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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 「지고자(至高者 神)의 노래」
약칭하여 《기타》라고도 한다. ‘지고자(至高者:神)의 노래’라는 뜻이다.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大敍事詩) 《마하바라타》 가운데 제6권 <비스마파르바>의 제23∼40장(章)에 있는 철학적 ·종교적인 700구(句)의 시를 말한다(1933~72년 푸네에서 출간된 크리티칼의 경우). 저작자는 《마하바라타》의 편찬자인 비아사로 보는데, 성립연대는 BC 2세기설(說), 3세기설, 5세기설 등 확실치가 않다. 이 경전은 힌두교도의 ‘경전 중의 경전’으로 되어 있지만, 본래 크리슈나 신(神)을 믿는 비(非)브라만교의 일파인 바가바타파(派)의 경전이었던 것이 브라만교에 편승하여 변모를 거듭하였다.
이 기타 속에서 비슈누신(神)의 화신(化身)으로서, 바라타족(族)의 왕자인 아르주나의 친구이며 스승인 크리슈나는 석가 탄생보다 오래 전에 비(非)브라만교 유목민의 지도자이며 전쟁의 지휘자임과 동시에, 그들의 종교인 바가바타파의 교조(敎祖)로서 숭배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브라만교에 혼합되어 처음의 성격을 상실하고, 우파니샤드 ·상키아 ·요가 ·베단타 등의 사상을 흡수하여 복잡하고 난해한 종교적 ·철학적 시가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이 《기타》에 대한 해석도, 관점과 개성에 따라 다양한, 많은 주석서가 있다. 베단타 철학자이며 정통 힌두교의 종조(宗祖)라 할 수 있는 삼카라로부터 그의 계승자 아난다기리 ·수리드라 ·마두수다나 등이 있고, 그 밖에 라마누자 ·마드바 ·님바르카, 발라바가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틸라크 ·아우로빈도 ·간디가 나름대로 독특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해석은 모두 하나의 목적 즉 해탈(解脫)과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지향한 것이며 상호보족적(相互補足的)이다.
그 내용은, 18장의 시를 각각 6장씩 3개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그 첫째 부분인 1~4장은 아르주나(arjuna:人間)의 비탄과 절망의 말을 들은 크리슈나의 충고와 위안으로서 변화무쌍한 마야(maya:摩耶)의 세계 가운데 불변 ·영원 ·불사(不死)의 신성(神性) 아트만(Atman)이 있음을 가리키며, 또 의무의 충실과 카르마 요가(수행)와 라자 요가(인식), 지나나 요가 등을 가리킨다. 7~8장은 신에 관한 교리와 신의 절대 완전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봉사, 즉 바크티[信愛] 요가를 그 주제로 하고 있다. 13~18장은 거의 삼키아 철학이 중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푸루샤(purua:我) ·프라크리티(prakti:自性) 및 3성(三性:Sattva ·Rajas ·Tamas)과 그에 따른 인간요소의 분류 ·분석, 그리고 끝으로 의무에 충실할 것과 최고존재인 브라만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기타는 종교 ·철학 ·윤리와 문학적 특성이 통합되어 있는 인도인의 정신의 참고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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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는 쿠르크세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하고 있다.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카우라바Kaurava 형제와 판다바Pandava 형제가 쿠루크세트라 들판 양쪽에서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기타>의 가르침은 시작된다.
바라타 왕국의 후계자였던 유디슈티라Yudhisthira가 카우라바 형제들 중 맏형 두료다나Duryodhana와 나라를 걸고 도박을 한 결과 그는 왕국을 잃고 형제와 함께 13년 동안 숲속에 유배되었다. 약속한 기간이 지나자 유디슈티라가 두료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으며 결국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기타>는 전쟁이 막 벌어질려는 찰나에 판다바 가문의 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Arjuna와 크리슈나Krisna 사이에 오간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아르주나는 전쟁에 대한 분명한 명분을 갖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상대편 군대에 사촌,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혈족을 사살하고 왕위에 오르느니 차라리 숲속으로 은거해서 절대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생을 선택하려고 했다. 이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워야 한다고 종용했다. 하지만 크리슈나의 가르침의 요지는 전쟁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르주나의 결심, 곧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 왜 옳지 않은가를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아루주나가 싸우지 않겠다는 이유가 단지 싸움의 대상이 혈족이라는 데 있었다. 사랑하는 혈족을 사살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는 말은 사리에 맞는 것 같지만 이는 영원한 자아의 본질을 망각한 결과이며 냉철한 판단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 크리슈나의 가르침의 요지였다. 아르주나가 자신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때 크리슈나는 그에게 바른 지식을 내려 그의 무지를 제거하도록 했다.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아르주나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크리슈나는 인류의 선에 관해 설교했다.
상카라는 크리슈나의 아르주나에게 한 말 "싸우라"에 대한 해석을 전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미혹으로 생겨난 장애를 제거하라는 촉구였다고 주장했다. 자아란 육체적인 생사를 초월한다는 점과 누구나 자기 신분에 부여된 사회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설정된 상황이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다. <기타>의 가르침은 슬픔과 미혹의 동기들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전쟁을 해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함석헌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타>는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을 통해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혼의 삶은 쿠루크세트라의 전쟁터로 상징되며 카우라바족은 영혼의 진전을 방해하는 적이다. 아르주나는 시험을 물리치고 감정을 제어하여 인간의 왕국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전진의 길은 고통과 극기를 통해 가능하다. 내면의 삶에 대한 추구는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요한다.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 참된 자아에 대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아르주나의 철저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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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 1~4장 요약.....
<바가바드기타>중에서 발췌
- 마하트마 간디 지음,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당대-
【제1장】
(p.5)
「˝『기타』는 역사논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촌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두 본성,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세대에 걸쳐 『기타』의 중요한 언어들은 새롭고 더욱 깊은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머리말
(p.10∼p.14)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제2장의 마지막 열아홉 줄[行]은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열아홉 줄 속에 ´다르마´의 알속이 다 들어 있다. 거기에는 최고의 지식(知識)이 구현되어 있다. 그 열아홉 줄에 담겨 있는 원리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최고 수준의 지성(知性)이 번뜩인다. 아니 그 자체가 높은 목적을 위하여 단련된 지성이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은 경험의 결실(結實)이다.
이것이 『기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여러 번역판과 주석서를 읽었고 또 여러 강좌를 들었지만, 지금도 첫 만남에서 얻은 감명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앞에서 말한 제2장 끝의 열아홉 줄은 『기타』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기타』의 다른 부분에 이 열아홉 줄의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이 있거든 차라리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거기에 한번 무릎 꿇어본 사람이라면 서슴없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부분이 그 부분하고 연결이 잘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나의 깨달음이 아직 모자라기 때문이다. 언제고 때가 되면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맥이 통하고 있는지가 보일 것이다.˝
경전(經典, Shastra)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잘 성숙된 도덕적 감수성과 경전이 말하는 진리를 좇아서 살아보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경전을 해설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경전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경전의 명령을 기계처럼 지키는 것은 힘은 힘대로 들고 아무 유익이 없다. 경전은 그것을 읽는 사람이 저마다 ´스승´(guru)을 모셔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요즘에는 스승이 드물어, 학식 있는 현인(賢人)들이 경건미 넘치는 지방사투리로 정규적인 경전공부에 도움을 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경건하지도 않고 신심(信心)도 부족한 자들을 경전의 뜻을 풀이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 이른바 유식(有識)한 자들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며 경전에서 멋대로 그럴싸한 의미를 읽어낸다. 그들이 경전의 참뜻을 밝히리라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오직 경전이 명령하는 바를 좇아서 살아가는 실습(實習)을 하는 자만이 그 참뜻을 해설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실은 적극적인 가치다. 비폭력은 소극적인 가치다. 진실은 긍정한다. 비폭력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금지한다. 진실은 존재한다. 비진실(非眞實)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존재한다. 비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다르마[法]는 비폭력만이 있어야 한다고, 비폭력만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진실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비폭력은 그것이 맺는 최상의 열매다. 비폭력은 불가피하게 진실 속에 내포되어 있다. 비폭력이 진실만큼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간혹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경전의 뜻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비폭력의 정신만이 경전의 참뜻을 밝혀줄 것이다.
진리를 실현코자 한다면 ´타파스차리아´(tapascharya, 종교수련의 하나로서 자발적으로 자기 몸을 괴롭힘)가 반드시 필요하다. 진리를 실현한 어떤 현자(賢者)는 폭력이 넘치는 바다 한복판에서 비폭력의 여신(女神)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폭력은 환(幻)에서 온다. 폭력은 유용하지 못하다. 비폭력만이 홀로 참되다.˝ 비폭력 없이는 진리를 실현할 수 없다. 도둑질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겠다는 ´브라마차리아´(brahmacharya) 서약(誓約)은 비폭력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다. ´브라마차리아´ 서약은 사람이 자기 자신 안에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게 돕는다. 그것은 진리의 숨[生氣]이다. 그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일찌감치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는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경전의 어느 본문이 지니고 있는 뜻을 읽어내는 데 필요한 두 번째 규칙은 문자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문자에 매달리지 말고 그 정신을, 그 의미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제2장】
(p.61)
「만일 우리가 공적(功績)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최선(最善)의 것이라 해도 그 속에는 악(惡)의 요소가 들어 있다. 세상에는 온전히 선한 것도 없고 온전히 악한 것도 없다. 행위가 있는 곳이면 얼마만큼의 악이 있게 마련이다.」
(p.67∼p.69)
「자기의 지력을 한 목적에 고정시키지 않는 사람, 오직 한곳에 자기를 바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여러 갈래로 어지러이 분산될 것이다. 그 마음이 원숭이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뛸 때마다 그의 지성(知性)도 그럴 것이다. 자기의 목숨에 집착하는 자는 ´바이드´(vaid)든 무당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도움을 요청한다. 이와 비슷하게,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다니는 원숭이는 마침내 고무줄 총에 맞아 비명횡사를 당하고 만다. 목표가 확실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나약해지고 너무나도 불안하여 그 순간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오늘의 정치판은 선(善)이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악(惡)으로 가득 차 있다. 가는 곳마다 들리느니 아첨하는 소리요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오늘의 정치는 우리가 ´아트만´(개인의 자아)을 실현할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다르마(종교의 가르침, 법)를 잃었고 선행(善行)을 할 능력도 잃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함께 잃었다.
반면에 만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신앙을 지닐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 봉사할 수 있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으며 큰 위험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짓누르는 것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또한 동시에 저 세상에서 복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의 뜻이 확고하지 않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왕도를 따르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우리 모두 가슴속에 신앙을 품고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요 비록 서로 독립된 존재들이지만 참된 평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두 장 나뭇잎이라 해도 평등하지 않다.」
(p.75∼p.76)
「행위만이 본분이요 그 열매는 아니니라. 행위의 열매를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행위를 피하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제2장 47]」
「그대들의 권리(right)는 일하는 것이지 그 열매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자기 노예에게 말한다. ˝맡은 일이나 하고 농장에서 열매를 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내가 주는 것만 받으면 된다.˝ 신(神)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제한한다. 그는 우리에게, 원한다면 일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일삯은 일체 자기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그분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현자는 신중하게 의식적으로, 자기는 세상의 노예가 아니라 신(神)의 노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신(神)이 그를 거절하는 듯이 보이면 보일수록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쓴다.」
「˝행위의 열매를 얻고자 고통을 겪는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지 말아라. 행위에 얽매이지 말아라. 무슨 일이든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말아라. 모든 일이 내가 하는 것임을 생각하여라. 도대체 무슨 근거로 네가 일한다고 생각하느냐?˝」
(p.77∼p.78)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이른다. ˝그대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유혹을, 그대의 임무가 아닌 일에 몰두하고 싶다는 느낌을, 멀리해야만 한다.˝
오, 다난자야여. 집착없이 행동하며 요가(수행, 수련)에 굳게 서고 성공과 실패에 마음 고요할지어다. 마음의 고요함이 요가이니라. [제2장 48]
집착하는 일 없이 일하되 요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라. 요가는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카르마´인 일의 열매를 바라지 않는 것이 요가다. 선한 일에 집착하는 것, 이것도 잘못인가? 그렇다. 잘못이다. 만일 우리가 ´스와라즈´(swaraj, 독립자치)에 집착한다면 망설임 없이 나쁜 수단을 마구 쓰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은화를 줄 만큼 각별하게 군다면 바로 그가 어느날 그것을 훔쳐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기(動機)가 좋은 일이라 해도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의 수단이 순결하게 남아 있고 우리의 행위 또한 순결한 행위가 될 것이다.
나아가서, 스리 크리슈나는 말한다.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고.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를 크리슈나에게 바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평등심(平等心)으로 대하는 사람이야말로 요가를 성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슈나는 같은 생각을 거듭 설명한다.
오, 다난자야여. 행위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행위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니, 초연(超然)한 태도에 들어 안도(安堵)할지어다. 결과를 바라고 행동하는 자야말로 한심한 자들이니라. [제2장 49]
지력(知力)의 요가(yoga)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극히 위험하다. 많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런즉 사람은 지(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知)란 단호하게 결심된 지력(知力)을 뜻한다. 일단 한번 결단이 내려지면 그 일로 더 이상 논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보상을 바라고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크리판´(kripan)이다. 불쌍히 여겨 마땅한 자다.」
(p.79∼p.80)
「여기 이 세상에서, 초연한 태도를 선물로 받은 자는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의 과보(果報)를 벗어나는도다. 그런즉, 그대 자신을 요가에 비끄러맬지어다. 요가는 동(動) 속의 정(靜)이니라. [제2장 50]」
「초연한 태도를 선물로 받아 행위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 현자(賢者)들은, 태어남이라는 사슬에서 풀려나 온갖 재난과 병고(病苦)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들기 때문이로다. [제2장 51]」
「그대의 지식이 미혹(迷惑)의 수렁을 벗어날 때, 그때 그대는 이미 들은 것과 앞으로 듣게 될 것에 대하여 똑같이 무심(無心)하게 되리라. [제2장 52]」
「듣는 것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진 그대의 지식이 집중(集中) 속에 안정하여 고요한 정(靜)에 들 때, 그때 그대는 요가를 성취하리라. [제2장 53]」
(p.82∼p.84)
「오, 파르타여.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갈망(渴望)을 물리치고 오직 ´아트만´한테서만 스스로 위안을 찾을 때, 우리는 그를 확실히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느니라. [제2장 55]」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고요히 만족하게 되는 상태를 나라시나 메타[Narasinha Mehta, 구자라트(Gujarat)의 15세기 시성(詩聖)]가 그의 시에서 잘 묘사해 놓았다. ˝브라만 앞에서 가벼이 춤추며 돌아가는 브라만.˝ 시인은 바로 그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만´이 ´브라만´ 앞에서 ´브라만´을 통하여 스스로 그 모든 즐거움을 누린다. 노예는, 주인 없는 자신의 존재를 결코 상상할 수 없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남의 이름만 부르며 사는 사람은 마침내 자기의 이름을 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트만´[개인의 자아(自我, self)]이 ´파라마트만´[우주의 자아]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트만´은 ´파라마트만´의 한 줄기 빛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곧 태양이다. 신(神)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우리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을 신(神)의 노예로 만드는 자는 신(神)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상태는, 자기 주변에 온갖 소유물을 쌓아놓고 자기만족에 속아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자족(自足)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목적과 수단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과연 자기를 통하여 자기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정신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면 그럴 수 있다.」
(p.86∼p.87)
「마음이 슬픔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에 치닫지 않는 사람, 정욕과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확실한 깨달음에 이른 고행자(苦行者)라 부를 수 있도다. [제2장 56]
고통으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않는 사람, (고통이란 언제나 어떤 동기에서 오는 것임을 알라) 고통에 굴복당하지 않는 사람, 쾌락의 한복판에서 무심하며 집착, 불안, 분노에 더 이상 예속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일컬어 ´스티타디´(sthitadhi)라고, 그 뜻이 든든히 서 있어 결코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 어디에도 애착하지 않는 사람, 눈앞에 선(善)이 나타나든 악(惡)이 나타나든 기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깨달음은 확고부동이니라. [제2장 57]
모든 대상에서 흥미를 거두어버린 사람, 그것들에 대한 욕망을 버린 사람, 좋은 기회 나쁜 기회에 관계하지 않고 무심한 사람, 어떤 일로도 즐거워하거나 불쾌해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리지 않는다. 스리 크리슈나는 예를 들어 말한다.
거북이 사방으로부터 네 발을 오무라들이듯이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끌어들일 때, 그때 그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림이 없도다. [제2장 58]
거북이 네 발을 끌어들여 한 배갑(背甲) 아래 모으듯이, 자신의 감각을 붙잡아 대상에 매이지 않게 하는 사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지력(知力)을 지닌 사람이다. 자신의 감각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사람만이 신(神)에게 온전히 예속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감각이 자신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처럼 여겨질 때는 거북을 생각할 일이다.」
(p.88∼p.90)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渴望)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至高者)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는도다. [제2장 59]」
「자신의 몸한테, 그 몸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주지 않는 사람만이 자신의 감각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자신의 감각이 잘 조절되지 않거든 단식을 하는 게 좋다. 전혀 조절되지 않으면 아예 음식을 딱 끊어버려야 한다.」
「단식하는 동안에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전심전력으로 원해야 한다고. 나아가서 우리가 신(神)을 뵙고자 간절히 바랄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금식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금식을 하는 동안 우리의 유일한 욕망은 신(神)을 뵙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식욕이 그 길을 가로막고 서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 신(神)을 만나본 뒤에는 음식을 먹든 먹지 않든 그게 그거다.」
(p.96∼p.97)
「현자(賢者)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 카운테야여, 휘어잡을 수 없는 감각들이 억지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도다. [제2장 60]」
「배워서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감각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그의 자기억제를 무너뜨리고 그 마음을 대상(對象)으로 치닫게 강제한다. 그들은 ´즈나니´[jnani, 정신적 깨달음을 얻어 계몽하는 사람]까지도 흔들어 놓는다. 감각은 마치 휘어잡을 수 없는 야생마 같다. 기수(騎手)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그것들이 어디로 달려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원숭이, 게다가 술까지 취한 원숭이˝[구자라트의 속담] 꼴이 될 것이다.」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yogi)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제2장 61]」
(p.101)
「감각의 대상(對象)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痲痺)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理性)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제2장 62, 63]」
(p.102∼p.105)
「그러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에서 떠나 아트만의 다스림을 받는 감각으로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단련된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얻느니라. [제2장 64]」
「마음의 평화는 모든 질병의 끝을 뜻하나니, 그 마음이 평온한 자의 깨달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로다. [제2장 63]」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깨달음도 헌신도 없나니, 헌신이 없는 자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자에게는 어디서 행복을 얻을 곳이 없느니라. [제2장 66]」
(p.107∼p.108)
「그의 마음이 떠돌아다니는 감각을 좇아 치달릴 때, 바람이 바다 위의 배를 휩쓸어가듯이 그의 깨달음을 휩쓸어가는도다. [제2장 67]」
「그러기에 오, 마하바후여. 사방에 널려 있는 대상(對象)들로부터 모든 감각이 통제되는 사람은 어김없이 깨달은 사람이니라. [제2장 68]」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한밤중일 때 단련된 영혼은 깨어 있고, 다른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때가 눈밝은 수행자(修行者)에게는 밤중이로다. [제2장 69]」
(p.111∼p.114)
「참으로 명상의 삶을 사는 사람은 밖으로 볼 때 속인(俗人)처럼 보인다. 그의 마음은 종일토록 신(神)에게 몰입되어 있지만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명상의 삶을 살고 있노라고 나팔을 불어대지 않는다.」
「갈망(渴望)을 품어 기르는 자가 아니라, 강물로 채워지면서도 결코 흘러 넘치지 않는 대양(大洋)에 모든 강물이 스며들어 없어지듯이, 자기 안에서 모든 갈망이 없어진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발견하느니라. [제2장 70]」
「모든 갈망을 벗어버리고 무심으로 행동하는 사람,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얻는도다. [제2장 71]
자신의 모든 열망을 포기하고 욕망에 시달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그런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의식(意識)을 지워버림으로써 그 평화를 얻는다. ´내가 이것을 한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만이 진짜 요기다.
오, 파르타여. 이것이 브라만의 품에 안식(安息)하는 자의 상태니, 이 상태에 도달한 그는 속지 않느니라.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순간에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도다. [제2장 72]」
【제3장】
(p.155)
「그러나 ´아트만´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 ´아트만´에 흡족한 사람, ´아트만´으로만 만족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도다. [제3장 17]
그는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 데 관심이 없고 무슨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도 관심이 없으며,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의지할 필요도 그에게는 없느니라. [제3장 18]」
(p.167)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의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나니, 깨닫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행동에 얽매여 있도다. 깨달은 자는 오히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일을 이룸으로써 깨닫지 못한 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심어주어야 하느니라. [제3장 26]」
(p.184)
「우리는 자신의 가슴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인간에게만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파지운동)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사이에 사랑이 통하는 사람만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이 없을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들의 일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다. 툴시다스는 사악한 자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p.186)
「공로가 없더라도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남의 일을 해주는 것보다 나으니라. 자신의 임무를 다하다가 죽는 것이 나으니, 남의 임무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도다. [제3장 35]」
(p.188∼p.190)
「어째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으면서 나쁜 길을 걷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탐욕이요 분노요 구나(존재의 양태)의 소생인 라자스(활동)니라. 그것은 교활한 탐식가요 교활한 죄인이니라.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적(敵)임을 알지어다. [제3장 37]」
「불꽃이 연기에 싸여 잘 안 보이고 거울이 먼지에 덮여 잘 안보이고 태아가 탯집에 싸여 잘 안 보이듯이, 지식(知識) 또한 이것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느니라. [제3장 38]」
「오, 카운테야여.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인 탐욕의 모습을 한, 지혜로운 인간의 영원한 적에 의하여 지식(知識)은 가려져 있도다. [제3장 39]」
(p.191)
「그런즉 그분이 이성(理性)보다 더 강하신 것을 깨달아 알고 나를 ´나´(아트만)로 다스릴지어다. 오, 마하바후여, 참으로 이기기 어려운 적 탐욕을 파멸시킬지어다. [제3장 43]」
【제4장】
(p.219)
「그는 영(靈)이다. 이는 그의 법이 영이요, 그의 법이 곧 신이라는 말이다. 그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행위자가 아니다. 우주가 질서를 좇아 운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이 그 질서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그가 만든 이면서 만든 이가 아니라고 말한다-그것이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신(神)의 미스터리(神秘)다.」
(p.219∼P.223)
「신(神)은 기계처럼 일한다. 그는 그의 법이다. 그는 법을 만드신 분이요 그것을 집행하는 분이다. 그분의 법은 참으로 완벽한 질서(order)를 보여주고 있다. 신이 당신의 법을 유예시키거나 그대로 시행하는 데 대하여는 의심할 근거가 없다. 그 기계는 영원 전부터 작동되어 왔다. 신의 법은 그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가 신에 대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실행되어 왔다. 우리는 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카르마[業]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어떤 행위(카르마)를 통해서 채워보려는 바람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의 모든 부속품은 쉬지 않고 제 기능을 다 한다.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그 뒤에 서 있는 인간이다. 신에 연관시켜 본다면, 우리는 신 자신이 곧 기계이면서 기술자라고 생각한다. 업보(業報)로 고통받는 기계 또는 행위[業]를 통해 무엇을 성취코자 하는 기계를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기계는 그냥 돌아갈 뿐이다. 우리가 만일 기계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여 일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그 일 속에서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의 임무를 반드시 확인해 보아야 한다.
탐욕스런 인간은 자신의 탐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탐욕의 화신이 된다. 그런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열망 속에서 자신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자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고 그 목적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결코 나쁜 욕망으로 말미암아 어지럽혀지지 않고 마침내 신(神)과 하나 된다. 우리가 만일 신 안에서 자기를 잃고 기계가 되어 자신을 신의 손에 들린 질흙으로 만든다면, 그리하여 신과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 아닌가? 우리는 신 안에서 완벽하게 자기를 잃어야 한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나에 관한 이 진리를 아는 자마다 결코 카르마(행위, 業)에 묶이지 않느니라.˝[4장 14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신의 법을 아는 사람은 일을 하되 그 일을 통하여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일을 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나´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조바심 내거나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에 깊숙이 몰입되어 언제 그 일을 그만둘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계처럼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저명한 화가의 작품인 매우 아름다운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여자들이 밭에서 곡괭이를 들고 일을 하고 있다. 그중 한 여자가 곡괭이로 땅을 파려는 바로 그때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곡괭이를 놓고 무릎을 꿇듯이 허리를 숙여 기도를 시작한다. 시인은-그 화가는 시인이다-기계처럼 일하고 있는 여인을 그렸던 것이다. 그 여자들한테는 노동이 곧 예배였다. 라틴어로, 육체노동이 예배의 한 양식(樣式)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기도시간만 되면 자동적으로 무릎을 꿇을 것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기로 결심한 사람은 시계가 4시를 알리면 침상에서 일어난다. 그런 사람이 기도시간에 기도를 못하게 되면 거기에 마음이 쓰여서 하는 일에 집중이 잘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 몸을 바쳐 일하는 사람이 카르마의 영향을 받아 괴로워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가 하는 일로 말미암아 긴장감을 느끼는 일이 없다. 그는 늘 신선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행복감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일을 중단하고 몸을 쉬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방문객이 있어서 일을 멈추어야 할 경우에는 오히려 비감(悲感)해진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카르마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탐욕스런 사람은 자신의 탐욕 안에서 자기를 잃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쾌락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자신의 방종(放縱)에 싫증을 낸다. 쾌락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에 대해 조만간 싫증을 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미각(味覺)에 싫증을 내면 그는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미각에 싫증 내지 않고 음식을 맛으로 먹지 않는 그런 사람이 어떤 질병으로 고생하겠는가? 사람은 손으로 일을 하되 거기서 쾌락을 얻고자 기대하지 말고 그냥 마땅히 자기가 할 일로 알고 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아무것도 얻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업보(業報)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神)은 이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지만 업보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데 먹고 마실 것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육체에 싫증을 내기에 카르마의 영향을 받아서 괴로워한다.
신은 늘 깨어 있다. 우리는 한동안 깨어 있다가 잠자고 음식먹고 배고픔을 느낀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늘 깨어 있으면서 스스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바가 없다. 그는 잠도 자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는다. 행위를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행위 뒤에는 자기중심성(egotism)의 흔적과 ´나´에 대한 집착이 숨어 있다. 우리의 행위는 의지(will)의 실현인 것이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찰나의 중단도 없이 늘 깨어 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을 우리의 이상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가장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스리 크리슈나가, 요가는 행위의 기술이라고[2장 50절]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요가를 확고하게 수련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조바심 내며 안달하는 사람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말이다.
해탈을 갈망한 옛사람들은 이를 알고서 행위하였느니라. 그런즉 그대로 지난날에 살았던 이들을 본받아 행위할지어다. [제4장 15]
옛적에 ´모크샤´(해탈)를 추구했던 이들은 이 진리를 알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일했다. 신(神)을 깨닫는다(realize)는 것은 신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몸을 바쳐 쉬임 없이 경계하며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육신을 입고 살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신을 본받아야 한다.」
(p.228∼p.230)
「우리는 이 세계의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의 임무는 이 기계의 한 부품으로서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매순간 우리 몫으로 배당된 일을 하되 그 일에 얽매이지 않고 조용히 담담하게 해야 한다.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는 황소는 돌고 또 돌지만 물통은 제자리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물통이 아니고 우리 가슴이었다면 분명히 아래로 떨어졌겠지만, 물통은 그냥 그대로 제자리에 조용히 남아 있다. 그와 같은 조용함으로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한다. 반면에, 만일 우리 마음이 어지럽혀져 있다면 우리는 일손을 놓고 쉴 수 있지만 그러나 행위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뭔가를 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더욱 세게 족쇄에 매일 것이고 비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릴 따름이다. 만일 그가, 일상사(日常事)에 스스로 비끄러매인 자들은 자기를 얽매는 카르마의 사슬을 짜고 있는 것이요 자기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자기한테 속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이 카르마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주인님이, 카르마에 관한 진리는 깊은 신비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생각으로 카르마를 행하는 자는 너무도 무거워서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짐을 스스로 어깨에 얹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하되 다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어서 하는 사람은, 그리고 만일 그가 어떤 특별한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일에서 손을 뗀다면, 그 사람은 자기 몸을 그 어떤 카르마의 사슬로도 묶지 않는 사람이다.
어제 저녁 나는 몇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그들을 꾸짖었다. 그 일에 대해서 누군가 나에게, 내 목소리에 짜증기가 섞여 있었던 것은 내가 성을 내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신(神)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만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자일 뿐, 남의 선생(guru)이 되기에는 적합지 못한 자다. 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래서 흥분을 하면 목소리가 절로 커진다. 내가 만일 내 몸에서 모든 욕망을 지워버리는 데 성공했더라면 화를 내면서도 목소리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러나 가끔 내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에 분노의 불꽃이 이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아르주나가 마음속으로 주인님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자기 의지에 반(反)하는 악한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나와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제3장 36] 나는 여전히 욕망과 분노에 휘둘리고 있다.」
(p.234)
「그의 모든 행실이 욕망과 이기적인 목적에서 해방된 사람,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지식의 불꽃에 타버린 사람, 그런 사람을 현자(賢者)는 ´판디타´(pandita, 자기를 실현한 사람)라고 부르느니라. [제4장 19]」
(p.236∼p.237)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만족하며 모든 의존(依存)에서 해방된 사람, 그 사람은 행위를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도다. [제4장 20]」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다만 그 몸으로 행위를 하는 사람, 그는 아무 오점(汚點)도 남기지 않느니라. [제4장 21]」
(p.239∼p.240)
「우연히 발생되는 모든 일에 스스로 만족하고 반대되는 양극(兩極)을 넘어 악한 뜻에서 자유롭고, 성공과 실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행위를 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느니라. [제4장 22]」
「모든 집착을 여의고 그 마음이 참된 지식에 굳건히 뿌리박혀 있고 오직 신(神)에게 바쳐진 공물(供物)로서 행위하는 자유혼에게는 모든 카르마가 소멸되는도다. [제4장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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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읽기
고기(logosin125) http://cafe.naver.com/mishima/484
쾌락 고통을, 이득 손실을. 승리 패배를 하나로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어라...
네가 죽으면 천당을 얻을 것이요, 네가 이기면 이 땅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쿤티의 아들아, 싸우기를 결심하여라.
- <바가바드 기타>, 2장 37,38절
바가바드 기타의 저술가에 따르면, 지식은 말로 하거나 학술적으로 토론할 일이 아니다. 내적인 체험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쉬엄 쉬엄 읽던 바가바드 기타를 마침내 다 읽었다. 제목의 뜻을 풀면, ‘바가바드’ 즉 至尊者, 지엄하신 자, 거룩한 존재의, ‘기타’, 노래라는 뜻이다. 10만 구절이나 되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일부분이다. ‘마하바라타’, ‘마하’는 한자로 큰 大자에 해당하고 ‘바라타’는 가문이름이다. 그러니까 위대한 바라타 가문의 이야기다. 황당한 것은, 바가바드 기타 속에 나와있는 대화들이라는 게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의, 적들이 코 앞에 대치해있는 들판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쿠르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그러니까 쿠루 족의 두 형제 가문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대 살육을 벌이려는 찰나에 두 왕자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아르주나라는 용맹한 전사가 친족들이 뒤섞여있는 적의 군대와 싸우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차부(수레 몰이꾼)였던 크리슈나가 인간의 의무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의 광명’을 여는 깨달음에 관하여 긴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함석헌 옹의 한글말 번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선생’ 소리를 듣는 괴짜 영감쟁이의 기묘한 고집의 아우라가 물씬 풍겨난다.
1.
어진 이(지혜로운자)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는다.
- 2장 11절
결국 평정심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쾌락과 고통에 대한 태도는 인체에 축적된 습관의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성공을 반드시 기뻐하고 실패를 반드시 슬퍼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쥐었던 손을 금방이라도 놓으려는 것처럼 천천히 힘을 빼라. 지극히 私的인 이 주변를 나 자신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평온이 가깝다고 말한다.
마치 거북이 그 사지를 끌어들이듯이, 그러한 사람은 제 감관을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지혜가 튼튼히 섰느니라.
- 2장 58절
평정심을 찾기 위해서는 외적 감각의 변화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감각적 대상에 대한 집착을 거두라는 말이다.
사람이 감각의 대상(境)을 골똘이 들여다보면 거기 대한 집착이 생겨난다. 집착에서 애욕이 일어나고 애욕에서 분노가 나온다. 분노는 미망을 낳고, 미망에서 기억 상실이 오고, 기억의 상실에서 이성의 파멸이 온다. 이성이 파멸하면 그 사람은 완전히 망해 버린다.
-2장 62-63절
감각의 대상에 대한 집착이 하나의 장(場)을 형성하고, 그렇게 힘과 내외적 감각과 정념의 변화들로 이루어진 퇴적물을 나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면, 나로 인해서 살고 나로 인해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무엇인가 성취한다는 망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오 마하바후(큰 팔을 가진 이- 아르주나를 가리킴)야, 이 성(性)과 그 활동의 진상을 아는 이는 성이 성에 대해 작용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 3장, 28절
자연의 성에 미혹되는 사람은 전체를 망각하고, 본성의 부분적 작용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크리슈나는 이런 미혹된 자들을 흔들어 깨워선 안된다고 충고한다.
전체를 아는 사람은 전체를 모르는 둔한 사람을 흔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29절
그들은 본성에 따라 그들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이고, 참된 지식의 낱알을 상대의 귓구멍에 불어넣어줘도 두개골 안짝에 싹티울 밭의 조건까지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힘의 낭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좁은 자아를 보존하기 위해 열심히 신경질을 내고 뭐라뭐라 그럴듯한 자기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며 설교 조로 덤비기도 한다. 비록 사태 자체에 대한 온전한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본성의 가드레일이 놓은 가능성의 길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지만 물러서지 않고, 올라가지만 내려가지 않는 게 천성의 힘이다.
무시당한 자연은 복수하는 법이다.
- 라다크리슈난, 2장 33절 주석에서
그렇다면 억지로 제 영의 본성과 주어진 고깃감의 제한된 피순환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마음의 무게중심을 되찾는 내적 자세란 무엇이냐.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성공 실패를 하나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3장 22절
행동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임에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속세를 떠나 까까중이 되어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처해있는 바에 따라 눈 앞에 놓인 구체적인 일거리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라는 게 아니다. 억지스러운 자기 콘트롤을 하라는 말도 아니다. 자제는 깨달음의 불이 켜진 이후에 자연스럽게 따라나온 증후와 같은 결과이지, 설교나 방법이 아니다. 감각은 언제나 마음의 구조에 따라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된다.
- 간디, 5장 19절의 주석에서
2.
행동하는 동안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기타>의 저술가는 말한다. 그것은 자아가 자신의 행동들과 초연해서 있는 상태를 관찰하고 뼛속 깊이 체험하는 결과로 오는 것이라는 거다. 내적 고요의 체험.
요가의 경지에 이미 올라 있다면 그 사람에겐 고요히 함이 그 방법이니라.
-6장, 3절
그의 공부는 신체적 활동 분야에 대립되는 마음의 분야에 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마음이 어떤 경험을 보존해 두려면 그에 상당한 신경 계통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과 신경 계통 사이의 관계로 인하여 어떤 경험이든지 이쪽에서도 자극할 수 있고 저쪽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다 요가hath yoga란 생리적 신경 조직을 훈련하여 마음을 제어함으로써 초월적인 의식의 상태에 이르자는 그래서 결국은 우주적 의식에 까지 이르자는 실현 방법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 절들에서 말하는 명상의 실습은 마음을 훈련함으로써 신경 조직을 통제하고 초월적 의식을 일으켜서 종국에는 우주의식에까지 이르려는 실현의 길이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절 주석에서
그렇다. 마음은 그 자체로 변화하지 않는 본체도, 권리적 주체도, 소급가능한 최종 단계로서의 실체도 아닌, 신경 조직과 호르몬의 양과 흐름을 가늠하고 뇌적 자극과 정념의 쾌울(快鬱)을 조작하기 위한 고정된 경계가 없는 일종의 ‘터치 스크린’이다. 내적 변화와 외부의 대상을 반영하는 이미지들이 그대로 기능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계기판 건반으로도 활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항상 변화무쌍하면서도 소용돌이의 중심을 잃어버리진 않는 마음의 구조를 온전히 간파하고 하나의 체험적 진실로 이끌기 위해서는 ‘은밀한 곳에서의 고요’가 필요하다.
너는 기도하려 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 <마태복음> 6장 6절
저 안으로 물러가 홀로 되기 위해서.
부드럽지만 피할 수 없는 압력에 마주하기 위해서.
자기 안의 낯선 음성을 듣기 위해서.
시는 정적 속에 괴는 정서에서 솟아난다.
- 워즈워드
이때 한 주석가는, 홀로 있는 명상의 단계에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올 어떤 특별한 체험 따위를 기대해선 안된다고 충고한다. 어떤 목적 관념을 간직하고 성공적으로 성취하기를 바라는 기대까지 끊으라는 얘기다. 일견 모순된 말처럼 들린다. 반면에 아무것도 욕망하고 집착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잊어버리려 노력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경지에 빠지는 길이다. ‘잊자는 노력은 미워함과 저주함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제 몸의 자연스러운 생리를 무시하지 말고, 단번에 휘어잡으려 조급해하지 말며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그 자리에 올라앉아,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고, 사념과 감각을 제어하여...몸과 머리와 목을 꼿꼿이 일직선을호 가져 움직이지 말고 눈으로는 코끝을 들여다보듯이 하고, 사방으로 눈을 팔지 마라. 본성의 고요 속에서 두려움을 버리고 브라마챠랴의 맹세에 굳게 서서, 마음을 정복하고, 생각을 내게 맡기고, 정신을 통일하고 앉아 나만을 지상으로 전념하라.
-6장 12, 13, 14절
여기서 ‘브라마챠라의 맹세’는 성적 방종에 빠지지 않겠다는 수행자의 약속을 말한다. 이러한 수련은 정신적인 차원에 있지만 감각의 기능을 수행하는 전 신경 조직의 작용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기타>의 저술가는 신경 조직의 개조를 위해서 지나친 고행에 빠지는 것도 금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함께 간다. 사실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서 석가의 기본 아이디어가 <기타>의 사상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11장에서 크리슈나는 신적인 광채로 자신의 본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아르주나는 그걸 보고 두려움과 황홀한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되고, 넙죽 엎드리더니 그 동안 친구인 양 버릇없이 굴었던 걸 용서하라고 빈다. 11장은 그 기막힌 환상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라다크리슈난은 이에 주석을 달고, 그러한 번쩍 번쩍 빛나는 환상이 궁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만약에 궁극으로 놓았다면 <기타>는 11장에서 끝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황홀 속의 삼매경은 앞으로도 결코 잊을 일 없겠지만 그것을 자신의 생활 속으로 융화시켜야 한다. 환상은 단지 열어줌(開示)일 뿐이지 뿌리를 박고 기초를 다지는 것은 또 다른 일이라는 말이다. 의미심장한 지적이다.
...모든 물건에 대하여 악의를 품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내게로 오느니라.
- 11장, 55절 중에서
지상에 있는 어떤 더럽고 사소한 것이라도 거룩한 자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받으면 그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의 목적, 그의 가락과 흘러넘침을 전달하는 통로로서 기능하게 된다.
‘나타나 뵈지 않는 이’에다 마음을 부치는 사람의 어려움은 더욱 클 것이니, 나타나 뵈지 않는 이(의 관조)는, 몸을 가진 자에게는, 그 지극한 데에 이르기까지 힘들기 때문이니라.
-12장 5절
<기타>의 저술가는 인격을 초월한 절대자의 무한한 속성을 섯부른 속세적 상상력으로 인격화하는 걸 경계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타> 저술가의 특별한- 혹은 인도 사상에서 고유한- 의견이 덧붙여진다. 절대자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개념적 정직성만을 소중히 한 나머지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는 식의 부정적 접근으로 치닫는 것 또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논리의 물신 숭배라는 점에서 ‘우상 파괴주의자들도 결국 우상 숭배자들보다 나을 게 없다’고 간디는 말한다. 절대자는 진창에 빠짐이 없이도 세계와의 변화하는 관계 속에 자신의 신성을 드러낸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인간의 좁은 두개골 속으로 담글 수 있거나 없거나 그 어떤 탁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은 우상 숭배자나 파괴자나 다같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중요한 건 자신의 신앙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합일의 지경에 이르는 최고의 길은 자기를 어떤 (구체적) 형상에다 바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규정할 수 없는 이’에게 간다는 철학적인 지름길은 오히려 가장 멀고 험난한 길이라는 것이다.
4.
<바가바드 기타>의 우주론은 당시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우리에게는 낯설고 기이한- 삼캬의 우주적 시스템에 기초하여 있다. 삼캬 론(數論)에 따르면, 우주는 ‘프라크리티’와 ‘푸루샤’, 두 개의 영원한 원리로 존재하고 움직인다. 프라크리티는 영원한 물질, 혹은 원질(原質)이라고 번역해서 불릴만하다. 이 원초적 질료는 그 자체로 나타나 뵈지 않는다. 대신 자신 안에 세 가지 ‘구나’(속성 혹은 德)로 균형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 균형이 흐트러짐으로써 나타나 뵐 수 있는 결과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 세 구나는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인데, 함석헌 옹에 의해서 선성(善性), 동성(動性), 암성(暗性)으로 번역된다. (플라톤의 <국가> 편에 나오는 인간 심성의 세 가지 요소, 즉 이성, 의지, 욕망과 비교될 만하다.) 사트바, 혹은 선성은 번역된 대로 꼭 도덕적인 의미를 띄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빛’이고, 광명이며, 정결의 공간을 마련하고, 의식의 비춰줌이라는 속성이 있어서 ‘방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라자스, 혹은 동성은, 불순(impurity)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밖으로 뛰쳐나가고 활동하려는 힘이다. 타마스 혹은 암성은 타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억제, 가라앉음, 게으름, 부주의, 무관심, 영원한 어둠에 가깝다. 이러한 삼성의 특징은 14장에서 자세히 분별해놓았다. 세계 속의 모든 구체적 물체들은 이들 세 요소가 서로 다른 비율로 구성되어 있고 그 물체 안에서 서로 작용하기 때문에 존재의 형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 요소는 원리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지 실제로는 언제나 함께 뭉쳐져 있다. 이 셋의 균형이 깨짐으로 해서 프라크리티의 진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프라크리티는 푸루샤의 영향을 받으면서 진화한다. 푸루샤는 간단하게 말해, 그 몸인 프라크리티에게 의식을 부여하고 알게 해주는 혼(魂)적인 요소다. 푸루샤는 프라크리티와 달리 그 자체로 활동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인 균형을 깨뜨릴 구나도 없다. 따라서 푸루샤는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를 가지지 않는다. 물체의 육들은 프라크리티라는, 기본적으로 하나인 것의 변형인데 반해, 푸루샤는 서로 다른 개체, 개인의 수만큼 무수하다. 삼캬론에서는 조물주나 신과 같은 인격적인 최고 주재자가 없고 대신 이 두가지 영원한 원리가 있을 뿐이다. 프라크리티가 그 자신을 드러내려고 할 때의 의지, 혹은 최초의 그 의미 분별 발생(붓디buhddi, 知 혹은 意)으로 진화의 첫 발을 내딛는다. 다음은 개체화(아함카라ahamkara), 단일한 프라크리티가 분열되어 무수한 개체로 갈라지게 되는 과정이다. 이 개체화는 크게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으로 나뉜다. 유기적인 것은 마음(마나스manas)를 중심으로 하여 이에 더불어 눈, 귀, 코, 혀, 몸뚱이, 이렇게 5지근(五知根, 알게 하는 다섯 가지 뿌리)과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이렇게 5작업근(五作業根, 작업 도구로서의 다섯 가지 뿌리)가 생겨나고, 무기적인 것의 세계에는 地, 水, 火, 風, 空이라는 5대 원소와 이에 상응하는 다섯 가지 대상(五‘境’, 5탄마트라)인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은 마하데브 데자이의 <간디에 의한 기타> 주석에서 참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삼캬 론에 따른 영적인 해방이란 무엇이냐?
문제는 개체의 푸루샤가 어떻게 해서 프라크리티라는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붓디(즉 분별지, 의지)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붓디 속에서 사트바의 요소가 지배적이 되면 푸루샤의 해방이 촉진되고, 라자스나 타마스가 지배적이 되면 붓디는 푸루샤를 결박하고 얽어매게 된다. 인간의 모든 욕망, 정념, 고통과 쾌감 등의 심리적 경험은 (실제로는 구나에 얽매일 필요 없는) 푸루샤 그 자신이 스스로 떠안은 변형들이다. 즉 세 구나의 주사위 놀이에 결박되어, 제 할당의 프라크리티에 얽매인 현 상황 자체를 나로 착각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소아(작은 나)일 뿐이다. 대아의 확신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나는 행하는 자도 경험하는 자도 아니다’는 그 확신이 이루어지면 산사라(sansara),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 다시는 삶이라는 마귀로부터 농락당하지 않게 된다는 시나리오가 삼캬 수행론의 골간을 이룬다.
5.
인도의 사상적 지형에 있어서 유물론과 허무주의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았고 그리 만만한 진영도 아니었던 듯하다. 직관적인 날카로움과 합리적인 근거를 갖춘 명쾌한 단순함으로 고대 인도의 지식인들에게 대단한 호소력을 지녔던 것 같다. 그러니 신앙의 힘으로 카스트를 유지하는,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현자들로서도 유물론자의 정직한 직관을 얕잡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현자들이 보기에 그 자들은 세상의 독소였고 그 스스로 망령이었으며, 어설피 건전한 민중의 무리들까지 휘어잡아 그들 망령의 세계로 유혹하였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전면적 허무주의는 신앙적 삶에 가장 무서운 적이다. 허무주의자, 유물론자들을 묘사한 16장의 일부를 인용해본다.
이 세계에는 두 종류의 피조물이 있다. 거룩에 속하는 것과 허깨비에 속하는 것. 거룩한 종류에 관하여는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프리다의 아들(아르주나)아, 이제 허깨비 종류를 들어보아라.
허깨비 바탕에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 할 것이요 어떤 것이 하지 않을 것인지를 모른다. 그들에게는 정결도, 올바른 행동도, 참도 없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세계는 실존도 아니요, 근저도 없고. 주인도 없다. 그럴만한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요. 다만 서로간의 정욕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에 달라 붙어서, 그 영혼을 잃고, 이성이 부족한 것들은 흉악한 행동을 하며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그 원수로 나타났느니라. 물릴 줄 모르는 애욕에 빠져들어 위선과 교만과 방종에 몸을 맡기고, 허망한 생각으로 그릇된 견해에 빠져 부정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한이 없고 죽음으로야 끝이 나는 근심 걱정에 휩싸여, 욕망의 만족을 최상의 목적으로 알고, 인생은 그저 이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 16장, 6-11절
이 세계가 이렇게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를 넘어서 도대체 세계 자체가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식의, 허무주의의 무장무장한 파토스를 뿜어내는 견해가 분명히 존재한다. 창조주가 통솔하는, 일정한 질서에 맞는 세계라는 것은 인간이 실용적 필요 때문에 고안해낸 어리석은 환상이다. 법칙도 없으니 조화나 안정도 없고 극단적으로 말해 당장 30분 후에 일어날 일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철학적 교설로 보기보다는, 그러한 이론을 고집했을 때에 풍기는 일정한 시선의 분위기(mood), 다시 말해서 이론이라는 인공의 온실 속에서 조성된 ‘철학적 기분’이라는, 시대반영적 배경까지 해석해 넣어야 할 것이다. 내일을 알 수 없고 친구도 적도 확신할 수 없는 현존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오직 순간의 쾌락뿐이다. 코 앞까지 다가온 쾌락만이 확실하다. 독이 되든 약이 되든 넙죽 주워먹고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게 보일 정도로 삶의 피폐 속에서 자라난 한 웅큼의 쑥덤불이 스스로 허깨비임를 자처한 자들의 철학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세계 자체가 쾌락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생물이 존재하는 유일한 원인은 오직 성욕 그것뿐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 시대의 저명한 유물론자였던 것이다.
<기타> 저술가는 그들을 ‘허깨비’라고 부른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영혼의 멸망으로 이르는 세 겹의 지옥문을 통과하여 최저의 밑바닥으로 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저주다. 해답을 갈구하지 않는 비대한 인식욕의 귀결이다. 세 겹의 지옥문이라 함은 애욕, 분노, 탐욕이다. 이는 불교의 貪(탐욕), 嗔(성냄), 癡(어리석음, 광기), 이 세 가지 정념의 독에 상응한다.
* 맺으며..
결국 아르주나는 각성하고 전쟁터에 나가서 용감히 싸운다. 신의 가호를 받았으니 승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 책의 머리말을 달아놓은 이거룡 선생의 글에서는, <기타>의 쿠루크세트라 전쟁을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비유하는 전쟁이라고 말한다. ‘내면의 큰 위기’를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내면의 비유가 좀 김빠지게 하긴 하지만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는 그 점이 김빠지게 만드는 것 아닐런지? - 받아들인다. <요가>, 즉 흩어진 자신의 다발을 ‘묶어세움’을 위해서는, 큰 위기가 뒷받침 되어야 리얼하다는 말일 게다. 이거룡 선생의 말을 인용해본다.
“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정확히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삶 가운데 문득 찾아오는 중대한 위기 상황은 우리의 마음속에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오직 그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장애를 깨부수고 내적인 실재에 닿는 데 필수적인 긴장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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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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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기타의 최고의 지식˝이라고 매일 외운 19줄(2장 52-72)
(p.560∼p.562)
52
그대의 지식이 미혹의 수렁을 벗어날 때,
그때 그대는 이미 들은 것과 앞으로 듣게 될 것에 대하여 똑같이 무심하게 되리라.
53
듣는 것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진 그대의 지식이 집중 속에 안정하여 고요한 정(靜)에 들 때, 그때 그대는 요가를 성취하리라.
54
오, 크리슈나여,
안정된 지혜를 지니고 초의식 상태에 잠긴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나이까?
그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나이까?
55
오, 파르타여.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갈망을 물리치고
오직 ´아트만´한테서만 스스로 위안을 찾을 때,
우리는 그를 확실히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느니라.
56
마음이 슬픔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에 치닫지 않는 사람,
정욕과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확실한 깨달음에 이른 고행자라 부를 수 있도다.
57
그 어디에도 애착하지 않는 사람,
눈앞에 선이 나타나든 악이 나타나든 기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깨달음은 확고부동이니라.
58
거북이 사방으로부터 네 발을 오무라들이듯이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끌어들일 때,
그때 그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림이 없도다.
59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至高者)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는도다.
60
현자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 카운테야여, 휘어잡을 수 없는 감각들이 억지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도다.
61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yogi)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로다.
62,63
감각의 대상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64
그러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에서 떠나 아트만의 다스림을 받는 감각으로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단련된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얻느니라.
65
마음의 평화는 모든 질병의 끝을 뜻하나니,
그 마음이 평온한 자의 깨달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로다.
66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깨달음도 헌신도 없나니,
헌신이 없는 자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자에게는 어디서 행복을 얻을 곳이 없느니라.
67
그의 마음이 떠돌아다니는 감각을 좇아 치달릴 때,
바람이 바다 위의 배를 휩쓸어가듯이 그의 깨달음을 휩쓸어가는도다.
68
그러기에 오, 마하바후여.
사방에 널려있는 대상들로부터 모든 감각이 통제되는 사람은 어김없이 깨달은 사람이니라.
69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한밤중일 때 단련된 영혼은 깨어 있고,
다른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때가 눈밝은 수행자에게는 밤중이로다.
70
갈망을 품어 기르는 자가 아니라,
강물로 채워지면서 결코 흘러넘치지 않는 대양(大洋)에 모든 강물이 스며들어 없어지듯이,
자기 안에서 모든 갈망이 없어진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발견하느니라.
71
모든 갈망을 벗어버리고 무심으로 행동하는 사람,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얻는도다.
72
오, 파트타여. 이것이 브라만의 품에 안식하는 자의 생태니,
이 상태에 도달한 그는 속지 않느니라.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순간에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도다.」
마하트마 간디 지음,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당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