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序
문인상(文仁相)
- 꽃으로 표상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우주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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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우주관은 동양 전통의 사상인 '도(道)'와 연결된다.
도는 유가와 도가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한 개념으로서
인간과 사회의 우주(자연)를 하나로 연결하는 원리였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법칙 삼아 어긋나지 않고, 땅은 하늘을 법칙 삼아 어긋나지 않으며,
하늘은 도를 법칙 삼아 어긋나지 않고, 도는 자연을 법칙 삼아 어긋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인간과 자연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 중심에는 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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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중기의 문인화가인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에도 나타나 있다.
그가 부지돈영이라는 한직을 맡은 후 화초를 기르면서 썼던 이 책에는 화초의 속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을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을 따뜻하게 하여 그 천성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 죽게 될 것이다.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천성을 헤쳐서야 되겠는가.
" 강희안은 양화를 통해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에 이르고자 했다.
인간과 사회를 성찰하며, 진정한 삶에 이르려는 소망의 표현으로 꽃을 길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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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이러한 동양전통의 우주관에 입각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특히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외롭게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과
삼라만상(산, 달, 별, 나무, 잡풀, 사람, 곤충, 동물 등)을
독립된 이미지와 소우주로 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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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
사실, 나는 꽃보다 풍경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군자를 비롯한 수묵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선친은 광주의 의재 허백련과 함께 남도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던 남농 허건의 제자였다.
... 어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남화연구원에 가곤했는데,
그때 수묵화를 보고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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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에게 배우고 연마했던 남종화 전통을 현대적 화법으로 계승하는 한편,
새로운 회화세계를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내가 이 무렵에 관심을 쏟았던 주제는 나를 포함한 인간의 삶과 관련된 소외된 계층의 문화였다.
아버지가 남겨준 가난이라는 유산과 시장이나 공사장 같은 노동현장의 고단한 풍경,
그리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힘찬 외침과 부조리한 사회현실 등이 자연스럽게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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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실주의적 화풍은 주로 판잣집-시장 상인드, 노인들, 광부 등
소외된 계층의 일상들에서 보여지는 돼지머리, 달, 솟대, 밥그릇 등
토속적 샤머리즘적인 사물들을 수묵채색으로 그린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보다 의인화나 상징 같은 은유적 방법으로 시대의 아픔을 전하고 싶었다.
소나무, 닭, 석불들은 인간의 또 다른 표정이나 상징이며, 전통의 해체적 징후를 표상한 것이다.
나는 이들 그림을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뜻에서
"반추의 장"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반추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함, 또는 그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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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란 곧 과거의 일을 되돌아보는 일인데,
나에게 있어서 반추의 대상은 소외된 계층의 일상이나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상은 나 자신의 과거이자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반추의 장은 사물의 해체와 재배열을 통해 시긱의 풍경이 아닌
'시간적 상상력의 풍경'으로 전치되거나 혹은 비현실적인 사물의 원형이
분할적으로 보기 위한 전략적 배려로서 고안한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적인 시간과 '나'의 현실적인 시간은 '상호 신체적'인 지평 속에서 만날 수 있고,
'나'의 반추는 '우리'의 반추로 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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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금호미술관 박영택(경기대 교수)은
"혼곤한 표정을 띤 인물들이 단독으로 혹은 군상으로 그려져 있고
그 인물 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윤곽과 테두리선은 삶의 굴레와 억압 속에 갇혀진
인간 존재의 불안과 긴장상태를 떠올려주고 있으며
아울러 인물 이외에 달과 솟대, 소나무, 밥그릇 등이 놓인 화면은
반문명적 성격을 띤 자연의 원초적 상태와
잊혀져가는 우리의 전통 그리고 강한 토속적 정취와 샤머니적 요소를 상징하는 동시에
민초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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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때는 1995년 무렵이다.
당시 서울의 화실을 정리하고, 팔당으로 작업실을 옮겼는데,
작업실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보고 자연스럽게 꽃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내 꽃 그림은 대학 진학 이전에 천착했던 남종화풍의 실경산수화와 같은 자연주의로 귀환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자연주의로만 꽃을 표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화면의 형식적 미학에 방점을 찍은 것이었다.
소재를 받쳐주는 배경은 물론 꽃의 형태와 색채 또한 자연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재현보다 심상의 꽃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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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의 '닮지 않은 닮음'의 화론을 계승한 제백석의 생각은 내 그림에 시사하는 바 크다.
제백석은 '그림은 닮음과 닮지 않음의 사이'에 있어야 한다 했다.
내 꽃 그림은 이러한 석도와 제백석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내 꽃 형상은 사실성을 바탕에 두면서도 자유분방한 변형을 거쳐 자연 그대로의 꽃이 아닌,
기억과 감정에 의해 재구성 되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회화적으로는 존재하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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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꽃 그림은 세 가지 방식으로 구성한다.
첫째는 여백을 중시한 구성이다.
꽃과 풀을 제외한 공간은 모두 모노톤의 채색으로 이루어진 여백이다.
한국화의 여백과 같은 구성이다. 그러나 일부 그림에서는
여백이 이미지가 없는 텅 빈 공간이 아닌 꽃의 형상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둘째는 화면을 면으로 크게 분할한 구성이다.
분할된 공간에 꽃과 풀을 선과 색채의 강약으로 표상해 놓았다.
색조의 강약, 크기의 대조로써 현대적 미감의 변화와 조화를 보여준다.
셋째는 화면 안에 크고 작은 원들을 배치한 구성이다.
그 내부에는 꽃 등의 자연물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화면 안의 원들은 자연물의 개체이자 소우주로 이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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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란 무엇보다 꾸준한 작업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평론가들이 알고,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제 자신이 안다는 말이 있다. 내가 항상 되새기는 생각이다.
그렇게 계속된 시도와 연습 속에서 작품이 나오기 떄문이다.
엄청난 작업이 결국 좋은 작품으로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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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상
* 개인전 19회 / 한국화 24인의 젊은영혼들전 / 한국청년작가 파리전 / KBS 선정 34인 특별초대전 /
한국미술 70인 아름다운 산하전 / 한중일 동행전
*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 한성 백제미술대상전 운영위원장 / 고양아트페어 우수작가 선정위원
*
몇 일 전
광주 모 갤러리가
서울의 문인상을 초대하여
전람회를 열었다. 동명동 농장다리께인데
도롯가 가정집을 개조하였다. 대문에서 바라보니
외장이 노출콘크리트방식에 통유리를 둘러쳐 예의 미술공간
다운 깨끗한 인상이다. 기왕에 나도 전원갤러리를 짓고 인테리어를
궁리하던 참이라 문인상의 그림도 궁금하거니와 그 그림을 걸어놓은 내부
도 보고 싶었을 터, 덤으로 아내와 함께 모처럼 토요일 저녁을 삼아 데이트도
하게 되었으니 일석삼조 아닌가! 입구에 들어서자 마당받이 비치파라솔 아래서
만난 첫 번째 사람은 황순칠화백. 나완 오랜 세월 서툴고 산 넘고 물 건너 바람으로
나 오간 더딘 관계... 몇 분 후에 또 도착한 사람은 박문수화백. 이도 고개 넘어 이 마을
저 고샅 익숙하고도 무심했던 세월의 뒤안... 그리하여 후배 문인상을 가운데에 앉혔으니
어쩌겠는가. 옛 고교시절이 불거지면서 금세 좌중이 왁자해지기 시작했다. 누군 아팠고,
누군 백억 대가 되었다니, 누군 뭘 그리고, 누군 작파하고...... 고교시절 이후 처음이다 싶을
만큼 반갑고 낯설었다. 붓 한 자루 들고 까불던 고등학생 문수와 붓 한자루 들고 살아온 생애
의 박문수씨가 본디 하나라는 사실을 몰라 또 술좌석에까지 이어졌다. 문인상은 오늘날에도 지
게바작대기거나 목나무다리 같은 선배들이 절뚝거리며 찾아와 술도 사주고 떠들어주고 격려도
아끼지 않음직하니 문인상이 실천한 사람 간의 이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
상인 그렇게 열 댓살부터 사십년이 흐른 오십 중반을 인간사회에서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치우치
지 않고 오롯 가운데를 잘 지킨 동글동글한 인간사회의 지표종이다. '文仁相'. '사람 사이(相)에 말
(文)이 어질다(仁).'는 뜻으로 보니 그의 이름에 걸맞는다. 가끔 의리나 예의, 상부상조, 의무와 배려
같은 자신의 원칙에서 세상이 종종 갈등할 때도 있지만 그는 천상 그림쟁이다. 세상을 향한 그림의
메시지 또한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다. 구체적인 적시나 직설의 주장, 서정의 시린 공간이나 서사의
아픈 시간마저 훅 날려버린, 축약시킨, 빨아서 탈탈 널어버린, 덮고 뭉개버린 안개 속이다. 붉은 안
개, 황토바람, 초록 서리, 갈빛 흔적 같은 시적 풍경마저 '의도'의 빌미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더 인
생이 온유하고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사실 '주장'이란 골치 아픈 물건이다. 싸움이든 시비든 하
다못해 갈등 같은 것이라도 기어코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예술의 방편이다. 문인상은 이제
인간관계를 넘어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도 '그림관계'을 시작했다. 꽃이면 어떤가 그는 여전
히 바라보고 쓸어안으며 그림을 그릴 뿐. 경이롭거나 황홀하거나 서럽거나 뜨겁다며 호
들갑 떨지 않는다. 간혹 흐린 풀섶에서 국화문양으로 터지는 불꽃놀이라도 감미로운
파스텔토운이라야 만족하고 행복하다. 색점이 하나 얹힐 때마다 잉큼잉큼 놀라고
즐거워하며 결국엔 모노톤으로 빈틈없이 두텁고 평화롭다. 그는 온 세상을 자신
만의 그림법으로 벽바르고 싶어하는 숙련된 프로 도배사다. 돌아봄과 내다
봄의 가운데를 꿰는 기술. 그의 회화는 '도'를 향한 멈칫거림. '도'
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주춤거림. '도'에서 아조 눌러살려는 '미
적거림' 미술이다. 2014. 5. 7. 김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