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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남보다 먼저 새봄을 만끽하러 2월 13일부터 나흘 동안 제주도를 일주하고, 올해는 그 보다 한 달 늦게 전라도 남녘을 찾았지만 따스한 훈풍과 유채꽃을 실컷 구경했던 제주도와 달리 전라도에서의 봄은 아직 멀게 느껴졌다.
아무튼 1979년 전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순천의 조계산(884m)은 원래 송광산이라고 불렀는데, 조계산 동쪽기슭에는 교종의 대표인 송광사(松廣寺: 사적 제506호)가, 서쪽기슭에는 선종의 총본산인 선암사(仙巖寺: 사적 제507호)라는 거찰이 있다. 두 사찰은 산길로 약6㎞쯤 떨어져 있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 선사가 100여 칸쯤 되는 절집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한 것이 기원이라고 하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고려 무신집권기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길상사에서 교선일치(敎禪一致)와 돈오점수를 주장한 이후부터다.
송광사 입구 |
대광보전 |
의종 12년(재위 1146~1170) 황해도 동주군(서흥)에서 태어난 지눌은 24세이던 1182년 승과에 합격했으나, 당시 무신집권기의 혼란한 현실에 실망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불교계의 정화에 나섰다. 지눌은 대구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벌이다가 1200년 길상사로 옮겨와 길상사를 수선사(修禪寺)로 고치고 9년 동안 중창불사를 하며 조계종의 중흥도량으로 확장시켰다. 그러자 희종 원년(1197) 임금이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송광사로 고쳤다는 것이다.
송광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상태인 것을 응선 스님 등의 노력으로 가람의 면모를 갖췄지만, 1842년(헌종 8) 큰 화재로 또다시 모든 절집 건물이 소실되고 삼존불·화엄경판 약간만을 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22년부터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했지만, 1948년의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6·25때 공비토벌 작전으로 사찰 대부분이 소실되어 1983년부터 대웅전 등 30여 동의 전각을 중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불교에서는 부처(佛), 가르침(法), 승가(僧)를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부처의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는 양산 통도사를 불보사찰,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경판이 있는 합천 해인사를 법보사찰,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라 한다. 이것은 송광사가 보조국사 이후 선초까지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결과인데, 16국사의 영정(보물 제1043호)을 모신 국사전(국보 제56호)은 송광사의 자랑이다.
대광보전으로 향하는 승려들 |
관음전 |
그러나 16국사의 진영은 일반 공개를 하지 않고, 영인본만 성보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수많은 국사를 배출한 천년고찰 송광사는 1969년에 조계총림이 되었는데, 총림(叢林)이란 불법이 숲처럼 어우러졌다는 의미로서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그동안 조계종 총림사찰은 송광사 이외에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예산 수덕사 등 4곳뿐이었으나, 1996년 장성 백양사, 부산 범어사, 대구 동화사, 하동 쌍계사 등으로 늘었다.
호남고속도로 송광사나들목을 빠져나와서 우회전하여 문길삼거리에서 보성 방향으로 27번국도 주암호반도로를 따라가면 송광사 가는 길인데, 매년 봄 문길삼거리에서 송광사 주차장까지 약10km 도로 양쪽에 만발한 벚꽃은 예부터 ‘춘송광 추해인(春松廣 秋海印)’이라고 할 만큼 유명하다.
순천시내에서는 송광사까지 47㎞를 좌석버스로 약 1시간 10분가량 걸려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광주버스터미널에서 1시간 30분 걸리는 직행버스를 타는 것이 더 낫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 학생 2000원인데, 매표소를 지나면 계곡 위에 극락교가 있다. 극락교를 지나 약10분가량 잡목과 편백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걸어가면 일주문인데, 무더운 여름철에는 멋진 삼림욕 코스가 된다.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曺溪叢林)이란 편액이 걸린 일주문은 조계문이라고도 하는데, 일주문은 수차례 화마를 겪은 송광사에서 유일한 초기 목조건물로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대개의 사찰은 일주문과 대웅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지만, 송광사는 일주문과 대웅보전이 90도 직각으로 꺾여있는 점이 독특하다.
쌍향수 |
조계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신평천이 송광사 앞을 지날 때에는 빈번한 화재를 막는 저수지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그런 지혜는 신평천 위에 다리처럼 지은 우화각을 중심으로 위쪽의 침계루와 아래쪽의 청량각 등 2개의 누각이 대웅보전을 호위하듯 행랑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화각은 날개로 난다는 것이니 이곳에 오르면 누구나 신선이 되고, 계곡을 내려다보는 누각이라는 침계루는 ‘송광사 8경’ 중 하나이다.
우화각을 건너면 바로 사천왕문과 이어지고, 사천왕문을 지나면 대광보전이다. 6·25때 소실된 후 1983년에 중창된 대웅보전은 국내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亞자형 건물에 추녀와 문살 문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데, 대광보전 오른쪽에 지장전·약사전(보물 제302호)·관음전이, 왼편에 승보전과 박물관이 있다.
1903년 고종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왕실을 위한 성수전(星壽殿)을 지었는데, 관음전이 퇴락하자 관음보살을 성수전으로 옮긴 1955년 이후 관음전이라고 불렀고,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보물 제1368호)가 있는 영산전(보물 제303호)은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정조 17년(1793)에 중창한 것이다.
또, 승보전은 사찰 송광사를 상징하는 법당으로서 부처와 10대 제자, 16나한 등 1250명의 스님들을 모신 전각이다.
송광사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제43호), 국사전(국보 제56호) 등 국보 이외에도 대반열반경소(보물 제90호), 경질(經帙, 보물 제134호), 경패(經牌, 보물 제175호), 금동요령(보물 제179호), 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제204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보물 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보물 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 약사전, 영산전, 팔상도, 고려시대의 문서인 노비첩, 수선사형지기(보물 제572호). 화엄탱화(보물 제1366호), 티베트문법지(보물 제1376호) 등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찰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그밖에도 비사리 구시, 능견난사(能見難思, 전남도유형문화재 제19호), 쌍향수(雙香樹, 천연기념물 제88호) 등 3대 명물이 있다.
먼저, 비사리 구시란 영조 원년(1724)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다듬어서 절에서 국재(國齋)를 모실 때 공양할 밥을 저장했던 나무 밥통인데, 구시에는 쌀 7가마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천왕문 추녀 밑에 전시되고 있다.
둘째, 능견난사는 ‘눈으로 볼 수는 있어도 직접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으로서 고려 6대 국사인 원감국사가 원나라에서 가져와 부처님에게 공양하던 놋그릇들로서 그릇을 어떤 순서로 하더라도 서로 포개지는 것을 신기하게 여긴 조선 숙종이 장인에게 그대로 만들어보도록 했으나 아무도 만들지 못하자 능견난사라는 어필제명을 하사했다고 한다.
놋그릇은 약500여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30여개만 성보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세 번째는 천자암(天子庵)에 있는 수령 약800년으로 추정되는 두 그루의 향나무로서 보조국사와 제자인 금나라 황제의 아들이 짚고 온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자란 것이라고 전해온다. 향나무는 높이 12.0m, 둘레가 각각 4.1m, 3.3m나 되고, 금의 왕자는 9대 국사가 된 자오국사 담당성징(慈悟 湛堂聖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