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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날의 소중한 외출 임정희
흰 눈이 휘날리며 주님 오심을 기뻐하고 세상은 고요와 적막에 조용하기만하다 귤이 생각이나 서 예배 후에 차를 몰았다 올해는 육지에 있는 지인들에게 귤을 선물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 나눔 실천을 하였다. 차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려서 갈등하게 한다. 그래도 찬양을 들으며 가다보니 새롭게 변화된 나의 고향에 다다랐다 마음속에서 성탄절날 예배 후에 무엇을 하고 있지하며 그자리에 앉아 있었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 집에 돈을 빌리러 왔다.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도 우리 집에서 일을 하였다, 동서남북으로 밭이 있었다. 겨울에는 소를 집에서 키웠다. 현 대기고 자리에 우물이 있었다. 7-8마리 소를 몰고 물을 먹이러 다니는 것이 겨울에 나의 일이였다. 어머니는 사람들과 같이 겨울에는 보리밭에서 보리 껍질을 메고 별을세며 일을 하였다. 가을에는 명도암으로 용강 옆 촌밭에가서 소꼴을 베고 모았다. 난 착한 사람으로 자라길 원하였다 커서 종교인이 되기 위하여 착하게 살았다. 남을 욕하지도 거짓말도 하지 않고 부모님 말씀 거역도 하지 않은 착한 아이였다. 초등3학년 때 우리 집에는 흑백 tv가 있었다.
나에게도 일본서 오신 친척으로부터 작은 라디오를 선물 받았다. 그때부터 나의 유일한 벗은 라디오였다. 길이 되어버리 텃밭 초등하교 앞이 우리 집이였다. 난 라디오를 들으며 마당에 텃밭에 김을 뽑으며 지냈다. 어느 날 김을 매고 있는데 여름 성경학교를 하니 교회 가자고 했다. 안된다고 했다 매일 절에 공양드리는 어머니를 거역하기 싫어서다. 4학년부터인가 어머니는 장사를 하였다. 전기밥솥이 들어오고 가스난로가 설치되고 친구들을 불러드려 밀가루로 지지미를 부치고 공연을 하며 겨울밤을 보내곤 하였다. 동네 친구들과 깡통 차기 지불놓기를하며 추억을 만들었다. 그 당시 나의 소원은 동생 아기 업계가 되어서 밭에 가지 않은것이였다. 중학교시절 오빠는 생일날 동네 친구로 부터 머리를 맞고 들어왔다. 그일이 계기로 나의 아픈 상처를 묻어버리고 시내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정말 봉개 서름이 많은 봉개를 떠나니 기뻤다.이젠 됐어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가서 살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야 서자의 것도 딸이라는 것도 장롱에 감추어야지 비밀의 문을 만들고 새로운 나의 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신 아버지 집 이층에서 한 일 년을 살았다. 그때 배운 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하면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다. 차비를 타고 핫도그 떡볶이를 사먹고 자습서를 구했다. 영화를 보러 다녔다. 중3인가 중앙로에서 고인이 된 추성웅씨인 모로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배우가 되어서 다른 세계의 삶을 경험하는 멋진 세계를 그리게 되었다
난 중삼 겨울 방학 때부터 새로운 벗이 생겼다 라디오에서 책 이 나의 벗이되어나를 훈훈하게 해주었다 서울이 아이들이 생활을 보게 되고 책속에서 세계인의 삶을 경험하며 하루 한권 책 읽으며 구속에 매료 되었다. 너무도 행복하였다. 든든한 후원자가 책이다.
고등학교는 여상을 다녔다 야간에 다녔다. 부자인 아버지는 딸은 시집가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난 초등학교에서 일을 하였다 신문 배달도 하였다 사회를 경험하였다 그 당시 첫 부임하신 선생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예수가 뭐길 레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매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6월 6일 내가 교회에 첫발을 드려 놓은 계기다. 친구와 함께 친척들의 모임에 동승하였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 이 아름다워서 나도 같이하자 우리 성경학교 놀이하는데 같이해요 놀고난후에 나도 너희와 같이 교회에 가고 싶다 가도 되니그것이 예수님 앞으로 혼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에 처음 나가던 날 밤 빨간 십자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나의 품으로 들어오더니 나의 주변에 무지개가 휘 감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랐으나 그때이후로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난 머리가 아파서 많이 울었다. 머리가 지근지근 하게 아프지 하던 일을 놔두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매일 장사한 돈으로 아들을 잘되게 해달라며 시주를 하였다. 남 매일 아침마다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재를 하였다 화장실에서 성경 요절을 외우고 설거지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기도 응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하나님께 입을 열었다 어머니 는 절에 열심 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 달라며 충성을 하였다 1년을 몰래 다니고 어머니께 교회다니는것을 고백하자 죽일뜻이 때렸다 오빠도 어머니를 슬프게한다며 집을 나가라고 했다 목사님 사모님 교회에 식구들을 만났다 새 롭게 단장된 교회를 자랑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래 많이 변하였구나. 이제는 연고가 없는 나의 고향 봉개 어머니는 봉개로 돌아오기를 위하여 그리워하였다.
성탄 행사로 재롱을 피우며 웃음꽃 피우는 모습을 보았다 예전에는 나도 그 자리에서 함께 했는데 결혼하여서 성탄 행사를 하지 못한 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웃 교회에 가서 보고 오곤 하였다. 우리도 함께 하였으며 재롱을 피우며 웃어보였으면 하며 성탄을 보내었다. 아들은 모른다. 성탄절이 이렇게 즐거운지를 모른다. 억지로 데리고 가서 앉아 있다가 왔으니 교회의 문화에 대하여 모른다. 그것이 슬프다 겨울이 되면 여름이 되면 큰 교회에서 성경학교를 한다. 우리 교회는 중고등부 가 없다 성경공부도 없고 성경학교도 없다 그저 주일 날 예배 드리는 것 그리고 게임을 하는 것이 생활이다 너무 슬프다. 큰 교회에 서 성경학교에서 작은 교회와 연합하여서 성경학교를 하기를 기도 한다. 오늘 만남 감사드리고 행복하였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 봉개가 학원 복음화를 위하며 많은 이들의 눈물이 있었고 지역의 변화를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의 기도가 싸여서 여기까지 와서 봉개 지역에 제일 높은 자리에 3번이 이사를 하여 자리를 잡아 큰 성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이제는 예수를 믿는 한 사람이 되었다. 노년이 되어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는 매일 봉개를 생각하며 기도를 한다. 사랑하니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중년이후의 삶을 펀처 놓으며 함께 하던 봉개를 가슴에 묻어 휘날린다. 벗꽂이 우수수 떨어져 금세 시들지만 그 가슴에서는 봉개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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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희누나 안녕하세요. 저 승우입니다. 전 누나가 전에 봉개교회 청년회활동할 때 온평리 온평교회에서 밤세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참 감명을 받고 나도 누나처럼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싶다고 생각을 가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삶이 그것을 허락하지가 않았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것인지 도 모르고, 그래도 호남신학대학 문턱에까지 갔는데 들어가는것이 싶지가 않았습니다. 주의(가족)에서 반대가 심하였거든요. 그래서 한라대학을 선택하여 들어가서 공부하며 UBF활동도 하곤하였습니다. 전에목사님은 신학교라도 들어가서 꼭 신학을 배으라고하였는데 세상삶에 빠지다보니 어렵네요. 기도해주세요. 동생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