 독일 격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병들 수도 있습니다. 요즘 어머니들은 아기에게 젖도 먹이지 않습니다. 또 아이를 키우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한테 맡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직장 일이나 자기 생활을 하려고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오늘날에는 적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나중에 자식에게 서러운 일을 반드시 당하게 될 것입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제가 저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드리고 그리워하는 것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고 어머니 젖을 4년 간이나 먹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어머니의 젖을 4년 더 먹은 셈이 됩니다. 동생의 것까지 빼앗아 먹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엄마 엄마' 하는 것입니다. 젖도 주지 않는 엄마에게서 엄마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바울은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교우들을 사랑했습니다. 제 가슴에도 그런 사랑이 철철 넘쳐서 여러분에게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역장님의 가슴에도, 교사들의 가슴에도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구역장님들이 제가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충성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충성하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교사들도 뜨겁게 충성하며 너무 잘 하니 그 소문이 나서 교사 강습회에 와 달라고 전국에서 저를 부릅니다. 우리 교사들 덕분에 제가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구역장님과 교사님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최고의 교육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교육할 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면 안 된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피하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하는 일에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즉 출애굽 하라는 것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쇠사슬을 박차고 떠났듯이, 우상 숭배하는 일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상 숭배하는 일을 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시장에서 팔면 묻지 않고 사먹으면 됩니다. 모든 것은 우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아닙니다. 우상은 금으로 은으로 동으로 나무로 돌로 만든 것이라 아무것도 아니지만, 거기에 숭배하면 귀신이 찾아옵니다. 귀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는 사령관들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는 천사 사령관들이 많습니다. 그 사령관들 중 한 천사가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 반기를 들고 하나님께 도전장을 냈습니다. 그것이 사탄이고, 그를 따라온 졸개들이 마귀이고 귀신입니다. 그 귀신들이 점쟁이 속에 들어가서 일하고, 우상 뒤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에게 절하면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 되고, 우상의 전에서 음식을 먹으면 귀신의 잔을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적인 음란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음란하면 망하니 그런 곳에 가지 말고 그 곳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과 달리 영력이 있어서 아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잘 아는 사람을 보면, 우리가 “귀신같이 잘 맞추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에게서는 떠나야 합니다. 아무리 영력이 있는 귀신이라도 떠나야 사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홍계관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섬기는 귀신이 “네가 곧 죽게 될 텐데, 그때 사는 길은 임금님의 용상 밑에 숨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왕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를 알고 있는 왕이 용상 밑에 숨어 있도록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그가 왕의 용상 밑에 숨어 있는데 큰 쥐 한 마리가 지나갔습니다. 왕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왕이 홍계관에게 물었습니다.
“홍계관, 방금 쥐가 지나갔는데 몇 마리가 지나갔는고?”
“세 마리입니다.”
“저 가짜 점쟁이의 목을 쳐 죽여라.”
왕의 명령을 받은 집행관이 홍계관을 한강 모래사장으로 데리고 가서 목을 치려고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그러자 홍계관이 말했습니다.
“조금만 참아 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게 될 것입니다.”
하도 유명한 점쟁이가 그렇게 말하니 집행관은 뽑았던 칼을 내리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왕은, ‘그렇게 영특하다는 점쟁이가 한 마리의 쥐를 보고 왜 세 마리라고 했을까?’하며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쥐를 잡아 해부해 보라고 했습니다. 쥐의 배를 해부하니 그 안에 새끼 쥐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왕은 빨리 한강에 가서 홍계관을 죽이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말을 타고 달려가는 신하의 눈에 칼을 뽑아들고 서 있는 집행관이 보였습니다. 신하는 급히 손을 흔들며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행관은 그 사인을 ‘왜 아직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았느냐? 빨리 사형을 집행하라.’라는 것인 줄 알고 홍계관의 목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아차현이라고 한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귀신도 아는 것이 있어서 귀신같이 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찾아오는 사람을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귀신도 지옥 가고, 귀신을 찾는 사람도 지옥 갑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점하는 사람이 2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20만 명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성령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점하는 것, 사주팔자를 보는 것, 관상을 보는 것, 궁합을 보고 결혼 날짜를 잡는 것, 묘 터를 보는 것, 이것이 다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하면 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미신을, 우상 숭배를 피하라. 도망가라.” 할렐루야!
길을 가다가 독사를 만나면 피해야 됩니다. 우상 숭배는 독사보다 더 무서운 멸망의 뱀입니다. 우상 숭배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먹는 성찬, 하나님의 거룩한 성찬을 먹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월절 식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는데, 그 기사가 누가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에 다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유월절을 준비하러 예루살렘에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22장 8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지명하셨습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에 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한 남자가 있을 것이다. 그를 따라가라. 그러면 그 집에서 유월절을 준비할 것이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5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니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에서는 여자들이 물동이를 가지고 다니지, 남자들은 물동이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우물가에 잘 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물동이를 가지고 가니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그렇게 선명하게 인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따라가서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어디에서 드실고?’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집 주인이 “어서 오세요. 유월절 만찬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하며 다락방을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주석 학자는 그때 이미 그 방에는 유월절 만찬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120명이 들어가도 되는 큰방에 새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테이블에는 양고기, 쓴 나물, 떡과 포도주가 다 준비되어 있었답니다.
그 집은 마가복음을 쓴 저자 마가의 집이었는데 마가는 큰 재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감동을 받고, 영적으로 주님의 사인을 받고 그 집에서 그렇게 준비한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께 달려가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마가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5리가 떨어져 있지만 마가의 집은 예루살렘 서편에 있으니 베다니에서 마가의 집까지는 10리가 됩니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예수님께서 그 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 방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준비된 떡과 잔을 놓고 기도하신 후 떡을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십자가에서 찢길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이 되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도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게 됩니다. 제가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봉사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우리 주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축복의 떡, 축복의 잔인지 모릅니다.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음식은 그것이 아무리 귀해도, 무슨 음식이 좋다, 무슨 음식이 좋다 해도 영원히 사는 음식은 없습니다. 무엇을 먹든 다 죽습니다.
그런데 성찬의 양식은 먹으면 영원히 삽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55절에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는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을 먹지 않는 사람은 영생이 없고 성찬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먹고 마시면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새롭게 되지만, 살다보면 죄로 또 더러워지는데 성찬을 대할 때 성찬의 피가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몇 주간 몸의 때를 씻지 않으면 불쾌하지만 목욕탕에 가서 깨끗하게 때를 씻으면 상쾌해지는 것처럼, 성찬의 잔을 마시면 영혼이 시원함을 얻고 몸에 능력도 흐르게 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 잡을 때 능력이 흘러 치료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찬을 대할 때 능력이 흐르는 것입니다.
관절염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우리 교인 한 분은 성찬식 때, ‘하나님, 오늘 성찬을 먹을 때 주님의 능력이 흘러 제 관절염이 치료되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날 성찬식 후 관절염이 깨끗하게 나았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분이 막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성찬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찬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고 우상의 전에서 먹는 것은 귀신과 사귀는 것이지만,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사귀고 주님과 사귀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떡을 하나 준비해 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찬식을 하실 때는 축사하신 다음에 큰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형편상 이미 잘라 놓은 떡을 나누어 먹는데, 원래는 큰 떡을 떼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한 떡을 떼어 먹는 것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식구는 한 솥의 밥을 먹는 사람입니다. 한 솥의 밥을 먹으면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한 떡을 먹는다는 것은 한 식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찬의 떡은 바로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니 성찬의 떡을 받아먹으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성찬을 먹은 사람은 어느 살이 자기 살이고 어느 살이 주님의 살인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찬을 먹으면 우리는 몽땅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포도주를 네 잔 마셨는데, 네 잔의 이름이 다 있습니다.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이고 마지막 잔이 기쁨의 잔입니다. 그러나 네 잔을 한 사람이 다 마신 것이 아니라 모두 나누어 마셨기 때문에 한 사람이 조금씩 마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가끔 포도주 한 잔 마시는 것 가지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씀했습니다. 집안에 회갑이나 결혼식 같은 축제가 있을 때 포도주를 담가 놓았다가 어른들에게 조금씩 대접하는 것은 욕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 포도주가 피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을 마실 때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 같은 축복과 능력, 신령한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 먹는 떡을 예수님의 살인 것처럼 먹지만 예수님의 살이 아니고 떡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을 때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 같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잔을 마실 때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 같은 능력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피아단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본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마피아 조직들끼리 싸우다 서로 망하게 되니 하나가 되기로 서약하고, 각 조직의 두목들이 각자 자기 손가락을 베어서 빈 컵에 피를 받았습니다. 그 피를 섞어 서로 나누어 마시면서 “우리는 한 형제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주님께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성찬식을 보고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기들의 피를 나누어 마셨지만 수가 틀리면 또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피에는 능력이 있어서 마시면 죄가 없어집니다. 주님의 피는 보배 피입니다. 할렐루야!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죄 있는 사람도 주님의 피를 마시면 죄가 없어집니다.
성찬을 대할 때는 자기를 살핀 후 떡을 먹고 잔을 마시라고 하셨는데, 이는 죄가 있으면 먹지말고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와서 그냥 떡 하나 더 먹고 포도주 한 잔 더 마시는 것같이 그렇게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더 마셔야 합니다. 죄인에게 주의 피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분별한다는 말은 집에서 마시는 포도주와 같은 포도주를 마시지만, ‘이 포도주는 집에서 마시는 포도주와는 다른 주님의 피다.’하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살과 피가 주님의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고 축복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할 때 교회가 화목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일로 A장로님과 B장로님이 서로 섭섭해하고 골이 깊어졌어도 떡을 떼어 나누어 먹고 잔을 나누어 마실 때 ‘우리는 한 가족인데….’하며 회개하고 하나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은혜와 능력을 주시지만, 또한 성찬의 빵과 성찬의 포도주로도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잔, 축복의 잔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귀신의 잔을 마시거나 우상 숭배하러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귀신의 잔을 마시는 것은 한 아내가 두 남자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아내가 어떻게 두 남자를 섬길 수 있습니까? 또 한 남편이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병든 사랑이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잔만 마시고 주님께만 우리의 사랑을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께도 맞추고 우상에게도 맞추고,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와 버금가는 위대한 조각가인 도롤드세가 예수님의 상을 조각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루브르미술관 책임자가 엄청난 예우를 해줄 테니 비너스 여신상을 빚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빚은 내 손으로 우상의 상을 빚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돈을 주어도 나는 비너스 상을 빚을 수 없습니다.”하고 절개를 지켰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잔에 참여한 거룩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선악과 있는 곳에 가서 선악과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곳에 가서 세상 사람들의 쾌락을 핥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절개를 지켜야 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먼지 같은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하여 보배가 되었으니 감사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 한 장로님이 신장 두 개가 다 망가져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가 신장하나를 떼 주어서 우리 장로님이 사셨습니다. 저는 그 장로님에게 모세 같은 건강을 달라고 날마다 기도합니다. 1부 예배 때도 이 말씀을 드렸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가니 그 장로님 부인이 제게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꼭 10년이 됐습니다. 신장 이식 수술 한 지 꼭 10년이 되었는데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신대로 건강하여 아직 감기도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장로님에게 신장을 나누어 준 아우는 지금 영국에서 아주 건강한 몸으로 귀하게 선교사 일을 하고 계시고, 사모님도 아주 복되게 사시는데 현대 그룹의 이사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 장로님 부인이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형제간에 신장 하나 떼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두 아들을 둔 한 재벌 사장님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의사이고, 둘째 아들은 미국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의사인 큰아들의 신장이 다 상했습니다. 그 의사가 사는 길은 미국에 있는 동생의 신장을 이식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얘야, 네 형에게 네 신장 하나를 주어라.”
“아버님, 그래야지요. 그러나 제 아내가 있으니 의논해 보고요.”
작은아들이 자기 아내와 의논하니 아내가 돈은 1억 원이든 2억 원이든 줄 수 있지만, 신장은 절대로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신장을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데 신장은 안 되겠습니다.”
결국 큰아들이 죽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서 작은아들이 왔습니다. 대문에 들어서는 작은아들을 본 순간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나가며 소리쳤습니다.
“내 집에 발을 들이지 마라!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내 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마라.”
너무너무 속이 상한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내쫓아버렸습니다. 그 아들은 형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중에 걱정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형이나 동생에게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가 건강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편안합니다.
내 형제에게 신장 하나 나누어주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우리 주님께서는 온 몸과 피를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자고 일어나서 밤까지 찬송만 하고 감사만 드려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생을 주님을 위해 다 쏟아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살과 피를 누린 사람답게 품위를 지키며 그런 삶의 자세를 지니고 처신해야 됩니다.
조선 시대 영조 때 이양필이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반 출신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품을 팔았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서당에 다닐 수 없는 그는 혼자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하루는 그 동네의 한 어른이 지나가다, 마당 한복판에 자리를 펴놓고 거기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여섯 살 난 양필이를 보았습니다. 그가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상의를 입지 않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필아, 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공부하지 않고 왜 거기에서 하고 있느냐?”
“할아버지,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 남의 집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서늘한 그늘에서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고생하며 공부해야지요.”
그런 자세를 가지니 서민의 아들이었던 그가, 머슴의 아들 같았던 그가 신분이 그렇게 엄격한 시대에 정승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나는 주님의 축복된 성찬을 먹은 사람이다.’하는 긍지와 그런 정신 자세로 살면 어디에서 살든 하나님께서 손들어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겨울비가 서글프게 내리는 날에 미끄러움을 무릅쓰고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 계신 것은 여러분이 열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경조 목사님은 우리 장로교 최초의 일곱 목사님 중 한 분으로 그 역사적인 소래교회를 세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해 동지 섣달, 교회에서 일하던 목사님이 무서운 열병에 걸려 열이 40도가 넘고 헛소리를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돌아가시게 되자 온 교우들이 모여서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열은 조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의학박사이신 엘비스 선교사님을 모시고 달려왔지만, 그분도 목사님의 병명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약도 쓰지 못하고 두 분 선교사님도 그저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창호지 문턱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찾아온 줄 알고 문을 여니 큰 두꺼비 한 마리가 뛰어 들어와 서경조 목사님의 이마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모두 놀라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두꺼비가 목사님의 이마 위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두꺼비를 쫓아낼 생각을 못했습니다. 조금 후에 혼수 상태에 있던 목사님이 “아, 시원하다.”하시며 일어나셔서 식사를 하시고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뒤늦게 어떤 한의사가 말하기를, 그 병은 서사병인데 그 병의 치료제는 두꺼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병은 두꺼비가 열을 빼앗아 가야 낫는 병이랍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동지섣달에 두꺼비를 보내신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더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두꺼비의 기적 같은 그런 기적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덮고 계십니다. 그리고 두꺼비는 왔다가 떠나갔지만, 여러분과 제게 오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거리에서나 상점에서나 어디에서나 이런 자세, 이런 긍지로 살면 하나님께서 착하고 귀한 아들딸이라고 빛을 비추어 주셔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1월 26일
사랑의 성찬
마태복음 26:26-29
이철신 목사(영락교회)
가. 최후의 만찬
1. 유월절 만찬
지난주간에 우리가 추석 명절을 지냈습니다. 추석은 한 해 농사를 수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 가족 식구가 모여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유월절이라는 명절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에 다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명절인데, 애굽 사람의 장자가 모두 죽어 가는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을 구원받았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하면서 도탄 가운데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명절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명절은 그래서 생명과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최후의 만찬
그런데 이 유월절 명절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방에 앉아서 유월절 만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만찬은 기쁘고 즐거운 만찬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울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26:1-2) 그리고 한편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죽일 음모를 다 꾸며 놓고 있었습니다. (26:3-5) 그리고 이미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고 선생님과 동료들을 배신하는 일을 작정했습니다.(26:14-15) 기쁘고 즐거운 유월절 만찬이지만 거기에 모였을 때에 그 만찬 자리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앉은 제자들에게는 명절의 기쁨은 없었습니다. 죽음과 이별의 두려움과 우울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 예수님의 사랑
1. 사랑의 표징 (26.27.28)
그런데 이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떡은 예수님의 몸이고 잔은 예수님의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그저 한 현상으로만 봤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우울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제자들에게, 인간들에게 온전히 다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은, 죽음과 이별의 두려움과 슬픔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정말로 사랑하셔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다 주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에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눈에 보이는 표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 십자가는 죽음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최상의 사랑의 표지입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떡과 잔을 나눌 때에 이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몸을 버리고 피를 흘리셨다는 상징입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주시는 가를 나타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최고의 사랑, 최상의 사랑을 우리가 성찬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찬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인간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2. 죄사함의 표지(28)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셔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죄에서 구원해서 새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한 개인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서 새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얻게 된다는 약속으로 주신 표지입니다. 성도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내 자신이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찬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나 그 성찬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신 지극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그 떡과 잔에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표지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죄사함 받았다는 언약의 표지를 그 가운데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1.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26)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27)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떡과 잔을 받아 먹을 때에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성찬,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표징에 참여하므로, 우리가 구원 받을 백성이고, 새생명 얻은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날마다 죄의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고 있지만,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견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연합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또한 영적인 양식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받아, 견고하고도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교를 시작한 칼빈 선생님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받는 은혜들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은혜의 첫번째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지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때마다, 성경 공부할 때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시하는 것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성례”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끝나지만, 성찬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실 때에 우리 지성과 마음이 성령의 빛으로 비추심을 받고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Institution 14. 8. p.345)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단순히 우리 지식만 동원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우리의 손과 눈과 미각만 동원된다면 우리에게 은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비추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감동 감화하시면, 그 말씀과 성찬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들 가운데에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밝히 비춰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들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성찬을 받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성찬을 받을 때에 영생의 삶이 풍성해 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랑의 공동체
또 성찬을 통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하므로, 모든 성도들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찬을 통해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찬에 참여하는 수천명의 성도들이 모두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한 몸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되어 어떤 불화나 분열도 침입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성찬을 “사랑의 유대”라고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Institution 17. 38 P.507)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에, 그 속에 어떤 불화나 분열도 침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성찬을 자주 집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성찬을 집행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주 회상하고, 그 사랑과 은혜를 자주 받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성찬을 자주 받으므로 성도가 서로 사랑을 증명하고 사랑을 증진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단결하고 사랑의 유대를 인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Institution 17.43.44. p.515ff) 초대교회 때에는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그 전통을 이어 받아서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찬만 했습니다. 말씀과 성찬이 같이 주어져야 하는데, 말씀은 빼고 성찬만 하다 보니까 성찬이 점점 신비적으로 나가게 되고, 우상숭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그 성찬을 없애버리고 1년에 한번씩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그렇게 성찬은 자주하지 않는 관습을 “마귀의 간계”라고 비난하면서, (Institution 17.46. p.518) 일주일에 한번 씩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제네바 시의회는 일년에 한번씩 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으니까 칼빈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번씩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일년에 12번은 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시행해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 동안 일년에 성찬과 세례를 합쳐서, 11번 정도 성례를 했습니다. 내년부터는 매달 첫째 주일에 성례를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회상하고, 그 사랑을 경험하고, 우리 교회 성도들 간에 사랑의 유대를 강화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이별의 슬픔과 두려움을, 사랑과 은혜로 바꾸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성찬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셨습니다. 그 성찬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운 주의 사랑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서 새 생명 얻은 약속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오늘 여러분들이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회상하며 그 고난 속에 담겨져 있는 주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에 참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받는 형제 자매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한 몸 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1년 10월 27일
요 3:16의 성찬
요한복음3:16
변한규 목사(광주중앙교회)
첫째 사랑의 성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누가 세상을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찬송도 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그런데 여기 세상이 무엇입니까? 학자들의 견해가 여럿입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세상이라고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질병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별이 있는 세상이요, 지난 과거이지만 지존파가 있는 세상이요, 험난한 IMF가 있었던 세상입니다. 지금도 미국과 이라크가 무서운 전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전쟁, 몸서리가 나지 않습니까? 6.25를 겪었던 우리네 정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전쟁은 이 땅에 평화를 앗아갔습니다. 온 세계가 평화를 그토록 염원하는 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평화는 거짓으로 위장된 평화요, 핵무기로 포장된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겠습니까? 참 평화는 어디로부터입니까? ♬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 사람이 평화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깨뜨릴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사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것 아닙니다. 둘째는 세상을 만물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물론 만물 중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조지아주에 있는 그랜드 캐년이 있고, 금강산의 절경도 있습니다. 꽃의 세계를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꽃들이 무성합니까? 그런데, 짐승가운데 잔나비가 있어요, 사람을 해치는 살모사가 있습니다. 바다에는 볼품 없는 꼴뚜기가 있고, 이빨이 날 선 상어 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러한 만물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인간으로 번역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입니까? 물어야 합니다. 답해야 합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 41:14). 지렁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사람이외다, 짐승이외다’고 했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1:20). 일찍이 시인 괴테가 말했습니다. “본래는 천사를 닮은 인생들이나 그 인생이 인생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짐승 되었다” 했습니다. 생각하면 인간 가운데는 하만도 있고 가롯유다 인생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가인 인생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겠느냐는 말입니다. 번역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도 죄인들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죄씻음 받았습니다. 고집스럽지요, 완고하지요, 그럼에도 바리새인처럼 의롭다고 말하는 나, 아닙니까? ♬ 나 같은 죄인 ♬ 죄인, 죄인,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죄인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나 같은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 이 성찬에 떡이 되시고, 이 성찬의 잔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성찬예식에 동참하려는 사랑하는 성도들,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오늘 성찬예식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오, 주님이여,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죽음의 성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 독생자를 주셨으니 ♬, 찬송가에도 이 내용이 밝혀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주셨으니’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사 주신 것 참 많습니다. 설악산도 주시고, 한라산도 주시고, 무시로 우리의 마음을 경쾌케 하십니다. 오곡백화도 주시고, 산해진미도 주셨습니다. 만 가지 복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영혼을 위하여 처음에는 아브라함을 주시더니, 다음에는 여호수아를 주셨습니다. 엘리야도 주시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기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까지 하셨다는 뜻입니다. 요 3:16의 성찬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성찬입니다. 죽음이 만든 성찬이란 말입니다. 요 3:16은 기독교가 십자가 종교인 것을 설명하는 성경의 요절이요, 축소된 복음이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이처럼’이 무슨 뜻입니까? 독생자까지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까지 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제가 늘 부르는 찬송입니다. ♬ 나 같은 죄인 ♬,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예수님의 몸이 이 시간처럼 성찬상에 놓이기 위함이요, 예수님의 피가 여기 성찬상에 놓이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피, 생각하지 아니하고는 성찬예식을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이 성찬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이 영생도 없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 성찬 예식에 동참하려는 사랑하는 성도여, 이 예식을 통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찬 예식을 통해서 예수 생명, 내 생명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부터 고난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성찬예식을 통해서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시기를 염원합니다. 성찬예식을 통해서 나의 아픔, 나의 괴로움, 나의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중앙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왠일인가, 왠말인가 ♬ 찬송을 부를 이유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는 사랑의 예수님, 고맙습니다. 사랑의 예수님, 감사합니다. 남은 생애의 발걸음도 주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식에 동참하시기를 염원합니다.
셋째 믿음의 성찬
“저를 믿는 자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떤 초신자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마침 그 날이 성례주일입니다. 그는 큰 기대를 걸고 교회에 나왔는데, 그 이유는 인도자가 오늘 우리 교회에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큰 잔치가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까 작은 떡 하나에, 작은 포도즙 한 잔입니다. 게다가 자기는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고 했을 때에 그가 굉장히 실망을 크게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요, 이해 곤란한 잔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찬예식은 이해 곤란의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가지사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어찌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으며, 믿음이 없는데 어찌 이 내용이 자신에게 은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성찬예식은 이해 곤란의 예식입니다. 그러나 신비한 예식이요, 하늘로부터 내려온 예식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이 예식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왠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찬송할 수 있게 되고, 믿음이 있어야만 ♬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은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 감격스럽게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 3:16의 성찬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성찬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으로 떡을 드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잔을 들기를 바랍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영생을 얻으리로다 ♬ 성경에 이르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소망도 헛되다 했습니다. 또 성경에 이르기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 했고, 믿음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축복 받는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중앙교회 성도여, 믿음으로 성찬예식에 동참하십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내가 축복 받고, 믿음으로 나의 인생을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 시간 내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물론 민주주의를 믿는 것도 믿음이요, 공산주의를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마호멧을 믿고, 석가모니를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합니다. 예수님을 떠난 어떠한 믿음도 참 믿음이 못돼요, 그 모든 믿음은 마치 지푸라기 믿음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이 무엇입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믿음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는데, “The Faith"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를 기억하십시다. 죄가 많고 적고를 묻지 아니합니다. 서양사람, 동양사람을 묻지 아니합니다. 나이가 많고, 젊고를 묻지 아니합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여기 떡이 예수님의 몸이요, 여기 잔이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내용을 믿으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주관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바울이 말할 때에 재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까? 우리는 젊으니까 쾌락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이 성찬예식도 믿음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축복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행하려는 이 성찬, 믿음의 성찬인 것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동참하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4월 13일
나를 기념하라
고린도전서11:23-27
이상민 목사(대구서문교회)
예수님께서 로마병사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행한 예식이 바로 성찬예식입니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마지막 유언처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찬예식에 대하여서는 여러 다른 신학적 입장이 있는데, 가톨릭에서는 ‘화체설’이라하여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종교개혁자 루터는 ‘공재설’이라 하여 떡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임한다는 입장입니다. 쯔빙글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실재로 임하는 것이 아니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요 상징이라는 ‘상징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을 단순히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쯔빙글리의 견해도,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 하신다는 루?! 痼?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실재와 형식의 깊이에 있어서 영적 실제를 보아야 한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는데, 즉 성찬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성도들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 성찬예식에 참예하기를 바랍니다.
(1) 주님의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주님은 곧 자심의 몸과 피를,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그 사랑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이 마지막 부탁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서로 높아지려고, 서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다투는 모습을 보시는 주님은 너무나 안타까워 사랑의 새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찬예식을 통해 예수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함께 마심으로 우리 서문교회가 예수님의 피로 하나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에 서로 미워하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오늘 성찬예식을 통해 용서하고 서로 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불화가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오늘 성찬예식을 통해 가정이 하나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간에 갈등이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오늘 성찬예식을 통하여 가정이 주안에서 하나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3)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 다시 오마 약속한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하시며 세상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힘겹게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예식을 통해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마 28:20)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4)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 사명들을 기억하고 잘 감당해 달라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위대하신 사랑을, 주님의 인류를 향하신 그 사랑을 아직도 흑암에 사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여러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1) 성만찬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과 내가 한 몸이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
(2)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한 지체)가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고전 10:17)
(3)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았던 것처럼, 이 예식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성찬예식을 제정하시던 날은 유월절 밤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심으로 죽음의 심판이 지나가는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4) 더럽고 추한 나의 진홍 같이 붉은 죄가 눈과 같이 희게 용서를 받게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죄책감에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죄를 짓는 연약한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 새로운 능력이 나의 몸 속에 들어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예식을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행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역시 모일 때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성찬예식을 통하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회를 거듭 할수록 사치해지고 분당을 조성하게 되고 빈부의 차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고전 11:22).즉 성찬예식의 진정한 의미는 잊어버리고 빈 껍데기 형식만 남은 성찬식을 무섭게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문의 성도 여러분이여!
오늘 성찬 예식이 단순한 연중 행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베푸시는 바로 그때의 감격으로 이 예식에 참예하시기 바랍니다. 2000년 전 그 감격과 그 축복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오늘 예식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예수님의 새 생명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새로운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