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땀을 흘려 오늘의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룩하게 했던 일터, 한일합섬.
한때는 이곳에 2만명의 종업원이 일했던 곳이다.
1964년 회사를 설립하여 1967년 국내 최초로 아크릴 섬유를 생산하여 그후 증설을 거듭하여 세계 3위의 생산량을 자랑했던 곳. 아크릴 원면, 방적사, 쉐타, 카페트, 편직물, 봉제품 등 1차 제품에서 3차 제품까지 일관 생산 체제를 가졌다.
1964년 자본금 1,500만원으로 일본기술과 제휴하여 아크릴 섬유를 생산하면서 시작된 한일합섬.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기공식을 했다. 섬유왕국의 시작이었고, 마산이 산업도시가 되는 신호탄이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하였다.
‘수출입국’을 지향하던 정부시책에 맞춰 국가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967년에 4,300명으로 시작했던 사원 수가 1976년경에는 27,000명까지 늘었다.
1967년 68만 불이던 수출액이 71년에 2,286만 불까지 급성장을 이루었고, 1973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
국내 최대의 화학섬유회사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몰락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SK나 CJ나 코오롱도 비슷한 업종이었는데 왜 한일합섬만 이렇게 몰락하였나?
2004년 9월 한일합섬과 (주)태영·한림건설(주)컨소시엄이 2850억원의 매입가격으로 한일합섬 마산공장 터의 매매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창립이후 40년동안 지켜왔던 마산 양덕동 시대는 막을 내렸다. 64년 창립된 한일합섬 마산공장은 마산뿐 아니라 국내 섬유산업을 주도하면서 한국경제의 산업동맥으로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냈다.
한일합섬 창사자인 고 김한수 회장은 64년 6월 창업자본 1500만원으로 한일합섬섬유공업(주)를 창립했다. 2년 반정도의 준비과정을 거쳐 67년 1월25일 마산시 양덕동에 1일 생산량 7.5t의 아크릴섬유플랜트 본공장을 지어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한일합섬 20년사에 따르면 고 김한수 회장은 당시 인사말에서 “한일합섬공장은 민족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충성스러운 정신에 의해 설립된 것”이라며 “모든 이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민족의 이익으로 분배돼야 할 민족의 재산”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일합섬은 스웨터·모시·내의·카페트·봉제·시트커버·원단 등 2차·3차 제품의 직접생산과 가공생산을 병행하는 한편 수출시장 개척에 주력했다.
그 결과 창업기를 벗어나 준공 5년이 지난 71년에는 자본금 33억원·매출액 132억원·당기이익 8억7161만원을 기록했고, 수출도 73년 국내 단일기업으로 1억달러를 달성하게 됐다.
또 한일합섬은 계열회사인 경남모직의 부산·마산공장, (주)한효 등을 중심으로 ‘하니론’이라는 브랜드를 개발, 150여개에 진출하는 세계적 종합섬유회사로 성장했다. 이후 한일합섬은 80년 후반 (주)국제상사·진해화학(주) 인수를 시작으로 94년에는 최고 15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한일그룹으로 급성장했다. 90년대에는 인도네시아·중국청도 등에 유한공사 방적·봉제공장을 준공하고 해외출자법인을 만들어 해외시장을 집중 공략했다.
그러나 한일그룹은 섬유산업의 급격한 사양화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국제통화기금 지원이 이뤄진 1998년 6월 모기업인 한일합섬과 계열회사인 남주개발·신남개발·진해화학이 정부의 퇴출기업로 분류돼 좌초 위기를 맞게 되었다.
급기야 한일그룹은 6개 계열사 중 한일합섬과 국제상사를 제외한 경남모직·부국증권·한효건설·한효개발 등 4개사와 보유 부동산을 매각하는 내용의 구조조정을 발표하게 이른다. 하지만 증권거래소에서는 한일합섬의 부도설로 1998년 6월 23일 주권 매매거래가 중단되고, 1998년 7월 1일 한일은행 용산지점에 돌아온 58억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한일합섬은 결국 부도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한일합섬은 창원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으며, 법원이 회사정리계획안을 승인함에 따라 법원의 관리를 받게 됐다. 법정관리 기간 중에도 한일합섬은 첨단섬유산업인 라이오셀 사업을 진행, 회생을 모색했지만 기존 아크릴섬유산업의 침체로 적자가 지속됐다.
한일합섬은 2004년 6월 15일 한일합섬 마산공장 터를 매각해 채무를 변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회사정리계획 변경계획안을 제출, 법원이 승인했다.
그렇게 한 시대는 지나갔다.
2006년 하반기에 있었던 일이다. 마산 실내체육관에서 마산시 양덕동 옛 한일합섬 부지 8만7천여평에 건립되는 “메트로 시티” 분양권 추첨이 진행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실내에서는 1만여명의 분양신청자들이 가득 들어찼고, 출입구에는 당첨자를 만나기 위해 “떳다방 들이 진을 치고 있고, 당첨자 발표가 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는 소식이다. " 아 이제 마산에도 부동산 투기바람이 부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당첨자 발표 직후 웃돈이 적게는 300만~400만 원에서 많게는 1,500만~2,000만 원까지 붙었다고 했다. 분양가가 당시 마산의 다른 신축아파트의 두 배에 가까운 점을 감안하면,그야 말로 “광풍”이었다. 메트로시티는 발표당시 3,800여 가구가 건립되는 마산 최대규모의 복합주거단지였다.
그리고 몇 년후, 그곳 입주예정자들이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메트로시티의 핵심이었던 2차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송을 추진하던 입주자들 이야기로는 태영건설 측이 당초 분양 당시 광고했던 주상복합 2차 사업을 예정대로 시행하지 않아 재산가치하락 등의 피해를 보고 있어 과대광고 및 사기분양에 대한 계약취소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었다. 중간에 합의를 했는지, 무슨 꼼수들을 부렸는지 그 이후의 다툼은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알길이 없다. 소송자 모임의 웹페이지에도 몇년전 부터 소식이 올라온게 없다.
메트로시티는 태영과 한림건설이 마산시 양덕동 옛 한일합성 부지 8만7000여평에 개발했던 복합단지 아파트다. 아파트와 주상복합 총 3859가구. 양덕동은 고속버스터미널과 마산역이 인근에 있고 창원까지 차로 10~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홈플러스,신세계백화점과 마산종합운동장 등도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