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논쟁
약칭 풍수설 ·지리설이라고도 한다. 도성(都城) ·사찰(寺刹) ·주거(住居) ·분묘(墳墓) 등을 축조(築造)하는 데 있어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는 지상(地相)을 판단하려는 이론으로, 이것을 감여(堪輿:堪은 天道, 輿는 地道), 또는 지리(地理)라고도 한다. 또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을 풍수가(風水家) 또는 풍수선생 ·감여가(堪輿家) ·지리가(地理家) ·음양가(陰陽家) 등으로 부른다.
그들은 방위(方位)를 청룡(靑龍:東) ·주작(朱雀:南) ·백호(白虎:西) ·현무(玄武:北)의 4가지로 나누어 모든 산천(山川) ·당우(堂宇)는 이들 4개의 동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어느 것을 주로 하는가는 그 장소나 풍수에 따라 다르게 된다. 그리고 땅 속에 흐르고 있는 정기(正氣)가 물에 의하여 방해되거나 바람에 의하여 흩어지지 않는 장소를 산천의 형세에 따라 선택하여 주거(住居)를 짓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은 그 정기를 받아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풍수의 자연현상과 그 변화가 인간생활의 행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되어,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 예언설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다시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한국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탈해왕(脫解王)에 관한 대목에 왕이 등극하기 전 호공(瓠公)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弦月形)의 택지(宅地)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아 후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백제가 반월형(半月形)의 부여(扶餘)를 도성(都城)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도입된 풍수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하여져 고려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풍수대가가 나왔으며, 그는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하여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 ·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裨補說) 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으므로 왕지(旺地)와 순지(順地)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지(衰地)와 역지(逆地)는 이것을 비보(裨補:도와서 더하다)할 것이라고 말한 일종의 비기도참서(記圖讖書)를 남겼다.
그 후 고려 때에 성행한 《도선비기(道詵記)》 등은 그 전체를 도선이 지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비기라 일컬어지는 예언서가 그의 사후 세상에 유전(流轉)되어 민심을 현혹시킨 일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사례가 많다. 고려 태조도 도선의 설을 믿은 것이 분명하여, 그가 자손을 경계한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울 때는 반드시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도록 유훈(遺訓)하였다.
개경(開京:개성)도 풍수상의 명당(明堂)이라 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였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으로 내기불설(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첩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들어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비보하기 위하여 많은 사탑(寺塔)을 세운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그 태반의 이유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다. 즉 개경은 이미 지기(地氣)가 다해 왕업(王業)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라 구세력(舊勢力)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신 왕조의 면목을 일신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밖에도 《정감록(鄭鑑錄)》을 믿고 계룡산이 서울이 된다는 등 실로 풍수지리설이 국가와 민간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 오늘날에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운운하며 묘(墓)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풍수지리가 끼친 영향
숭례문 현판은 가로일까 세로일까. 정답은 세로. 동대문 등은 모두 가로인데 남대문만 세로다. 이유는 간단하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서울은 관악산의 화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 숭례문은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한 일종의 부적이다. 숭(崇)은 높인다는 뜻이고 예는 음양오행 중 불(火)에 해당한다. 선인들은 이열치열의 논리로 불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최근 출간된 〈역사를 움직인 풍수 이야기〉(웅진출판·정종수 지음)는 고려와 조선 건국에 얽힌 풍수 이야기를 다룬다. 문화재관리국 학예관인 저자는 역사를 움직인 또 하나의 권력으로서 풍수의 실체를 낱낱이 해부한다.
우선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 설화를 보자. “도선이라는 스님이 개성 융건의 집에 이르러 ‘기장 심을 터에 삼을 심었구나’하면서 혀를 찼다. 기장 제(禾祭)자는 군주 제(帝)와 음이 같다. 도선은 왕이 태어날 집이란 것을 암시한 것이다. 깜짝 놀란 융건이 도선을 쫓아갔다. “백두산의 기운이 마두명당에 이르렀으니 서른여섯 칸짜리 집을 짓고 내년에 아들을 얻으면 이름을 왕건이라 해라.” 과연 도선의 예언대로 왕건이 태어났다.
풍수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땅을 길지로 친다. 초승달은 점점 커져 만월이 되기 때문이다. 좌우로 예성강과 임진강을 끼고 있는 개성은 초승달을 닮았다. 그러나 천하명당에도 약점은 있게 마련. 조선시대 학자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개성의 산세는 왼쪽보다 오른쪽이 높다. 풍수에서 좌측인 청룡은 문(文)과 장자를, 우측인 백호는 무(武)와 차자를 상징한다. 개성의 경우 우측이 좌측보다 높았기 때문에 무신이 발호했다”라고 기록했다. 고려말 무신정권이 득세했음을 상기할 때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고려인들은 탑을 세움으로써 액운을 막고 상서로운 기운을 간직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참설이 유행하기 전 신라의 탑은 모두 3층이었다. 그러나 3층은 잡귀를 막기에 너무 낮았다. 고려인이 5층탑을 짓기 시작한 것은 다분히 풍수적인 것이었다.
시간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는 것이 땅의 기운이다. 고려말 국운이 쇠퇴하자 왕실은 남경(서울)의 삼각산(북한산)이 개성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남경천도론이 제기돼 현재 청와대 자리에 궁을 짓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남경천도론에 이어 이씨가 남경에 도읍할 것이라는 도참설도 퍼졌다.
혼비백산한 조정은 이씨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남경에 이씨를 상징하는 오얏나무를 심어놓고 이씨성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베어버리도록 했다. 또 왕이 매년 남경을 방문, 지금 경복궁터에 임금의 옷을 묻어 서울의 지기를 억누르려 했다.
고려시대는 지기쇠양설 등 주거풍수가 유행했으나 조선시대는 묘지풍수가 인기를 모았다. 조선조 임금의 무덤 중 제1명당은 세종의 영릉. 풍수가들은 영릉 때문에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고 입을 모은다. 풍수의 모든 이론을 결집한 것이 왕릉이지만 도읍지 선정도 매우 중대한 분야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원래 신도(新都)로 계룡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바람개비 형상 한가운데 위치한 계룡산은 이상적인 땅이었다. 그러나 신료들은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다 해안에서 멀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성계는 토목공사를 시작한 지 10개월 만에 중단하고 말았는데 당시 궁궐터 주춧돌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궁궐 위치에 관한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논쟁도 유명하다. 무학대사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 경복궁을 동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모두 남쪽으로 궁을 건설했다”며 “한강이 화기를 막아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무학대사는 “도읍을 정할 때 중의 말을 들으면 나라가 연장될 것이나 정씨의 말을 들으면 5대가 가기 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못가 나라가 흔들릴 난리가 일어난다”고 예언했다. 실제로 개국 후 세조의 왕위찬탈 등 변고가 끊이지 않았으며 개국 200년인 1592년엔 임진왜란까지 발생,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도읍지 선정에 관해 재미난 일화가 또 있다.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하륜은 서대문 밖 무악벌을 궁터로 추천했다. 무악벌은 현재 무악재 왼편 서교동 연희동 동교동 일대. 명당임에 틀림없었으나 주산인 뒷산이 너무 낮고 땅이 좁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이가 많았다. 태종은 북한산 아래 궁터를 잡으면서도 무악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훗날 여기 도읍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달랬다. 어쨌든 현재까지 최규하(서교동), 전두환·노태우(연희동), 김대중(동교동) 등 대통령 4명이 이곳에서 나왔다.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가 남사고의 말도 들어볼 만하다. 남사고는 “서울의 동쪽 낙산(동숭동 뒤쪽 이화여대 대학병원 쪽으로 흘러내리는 산)과 서쪽의 안산(인왕산)이 서로 대치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로 인해 조정이 당파를 지어 동서로 나뉘는데 동쪽 낙산의 낙(駱)자를 풀면 각마(各馬)가 되므로 동인은 갈라지게 되고 서쪽 안산의 안(鞍)자는 풀면 혁안(革安)이 되므로 서인은 혁명을 일으킨 후에야 안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이후 비로소 안정됐으니 글자 풀이가 절묘하게 맞은 셈이다.
풍수와 정권교체의 연관성을 다룬 이야기도 많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도성에 연못을 만듦으로써 화기나 살기가 침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사대문 부근에는 인공연못이 많았는데 서대문 밖 서지에 연꽃이 만발하면 서인이 득세하고, 동대문 밖 동지에 연꽃이 성하면 동인이 성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순조 23년 남대문 밖 상인들이 돈을 추렴, 마른 연못에 물을 채우자 그 해 남인의 거두 채제공이 등용되었다. 광화문의 해태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가 궁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봉에 샘을 파고 구리 용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동서남북 중 북문이 없는 것은 북문을 통해 음기가 들어와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동대문의 원 명칭 흥인문에 지(之)자를 추가, 흥인지문이라고 한 것은 산맥 모양의 之자를 넣어 동쪽의 지기를 돋우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