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1일(금) 책 205 - 228 페이지
{ 제 4장 양떼를 사랑한 목자 }
[ 서울 대교구장에 오르다 ]
1968년 4월 어느 날 서울로 급히 올라오라는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님의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섰다. “ 어서 오시오. 김 주교.” “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 --” “ 우선 축하부터 해야겠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김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셨어요.” “ 예? 뭐라고요? ” “김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말이예요.” “ ---- ” 정말이지 맑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내리치는 벼락을 맞는 충격이 그럴 것이다. 서울대교구는 노기남 대주교님이 은퇴하신 후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이 서리 자격으로 13개월째 이끌어 가고 있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문제가 많았다. 교회에서 종종 발생하는 문제와 갈등이 모두 불거져서 그야말로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된 ‘시골뜨기 주교’가 짊어질 만한 십자가가 아닌 것 같았다. 새 교구장 탄생 소식에 별의별 반응이 다 나왔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무나 예상 밖’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서울 신부들은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고, 또 교구장이 될 만한 특출난 자격을 갖춘 사람도 아닌 내가 수도 교구의 교구장으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게다. 하기는 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파격 인사인데 그분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마산교구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5월 29일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좌 착좌식이 거행됐다. 내가 교황대사님 인도로 교구장좌에 앉아 교구 사제 120명이 한줄로 걸어 나와 내게 순명 서약을 했다. 백발이 성성한 80 넘은 원로 사제들이 맨 먼저 47세 새파란 교구장에게 무릎을 꿇고 순명을 서약하는 그 순간, 내 마음은 감동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난 그분들보다 더 몸을 굽히고 서약을 받았다. 가톨릭의 순명 전통을 모르는 외빈들은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취임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 그것이 우리 교화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천주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 해 달라” 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 세상 속 교회 ‘가 되어야 합니다.
[길고 험난했던 서울대교구장 30년 ]
난 아무래도 촌사람인 것 같다. 아무리 타향이라지만 30년 넘게 살았으면 제법 정이 들었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해서 서울에 정을 붙이려고 한동안 무던히 애를 썼다. 아무튼 1998년 서을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1970년대 소위 ‘TK아성‘ 때문이었는지 나를 잘 아는 고향 대구 사람들까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때는 괴로운 나머지 고독하기까지 했다. 한때는 교황님께 올리는 교구장 사표 서한을 쓰고 찢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불면증은 교구장 시절에 얻은 병인데 아직도 그 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교구에 부채가 많아 교구장 서리로 계시던 윤공희 대주교님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 외에도 여러 문제가 많아 내 나름대로 해결 실마리를 찾은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세월이 약‘ 이라고 시간이 해결해 준 문제가 더 많은 것 같다.
[ 내가 만난 박정희 대통령 ]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1968-19980) 동안 박정희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여섯 분의 대통령을 만났다. 박대통령은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관철시키고 결국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라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 그러나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의 비위를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박정권은 ‘국가 보위에 관한 비상 대권’을 주는 법을 의결해야 한다고 국회에 으름장을 놓았다. 성탄을 준비하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성탄 자정 미사 강론에서 말문을 열었다. “ -----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마침 미사 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박 대통령은 그 충격적 발언에 버럭 화를 내고 방송 중지 명령을 내렸는데 그 때 중계방송 책임자가 자리에 없어서 즉각 방송이 끊어지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나간 후에 중단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아침 165명이 사망하는 대연각호텔 화재 참사가 발생하여 청와대에서 내 문제가 흐지부지 묻혔다고 한다.
이듬해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는 도중에, 기차에서 7시간, 진해 공관에서 4시간을 박대통령과 마주보게 되었는데 그 만남은 육영수 여사가 나와 대통령의 관계를 화해시키려는 뜻이 아니었나 싶었다.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으나 그분은 말할 기회를 좀체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혼자 애기했다. 그래서 ‘오늘은 듣자. 어떤 분인지 어떤 통치 철학을 갖고 있는지 들어 보자’고 마음먹고 거의 듣기만 했다. 종이에 4대 강을 그려가면서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 계획을 설명해 주는 그분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 독제 체제로 갈 것임을 예견했다. 박대통령은 우리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 그루에까지 애정을 쏟는 분이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꾸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집착이 강했다. 박대통령과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것은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금되었을 때이다.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 중에서 가장 뜻 깊었던 그 만남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다.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나도 순교할 수 있을까? 순교도 하느님 은혜인 것 같다.아픈 걸 못 참는 내가 그 고통을 이겨 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순간이 닥치면 하느님 은혜를 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 교회사가는 “ 조선 관가의 순교자 심문 기록에서 ‘사학죄인’ ㅇㅇㅇ‘ 라는 말만 빼면 그 자체가 훌륭한 교리서”라고 감탄했는데 나 역시 순교자 증언록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1968년 10월 6일은 한국교회에 큰 축복이 내린 날이다. 이날 로마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는데 나와 한국교회 대표단 136명이 그 감격스런 현장에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순교를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라고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가깝게는 우리의 조부, 멀게는 증조부와 고조부가 걸어온 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순교자들처럼 세상 부귀영화와 목숨을 다 버린다 해도 하느님만은 버릴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최소 한 주일만이라도 돈 벌거나 먹고 즐기는 일보다 하느님 섬기는 일을 우선시하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성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게 순교는 바로 할아버지 얘기다. 조부는 병인교난(1866-68)때 충남 연산에서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아사하셨다. 조모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내 아버지 김영석 요셉이다. 겉으로 내색을 안 하고 살아왔지만 내 몸에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다시 교구 일상으로 돌아와 현안 처리에 골몰하던 중 내게는 도망갈 길이 완전히 막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 4장을 마치고, 내일 5장으로 들어갑니다.
첫댓글 내 몸에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저도 느끼면서 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