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너무 긴 세월과 시련 때문에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주위환경이 너무나 저를 슬프게 하여 잊지 못하였습니다.
1979년 10월18일 새벽 4시경 부산 동래 온천2동 제가 경영하는 양산상회(제주밀감 도매업)에서 검은 찦차에 실려 눈에 안대를 씌워 어디론가 압송된 뒤 몇시간이 지나 의식을 회복하니 깨어난 곳이 동래경찰서 2층 회의실 같은 곳에서 100여명의 부산대 학생들 앞이었습니다.
"김대중같은 빨갱이새끼, 남민전 프락치"하면서 학생들 앞에서 개처럼 구타하고 나서 나무의자에 포승줄로 묶고 심문을 시작한 뒤 독방에 쳐넣고 밤마다 불러내 심문을 계속했습니다. "남민전에 연루된 임동규선배와의 관계, 부대생중 누구와 접선했냐? 통사당(대표 안필수, 고문은 김한길의원 부친이신 김철선생) 중앙의 지령이냐?"
계속 함구한 저에게 10월20일 일단 부산대생과 같이 경범죄 처벌로 20일 구류를 선고 받고 독방에 감금한 후 심문은 계속되었는데 그때 키와 몸집이 작은 이호철씨가 저의 독방에 들어 오더군요.
밤마다 계속된 심문이 며칠 지나자(27일 저녁) 구류방으로 옮겨 학생들과 합방한 후 박정희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풀려났습니다. 그 뒤에도 계속 뒤쫓는 사복형사들을 피해 3년4개월만인 1983년 3월 10일 영등포경찰서 형사들에게 불심검문에 붙잡혀 광주서부경찰서로 압송됐으나 7일간의 심문을 마치고 간첩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이렇다 할 직장도 없이 2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1985년 2월12일 국회의원선거에 민추협의 신민당 광주광산지구당 선전부장으로 야당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지역활동을 했습니다. 1986년부터 직선제개헌투쟁본부 광주전남 총무부장으로 봉사하다가 1987년 6월 26일 광주금남로 국민투쟁 선두지휘 후 구금, 10월21일 노태우처단송정리역최루탄투척사건 연루 3일간 구금 등 직선개투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양김 단일후보 좌절"에 그만 평민당을 탈당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최근 민주화 보상신청에서 조금이라도 어려운 살림에 도움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야당의 집요한 방해로 오늘에 이르게 되어 민주화운동공제회에 희망을 걸고 있기에 12.9 발기인대회에 참석하려고 북경에서 달려간 것입니다.
1974년 서울 명동 대성빌딩에서 통일사회당 창당대회에서 김철선생(김한길의원 부친)과 같이 중앙집행위원에 선정된 뒤 1976년 11월 육군보안사 제주지대(일명 한라기업사)의 조작으로 파렴치범으로 몰려 실형 1년을 억울하게 당하고 나서 간첩혐의 꼬리가 달린 채 저의 청춘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1982, 1983년 간첩수배 중 태어난 두 아들(경진-전남대 수의학과 3년. 유진-서울대 경영대학 3년)을 위하여 1988년 자라나는 아이들의 신상안전을 위하여 보수계통의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낙선했지만 두 차례의 국회의원 후보도 한 경력이 있으며 수차례의 사업실패로 가정은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1996년 이후 중국 청도와 북경에서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하여 한국여성월간잡지를 중국전역교민미용업소와 의료기관에 배송하고 있으면 서 안내사이트 배너광고업을 준비하고자 beijing114.co.kr, shanghai114.co.kr, qingdao114.co.kr, tianjin114.co.kr, 0005.com.cn 등 도메인을 선점하여 한국인 상대 안내사이트 창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할말은 많으나 차후로 미루고 일단 저의 소개를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소원성취하시길 빕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