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朝鮮)은 북쪽으로는 여진(女眞)과 접하였고, 삼면은 바다에 닿았으며, 정면으로 일본(日本)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부산(釜山)이란 곳은 조선의 해구(海口)인데, 부산에 사는 조선 사람들은 왜인(倭人)들과 오가면서 끊임없이
호시(互市)를 열었다. 부산에 사는 집이 있으면서 조선 사람과 혼인을 한 왜인들을 왜호(倭戶)라고 부르며, 여왜(麗倭)라고도 부른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후소송(後小松) 명덕(明德) 3년(1392)에 조선의 사신이 와서 이웃 나라 간의 우호를 닦기를 청하니, 의포공(義浦公)이 허락하여 조선 사신들이 왔다. 장군가(將軍家)에 후사(後嗣)가 서면 조선에서 반드시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이때는 바로 명(明)나라 홍무(洪武) 25년으로, 우리 태조 원년이다.
응영(應永) 5년(1398) 8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에 통빙(通聘)하면서 알리기를, “지난번에 명을 어긴 구주(九州)의 소추(小醜)들은 이미 죄를 저지른 데 대한 벌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군사를 파견해 해도(海島)의 나머지 도적들을 모두 섬멸하여 배가 통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양국 간의 우호를 맺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이때는 바로 홍무 31년으로, 우리 태조 7년이다.
30년(1423) 7월에 도전(道詮) -족리의지(足利義持)의 법명(法名)이다.- 이 영 상인(齡上人 범령(梵齡))을 파견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가게 해 서신을 올리기를, “사신이 요청한 바에 따라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을 곳곳에서 찾아내어 돌려보냅니다. 지금 거듭 전담 사신인 정사(正使) 주 지객(籌知客 규주(圭籌))과 부사(副使) 영 장주(齡藏主 범령(梵齡))를 파견하니, 그들이 별도로 진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동》 ○ 이때는 바로 명나라 영락(永樂) 21년으로, 우리 세종 5년이다.
후화원(後花園) 영향(永享) 11년(1439) 7월 12일에 조선국왕이 일본국왕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었다. 《상동(上仝)》 ○ 이때는 바로 명나라 정통(正統) 4년으로, 우리 세종 21년이다. 국서는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 정통(正統) 9년(1444)
-우리 세종 26년인 갑자년이다.- 봄에 왜구(倭寇)가 조선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조선의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친 다음 5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경사(京師)로 묶어 보냈다.
《명사(明史)》○ 10년(1445)
-을축년- 에 또 나머지 잔당들을 사로잡아 바치자, 황제가 잇따라 권면하는 유시(諭示)를 내리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상동》○ 천순(天順) 초
-천순 원년(1456)으로, 우리 세조 2년이다.- 에 일본의 국왕 원의정(源義政)이 전에 보낸 사신이 천조(天朝)에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려고 하였으나, 감히 직접 사신을 보내지는 못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국서를 보내 대신 전하게 하였다. 조선이 이런 사실을 아뢰자, 조정에서 의논하여 조선에 칙서를 내려 사실을 조사하게 하고, 노성(老成)하고 대체(大體)를 아는 자를 사신으로 뽑아 보내
전처럼 제멋대로 소요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다. 《상동》
후토어문(後土御門) 문명(文明) 5년(1473)에 능등국 자사(能登國刺史) 전산의륭(畠山義隆)이 양심(良心)을 파견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보냈다. 양심이란 자는 승려이면서 의원(醫員)인 자로, 《신응경(神應經)》 및
화개씨(和介氏)와 단파씨(丹波氏)의 종기(腫氣)를 치료하는 팔혈법(八穴法)을 조선에 전하였다.
《이칭일본전》 ○ 이때는 바로 명나라 성화(成化) 9년으로, 우리 성종 4년이다.
6년(1474)에 원의정이 조선에 국서를 보내어 대명국(大明國)의
감합 인신(勘合印信)을 구하였다.
《화한삼재도회》○ 가정(嘉靖) 2년(1523)
-우리 중종 18년인 계미년이다.- 8월에 조선에서 포로로 잡은 왜이(倭夷)를 보내었으며, 아울러 왜적들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중국 사람 8명도 함께 송환하였다.
《명사(明史)》 ○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이르기를, “가정 4년(1525) 2월에 일본인 종설(宗設)이 멋대로 노략질한 뒤 바다로 들어가 숨어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송소경(宋素卿)과 서좌(瑞佐)만을 잡아 하옥시켰다. 그 뒤 조선의 국왕이 아뢰면서 군사를 보내 사로잡은 중림(仲林)과 망고다라(望古多羅) 등 30여 명과 포로로 잡혀갔던 중국 사람 8명을 보내왔다. 이에 과도(科道) 유목(劉穆)과 왕도(王道)에게 명해 복심(覆審)하게 하였다. 옥사(獄事)가 이미 갖추어져서 소경은 반정(叛正)으로 논하고 중림과 망고다라는 고살(故殺)로 논하여 참수형(斬首刑)에 처하였으며, 서좌는 석방하여 환국하게 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 내용은 《명사》 일본열전(日本列傳)에도 실려 있는데, 가정 2년의 일로 되어 있다.
후나량(後奈良) 천문(天文) 11년(1542)에 대내의륭(大內義隆)이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오경신주(五經新註)》와 각루기(刻漏器)를 구하였다. 《이칭일본전》 ○ 이때는 바로 명나라 가정 21년으로, 우리 중종 37년이다.
○ 가정 35년(1556)
-우리 명종 11년인 병진년이다.- 5월에 왜선(倭船) 4척이 절직(浙直) 지방에서 패하여 돌아가다가 조선의 해안으로 표류해 들어갔다. 조선의 왕이 병사를 파견해 이들을 섬멸시키고, 포로로 잡혀갔던 중국 사람 및 왜인들을 도왔던 자 30여 명을 사로잡아서 바쳤다.
《명사》○ 38년(1559)
-기미년- 11월에 조선에서 상주(上奏)하기를, “금년 5월에 왜구가 배 25척을 몰고 해안을 침범하였으므로 신이 장수 이탁(李鐸) 등에게 명하여 거의 전멸시키고, 중국 사람 진충(陳忠) 등 300여 명과 왜구를 불러들여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던 진득(陳得) 등 16명을 사로잡았기에, 모두 대궐 아래에 바칩니다.” 하였다.
《상동》○ 만력(萬曆) 14년(1586)
-우리 선조 19년인 병술년이다.- 이다. 이 당시에 일본국왕은 성(姓)이 진씨(秦氏)였는데, 평신장(平信長)이 관백(關白)이 되고, 평수길(平秀吉)은 평신장의 의자(義子)가 되었다.
평수길은 어려서 미천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그의 어미는 남의 종으로 있다가 임신하였으므로 평수길을 낳자마자 내다 버리려고 하였는데 이상한 징조가 있어서 버리지 못하였다. 장성하여서는 용력(勇力)이 있고 민첩하였으며, 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평신장이 사냥을 나갔다가 그를 보고는 거두어서 말을 기르게 하였으며, 이름을 목하인(木下人)이라고 하였다.
-《이칭일본전》을 보면, 국왕의 성이 진씨라는 것과 평신장이 관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 또 수길의 이름이 목하인이라고 하는 것도 틀린 것으로, 목하는 수길의 옛 성씨(姓氏)이다.평신장은 출병할 적마다 매번 평수길을 데리고 나갔는데,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몹시 총애하면서 전토(田土)를 하사하고 이름을 삼길(森吉)로 고쳐 주었다. 평수길이 평신장을 도와 계책을 세워서 20여 주(州)를 빼앗았다.
평신장이 공이 크고 세력이 강성함을 믿고서 드디어 국왕을 시해(弑害)하고 스스로 찬탈하여 왕이 되었으나, 얼마 뒤에 부장(部長)인 명지(明智)에게 시해당했다. 평수길이 변고를 듣고는 드디어 부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 등과 의병을 일으켜 명지를 주살(誅殺)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평신장의 세 아들을 폐하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이때 관백이 열국(列國)을 병탄하였는데, 오직 관동(關東)
-원뢰조(源賴朝)이다.- 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양조평양록》 ○ 《명사》에 이르기를, “평수길이란 자는 살마주(薩摩州) 사람이다. 당초에 왜의 관백인 평신장을 수행하였는데, 마침 평신장이 그의 부하에게 시해당하였다. 이에 평수길이 드디어 평신장의 군사를 통솔하고 스스로 관백이라고 부르면서 60여 주(州)를 위협해 항복받았다.” 하였다.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일본의 도희거사기(道喜居士記)에 이르기를, “평수길은 미장국(尾張國) 아육군(阿育郡) 사람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축아미(筑阿彌)로 하찮은 백성이다.” 하였다. 또 송하견림(松下見林)은 말하기를, “평수길의 처음 성씨는 평씨(平氏)인데, 뒤에 등원씨(藤原氏)로 고쳤다가 다시 풍신씨(豐臣氏)로 고쳤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중국 태주(台州) 사람 소팔(蘇八)이 포로로 잡혀 왜국에 들어가 수길을 직접 보았는데, 왼쪽 이마 위에 검은 점 몇 개가 있었고, 얼굴 모습이 개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나이가 대략 60세쯤 되었으며, 세 살 난 아들 한 명만 있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평수길은 민간의 노복(奴㒒)으로 본명은 방백고등(方白古登)이며, 은산대두목(銀山大頭目)의 세자(世子)인 사야둔(四也屯)의 부하로 있으면서 정벌하는 데 따라가 공을 세웠다. 그러자 사야둔이 총애하면서 목하(木下)라는 성씨를 하사하고 십길차랑(十吉次郞)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평수길은 아첨하면서 그의 주인을 섬겨 드디어 대장(大將)이 되어 재상(宰相)의 일을 겸임하였다. 그러자 다시 우시(羽柴)라는 성씨를 하사하고 축전(筑前)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 뒤에 사야둔을 죽이고 사야둔의 아들을 축출한 다음 스스로 즉위하였다.” 하였다.
정친정(正親町) 천정(天正) 14년(1586, 선조19)에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지(宗義智)가 조선에 조총(鳥銃)을 보내 주었는데, 조선에 조총이 있게 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화한삼재도회》 ○ 이때는 바로 만력 14년이다.
○ 만력 18년(1590, 선조23)
-경인년- 1월 8일에 관백이 여러 장수들을 모은 다음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동쪽을 정벌하였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내가 바다를 건너가서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비전수(肥前守)에게 명하여 배를 만들게 하였다. 또 열국(列國)들로 하여금 비전주(肥前州), 일기도(一歧島), 대마도(對馬島) 등 세 곳에 성을 쌓아 중국으로 건너가는 관역(館驛)으로 삼게 하였다.
관백이 말하기를, “나의 지혜로움을 가지고 나의 군사를 쓴다면, 큰물이 모래를 무너뜨리고 날카로운 칼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나라인들 멸망시키지 못하겠는가. 나는 대당(大唐)의 황제가 될 것이다. 오직 두려운 바는 명나라의 수군(水軍)이 빈틈없어
-일본에서는 단지 중국의 수군만을 겁내었다.- 중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될까 하는 것뿐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에게 명하여 상인(商人)으로 변장해서 조선에 가서 지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자 태수가 회보(回報)하기를, “조선에서는 20리쯤 군사를 물린 다음 일본 군사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보고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으며, 대마도와 가까이 있는 한 고을만이
-생각건대 바로 부산을 말한다.-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공격하고자 하면 손바닥에 침을 뱉는 것처럼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뒤에 조선에서 중국에 주문(奏聞)하기를, “금년 6월에 대마도 태수 종의조(宗義調)가 그의 아들 종의지(宗義智)를 파견하여 포구에 도착하여서는 경보(警報)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쇄환(刷還)해 온 사람들을 만나 물어보니, 그들이 이르기를 ‘종의조가 병을 칭탁하고는 직무를 보지 않으므로 이미 평의지(平義智)가 대신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종(宗)과 평(平)이 성씨가 다른데도 도리어 성을 바꾸어 부자(父子)처럼 보이게 한 것은, 생각건대 평의지는 수길의 성씨인 평씨인데, 직접 나라를 찬탈하고 섬을 빼앗으면서 역적질하는 것을 도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의조가 보내서 온 것이라고 사칭하여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계책인 것입니다.” 하였다.2월에 다시 화상(和尙) 현소(玄蘇)를 차임(差任)하여 조선에 가게 해서 관백이 말한 이해(利害)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놀랍고 두렵게 여겨 즉시 대두목(大頭目) 10인으로 하여금 투항하게 하니, 관백이 이들을 안치시켜 볼모로 삼았다. 5월에 조선에서 진공(進貢)한 나귀가 일본에 이르자, 관백이
유구(琉球)에 부탁하였던 말로 부탁하면서 금(金) 400냥을 하사하였다.
-이것이 조선에서 관백에게 조공한 시초이다.- 11월에 관백의 동생이 죽었다. 12월에 관백이 풍후주(豐後主)의 아내를 강탈하여 첩으로 삼았다.
《양조평양록》
천정(天正) 18년(1590, 선조23)에 조선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일본국왕에게 국서를 올렸는데, 그 국서에 이르기를, “봄철이라 날씨가 화창한데 잘 지내고 계실 것입니다. 멀리서 듣건대, 왕께서 60여 주(州)를 통일하였다고 하기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수호(修好)를 맺어 우호 관계를 도타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길이 흐릿해서 사신들이 길을 잃고 지체할까 걱정스러웠기에, 몇 년 동안 생각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귀국(貴國)에서 보낸 사신과 함께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잠(許箴) -삼가 살펴보건대, 허잠(許箴)은 허성(許筬)으로 되어야 한다.- 등 세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의 말을 올립니다.”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별폭(別幅)은 다음과 같다.
양마(良馬) 2필(匹), 대응자(大鷹子) 15연(連), 안자(鞍子) 2면(面), 안자에 따른 여러 가지 기구, 흑마포(黑麻布) 30필(疋), 백면주(白綿紬) 50필,
청사피(靑斜皮) 10장(張), 인삼(人蔘) 100근(觔), 표피(豹皮) 20장, 호피(虎皮) 25장, 채화석(彩花席) 10장, 홍면주(紅綿紬) 10필, 청밀(淸蜜) 11석(碩),
해송자(海松子) 6석(碩), 표피(豹皮)로 바탕을 하고 아호피(兒虎皮)로 가를 두르고 전피(猠皮)로 속을 한 아다개(阿多介) 1좌(座). 《일본인(日本人)의 정벌기(征伐記)》 ○ 이때는 바로 만력 18년이다.
19년(1591, 선조24)에 관백 평수길이 조선의 국서에 대해 답하기를, “보내 준 글을 향을 사르면서 두세 번이나 거듭해서 읽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60여 주라고는 하지만, 근년 이래로 서로 나뉘어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고, 선대의 예법이 없어져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역자를 치고 도적들을 토벌하여 이역 지방과 먼 섬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나의 지난날 일들을 돌아보건대, 비루하고 미미한 소신(小臣)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나를 밸 적에 어머니의 품 안으로 태양이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관상을 보는 자가 말하기를, ‘햇빛이 미치는 곳에 비치지 않는 곳이 없을 상이니, 장성하면 반드시 천하에
어질다는 소문이 나고 사해(四海)에 위엄을 떨칠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이함으로 인하여 적들의 마음이 저절로 꺾였는바, 싸우면 이기지 못하는 상대가 없었고, 치면 점령하지 못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미 천하가 크게 다스려져서 백성들을 어루만져 길러 주고, 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히 여겨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많고 재물은 풍족하여 공납받는 것이 옛날보다 만 배나 불어났습니다.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조정의 번성함과
낙양(洛陽)의 화려함이 오늘날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 무릇 사람이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예로부터 100세를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찌 답답하게 여기 왜국에만 오래도록 머물러 있겠습니까.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고 산하(山河)가 가로막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명국(大明國)에 한번 뛰어 들어가 중국 400여 주의 풍속을 우리나라 풍속으로 바꾸고, 천자(天子)의 도성에서 정치의 교화를 억만년토록 베풀어 보려는 생각이 내 마음속 한가운데 있습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들어간다면, 장래의 희망은 있고 목전의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먼 나라나 작은 섬으로서 바다 가운데에 있는 자들 중에서 뒤늦게 도와주러 오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국에 들어가는 날 군사를 거느리고 군영(軍營)을 바라보면서 더욱더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닦을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아름다운 이름을 세 나라에 드러내려는 것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과 같으니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잘 지내면서 보중(保重)하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또 이르기를, “관백이 조선에 답한 서신은 유구(琉球)에 답한 서신과 다르나, 중국에 들어가서 교화를 펴고자 한다는 말뜻만은 자못 같다.” 하였다.
대합(大閤) 평수길이 -살펴보건대, 평수길이 평수차(平秀次)에게 관백(關白)을 양위(讓位)하고 스스로 대합이라고 칭하면서 산성리(山城里)와 복견리(伏見里)에서 거처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관장하면서 홀로 우뚝 서 비록 꼭대기의 관직에 이르렀지만, 중화(中華)를 다스리지는 못하였다. 이에 급히 대명(大明)을 쳐서 이국(異國)의 황제가 되고자 한다.” 하였다. 그러고는 조선으로 하여금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자 하여 조선에 유시(諭示)하였는데, 조선에서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평수길이 크게 분노하여 먼저 조선을 정벌하였다. 《화한삼재도회》
○ 만력 19년(1591, 선조24)
-신묘년- 11월에 조선에서 상주(上奏)하기를, “왜추(倭酋)인 관백 평수길이 내년 3월에 쳐들어오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하였는데, 병부(兵部)에 조칙을 내려서 해안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도록 하였다.
《명사》○ 이때 관백이 관동(關東) 지방을 격파한 뒤 쳐들어올 뜻을 이미 결정하여 각 주(州)로 하여금 병선(兵船)을 많이 만들게 하였다. 그러고는 ‘3월에 대명(大明)을 칠 것인데, 북경(北京)에 들어가는 것은 조선으로 하여금 앞장서서 인도하게 하고,
복건(福建), 광동(廣東), 절강(浙江), 직례(直隸)에 들어가는 것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앞장서서 인도하게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또 사람을 차임해 보내어 유구(琉球)를 위협해서 대명에다가 사기(事機)를 누설치 못하게 하였다.
이때 복건성(福建省) 동안(同安)의 선상(船商)인 진신(陳申)이 유구국에 있었는데, 유구국 진공사(進貢使)의 배를 타고 일본에 갔다가 관백의 정황에 대한
주보(奏報)를 가지고 즉시 배를 타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순무(巡撫) 조삼로(趙參魯)에게 직접 이런 사실을 말하여 순무가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이때가 만력 19년 4월이었다.
또 강우(江右) 사람인
허의후(許儀後)가 살마주(薩摩州)에서 의원(醫員) 노릇을 하고 있다가 역시 동향 사람인 주균왕(朱均旺)으로 하여금 관백의 간사한 계책을 갖추어 기록한 것을 가지고 복건 군문(福建軍門) 장씨(張氏)에게 달려가서 알리게 하니, 복건에서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를 병부에 내리고, 병부에서 조선국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조선에서는 단지 조선이 앞장서서 인도한다고 한 무고(誣告)에 대해서만 자세히 해명하였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이르기를, “왕기(王圻)가 말하기를, ‘조선의 부산 지방은 일본 대마도와의 거리가 겨우 하루 일정이다. 전해 오는 말에 예전에는 이곳이 일본에 속하였는데,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조선에 떼어 주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일본에 크게 흉년이 들어 조선에서 곡식 1만 곡(斛)을 빌려 왔는데, 조선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를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부산 지역을 되돌려 달라고 말하니, 조선의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압록강(鴨綠江) 이북에는 우리 조선의 땅이 있는데, 세 줄기의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오랫동안 중국의 소유가 되었다. 너희들이 능히 우리를 도와서 이 지역을 수복시켜 준다면 부산을 너희들에게 돌려주겠다.」 하였다. 이에 일본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평수길이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이르자, 조선은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다. 아, 조선이 잔폐된 것은 참으로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속문헌통고》에서 말한 바는 아마도 교활한 왜인들이 우리나라와 중국을 이간질하고자 한 데서 나온 말인 듯한데, 이 말이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가서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앞장서서 인도한다는 무함까지 있게 되었으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고는 왜적들이 쳐들어올 걱정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긴 채 오직 연해(沿海) 지방으로 하여금 엄하게 수비하라고만 독책하였을 뿐이다.
9월 7일에 이르러서 관백이 문서를 살마주에 보내어 군사 2만 명과 대장(大將) 6명을 조선으로 보내어 모이게 한 다음 명나라를 침공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각진(各鎭)의 군사 50여 만 명을 다음 해인 임진년 봄에 출동시키게 하고, 자신은 3월 1일에 배를 탈 것이라고 하였다.
11월 18일에 문서를 각 열국(列國)에 보내어 말하기를, “각각 3년치의 식량을 확보하여 먼저 조선을 정벌하고, 일본의 백성을 모두 조선 지역으로 옮겨 조선에서 농사를 지어
명나라를 대적할 기반으로 삼으라. 만약 대당(大唐)의 한 고을을 차지하면 이것은 우리 일본의 소유가 되는 것으로, 중국의 천하는 나의 수중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열국의 군사들로 하여금 조선의 해안에 이르러서는 솥을 부수고 배를 불태우게 하였으며, 사람들을 약탈하고 재물을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날마다 조선을 빼앗아서 밤사이에 성을 쌓게 하였다. 또
한 시각이라도 잠시 머무르거나 한 가지 물품이라도 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싸움에 임해서는 한 사람도 후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물을 만나면 물을 건너며, 함정을 만나면 함정에 빠지게 하였다. 또 멈추자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앞으로 진격하다가 죽은 자는 그 후손을 남겨 두고, 후퇴한 자에 대해서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따지지 않고 본인을 참수하고 가족은 몰살시키게 하였다.
12월에 또 명령을 내려서 서해도(西海道)의 9국이 선봉이 되고 남해도(南海道)의 6국과 산양도(山陽道)의 8국이 응원하되, 온 국력을 다 기울여 출동하여, 부자나 형제 중 한 사람도 집에 남아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변고가 있을까 의심하여 각자 몰래 모의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또 관백은 지난해 7월에 자식을 잃은 데다가 형제마저 없었으며, 풍후주(豐後主)의 아내를 빼앗은 원한을 맺고 있었으므로 직접 출동하지 않았다.
《양조평양록》 ○ 《이칭일본전》에 이르기를, “천정(天正) 19년(1591, 선조24) 4월에 평수길의 아내 천정씨(淺正氏)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기(棄)라고 하였다. 이해에 평수길의 형 평수장(平秀長)이 죽었는데, 아들 기 역시 가을에 죽었다. 이에 평수길은 애석하게 여겨 마음이 상하였으므로 자주 죽원(竹院)에 갔다. 그러다가 반나절 동안의 한가한 시간을 틈타 동복사(東福寺)의 묘운각(妙雲閣)에 올라가서는 갑작스럽게 조선을 침략하려는 마음을 내었다. 평수길이 조선을 정벌할 적에 군사를 나누어 보내면서 자신이 직접 출정하지 않은 것은 일본에 화가 일어날까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다. 그런 만큼 아내를 빼앗은 원한을 맺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20년(1592, 선조25)
-임진년- 여름 5월에 평수길이 마침내 장수인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평의지(平義智), 승(僧)
원소(元蘇), 종일(宗逸) 등을 나누어 파견하니, 수백 척에 나누어 탄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경유해 바다를 건너 부산진(釜山鎭)으로 들이닥친 다음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다. 이 당시 조선은 태평 시대가 오래 계속되어 군사들이 전술을 익히지 않은 채 방비를 느슨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섬 오랑캐가 갑작스럽게 쳐들어와 난리를 일으키자, 멀리서 왜적을 바라만 보고서도 모두 무너졌다. 이에 왕은 왕성(王城)을 버리고,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이다.- 에게 국사(國事)를 내맡긴 채
평양(平壤)으로 달아났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다시 의주(義州)로 도망쳐 와 중국에 내속(內屬)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명사》○
임진년 1월에 평수길이 여덟 장수를 나누어 파견하여 조선의 팔도를 침공하였다. 풍신휘원(豐臣輝元)은 경상도, 풍신경륭(豐臣景隆)은 전라도, 풍신가정(豐臣家政)은 충청도, 풍신승륭(豐臣勝隆)과 풍신원친(豐臣元親)은 경기도로 보냈다. 도성 안에 주둔해 진압한 자는 풍신수가(豐臣秀家)이다. 풍신길성(豐臣吉成)은 강원도, 풍신가치(豐臣家治)는 황해도, 풍신청정(豐臣淸正)은 영안도(永安道), 풍신행장(豐臣行長)과 풍신의지(豐臣義智)는 평안도로 나누어 보냈다.그런 뒤에 또 이들 가운데에서 세 왜추(倭酋)를 뽑아 대수(大帥)로 삼았는데, 세 왜추 가운데에서
섭진주 전소사서(攝津州前小司西) -지명이다.- 비서 소감(祕書少監) 풍신행장(豐臣行長)을 방장(傍將)으로 삼고, 대마주 전사 종(對馬州前司宗)
-지명이다.- 습유시중(拾遺侍中) 풍신의지(豐臣義智)를 선봉으로 삼아 왜병 10만 명을 통솔하고 조선을 침공하도록 명하였으며, 이들 두 왜추가 패전할까 두려워 다시 또 가등 주계두(加藤主計頭) 평청정(平淸正)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2월부터 바다를 건너기 시작하여 부산으로 들어가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칭일본전》에 이르기를,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풍신휘원(豐臣輝元)은 모리우마두(毛利右馬頭)이다. 풍신경륭(豐臣景隆)은 풍신륭경(豐臣隆景)으로 되어야 하며, 소조천 좌위문좌(小早川左衛門佐)이다. 풍신가정(豐臣家政)은 봉수하 아파수(蜂須賀阿波守)이다. 풍신승륭(豐臣勝隆)은 대곡 형부 소보 길륭(大谷刑部少輔吉隆)의 잘못이다. 풍신원친(豐臣元親)은 장증아부 토좌수(長曾我部土佐守)이다. 풍신수가(豐臣秀家)는 부전 중납언(浮田中納言)이다. 풍신길성(豐臣吉成)은 석전 야부 소보 삼성(石田冶部少輔三成)의 잘못이다. 풍신가치(豐臣家治)는 협판 중무 소보 안치(脇坂中務少輔安治)의 잘못이다. 풍신청정(豐臣淸正)은 가등 주계두(加藤主計頭)이다. 풍신행장(豐臣行長)은 소서 섭진수(小西攝津守)이다. 풍신의지(豐臣義智)는 종 대마수(宗對馬守)이다.’ 하였다.” 하였다.- 조선은 나라 안에 오래도록 전쟁이 없었던 탓에 백성들이 싸우는 법을 익히지 않았다. 이에 왜병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소문을 듣고는 임금과 신하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백성들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달아났으며, 고을의 수령들은 왜적들의 모습만 보고서도 항복하였다. 이 때문에 두 왜추(倭酋)는 불과 두 달도 못 되어서 조선의 세 도를 격파하였다. 조선은 모두 여덟 개의 도가 있는데, 당시에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는 이미 격파되었고, 경상도와 전라도는 조석간에 무너질 듯 위태로웠으며, 국왕은 의주(義州)로 피난하여 있었다. 두 왜추가 드디어 왕경(王京)에 들어와서 왕자(王子)를 포로로 잡았다.
《양조평양록》
후양성(後陽成) 문록(文祿) 원년(1592, 선조25)
-《명사》에 이르기를, “평수길(平秀吉)은 직전신장(織田信長)의 세 아들을 폐하고 관백(關白)이라고 참칭(僭稱)하였으며, 문록(文祿)이라고 개원(改元)하였다.” 하였다. ○ 이때는 바로 만력 20년이다.- 에 평수길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비전국(肥前國) 명고옥(名古屋)에 주둔하였는데, 10만 명의 군사가 따랐다. 제1번(番)은 종 대마 시종 의지(宗對馬侍從義智),
소서 섭진수 행장(小西攝津守行長), 송포 형부경(松浦刑部卿), 유마 수리대부(有馬修理大夫), 대촌신팔랑(大村新八郞)이다.
-도합 1만 8700여 명이다.- 제2번은 가등 주계두 청정(加藤主計頭淸正), 과도 가하수 직무(鍋島加賀守直茂), 상량 궁내 대보 장안(相良宮內大輔長安)이다.
-도합 2만 800명이다.- 제3번은 흑전 갑비수 장정(黑田甲斐守長政),
대우 풍 시종 의통(大友豐侍從義統)이다.
-도합 1만 1000명이다.- 제4번은 모리 일기수 원강(毛利一歧守元康), 도진 살마 시종 의홍(島津薩摩侍從義弘),
-일본의 《남포문집(南浦文集)》에 이르기를, “살마수(薩摩守) 도진의구(島津義久)가 수호직(守護職)을 그의 동생인 병고두(兵庫頭) 도진의홍(島津義弘)에게 양위(讓位)하였는데, 도진의홍은 그의 아들인 도진충항(島津忠恒)과 함께 조선에서 종군(從軍)하였다.” 하였다. ○ 《양조평양록》에 이르기를, “평수길은 각 섬에서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웠고 또 자신의 아들이 아직 젖먹이였으므로, 의심스럽고 거리끼는 자는 모두 정벌에 따라나서게 하였다. 살마주군(薩摩州君) 도진의홍과 손자 도진칠랑(島津七郞), 아들 도진흥가(島津興哥)가 모두 조선을 정벌하는 데 따라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고교구랑(高橋九郞), 추월삼랑(秋月三郞), 이등민부대보(伊藤民部大輔), 도진우칠랑(島津又七郞)이다.
-도합 1만 4000명이다.- 제5번은 복도 좌위문 대부 정칙(福島左衛門大夫正則), 호전 민부 소보(戶田民部少輔), 장증아부 토좌수(長曾我部土佐守), 봉수하 아파수(蜂須賀阿波守),
-《남포문집》에 또 이르기를, “봉수하 하원씨 정승(蜂須賀賀源氏正勝)은 문록(文祿) 연간에 평수길이 조선을 정벌하는 데 따라가 군사 4500명을 거느리고 그곳에서 전투를 하여 크게 군공(軍功)을 세웠다.” 하였다.- 생구아락두(生駒雅樂頭), 내도형제(來島兄弟)이다.
-도합 2만 5000명이다.- 제6번은
소조천 시종 융경(小早川侍從隆景), 구류미 시종 수포(久留米侍從秀包), 입화 비탄수 종무(立花飛彈守宗茂), 고교 주선(高橋主膳), 축자 상야개(築紫上野介)이다.
-도합 1만 5700명이다.- 제7번은 안예 재상(安藝宰相)이다.
-도합 3만 명이다.- 제8번은 비전 재상(備前宰相)으로,
-도합 1만 명이다.- 대마도(對馬島)에 주둔하였다. 제9번은 기부 재상(歧阜宰相), 단파 소장(丹波少將)으로,
-도합 1만 1500명이다.- 일기도(壹歧島)에 주둔하였다. 이상 모두 합해서 총 15만 8700명이다.
-《이칭일본전》에 이르기를, “평수길이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조선으로 들어가 팔도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모리 우마두 휘원(毛利右馬頭輝元)은 경상도, 소조천 좌위문좌 융경(小早川左衛門佐隆景)은 전라도, 봉수하 아파수 가정(蜂須賀阿波守家政)은 충청도, 대곡 형부 소보 길륭(大谷刑部少輔吉隆)과 장증아부 토좌수 원친(長曾我部土佐守元親)은 경기도, 석전 야부 소보 삼성(石田冶部少輔三成)은 강원도, 협판 중무 소보 안치(脇坂中務少輔安治)는 황해도, 가등 주계두 청정(加藤主計頭淸正)은 영안도(永安道), 섭진주 전소사서 비서 소감 행장(攝津州前小司西祕書少監行長)과 대마도주 전사 종 습유 시중 의지(對馬島主前司宗拾遺侍中義智)는 평안도를 침공하게 하였으며, 부전 중납언 수가(浮田中納言秀家)는 도성 안에 주둔하면서 진압하게 하였다. 또 이들 가운데서 세 사람을 선발하여 선봉으로 삼았는데, 바로 소서행장(小西行長), 종의지(宗義智), 가등청정(加藤淸正)이다.” 하였다. 4월 12일에
삼봉행(三奉行)인 증전장성(增田長盛), 석전삼성(石田三成), 대곡길륭(大谷吉隆)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제1번 배가 일찍 도착하여 소서행장과 종의지가 먼저 부산포성(釜山浦城)을 빼앗고, 다음으로 동래성(東萊城)과 충주성(忠州城)을 함락시킨 다음, 제2번 배를 타고 온 가등청정 등과 충주에서 만났는데, 가등청정은 늦게 와서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겼다. 충주에서 왕성(王城)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다. 첫 번째 길은 남대문(南大門)으로 통하는데, 일정이 100리 길로 중간에 큰 강이 있으며, 험한 곳이 많다. 두 번째 길은 동대문(東大門)으로 통하는데, 일정이 110리 길이며, 길이 평탄하다.
가등청정 등은 남대문으로 향하고, 소서행장과 평의지는 동대문으로 향하여 왕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왕성은 동쪽에는
여강(麗江), 남쪽에는 한강(漢江), 서쪽에는 서강(西江)의 물이 넘실대고 있고, 남산(南山), 북산(北山), 삼각산(三角山) 등의 산이 높이 솟아 있다. 서울은 사방이 40여 리인데 바위를 깎고 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었으며, 푸른 돌로 사방의 벽을 쌓았다.
북쪽 산기슭에는 남쪽을 향한 자궁(紫宮)이 있는데, 궁전과 누각이 몹시 아름답다. 왕경으로 진격하기 3일 전에 조선 사람들은 모두 피난 갔는데,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는 길주(吉州)를 경유하여 올량합(兀良哈)으로 달아났다. 가등청정이 남대문을 향해 진격하여 왕성에 도달해서는 모두들 피난 갔다는 말을 듣고는 이들을 추격하고자 하여 함경도로 향하였는데, 과도직무(鍋島直茂)가 그 뒤를 이어서 따라갔다. 가등청정과 과도직무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간신히 가서 적을 토벌하면서 개성부(開城府)에 도착하였으며, 6월 18일에는 안변부(安邊府)에 도착하였다. 두 장수가 두 길로 길을 나누어서 진격하여 가등청정은 올량합으로 향하고,
-《이칭일본전》에 이르기를, “세류두자수원(世琉兜字須元)은 일본 송전(松前) 사람이다. 일찍이 고깃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으로 인해 표류해 조선의 제주(濟州)에 20년이나 머물러 살았다. 평수길이 조선을 정벌할 때 가등청정이 올량합에서 이 사람을 사로잡았다. 가등청정이 몹시 기뻐하여 향도(嚮導)로 삼았는데, 후등차랑(後藤次郞)으로 개명하였다.” 하였다.- 과도직무는 함경도 길주(吉州)로 가서 먼저 안평성(安平城)을 도륙하여 600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이어 북단(北丹)
-살펴보건대, 북단은 북청(北靑)으로 되어야 한다.- 과 홍원(洪原)을 함락한 다음, 안평부(安平府)
-안평부는 정평부(定平府)의 잘못이다.- 에 주둔하였으며, 과도오랑무리(鍋島五郞茂里)를 홍원성에 남겨 두었다. 가등청정은 올량합에 도착하여 두 왕자와 후비(后妃) 및 대신(大臣)을 사로잡아 안변(安邊)으로 돌아왔다. 이때 올량합 사람과 한남(漢南) 사람들이 추격해 왔으며, 길주(吉州)의 적병들이 크게 공격해 와 가등청정이 위태로워졌다. 그러므로 가등청정이 과도직무에게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과도직무가 성부(成富)와 지영(持永) 두 사람의 군사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다. 이에 가등청정이 아무 탈 없이 함흥(咸興)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으므로, 과도직무를 찾아가 구원병을 보내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때 성부무안(成富茂安)의 용맹스러운 이름이 조선에 알려졌다. 얼마 뒤에 가등청정과 과도직무가 함경도 22개 군을 토평(討平)하였다.
10월에 과도직무가 영강산(永岡山)
-함흥 주위에 있다.- 에 주둔하였다. 이 당시에 매천(梅天), 매백(梅白) 형제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과도직무가 토벌하여 1500급을 참획하였다. 또 올평산(兀平山)
-함흥에서 북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에
관찰사(觀察使)가 있으면서 수만 명의 군사를 일으켰는데, 과도직무가 300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1300여 급을 참수한 다음 귀를 모두 잘라서 일본으로 보내었다.
이보다 앞서 길주의 성안에 있던 가등청정의 군사가 수만 명의 군사에게 포위당하여 몹시 궁박하게 되었으므로, 과도직무에게 사유를 고하였다. 이에 과도직무가 구원병 600명을 보내어 방어하였으니, 그 고전(苦戰)한 상황을 잘 알 수가 있다. 길주는 올량합 및 달단(韃靼)과의 경계 지역으로, 왕성에서의 거리가 30일 정도 가야 하는 곳이다.
-가등청정이 주둔한 안변(安邊)에서는 7일이 걸리고, 과도직무가 주둔한 함흥에서는 6일이 걸린다.- 가등청정이 다시 길주로 가서 과도직무의 군사인 간조가청(諫早家晴)과 성부무안(成富茂安)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하여 크게 싸워서 3000급을 참획한 다음 함흥으로 돌아왔다. 과도직무가 획득한 8개 성은 덕원성(德原城), 문천성(文川城), 고원성(高原城), 영흥성(永興城), 정평성(定平城), 홍원성(洪原城), 금산성(金山城), 함흥성(咸興城)이다.
《화한삼재도회》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승(僧) 청한(淸韓)이 지은 가등청정의 만사(挽詞)에 이르기를, ‘조선 왕자의 형제는 장자를 임해(臨海)라 하고 차자를 순화(順和)라 하는데, 회령(會寧)으로 달아났다. 이에 가등청정이 이들을 추격해 영안(永安)에 이르러서 회령성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회령성의 수만 명 군사가 왕자를 옹위한 채 성루(城壘)를 굳게 지키면서 화살과 돌을 번갈아 쏘아 댔으며, 화전(火箭)을 비 오듯 쏘아 대었다. 그러나 가등청정의 흉중에 어찌 걸리는 것이 있었겠는가. 성안으로 한 사람이 곧장 뛰어들어가서 왕자를 사로잡자, 성안의 군사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미 성안이 텅 비었으므로 군사들을 통솔하면서 지휘하였다. 후비(后妃)와 궁녀들을 모두 왕경으로 호송하였으며, 그 뒤에 부산으로 나왔다.’ 하였는데, 《징비록(懲毖錄)》에는 이르기를,
‘회령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이 두 왕자를 묶고서 가등청정의 군사를 맞이하였다.’ 하였는바, 만사와는 내용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등청정이 올량합에다가 두 왕자를 가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올량합은 여진(女眞)의 지역이다. 만사에는 가등청정이 두 왕자를 사로잡은 뒤에 7일 동안 진격하여 곧장 여진으로 들어가서 성을 함락하고 위세를 떨쳤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6월 갑술일에 총독(摠督) 건달(蹇達)이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을 파견하여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은 난리를 피해 장차 요동(遼東)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는데, 학걸(郝杰)이 국경 바깥의 적당한 곳을 택해 거처하게 하고, 종관(從官)과 위사(衛士)들에게 두루 물품을 지급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그리하라고 하였다.
7월에 병부(兵部)에서 의논하기를,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험고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국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온 나라의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게 하라.” 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 왜적들이 이미 왕경에 들어와서 왕의 분묘(墳墓)를 파헤치고, 왕자와 배신(陪臣)들을 위협하고, 창고를 털어서 조선의 팔도가 거의 다 함락되었으며, 머지않아 왜적들이 압록강을 건널 판이었다. 이에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사신이 길에 줄을 잇고 있었다.
조정의 의견은, 조선이 중국의 울타리 구실을 하는 번국(藩國)이므로 반드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행인(行人)
설번(薛藩)을 파견해서 조선국왕에게 대의(大義)로써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을 유시(諭示)하고, 10만 명의 대군이 곧 도착한다고 널리 알리게 하였다. 그런데 왜병이 이미 평양에 도착하였으므로 조선의 여러 신하들이 더욱 급박해져서
애주(愛州)로 나와 피난하였다.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갔으나 전사하였다. 부총병 조승훈은 군대를 통솔하여 압록강을 건넜다가 겨우 목숨만 건지고 돌아왔다. 그러자 중국 조정이 크게 놀랐다.
《명사》○ 왜병들이 평양에 모여 있으면서 조선 전체를 쓸어버린 다음 중국으로 쳐들어오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두 왜추(倭酋)가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바다를 건너와 조선을 정벌하면서 다행히도 전승(全勝)을 거두어 삼한(三韓) 땅을 말채찍 한 번 휘두르는 사이에 평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라도와 경상도의 각 고을은 대부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군사가 압록강을 건넜다가는 적들이 도리어 우리의 뒤를 추격해 올 것이니, 중병(重兵)으로 왕경에 주둔해 있느니만 못하다. 그러면서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서쪽으로 전라도를 진격해 들어간 다음 서해도(西海道)로 빙 돌아서 나와 대병을 일으켜 수로와 육로로 동시에 진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군사를 나누는 한편 화상(和尙)인 선소(仙蘇)
-이름은 현소(玄蘇)이다.- 와 죽계(竹溪)
-이름이 죽계(竹溪)이다.- 등을 차임하여 격문(檄文)을 가지고 가서 조선에 고하기를,
“일본이 대명(大明)과 싸우고자 군대를 출동시켰으니, 조선쯤은 구우일모(九牛一毛)요, 대해일속(大海一粟)인 셈이다. 그러나 국왕의 명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조선에 길을 빌려 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통일된 이후로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들은 풍족해 다른 나라를 빼앗을 마음이 없고 또 재물을 약탈할 뜻도 없는바, 단지 옛 원한을 갚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날에 장주(蔣洲)의 객선(客船)이 오산(嶴山)에 정박하였던 일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빌어서 한 말이다.- 조선은 명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대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선을 거치지 않고 어느 나라를 거쳐 들어가겠는가. 이 때문에 조선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곳곳마다 성(城)과 돈대(墩臺)를 쌓고 도로를 넓혀 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항하는 자는 도륙하고 항복하는 자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은 어느 한 성도 우리의 예봉을 당해 내지 못하여 부산에서 평양까지 오는 데 한 달도 채 안 걸렸다. 그런 데다가 풍신청정(豐臣淸正)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만강(豆滿江) 가에 이르게 하였는바, 그 일대가 모두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나는 계속 전진해서 압록강에 가서 주둔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며칠 앞서 미리
예조 판서 이공(李公)에게 글을 보내는 바이니, 답장을 가지고 평양으로 오기 바란다. 답장을 늦게 하지 말라. 잘 살피기 바란다.”
하였다.
-이 글은 심유경(沈惟敬)이 전해 온 것인데, 그 첫머리의 한 구절에서 일본 뭇 신하들의 뜻이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에 ‘본래는 봉작(封爵)을 받고자 해서 온 것이다.’ 하였으니, 장차 누구를 속이겠는가.격서(檄書)가 이르자, 국왕은 먼저 중국 조정에 위급한 상황을 고하면서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소서행장이 별장(別將)을 나누어 보내 수군(水軍) 한 부대를 이끌고 서해(西海)를 경유해 곧장 전라도로 갔다. 전라도는 논밭이 모두 옥토라서 백성은 많고 부유해 국가의 재정과 군대의 군량을 모두 이곳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 비록 조선 팔도의 태반이 약탈당하였다고는 하지만, 다행히 왜적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만약 전라도를 한번 잃는다면 조선 전토가 일본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수군의 대장인 원균(元均)이 수군을 통솔하면서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서 왜적의 전함을 막아 온 힘을 다해 싸우면서 치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 퇴각하였다. 이에 비로소 왜적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지 못하여 감히 대대적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왜병들은 본디 수전(水戰)에는 익숙하지 않은바, 전선(戰船)이 비록 많기는 하였으나 뾰족하고 작으며 무르고 얇아서 우리 측의 평평한 배와 충돌하는 것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 또 왜적들은 몸을 잽싸게 움직이기를 잘하고 칼과 총을 쓰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데, 일단 배에 들어간 상태에서 풍랑이 일어 배가 출렁이게 되면 몸을 잽싸게 움직일 수가 없고, 칼과 총이 서로 호응할 수가 없게 된다. 이에 우리 측 군사들이 장창(長槍), 대노(大弩), 대포(大砲)를 써서 공격하면 형세상 반드시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왜적들이 조선의 주사(舟師)를 만나면 피하기만 하면서 공격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왜적을 막는 데 있어서는 먼서 수군을 써야 하는 것으로, 이것이 이른바 바다 밖에서 막는다고 하는 것이다.조선에서 상주(上奏)하는 글이 잇따라 도착하자, 온 조정이 경악하여 ‘왜적이 조선을 침공하고 중국을 엿보는 것은 200년 이래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하면서 구원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7월에 요동 순안(遼東巡按)
이시자(李時孶), 요양 수도(遼陽守道) 형주준(荊州俊)이 명을 받들어서 요장(遼將) 조승훈(祖承訓)과 유격(遊擊) 사유(史儒)를 파견해, 군사 3000명을 선발하여 압록강을 건너가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 당시에 두 장수가 통솔한 군사들은 모두 요동의 마군(馬軍)이었는데, 그들은 조선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또 왜적을 치는 방법도 몰랐다. 그런 데다가 마침 장맛비가 쏟아져 산골짜기 물이 쏟아져 내리는 통에 말이 진창에 빠져 말발굽이 물러져서, 한번 고갯길을 오르고 나면 말발굽이 모두 갈라졌다. 이에 반해 왜적들은 편안히 쉬면서 피곤해진 우리 중국 군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7월 15일에 평양의 안정관(安定館)에 도착하여 미처 군영을 정돈하지도 못 하였는데, 이날 밤에 왜적들이 쳐들어왔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마침내 소란스러워졌다. 왜적들이 모두 귀신의 머리에 사자의 얼굴을 한 가면을 쓰고 있었으므로, 관군(官軍)이 탄 말이 그들을 보고는 놀라서 뒤로 물러나다가 진흙탕에 빠져 일어나질 못하였다. 이에 사졸들이 모두 갑옷을 벗고 말에서 내려 도망치다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함정에 빠지거나 논 속으로 들어갔는데, 왜적들이 바짝 다가와서 칼로 내리쳤다. 유격 사유는 진중(陣中)에서 죽었고, 조승훈은 겨우 자기 한 몸만 빠져나왔으며, 3000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자는 수십 명뿐이었다. 보고가 올라오자 온 조정이 두려워하면서 경사(京師)에 계엄령을 내렸다.
《양조평양록》 ○ 살펴보건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임진록(壬辰錄)》에 이르기를, “조승훈이 평양으로 진격해 올 때 마침 큰비가 내렸는데, 빗줄기가 쏟아지는 속에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하였다. 왜적들이 성안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조총(鳥銃)을 쏘아 대자 사유는 탄환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고, 조승훈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왜적들은 기세가 더욱 교만해져 우리 군사들에게 글을 던졌는데, ‘여러 마리의 양이 한 마리 호랑이를 공격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하였다.
소서행장과 평의지가 평안도를 공략하여 평양에 주둔하였는데, 평양은 조선의 옛 서울이다. 대우의통(大友義統)은 봉산(鳳山)에 진을 쳤는데, 이곳에서 평양까지는 84리이고, 흑전장정(黑田長政)은 배천(白川)에 진을 쳤는데, 이곳에서 봉산까지는 42리이며,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과 구류미수포(久留米秀包) 등은 그다음에 진을 쳤다. 조선의 국왕이 대명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조승훈과 사유가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와 평양의 안정관에 주둔하였다. 《화한삼재도회》
소서행장이 3만 명의 군사를 독려하면서 평양성을 고수하였는데, 사유산(史儒筭) -살펴보건대, 사유(史儒)로 되어야 한다.- 과 조승훈이 공격해왔다. 소서행장이 한밤중에 보졸(步卒)을 보내어 소란을 피우자, 명나라 군사들이 동요하였다. 이에 소서행장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들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하였다. 그다음 날 소서행장이 나아가 공격하였는데, 갑옷과 말 장식, 깃발 등이 모두 번쩍거리자 명나라 말이 크게 놀라 달아났다. 사유산 등이 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진흙에 허리까지 빠져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던 탓에 소서행장이 대승을 거두었다. 사유산은 이 싸움에서 죽었으며, 조승훈은 도망쳤다. 이에 대명(大明)이 진동하였다. 송응창(宋應昌) 등이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였다. 《이칭일본전》
○ 8월 을사일에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로 삼았다. 이 당시에 왜군이 풍덕군(豐德郡) 등지에 침입하였으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계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왜군의 동정을 정탐하기로 의논하였다. 이때 가흥(嘉興) 사람 심유경(沈惟敬)이 초모(招募)에 응해 왔는데, 심유경이란 자는 시중의 무뢰배였다.
이때 평수길은 대마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가 나누어 파견한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요해처를 지키는 것을 성원하고 있었다. 심유경이 평양에 이르자, 접대하는 예법이 아주 형편없었다. 소서행장이 짐짓 말하기를, “천조(天朝)에서 다행히 진군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도 머지않아 돌아갈 것이다. 대동강(大同江)을 경계로 삼아서 평양 서쪽은 모두 조선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심유경이 이런 내용으로 보고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
왜적들은 속임수를 잘 쓰므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송응창 등에게 진군하도록 재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성은 심유경에게 몹시 미혹되어 있었으므로 심유경을 유격(遊擊)으로 임명한 다음 군전(軍前)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며, 금(金)을 가지고 가서 이간질시키게 하였다.
《명사》○ 대사마(大司馬) 석성(石星)의 의견으로 심유경을 파견하여 왜영(倭營)에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는데, 심유경이 문득 봉공(封貢)에 대한 의논을 주창하면서 왜적들로 하여금 군사를 물리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평행장(平行長)이 평양 밖으로 퇴군하는 것만을 허락하면서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겠다고 하였으며, 또한 날씨가 추워졌으므로 거짓으로 이를 허락하여 우리 군사들을 구원하는 것을 늦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사를 퇴군시킬 뜻이 없었다. 심유경이 이를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평행장이 속임수를 쓰는 것을 눈치채었다. 이에 군사를 쓰기로 뜻을 모은 다음, 소사마(少司馬) 송응창(宋應昌)을 도어사(都御史)로 삼아 조선을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송응창의 사람됨은 얼굴이 모졌고 붉은 수염이 났으며,
눈빛이 형형하여 산골짜기에 번개가 치듯 빛났고, 침착하고 굳센 데다가 강개한 맘을 품고 있어서 영웅다운 기략(器略)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산동(山東)을 순무(巡撫)하면서는 변무(邊務)를 다스리는 데에 마음을 두어 해방사의(海防事宜)에 대한 다섯 가지 일을 올렸으며, 또 해방요략(海防要略)에 대해 올렸는데, 그 대강의 뜻은 ‘왜노(倭奴)들의 정형(情形)이 이미 드러났으니 미리 방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이로 인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쌓아 두라는 세 가지 계책을 올렸으며, 이어 군기(軍器)와 화약(火藥)을 제조하고, 연해(沿海)의 관병(官兵)을 나누어서 파견하며, 계책을 세워 방어책을 펴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모두들 지나친 계책으로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중외(中外)가 흉흉해지자, 병부(兵部)에서는 ‘조선을 회복하는 자가 있으면 은(銀) 1만 냥을 상금으로 주고 백작(伯爵)에 봉하여 세습시키겠다’는 내용으로 현상(懸賞)을 내걸었는데도 응모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비로소 탄복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송응창을 추천해 특별히 왜적을 정벌하는 일을 경략하게 한 것이다.
임진년 9월 26일에 송응창이 도성 문을 나서면서 아뢰어 이여송(李如松)을 제독(提督)으로 삼고, 병부랑(兵部郞) 유황상(劉黃裳)과 원황(袁黃)을 찬획(贊劃)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고는 사방의 진(鎭)에 격문을 보내어 돈대(墩臺)와 보루를 수리하고 파수병을 더 늘리며, 군기(軍器)와 화기(火器)를 제조해 해구(海口)에 나누어 배치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협수(協守),
부총병(副摠兵), 유격(遊擊), 수비(守備) 등의 관원을 더 뽑아서 각자 군사를 거느리고 해구에 머물면서 남북(南北)을 제어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 제독 이여송은 아직도
영하(寧夏)에 매여 있었으며, 조발하여 모은 군사도 겨우 3만 5000명뿐이었다. 송응창은 부장(副將) 양원(楊元)으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이여백(李如柏)으로 하여금 좌군(左軍)을, 장세작(張世爵)으로 하여금 우군(右軍)을 거느리게 하고, 참장(參將)과 유격(遊擊) 등 여러 장수들을 그들의 휘하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그런 다음 군사를 통솔하여 관문(關門)을 나섰는데, 기율이 엄명하고 군용(軍容)이 정제되어 있었다.
-어떤 본(本)에는,
“송응창(宋應昌)이 시랑(侍郞)으로서 조선을 경략하게 되었는데, 10월 초에 명령을 받았다. 송응창은 재주와 명성이 당초에 드러나 있었다. 사마(司馬) 석성(石星)이 그가 절강(浙江) 출신이어서 왜적들을 막는 데 익숙하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 그가 올린 《연해험요도설(沿海險要圖說)》을 보고는 특별히 천거하여 등용시켰다. 송응창이 명을 받음에 미쳐서 막 건의하려고 하였는데, 석 사마(石司馬)가 심유경(沈惟敬)의 유세(遊說)를 들어서 봉공(封貢)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다.
심유경이란 자는 본디 무뢰배로서 경사(京師)에서 노닐 적에 오(吳) 땅의 협기(俠妓)인 진담여(陳澹如)와 친밀하게 지냈는데, 진담여에게는 정사(鄭四)라는 종이 있었다. 정사는 예전에 일본 땅에서 도망쳐 돌아온 자로, 자못 왜국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심유경은 어려서 왜란(倭亂)을 겪었으므로 왜국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석 사마가 조선에 왜적들이 침공하였다는 보고를 듣고서는 널리 여러 사람들의 계책을 모으려고 하였는데, 마침 석성의 첩의 아버지인 원무(袁茂)가 진담여와 노닐 적에 만나 본 심유경을 천거하였다. 석 사마가 심유경을 불러다가 말을 나눠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으며, 조승훈이 패하자 심유경을 파견하여 왜적들과 통하게 하였다.
심유경이 많은 돈을 가지고 가기를 요구하니, 석 사마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심유경이 수천 금을 가지고서 망의(蟒衣), 옥대(玉帶), 화폐(花幣) 등을 사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가 왜장인 풍신행장(豐臣行長)을 만나 보고는 그들과 함께 평양성에 머물러 있었다. 심유경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뜻을 전하자, 풍신행장이 승 현소(玄蘇)와 종일(宗逸)을 보내어 답하였다. 8월 29일에 심유경이 먼저 금폐(金幣)를 선사하고서야 풍신행장과 건복산(乾伏山) 기슭에서 서로 만났다. 이로 인하여 심유경이 화호(和好)의 편리함에 대해서 극력 진술하니, 풍신행장이 심유경에게 일곱 가지 일을 요청하였는데, 심유경이 개연히 허락하였다. 그러자 풍신행장이 평양의 방수(防守)를 철수하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 화의(和議)가 맺어지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풍신행장이 심유경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일본에서 차임되어 온 선봉(先鋒) 풍신행장은 삼가 대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 심공 합하(沈公閤下)께 아룁니다. 일본이 중국에 조공하는 것이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을 조선에다가 화의를 맺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일본의 요청에 부응하지 않았으므로 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러한 때 합하께서 평양에 오셨으니, 이는 실로 우리 두 나라가 옛날의 규례를 회복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합하께서 이런 내용으로 조정에 전해 아뢰어 중국에서 천사(天使)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맺은 증험으로 삼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천사를 보내는 것을 허락한다면 서로 기다리는 것은 중간 50일로써 기한을 삼겠습니다. 만약 기일을 어기고 싸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중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여러 장수들은 조선의 성안에 머물러 있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를 양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만 줄입니다. 임진년 9월 3일에 풍신행장은 올립니다.’ 하였다.
심유경이 9월에 화의가 맺어졌다는 내용으로 회보(回報)하였다. 이때 경략 송응창은 요양(遼陽)에 이르렀고,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이여송은 군사를 세 협(協)으로 나누어서 중협(中協)은 양원(楊元)이, 좌협(左協)은 이여백(李如柏)이, 우협(右協)은 장세작(張世爵)이 거느리게 하였으며, 오유충(吳惟忠)은 3000명의 남병(南兵)을 거느리고 우협에 속하게 하였는데, 군사는 도합 5만 명이었다. 만력 20년 10월 27일에 산해관(山海關)을 나섰다.” 라고 되어 있다.○ 《명사》 주국조열전(朱國祚列傳)에는,
“일본이 조선을 함락시키자 석성이 심유경의 말에 혹하여 봉공(封貢)의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다. 이에 주국조(朱國祚)가 면전에서 석성을 힐난하기를, ‘이자는 시골 출신의 무뢰배로서 이 틈을 타고서 간사한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는 자일 뿐입니다. 공은 나라를 욕되게 한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으나, 석성이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청인(淸人)의 기록에는,
“심유경이 낙담하여 연중(燕中)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우거하고 있는 집 곁에 빈 집이 났다. 이에 심유경이 얼음을 파는 집의 짐꾼 노릇을 하는 심가왕(沈嘉旺)이란 자에게 집을 사서 살게 하였다. 심가왕이란 자는 본디 낙청(樂淸) 조상길(趙常吉)의 집종이었는데, 어려서 왜노(倭奴)들에게 붙잡혀 가 일본에 실려 갔다가 18년 뒤에 바다를 건너 돌아온 자였다. 심유경은 때때로 심가왕에게 가서 왜국 땅의 풍속에 대해 담소하여 왜국의 기물(器物)이나 사투리까지도 모두 다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마침 대사마 석성이 조선의 일을 경략하게 되었는데, 석성이 총애하는 첩의 아버지인 원모(袁某)가 항상 심유경과 놀았는바, 심유경은 날마다 원모와 왜국의 일에 대해 말하면서 마치 자신이 직접 왜국에 갔다 온 것처럼 말하였다. 이에 원모가 이런 내용으로 석성에게 고하자, 석성이 심유경을 불러 말을 나눠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마침내 상께 아뢰어 유격장군을 제수하고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어 봉공의 의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얼마 뒤에 사마 석성이 심유경의 사특한 말에 혹하여 다시 심유경으로 하여금 왜영에 가서 봉공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심유경이 병부의 자문(咨文)을 받고서 요양에 가 경략 송응창을 알현하자, 송응창이 심유경에게 이르기를, “왜적들이 봉공을 구한다면 공손한 말로 대궐에다가 아뢰어야지 어찌 감히 조선을 격파하고서 우리를 협박한단 말인가. 나는 명을 받들어서 왜적을 토벌하고 있으니, 왜적과는 오직 싸움이 있을 뿐이다. 너는 가서 왜적을 보거든, 봉공을 구할 경우에는 의당 조선 전토를 다 되돌려 주고 모든 군사를 부산으로 철수시킨 다음 표문(表文)을 갖추어 올리면서 칭신(稱臣)하라고 하라. 그러면 내가 들어줄 것이다. 지금 논의하면서는 단지 평양에서 물러나겠다고만 하였다. 이것은 계책을 써서 우리의 진군을 늦추려는 것이니, 싸움이 있을 뿐이다. 너는 목을 잘 보존하려거든 엉성하게 하지 말라.” 하니, 심유경이 그저 예예 하면서 물러갔다.
송응창은 왜적들이 조선을 격파하고 난 뒤로 기세가 몹시 창성하므로 한번 크게 징계하지 않으면 앞으로 계책을 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山海關)을 나간 다음 광녕(廣寧)을 경유하여 요양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선국왕이 우리 군사가 빨리 나오기를 독촉하여, 이를 독촉하는 사신이 길에 줄을 잇고 있었다. 송응창이 조선의 사신에게 이르기를, “우리 군사는 풍우(風雨)와도 같으니, 반드시 아침에 강을 건너면 저녁에는 왜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가 출동하면 군량이 뒤따르는 법이다. 압록강 서쪽에서는 우리가 군량을 댈 것이나, 압록강 동쪽에서는 너희들이 군량을 대라. 군량은 반드시 5만 명의 군사가 3개월 동안 먹을 수 있도록 마련하라.” 하니, 조선국왕이 승낙하였다.
《양조평양록》○ 겨울 10월 임인일에 이여송(李如松)을 제독계요보정산동군무 충방해어왜총병(提督薊遼保定山東軍務充防海禦倭摠兵)으로 삼아 조선을 구원하되, 기일을 정해 동정(東征)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동생인 이여백(李如柏)과 이여매(李如梅)도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섬멸하는 것을 돕게 하였다. 이여송은 이때 막 공을 세워서 기세가 더욱더 교만하였으므로 경략 송응창과 서로 맞서면서 굽히지 않았다.
12월에 이여송이 군영에 도착하였다. 심유경이 왜적들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왜추(倭酋)인 풍신행장이 책봉(冊封)해 주기를 요청하면서 평양 서쪽으로 물러가 대동강을 경계로 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이여송이 심유경의 음험함을 질타하면서 참수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참모(參謀) 이응시(李應試)가 말하기를, “심유경의 말을 빙자하여 거짓으로 왜추를 책봉하는 체하면서 몰래 가서 습격한다면, 기이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하니, 이여송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이에 심유경을 병영에 잡아 놓고서 맹서한 다음 압록강을 건넜다.
《명사》○ 12월 8일에 제독 이여송이 비로소 와서 송 경략(宋經略)을 알현하였는데, 송 경략이 말하기를, “지금 꼴과 군량이 이미 채워졌고, 장사(將士)들이 이미 모였으며, 화약(火藥)과 병기(兵器)도 모두 갖추어졌는데, 위력이 세다. 그러니 오직 장군이 서쪽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꺼번에 섬멸하라.” 하니, 제독 이여송이 자리를 비껴 피하면서 말하기를, “감히 명령한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마침 심유경이 왜영(倭營)에서 이곳으로 와서는 처음의 의논을 그대로 고집하였다. 그러자 송응창이 노하여 꾸짖기를, “왜적들이 망할 날이 머지않았는데 어찌 감히 부질없는 말로 나를 속이려고 드는가.” 하고는, 명령을 내려 곤장을 친 다음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제독과 찬획이 심유경은 석 사마(石司馬)가 보낸 자이니 그를 죽일 경우 석 사마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심유경을 죽이지 않고 제독에게 주어 군중(軍中)에 구금시키도록 하였다.
16일에 맹서하고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군율(軍律) 32개 조항을 반포하니,
전군이 숙연하였다. 그때 마침 상으로 내린 은 10만 냥이 도착하였으므로 환호성 소리가 하늘까지 퍼져 나갔다.
《양조평양록》
첫댓글 나보고 하는 말인가 본데 나는 경상도 사람도 아니고 서울사람입니다. 나는 님이 틀린걸 지적한겁니다. 졸렬하게 굴지 맙시다. 어디 인터넷바닥에서 줏어본거 가지고 돌팔이짓 하지 말라고요. 지역감정에 사로잡힌건 인터넷에 보이는 자칭 역사학자들입니다. 나도 반도사관 믿지 않지만 대륙사관 주장하는 사람들중에 상당수가 어찌나 하나같이 친중에 경상도에 대한 은근한 자격지심이 보이던데요. 자기들은 객관적이라면서 전혀 그렇지 않던데
솔찍해 지십시다...
엄마 아빠 중 한 분은 경상도사람 아니곤...이리 쌩뚱맞게 복건성 경상도 얘기에 거품물 일 없을줄 압니다.
윗 글도 근거없는 인터넷 집시글이란 얘기신지여...?
뭘 솔직해져요. 난 서울사람이고 양친은 전라도 경기도사람입니다. 물타기하지 마시죠. 지금 이글에 태클거는걸로 보입니까
그럼, 임란 7냔간 경상도를 점거한 ...기록상엔 거의 싸이코 성 도착증환자들 수준였던 왜구들이...
경상도 여인들 정절을 지켜줬다 보시는 겁니까...?
당대 경상도 여인들은 사후피임약들을 상시 구비해...왜놈 혼혈들을 낳지 않았단 겁니까...?
아님, 왜놈들이 털복숭이란 부분이 믿을 수 없단 겁니까...?
분명하게 어느 부분이 잘못이라 명기하시져...
그리고 털복숭이 아이들 얘긴...위 본문글도 아니고...댓글에도 비공식 설이라 명기 했거든여...?
역사연구하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편협해서 하는 말이오. 거기에 정치성향까지 드러내놓고 보이는데 어찌나 숨막히던지
그렇다고 내가 전라도 욕하는 글에는 욕 안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지방의 대해 사심 가득히 담긴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오
솔직히 말해...
난 두 남쪽지방인들의 편협한 지역감정이 대한민국 말아먹고 있다 확신합니다.
그냥 독립해 나가고...북한과 통일됐으면 좋겠습니다.
생뚱맞는 얘기 그만하시죠. 님같은 사람들이 한국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겁니다. 예전부터 경상도가 반도 원주민이라느니 사심있는 표현을 하시더만
댓글로 나도는 비공식이라 했다고 명기했는데 뭘 물타기...?
말귀 못알아듣네 계속 우기네 그 비공식이 조작된 짤이라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계속 이러네
뭔 개같은 소리를 하십니까 털많은 아기가 태어낳다라는 비공식적인 얘기가 있다면서요 그 얘기가 징비록에 나왔다면서 구라를 치는 짤이 돌아다니던데
비공식이라 명기했잖습니까...
7년 장기점거 와중에도 당대의 경상도(복건성)에 혼혈이 없었을 거란 주장입니까...?
아님 왜놈 혼혈아들이 털이 많았단게 거짓이란 주장입니까...?
분명히 좀 해 주시져...?
그러니까 그 비공식을 님도 인터넷에서 본거잖아요. 털복숭이 어쩌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얘기하더만 인터넷에서 본거 맞구만 뭘 그래요. 지금 님이 어디서 보거나 들은걸 가지고 얘기하는데 왜 이제는 사실확인이 아니라 가정을 하면서 물타기 하십니까?
님도 그거 보고 하는 말 아니냐고요. 근데 그게 가짠데 무슨 뚱딴지같으 소리를 하냐고요. 참내 자기가 비공식이라고 해놓고선 그 비공식이라는게 인터넷에 돌아다는 징비록 조작짤인데 자가당착에 빠져가지곤ㅉㅉ
먼저 두 분께 감정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감정은 가장 큰 폐해를 가져온 아주 나쁜 감정입니다. 경상도나 전라도 다를 것이 없는 조그만 땅에서 "서로 치고 받는 싸움"은 "반도사학과 그 후대의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어봐도 결코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왜인들이 털복숭이라는 말은 그 근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는 "아이누와 오키나와 토착민"을 뺀 나머지 인들은 결코 떨이 많은 자들이 아니거든요. 미륵돼지님! 역사연구하는 자들은 간혹 그런 분도 계시겠지만 지역감정이나 좌우에 빠져 허덕이는 분들은 의외로 적습니다.
문무님은 저런 사람 강퇴 안하시나요? 내가 이곳에서 댓글은 별로 안달았지만 저 사람은 전부터 경상도 타령하던 사람 아닙니까? 난 정말 순수하게 우리나라를 위한 사람만 봤으면 합니다. 이런식으로 은근슬쩍 특정 지역사람인냥 행세하며 지역감정 조장하는 사람은 보기가 싫네요.
특정지역사람인냥 행세여...?
내가 어느지역 사람인데 경상도만 욕했다 하시는지...?
4대째 계속 한동내 사는 경기도 사람인데여...?
그 이전엔 한양...고양이라하나...고양은 거쳤고...여기 서울같진 않고여...
제가 전라도사람인데...경기인 행세한단 의심이신가여...?
어젠 경상도 사람이라면서요. 그럼 경상도 사람이 아니면 조선족이신지? 조선족이 이런짓 잘하던데... 조선족댓글부대이신가... 걔네들 우마오당이라고 남에 나라 온라인에 기생해가며 분탕질치는게 일입니다. 이런곳에 없을리가 없죠. 대륙조선사 카페가 와해가 된것도 다 그놈들 소행
내가 날 경상도 출신이라 했다고여...?
무고죄로 사식 좀 드시렵니까?
내몸엔 털이 없는데<< 이랬잖아요. 그게 본인을 경상도사람이라고 말한거 아닙니까?
중국 공산당 두둔하는 조선족 댓글부대...?
참 이런 분들이 이 글들을 보고 있단게...답답해 집니다.
내 글 전체가 현 중국 공산당 지배개층은 구한말에 동서남아에서 겨 올라온 왜노 혼혈족이란 글인데...
그런 글은 않 보이고...경상도 냇글 딱 한줄만 독해를 하셨단 말씀이신지여...?
조선족 알바가 중국 공산당 동남아 왜라 떠들면 살아 남을 수 있다 보시는지...?
참으로 답답해 집니다.
뭔 상상력이 이리 엄청나고...삑싸리가 심한지...
자꾸 말돌리지 마세요. 교묘하게 논지 이탈하시는데 우습습니다. 나도 현중국애들 출신이 서남동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족의 대담성에 대해 과소평가하네요. 님같이 중국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조선족이 거의 없지만 찾아보면 있긴 합니다. 그 사람들이 극히 소수라서 그렇지
네. 등엔(백인들 등엔) 털이 그리 많지않은데...이걸 잘 못 독해하셨습니다.
내가 ...내 등엔...이라고... 오타를 치는 바람에여...
그러나 댓글 질문과 대답의 횡간을 보면...내(나의) 몸엔이 아니라...
내(네)...백인들 등엔 털이 없는데로 이해가 가야 할텐데...미륵돼지님이 항시 경상도 부분에만 촉수를 뻗고 계셔서 그히 해돗하신 겁니다.
뭔 말을 돌렸다고...?
서로 조금만 자제하시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글은 삼가해야 합니다. 조선사 연구는 지역감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감정은 일제가 반도에 만들어 놓고, 그 하수인들이 살을 뿥인 결과로 여러분들이 지역감정으로 싸우는 것은 "일제"가 남겨 놓고 간 비장의 카드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두 분 모두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역감정이 아닌 전라도혐오증이죠. 근데 이게 일제때부터 있었고 조선실록에 봐도 전라도인의 대한 혹평이 많습니다. 근데 이걸 반도 전라도라고 하기엔 실록에 쓰여 있는 악평이 전라도를 너무 쓰레기마냥 묘사했는데 반도 전라도인이 그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전라도를 독립시켜야한다는 이런 온라인의 일부 반국가적인 사람들의 행태가 치를 떱니다.
지구조선사 카페만 하더라도 글속에 은근히 지역감정 조장하는 글이 많습니다. 제가 그거 지적했더니 결국 절 강퇴시키더군요.
미륵돼지님! 우리 카페는 지역감정을 부친다거나, 그것을 조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궐한님! 께서도 이런 댓글은 지양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성처를 주는 글은, 상호 자제해야 합니다.
두 분께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 카페 가입한지는 몇달돼지 않았지만 이런곳이 있다는걸 알고 있기는 했습니다. 문무님 사이트 말고도 다른곳도 눈팅 많이 했었고요. 근데 점점 할수록 회의감만 드네요. 탈퇴하고 싶어지네요. 차라리 이런 카페보다는 개인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더 낫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만하시죠. 님의 좁은 인품만 까발려 지는군요. 인정할건 인정하세요. 사람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거죠. 거기에 대고 바락바락 싸우려고 들면 돼나요.
눨 인정...?
어느 사항이 오류인지...정확히 집고 인정하라 해야지...무조건 뭘 인정...?
자꾸 사실을 호도하잖아요. 님을 경상도사람이라고 오해한건 죄송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뭔 호도...인정...아유...전형적 인터넷 정치게시판에 나오는 용어들...지겹습니다.
끝.
비공식 어쩌고 하더니만 나중엔 비열하게 계속 이러네... 문무님 보십시오. 저 정말 짜증나네요. 문무님 이 카페가 번영해서 제대로 된 한국사를 찾고 싶으시죠? 근데 이런 사람 놔두면 커지기도 전에 와해될겁니다. 전 그만 탈퇴하겠습니다. 이런 사람하고 도저히 얘기 더이상 못하겠네요.
● 皇 清 通 考 / 四 裔 門 曰 : 〔所統屬國,北為對馬島,與朝鮮接,南為薩摩州,與琉球接。對馬島與登州直,薩摩州與溫台直,長崎與普陀東西對峙. : 그 나라에 소속된 나라들은, 북쪽으로 대마도(對馬島)는 조선(朝鮮)과 접해 있고, 남쪽은 살 마 주(薩摩州)인데, 유구(琉球)와 접해 있다. 대마도(對馬島)는 등주(登州)에서 곧바로, 살 마 주(薩摩州)는 온 태(溫台)에서 곧 바로이고, 장기(長岐)는 보타【普陀 : 절강(浙江) 주산(舟山)군도】와 동서(東西)로 대치【對峙 : 서로 마주 대하여 버티고 있는 것】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옛 왜나 일본은 반도와 현 열도와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참고해 주세요
열도와 대만 필리핀등등이 전체의 일본(왜)이고...
그 지역과 조선 동남부 경상도격인...중원 복건,광동성과의 관계라고 한 건데여...?
그렇다 보니 서로 오해가 없어여 되는데......안타깝습니다.
나라의 지역감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존재합니다만,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정치인들이 지역구도를 가지고 표를 의식해 이용하는 곳도 드물겝니다. 여러분들까지 망국론까지 대두되는 지역감정으로 빠져들면 이 나라가 어찌되겠습니까?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아쉽습니다. 두 분 모두 마음을 가지 앉히시고, 감정을 풀었으면 좋겠네요.
궐한님!
앞으로 글을 게재하실 때에는, 지역감정이나 또는 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 큰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내용은 삼가해 주셔야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쪽빠리놈들이 친 덫에 걸려들지 맙시다!! 그놈들은 범죄를 은폐하기위해 교묘하게 우리역사를 이용했던것이죠. 내용을 바꿔서 우리조상들이 했다고 쓰고는 지들은 교묘히 빠지는것이죠. 훈요십조나 또는 조선왕조실록의 어느 왕때 옛서적을 모두 수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함으로써 사실은 쪽빠리놈들이 서적을 수거해 불태운범죄를 은폐시키려한 짓일것입니다. 이런 모든것들이 지역감정으로 연결되어 쪽빠리놈들이 노린효과를 배가시켜주는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역땜시 경상도.전라도 하지 마세요.원천적으로 반도 서쪽부터 임진왜란 시작입니다.
또한,지역은 서쪽,전라남도가 왜인 가깝고여,열받지 마시구여,지금현재 왜? 다시 21세기 역사를 만드는게 중요하죠
역사,구글 만히 있죠.한우물에 애공애공 하는 역사 님들이 젊은사람한데 부끄럽지 안나요?역사책 까지고,그걸 어떻게 증명 해야죠? 실물로 해야잖아요?
책을 갖고 하면,현장 검증 해주세요
미륵돼지나?궐한이나 자신의 품격(퀠리티) 하세요. 도용하지 말구여,색깔을 보여 주세요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 이지성 =>이자성 오타 났다느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