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碑)의 기원과 건립 기준
비(碑)의 기원
뚜렷한 문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주나라(周; BC 1134~BC 250) 황후의 능을 조성하고 묘광(墓壙)에 시신을 하관할 때 밧줄을 도르래에 걸어 안전하게 내리기 위해 전후에 설치했던 도르래 장치[穿]의 기둥인 비목(碑木) 이비의 기원이라 전해진다.
비는 장례에 사용되던 비목에서 출발하여 비석(碑石)으로 발달하여 후한(後漢)에 이르러서는 유교 이념에 따라 후장(厚葬)과 더불어 크게 유행하면서 수량과 양식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고, 당(唐)에 이르러 비의 전형(典型)이 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의 양식이 정형화 되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입비(立碑)가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현존하는 최고의 비석은 낙랑(樂浪)의 점제현 신사비[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성현리]는 AD 85년에 건립되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능비(414년), 신라 영일 냉수리비(503년), 태종 무열왕릉비(661년)가 대표적이며, 고려시대는 탑비(塔碑)가 많이 남아 있다.
점제현 신사비
홍언박(洪彦博; 1309~1363)의 신도비(神道碑)는 백문보(白文寶; 1303~1374)가 찬(撰)한 것으로 이 시기에 조선된 것으로 추정되며, 비석이 가장 많이 건립되고 남아 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비의 건립 기준
비의 건립은 품계(品階)에 따라 비의 크기와 종류를 구별하였는데 당나라에서는 ‘5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의 비(碑)로, 5품 이하는 비좌원수(碑座圓首)의 갈(碣)’의 형태로 구별하였다.
<가례원류(家禮源流)>(1711년)에 의하면 형태와 크기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였다.
왕 : 귀부이수(龜趺螭首) / 이수 높이 97cm, 비신 높이 273cm, 너비 109cm, 귀부 높이 115cm
1품 : 귀부이수(龜趺螭首) / 이수 높이 91cm, 비신 높이 257cm, 너비 103cm, 귀부 높이 109cm
2품 : 귀부인봉(龜趺麟鳳) / 인봉 높이 85cm, 비신 높이 242cm, 너비 97cm, 귀부 높이 103cm
3품 : 귀부천록(龜趺天祿) / 천록 높이 79cm, 비신 높이 227cm, 너비 91cm, 귀부 높이 97cm
4품 : 비좌원수(碑座圓首) / 원수 높이 73cm, 비신 높이 212cm, 너비 85cm, 대석 높이 91cm
5품 : 비좌원수(碑座圓首) / 원수 높이 67cm, 비신 높이 197cm, 너비 79cm, 대석 높이 85cm
6품 : 비좌원수(碑座圓首) / 원수 높이 61cm, 비신 높이 182cm, 너비 73cm, 대석 높이 79cm
7품 : 비좌원수(碑座圓首) / 원수 높이 55cm, 비신 높이 167cm, 너비 67cm, 대석 높이 73cm
신도비는 정1품에서 종2품, 묘갈(墓碣)은 정3품에서 종4품인데 증직(贈職)이 포함되었으며, 묘표(墓表)는 종5품 이하에서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묘소(墓所)의 석물(石物) 묘소(墓所)의 석물(石物)
왕릉 배치도(조선) 황제를 배치도(고종/순종) 묘소(墓所) | 묘소(墓所) | 호석(護石) | 상석(床石) | 혼유석(魂遊石) | 고석(鼓石) | | 향로석(香爐石) | 계체석(階砌石) | 장명등(長明燈) | 석인(石人) | | 동자석(童子石) | 석상(石像) | 망주석(望柱石) | 소지대(燒紙臺) | 죽은 이의 집이라 해서 유택(幽宅)이라하며, 이는 죽은 이가 산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계서 사상에서 연유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며, 저승의 관문이자 자손들이 찾아와 제사 지내는 성역이다. 조상의 음덕으로 잘 산다는 생각에서 자손들은 묘역을 가꾸고, 사체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힘쓴다. 사체 처리와 죽은 이에 대한 기념적 조형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다. 성묘하고 묘역을 정비하는 일은 죽은 조상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안락하게 하려는 효의 표출이다. 묘는 신분에 따라 봉분을 중심으로 1품 100보, 2품 90보, 3품 80보, 4품 70보로 규정했고, 5품 이하는 50보, 일반 서민은 10보로 정했다 사체 처리 방법은 생활환경에 따라서 바위나 나무 위에 얹어 놓음으로서 금수에게 처치를 맡기는 풍장(風葬), 강변이나 해변 물속에 가라 앉혀 물고기에게 처리를 맡기는 수장(水葬), 열대 지방에서 급속히 진행되는 사체의 부패에 대처하기 위한 화장(火葬) 등이 있다.
민묘 약도 묘소 이기-1581년 호석(護石)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돌을 이용하여 만든 시설물이며, 열석(列石)이라고도 한다. 판석을 이용하여 무덤의 둘레에 같은 간격으로 12지상을 조각한 돌을 세워 무덤의 외형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상석(床石) 일반 분묘나 능원의 봉분 앞 정남쪽에 설치 해 놓은 석물로, 넓적한 장방형의 돌로 된 상을 말한다. 흔히 ‘상돌’이라 한다. 상석의 숫자와 크기에 대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봉분 앞에 하나를 설치하는데 길이 300cm, 너비 194cm, 두께 45cm로 규정하고 있다. 능원은 3계절(階節; 무덤 앞을 평평하게 만든 땅)로 나누어져 봉분과 상석, 그리고 망주석을 똑같이 상계(上階)에 설치하며, 중계(中階)에 장명등과 문인석 그리고 석마(石馬)를, 하계(下階)에 무인석과 석마를 각각 설치하고 있다. 사대부 분묘의 경우 2계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계절에 봉분과 상석을 함께 설치하거나 계절의 계체석(階砌石)에 두 모서리를 걸치게 하여 아래 배계절(拜階節)에 설치하기도 하여 고석(鼓石; 북석, 족석)이 필요 없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2개만 필요하게 되어 있다. 상석과 동시에 설치되는 것은 혼유석(魂遊石), 향로석, 고석이 있다.
상석 향로석 상석 정흥선-1663년 혼유석(魂遊石) 능원은 봉분 앞에, 일반 분묘는 상석과 봉분의 사이에 놓는 장방형의 돌로 영혼이 와서 놀도록 마련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묘제를 지낼 때 영혼이 나와 앉아서 후손이 올리는 제수들을 흠향(歆饗)하는 자리라 생각하고 있다. 봉분 앞에 묘표를 세울 때 혼유석은 상석과 묘표 사이에 놓이게 된다. 고석(鼓石; 足石) 상석의 네 모서리를 괴는 북 모양의 돌이며, 일반적으로 북석, 족석(足石)이라 한다. 고석의 형태와 크기도 규정되어 있는데 북 모양의 4면에 나어(羅魚)의 머리를 새긴다면 높이 45cm, 지름 68cm이다. 소리로서 인간이 소원을 빌기 위해 신의 강림을 기원하거나 신이 인간에게 신의(神意)를 전달하는 신구의 의미를 지닌다. 고석의 4면 중앙에는 양각으로 어두문(魚頭紋)과 귀면상(鬼面像)을 새기고, 상단과 하단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긴다. 향로석(香爐石) 향안석(香案石)이라고도 하는데, 옛 말로 ‘석상(石床)’이라고 불렸다. 네모난 돌에 네 다리를 형식적으로 새겨 향탁(香卓)과 같이 깎아 상석 앞에 세우는 것이며, 간혹 육각형도 보인다. 향(香)은 부정을 제거하여 깨끗이 하는 정화 기능을 하며, 세속과 성스러운 공간을 분리하고 순수함을 만든다. 제사를 비롯해 모든 성스러운 종교 의식은 향불을 피움으로서 시작되고, 영혼이 향내를 맡고 찾아오게 하는 행위이다. 인도는 기후 조건에 의해 부패가 심해 악취 제거 방법으로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 계체석(階砌石) 봉분 앞에 평평하게 만든 땅과 아래에 계절(階節)을 구분하기 위해서 놓은 장대석(長臺石)이다. 배계절(拜階節)이란 봉분 앞에 절을 하기 위하여 계절보다 한 층을 낮추어 평평하게 만든 땅으로 배제체(拜除砌)라고도 한다. 장명등(長明燈) 봉분 앞에 세우는 석조물의 일종으로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돌을 네모지게 만든 등(燈)이며, 석등용(石燈龍) 또는 석등(石燈)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분묘 제도에 의하면 봉분 앞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나 문무신상(文武臣像) 등의 석조물을 세우는 것은 피장자의 신분과 품계를 기준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였고, 장명등의 경우는 1품 재상에 한하여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피장자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망자가 살고 있는 무덤을 밝혀 지키려는 수호신적인 기능도 있었다.
장명등 명칭 선종 선릉 장명등 석인(石人) 능묘 앞에 세우는 사람 형상의 석조물로 석수(石獸)와 함께 수호하였고, 외형에 따라 문인석, 무인석, 동자석으로 구분된다. 문인석은 공복(公服) 차림에 홀(笏)을 두 손으로 마주 잡아 문관의 형상을 하였으며, 무인석은 갑옷과 투구, 긴 칼로 무장한 무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능묘 주위에 석인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 전한(前漢; BC 206~24) 때부터 시작되어 묘 앞에 석사(石祠)나 석궐(石闕)을 세우고 신도(神道)의 양쪽에 석인과 석수를 세워 묘를 수호하였다. 우리나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능묘 제도가 정비된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인석 한지원-1561년 무인석 유권-1477년 무인석 오명항-1793년 동자석(童子石) 봉분 좌우측에 세워 피장자를 모시고,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돌로 만든 동자의 형상으로 얼굴은 곱상하며, 머리에는 두 개의 작은 뿔이 있고, 두 손은 가슴에 모았는데 가운데에 홈이 있다. 동자석 정재윤-1725년 석상(石像) 돌로 만든 동물의 형상으로 능묘는 12지상을 배치하고, 사대부는 석양(石羊)을 주로 사용했는데 묘소 앞 좌우에 하나씩 세웠다. 석양 이진수-1803년 망주석(望柱石) 돌로 만든 기둥으로 봉분의 양쪽에 하나씩 세웠으며, 다른 명칭은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이며, 줄여서 석주(石柱), 망주(望柱)이고, 화표주(華表柱)라고도 한다. 피장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자손의 복과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남근(男根) 숭배 사상은 민족 신앙기를 거쳐 이제는 하나의 풍습으로 남아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망주석 망주석 한지원-1561년 소지대(燒紙臺) 축문(祝文) 등의 종이를 태우는 곳으로 신령의 앞에서 빌며, 종이를 태워서 공중으로 올리는 곳이다. 소지대 이극기-14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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