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도 계속해서 생명의 빵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일, 생명의 빵이란 것은 혼자 숨어서 나만 배불리 먹는 빵이 아니라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생명의 빵이다. 또 생명의 빵은 그 빵의 크고 작고, 또 무슨 빵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그 연장선상에서 계속 말씀드립니다.
지난 가을 어느 수요일에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던 천안 호스피스 시설의 심석규 의사, 목사님 생각나시죠? 지난 일요일 오후에 천안에 상가집 문상을 갔다가 저녁에 들러서 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전에 그 호스피스 병원에서 생을 마친 한 청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3세의 청년인데, 180킬로그램의 고도비만이고, 알콜중독이고, 심장근육병증, 울혈성 심부전, 폐부종, 당뇨병2형으로 단국대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 환자입니다.
너무 크고 무거워서 남자 5명이 겨우 침대로 옮겼는데 침대가 푹 꺼지더랍니다. 대화가 안 될 정도로 숨이 차고 복부팽만과 부종(붓는 것)이 전신에 걸쳐 심했다. 닦지를 못해서 냄새가 진동했다. 일단 숨을 쉴 수 있도록 산소공급을 하고 몸을 닦아주었다. 일단은 편하게 해주고, 그리고 위급한 것부터 하나씩 치료를 해나가기 시작했답니다.
워낙 살이 찌다보니 겹치는 부분은 다 헐어서 진물이 나옵니다. 특히 음낭 부분은 들어가서 보이지도 않고 짓물러서 피고름이 그치지를 않는다. 거즈를 붙일 수도 없고 올려놓으면 붉게 금세 물들어버린다. 얼마 못 살 것 같더랍니다. 몸이라도 편하게 해주어야겠다. 해서 며칠을 거의 그 환자에 붙어서 기도하면서 몸을 보살펴주었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어나 앉아서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tv를 볼 정도로 회복되었답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심석규씨와 저는 저녁 내내 그 지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지경, 그 지경에 이르도록 왜 그는 폭식과 폭음을 멈추지 않았나. 그 지경에 이르도록 왜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나. 과연 무엇이 그를 그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작동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젊은이에게는 삶에 대한 희망이 없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없고, 마음에 맞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고, 좋아하는 일도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체중관리나 과도한 흡연 등이 자신의 심장질환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설명을 해도 남의 얘기 듣듯이 관심이 없었답니다. 이 시설에 대한 관심이나 이웃 환자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고, 고마워하는 표정도 없고 인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무표정입니다. 감정이 없습니다. 오로지 먹는 것과 술과 줄담배입니다.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언제부터 이랬을까? 그에겐 면회 오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고아 출신이구요, 입원하기 전에는 고물상에서 몇 명의 인부가 함께 작업장에서 기거하며 살았는데, 거의 동료들과도 교류가 없었던 외톨이었습니다. 매일 술을 소주 3병씩 마셔야 자고 담배도 몇 갑씩 피우고 엄청난 양의 식사를 했답니다. 고물상에서 받는 돈 전부를 먹고 마시는데 썼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뚱뚱하다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따돌림을 당했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먹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끝없이 먹었답니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학교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오로지 먹는 것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는 며칠 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숨을 몰아쉬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고 갑자기 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 없고, 장례랄 것도 없고, 심석규씨 혼자서 화장을 하고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으로 장례를 대신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그의 죽음에 이른 그 지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과거 십수년 전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해피홈이라는 시설을 만들었을 때, 지금도 심석규씨가 혼자 하고 있습니다만, 그때 우리가 돌보았던 은진이라는 아이가 바로 그랬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너댓살 먹은 여자 아이였습니다. 버려진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먹는 것에 너무 집착했습니다. 토하도록 먹고, 토하고 나서도 또 음식이 다 없어질 때까지 먹으려고 들었습니다. 은진이는 속에서 거부를 해서 토했지만, 그 청년은 은진이와 달리 소화를 시키고 그대로 다 살이 된 겁니다.
그때 심석규씨는 그 은진이에게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베풀었습니다. 꼭 함께 식사를 하면서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고, 다 먹고 나서 더 먹고 싶다고 하면 그때 조금 더 주고, 여기 남은 음식은 다 네 것이니 다 소화된 다음에 네가 배고플 때 주겠다. 그리고 그 아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 그런 훈련을 통해서 그 아이의 폭식 습관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훈련과 통제로 고친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으로 고쳤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아주 예쁜 여학생이 되어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폭식은 사랑 결핍, 관심 부족으로 온 것이었고, 그 치료는 사랑과 관심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그런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그런 고도비만으로 일찍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 지경이란 바로 사랑과 관심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면 모든 희망이 사라집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주일 저녁 늦게까지 얘기한 우리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서 생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살려고 노력한다. 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사랑과 관심으로 희망을 주는 일이다. 맞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지난 주일에 이어 말씀하시는 생명의 빵이란 바로 그런 차원의 것을 말합니다. 빵이란 것이 세속적 의미의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찌 보면 그 반대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풍요로움으로 생긴 그늘진 곳의 버려진 영혼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일, 주님이 주신 생명을 나누는 일.
지난 주일, 생명의 빵이란 혼자 먹는 빵이 아니라 모두 나누어 먹는 빵이 생명의 빵이라 했죠? 어떻게 먹어야 하느냐를 말했다면, 오늘은 누구와 먹느냐를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빵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만이 우리를 살리고, 그보다 좋은 것은 없고.... 다 맞는데요, 그건 우리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잘 모셔둔 금송아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빵이 어떤 빵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 무엇에 매달리는 한 번잡스럽고 구차스런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생명의 빵이 어떤 빵이란 것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그 빵을 누구와 어떻게 먹느냐가 아니겠습니까?
두 주일에 걸쳐서 말씀드렸습니다. 내 손에 지금 들고 있는 것,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필요로 하는 사람과 결핍된 사람과 나누면 그것이 곧 생명의 빵입니다. 금박으로 두른 하느님 할아버지 것이라도 그냥 손에 들고 있으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관심 - 그것이 생명의 빵이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소외된 사람들, 그것이 절실한 소수의견 사람들, 그들과 그것을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나라에 한 발을 들여놓는 겁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