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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김용휘 사장은 국내 프로야구 사상 손꼽히는 유능한 프런트였다. |
주식회사 현대 유니콘스는 아직 살아 있다. 사무실도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현대해상빌딩 9층에 남아 있다. 3월 18일 오후 사무실에서는 현대 유니콘스 점퍼를 입은 직원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대다수가 우리 히어로즈로 고용이 승계된 직원이다. 아직 히어로즈가 사무실을 구하지 못해 임시로 공간을 빌려 쓰고 있다. 히어로즈로 옮기지 않은 직원들은 회사 청산 작업을 하고 있다.
김용휘(58) 현대 구단 사장은 “퇴직금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받은 히어로즈 창단 가입금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3월 말께 청산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청산을 앞둔 기업의 대표이사라면 ‘실패한 CEO’일 것이다. .
그러나 김사장은 국내프로야구 사상 손꼽히는 유능한 프런트였다. 그는 1970년대부터 여자배구, 남자농구, 아마추어야구, 역도 팀 등을 거치며 전문 프런트의 길을 걸었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 단장을 맡았고 2001년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전문 프런트의 사장 승진 자체가 국내프로야구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가장 유능했을 단장이 실패한 경영자로 전락한 건 한국프로야구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회사 청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아까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을 만나고 왔습니다. 많이 아쉬워하시더군요. 그동안 야구단에 많은 지원을 하신 분입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 때 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현대가 1996년에 프로야구단을 만들었죠. 그전에 현대그룹에서 프로야구를 했으면 한다는 의사 표시는 몇 번 있었어요. MBC 청룡이나 쌍방울 레이더스 인수 이야기도 있었고.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는 기존 프로구단들이 진입 장벽을 쳤어요.
그때 ‘공룡 현대’라는 말이 있었죠. 그랬죠. 복잡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좋다. 정 받아주지 않으면 다른 리그를 만들어보자’고 한 거예요. 이른바 ‘제2리그’였죠. 고교나 대학 졸업반 선수들을 모아 아마추어 팀을 만들어 일단 현대가 관리한 뒤 그 선수들로 제2리그 참가 기업들이 따로 드래프트를 해서 프로리그를 출범한다는 구상이었죠. 몇 개 기업과 꽤 구체적으로 얘기가 됐습니다. 그래서 현대 피닉스라는 팀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때는 아마추어 야구의 인기가 있었고 대학에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이 선수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했죠. 문동환, 안희봉, 조경환, 박재홍, 임선동 등이죠. 관리는 현대건설에서 했습니다. 그때 제가 현대건설 총무부에 몸담고 있었어요. 나중에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된 뒤 현대전자가 피닉스를 맡았고 이내 팀을 해체했죠.
그러다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게 된 거죠. 2년가량 피닉스를 운영했는데 태평양에서 인수 의사를 타진하더군요. “어렵게 새 리그를 만드느니 차라리 기존 구단을 인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인수 대금이 430억 원이었는데 그때 시세로 지나친 금액이었습니다.
계산은 이랬습니다. 1995년 태평양의 예산이 59억 원이었습니다. 연평균 50억 원이라고 쳐서 태평양이 구단을 운영한 8년을 곱하니 400억 원이 됐습니다. 운영 적자를 보전해 준다는 셈법이었죠.
예산을 모두 적자 또는 지원금으로 잡은 셈인데 납득이 가지 않는 계산법입니다. 태평양 쪽의 논리가 그랬습니다. 어쨌든 현대그룹에서 프로야구에 뛰어들겠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금액이 좀 과하다 싶어도.
제2리그 출범보단 싼 비용일 수도 있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죠. 앞으로 당분간 430억 원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2000년 SK의 창단 가입금이 250억 원, KIA의 해태 매입 대금이 210억 원이었습니다. 대단한 투자였죠. 지금 새삼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초기 투자 비용 일부를 돌려서 구장 시설에 썼으면 어땠을까라는 거죠.
지금 모든 야구장들은 지방자치단체 소유입니다. 당시는 구장 건축비가 지금보다는 적게 들었어요. 민간 야구장이 건설됐더라면 야구단이 자체 수익 사업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프로야구도 더 활성화됐겠죠.
프로야구단의 가장 큰 문제는 자생력이 없다는 겁니다. 이른 시간 안에 이기는 팀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에 선수들에 대한 투자는 많이 했습니다. 물론 좋은 선수들을 데려오면 구단 가치가 올라갑니다. 그러나 이기는 팀은 만들었지만 팬들이 프로야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은 조성하지 못했습니다. 구단 가치를 올리는 방향이 선수 투자에 편향됐던 거죠. 더 적은 비용을 들여서도 팀 색깔에 맞는 전력 구성은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현대 사태’를 겪고 나니 더 아쉬움이 큽니다. 국내프로야구의 저변은 좁습니다. 프로야구는 골수 야구 팬들만을 바라봐선 안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야구장을 찾도록 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시설에 투자를 해야 하고 구단은 투자에 대한 효과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까진 투자 효과를 승리로만 생각했습니다. 1등을 하면 사장 목이 붙어 있고 꼴찌 하면 목이 달아나는 식이었죠.
구단과 팬, 프로야구와 지역사회의 연결 고리가 단절돼 있다는 게 국내프로야구가 침체한 원인입니다. 사실 프로야구단은 경영 개념으로 창단된 게 아닙니다. 직원들의 사기 앙양, 기업 수익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만 생각했죠. 그러니 시설 투자에 눈을 감게 되고 승리를 위해 선수들에게만 투자를 한 거죠. 가뜩이나 한국은 야구선수 자원이 적습니다. 선수들의 몸값이 올라간 이유입니다.
야구장은 지역주민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이 돼야 합니다. 국내 야구장에는 커피숍 하나 없이 매점만 달랑 하나 있죠. 기업이 야구장에 투자할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30년이든 50년이든 운영한 뒤 기부체납하는 방법도 있죠. 기업도 야구장을 100억 원 투자해서 120억 원을 벌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창단 이후 짧은 시간 안에 명문 구단이 됐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태평양을 인수해 놓고 보니 여러 면에서 열악했습니다. 특히 선수층이 얇았어요. 지금처럼 외국인선수를 쓸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고. 좋은 선수를 데려와아겠다 마음먹었죠. 해태가 지명했던 박재홍, 롯데의 전준호, 나중 일이긴 하지만 LG의 임선동 등을 그래서 영입한 겁니다.
창단 뒤 3년여 동안 선수단에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창단하자마자 원당에 야구장을 만들었고 실내훈련장도 지었죠. 그때 실내훈련장을 보유한 구단은 삼성 하나뿐이었습니다. 일본의 오릭스 블루웨이브, 미국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자매결연을 했죠. 피츠버그는 태평양 시절부터 자매 구단이었지만 현대가 인수한 뒤 플로리다의 브래든턴 훈련장을 장기 사용하는 계약을 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로 전지훈련을 간다는 게 쉽지 않은 시절이었죠.
그 결과 창단 3년째인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우승했습니다. 그때 냉정하게 보면 우승 전력은 아니었어요. 구단의 투자를 보고 선수들이 열정을 가진 게 우승의 원동력 아니었나 싶어요. ‘이렇게 하면 팀이 잘 될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이죠. 바람을 탔다고도 볼 수 있고. 창단 뒤 새로운 시도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시도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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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시리즈를 2연패 한 팀은 해태와 현대 뿐이다. |
프로팀을 맡고 보니 구단과 선수 사이에 불협화음이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돈, 즉 연봉을 둘러싼 갈등이 컸던 거죠. 선수와 구단이 서로를 믿지 못했습니다. 나는 유니콘스를 맡기 전 배구와 농구팀 관리를 오래 했습니다. 아마추어 팀에는 신뢰란 게 있습니다. 어차피 똑같은 월급쟁이들이니 연봉 싸움이 있을 수가 없죠. 우승하면 보너스가 나오는 정도죠. 선수들 사이에 봉급 차이도 많지 않았고.
그런데 프로에 와 보니 신뢰가 매우 부족하더군요. 구단의 거의 모든 자산은 선수입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선수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선수들이 원하는 대로 연봉을 줄 수도 없죠. 어차피 쓸 수 있는 범위에서 연봉이 결정되는 겁니다. 그래서 연봉 고과 기준을 모두 공개했습니다. 구단 측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선수들에게 알려주는 거죠.
기준이 명확하면 토론이 됩니다. 태평양 때 200개이던 고과 기준도 430개로 늘렸습니다. 관중 동원에 점수를 주는 방식도 현대가 처음 도입한 겁니다. 연봉 협상도 세 번으로 줄였습니다. 이전까지 구단은 줄 수 있는 돈보다 적은 금액을 부르고 선수는 그 반대였죠. 그러면 협상이 길어지고 감정 싸움이 일어납니다.
현대는 1차 협상 때는 무조건 고과 점수에 대해서만 얘기를 했습니다. 두 번째 협상에서 금액이 제시되죠. 그리고 마지막 3차 협상 때 도장을 찍습니다. 처음에는 선수들이 “이게 무슨 연봉 협상이냐. 연봉 통보 아니냐”고 반발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구단을 믿게 됐다”고 하더군요. 물론 구단이 평점을 잘못 매긴 사례도 몇몇 있었지만 대체로 잘 됐습니다.
현대에서는 연봉 싸움이 거의 없었습니다. 태평양 시절에는 한 해 성적이 좋으면 다음해 어김없이 추락했습니다. 현대에선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연봉 협상이 순조로웠던 게 이유일 겁니다.
선수단 지원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호화롭진 않지만 선수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최대한 했습니다. 일부 오해도 있어요. 지난해 현대선수들이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지원에 의존하면서도 비싼 호텔에 묵었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실제 비용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창단 뒤부터 호텔 측과 연간 계약을 맺어 싼 값에 이용했습니다.
정몽윤 회장이 “방값이 20만 원이 넘는 호텔에 묵는다며”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 비용은 6만 원가량입니다”라고 하니 놀라시더군요. 유니폼도 창단 때부터 일본 미즈노사와 계약해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까지 국내에서 만든 유니폼은 땀이 잘 빠지지 않았거든요. 창단 뒤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서 “현대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오더군요.
투자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강한 팀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정몽헌 회장이 야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창단 때 정회장이 “성적은 어느 정도 나올 것 같나”고 하시더군요. “지금은 어렵고 (우승까지) 5년을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동석한 강명구 구단 사장이 테이블 아래에서 발로 차더군요. 제 정신이냐고(웃음).
제 생각은 이랬습니다. 베테랑들을 모으면 이른 시간 안에 성적은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갈 순 없죠. 태평양의 성적이 들쭉날쭉했던 건 선수 구성에서 뚜렷한 색깔이 없었기 때문으로 봤습니다. 구단 운영의 기본은 선수단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입니다. 스카우트들은 그해 최고인 선수를 데려오고 싶어합니다. 이건 잘못된 겁니다.
선수 수급은 3~5년 앞을 보고 하는 겁니다. 미래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게 선수를 뽑아야 합니다. 가령 지금 2루수에 주전이 있지만 이 친구가 몇 년 뒤 군대에 가야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신인 가운데 지금 당장 최고는 아니지만 몇 년 뒤 성장할 선수를 뽑아야 합니다. 선수를 유형별로 나누고 팀의 미래 필요에 따라 맞는 선수를 고르는 거죠. 현대가 신인왕을 여럿 배출했던 건 그런 이유일 겁니다.
단장 시절에는 드래프트 회의장에 꼭 나갔습니다. 드래프트가 끝나면 기자들 사이에서 현대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아요. 다들 “이상한 선수 뽑았다”고들 했습니다. 그때 기자들에게 “아마추어에서 90%까지 올라온 선수가 있고 50%인 선수가 있다. 지금 경기력은 90% 선수가 낫지만 얘는 앞으로 50%를 더 채울 수 있다. 그래서 50% 선수를 잡는다. 기초를 다진 뒤 3~5년 뒤에 좋은 선수가 된다면 더 바랄 게 뭐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현대 창단 감독을 젊은 김재박 코치에게 맡겼습니다. 그때 언론에서는 백인천 씨가 감독이 된다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구단 내부에선 김재박을 점찍어 놓고 있었습니다. 신인 감독을 쓴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코칭스태프와 프런트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많습니다. 특히 노장 감독들은 프런트를 끌고 가려고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걸 다 받아 내려 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깽판’이 나죠.
창단 시즌에 김감독의 나이가 42살이었습니다. 흠이라고 하면 흠도 있었습니다. LG에서 태평양으로 이적할 때 매끄럽지 않았고 ‘성격이 어떻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선수협 활동 전력도 있었죠. 하지만 신생 팀에는 젊은 감독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김감독을 임명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감독이고 내가 단장이다. 고유 영역은 서로 건드리지 말자. 코치나 선수를 쓰는 건 당신 마음이다. 대신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거나 트레이드하는 건 내 권한이다. 선수가 필요하다면 계획서를 내라. 계획서대로 선수를 뽑아주는 게 프런트의 일이다. 능력이 이만큼 밖에 되지 않는 선수들로 성적을 내지 못했다면 그건 프런트 책임이다. 성적이 나쁘다고 감독 목을 치지 않는다. 그 걱정은 하지 마라. 좋은 선수를 주지 못한 사장이나 단장이 갈려야지 왜 감독이 옷을 벗어야 하나. 다만 선수는 구단 재산이다. 구단에 돈이 없으면 팔아먹기라도 해야 한다. 이 부분은 절대 당신이 건드려선 안 된다.”
실제 김감독은 현대를 10년 넘게 이끌면서 프런트 업무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LG에서도 그럴 겁니다. 이런 점이 김감독의 장점이죠. 구단에서도 김감독을 경질하지 않았죠. 감독뿐만 아니라 현대는 창단 뒤부터 코칭스태프에 거의 변동이 없었습니다.
선수는 절대 기능적인 면으로만 평가하면 안 됩니다. 사고방식이나 인성, 집안 환경도 봐야 합니다. 한 팀에 오래 몸담은 코치일수록 이를 보는 눈이 뛰어납니다. 요약하자면 구단과 선수간의 신뢰 형성, 팀 컬러에 맞는 선수 구성, 현장과 프런트의 분리, 이 세 가지를 구단 운영의 중점으로 삼았습니다.
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게 1978년 현대건설 입사 때부터였죠. 동년배들에 비해 입사가 좀 늦었어요. 군대도 장가든 뒤에 갔고 입사도 스물 여덟에 했습니다. 입사 전해인 1977년 현대건설에서 여자배구팀을 만들었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따지 않았습니까. 그 바람을 타고 현대그룹에서 처음 운동부를 만든 거죠. 팀 관리를 총무부에서 했는데 강명구 구단주 대행이 그때 과장이었죠.
총무부에 발령이 나자마자 “운동부 좀 맡아보라”고 하더군요. 전임자가 해외로 가게 돼 자리가 비었거든요. 7월부터 배구단 일을 봤는데 그해 11월 3차 실업배구연맹전에서 첫 우승을 했습니다. 그해 12월 네덜란드 아고디나모에서 국제클럽배구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 대통령도 관전을 했습니다.
그때 멤버가 어땠습니까. 몬트리올올림픽 대표팀을 맡았던 전호관 씨가 초대 감독이었고 그 아래 이임 코치, 김호명 보조 코치가 있었습니다. ‘나는 작은 새’로 유명했던 조혜정 씨는 창단 2년 뒤에 플레잉코치로 들어왔죠. 국내스포츠에서 플레잉코치라는 개념이 그때 처음 생겼을 겁니다.
선수로는 신명희, 김명신, 손호숙, 김미연 등이 있었습니다. 그 뒤 김정순, 이은경 등이 입단해 팀의 중심이 됐죠. 여자실업배구는 원래 드래프트 제도를 택했지만 현대 창단 뒤에는 자유경쟁 제도로 바뀌었습니다. 스카우트 열심히 했죠.
스카우트 비화도 많았을 텐데요. 레프트 이은경은 부산 남성여고를 졸업했습니다. 그때 구단들은 고교 3학년 선수들을 대상으로 스카우트 활동을 했습니다. 난 이은경을 고1 때부터 접촉했습니다. 3년이 지나니 정이 들어서 다른 팀에 갈래야 갈 수 없는 사정이 됐죠. 세터 임혜숙은 서울 일신여상을 나왔습니다. 일신여상은 호남정유(현 GS 칼텍스)의 연고 학교였어요. 졸업생들은 모두 호남정유에 입단했죠.
1학년이던 임혜숙의 집에 무작정 찾아갔죠. 다들 “헛고생한다”고들 했지만 집요하게 설득해 결국 입단시켰습니다. 물론 스카우트 자금도 넉넉했죠. 그러자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임혜숙은 운동을 하지 못하고 수업만 들었습니다.
임혜숙을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아내가 도시락을 싸 줘가며 학교에 보냈습니다. 학교에선 임혜숙에게 졸업장도 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교육부에 제출한 졸업생 명단에는 이름이 들어있더군요. 일신여상 선수로 현대에 입단한 선수는 임혜숙이 처음이었습니다.
농구는 언제부터 관여했습니까. 현대 농구팀은 1978년 창단했어요. 처음에는 현대중공업에서 관리했는데 2년 뒤에 현대건설로 넘어왔죠. 박수교, 신선우, 최희암, 박광호, 최관웅, 김세환 등이 창단 멤버였습니다. 내가 처음 맡은 일은 이충희의 스카우트였습니다. 전임자 일을 물려받은 거니 100% 제 작품은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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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청산 작업 중인 현대 유니콘스 사무실. |
그때 내 집이 대치동 은마아파트였는데 같은 층에 이충희의 고려대 동기인 임정명이 살았습니다. 임정명은 현대에 입단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죠. 이충희는 삼성으로 진로가 정해져 있었구요. 무진 애를 써서 이충희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니 삼성에선 거꾸로 임정명을 데려가 버리더군요.
이충희가 현대빌딩에서 입단 기자회견을 했는데 같은 시간 이충희의 부친은 삼성 건물에서 입단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상 가장 유명한 스카우트 전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당시 삼성과 현대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했습니다. 부정적인 면도 많았지만 스포츠는 라이벌이 있어야 크는 겁니다. 삼성화재의 독주가 끝나니 남자배구가 다시 붐이잖습니까.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았죠. 1979년 가드 이동균을 입단시킬 때는 제주도로 헬기를 띄워 삼성 숙소에서 빼냈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는데 두 기업 사이의 자존심 대결로 과열 경쟁이 됐습니다. 선수 측에서도 두 기업 사이를 오가며 몸값을 올렸죠.
이민형은 과열 스카우트 와중에 피해를 입었죠. 고려대를 나온 뛰어난 포워드였는데 현대가 1억 원, 삼성이 1억5천만 원, 다시 현대가 2억 원 이런 식으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이내흔 사장이 삼성 사장과 담합을 해 스카우트전에서 발을 빼기로 했습니다. 결국 이민형은 헐값에 기업은행에 입단했죠. 이때 이민현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사고도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열린 경기 도중 삼성 선수 한 명이 현대 벤치로 와 수건으로 싼 맥주병으로 현대 선수 한 명의 머리를 내리친 겁니다. 그래서 경기가 중단됐죠. 그 정도로 경쟁의식이 대단했습니다. 회사 쪽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작고한 정주영 명예회장은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속이고 훔치는 비겁한 경기라는 거죠. 하지만 남자농구와 여자배구는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남자농구 선수들이 회장실에 인사하러 오면 무척 즐거워했죠.
한남대교부터 걸어서 장충체육관을 찾아 남자농구 현대-삼성전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눈이 내려 승용차가 다리 가운데서 서 버렸기 때문이었죠. 그때 담배를 피러 체육관 바깥에 있다 회장님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야구는 원래 좋아했습니까. 1960년대를 전후해 야구 명문교로 이름을 날린 경동고를 나왔습니다. 백인천 감독이 고교 선배죠. 그래서 유니콘스 창단 때 백인천 감독설이 나온 거죠. 여러 종목을 거쳤지만 야구가 가장 어렵습니다. 선수와 프런트 직원이 가장 많은 종목이죠.
현대건설 시절에는 총무부 일을 하면서 주무, 스카우트 일까지 했습니다. 저변도 농구나 배구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경기 스타일도 농구나 배구는 동적이지만 야구는 동과 정이 함께 있습니다.
올해 초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야구는 용사처럼 플레이하고 신사처럼 행동하는 품위 있는 스포츠”라고 정의하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종목 선수들은 야구는 운동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도 있지만 한 면만 보는 거예요. 경험적으로 머리가 좋은 선수들이 야구를 잘 합니다. 정적인 면이 많은 운동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재박 감독도 머리가 매우 뛰어난 사람입니다.
기자로서는 가장 곤란한 인터뷰 대상이기도 합니다. 과묵한 데다 답변도 짧게 하기 때문일 겁니다. 기자들에게만 그러는 건 아닙니다.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가타부타 말이 없어요. 자기 마음을 잘 드러내진 않지만 유능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나야 10년 넘게 함께 일하다 보니 대충 그 사람 속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선수 출신이 아니지만 선수를 보는 눈이 뛰어나다는 평가입니다. 오래 운동선수들과 생활하다 보니 경험이 쌓인 거겠죠. 원칙은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기량보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건전하냐를 먼저 봅니다. 말을 시켜보면 알 수 있죠. 가정환경이 어려워도 생각이 바로 잡힌 선수들이 있습니다. 스카우트들에게 선수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라고 조언합니다.
물론 실패도 많이 했습니다. 실패한 스카우트는 팀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칩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노하우가 생긴 거겠죠. 스카우트 업무는 한 사람이 오래 하는 게 가장 낫습니다. KIA로 옮긴 김진철 스카우트도 현대에서 오래 일했죠. 대학에 진학하면 성장할 수 있는 선수를 찾아 내는 눈이 뛰어납니다.
일반 회사 조직과 구단의 차이는 뭡니까. 일반 회사가 조직관리 면에서 더 세련됐을 수는 있겠죠. 구단은 성패가 1년 안에 바로 바로 결정 나는 조직입니다. 그리고 기술력보다는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중요한 조직입니다. 신기술을 개발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 조직의 효율을 높이고, 이런 식이 아니란 거죠. 감정이라는 요소가 얽혀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매우 복잡합니다.
선수들이 단순하다는 말은 편견입니다. 복잡해요. 그래서 운동부가 어렵습니다. 일반 회사의 CEO나 관리 책임자들은 계획을 세워 실적을 올릴 수 있습니다. 실적 예상도 어느 정도 가능하죠. 하지만 사장, 단장, 운영부장이 아무리 성적을 내고 싶어도 안 되는 게 구단입니다. 구단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야구하는데 물주전자랑 수건만 갖다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들 합니다만 절대 아닙니다. 프런트 사이에도 실력 차이가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 비해 국내 프로야구단 사장들은 대개 단명인데요. 일을 오래 하면 단점도 있어요.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죠. 하지만 구단 수뇌진이 안정된 게 장점이 더 많습니다. 훨씬 많죠. 경험이 많으니 현장의 목소리를 적절하게 받아줄 수 있습니다. 선수단을 어떻게 끌고 가겠다는 전략도 세울 수 있죠. 그리고 미래를 위한 투자 마인드를 가질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 사장들은 퇴임 직전인 분들에게 자리를 잠시 맡기는 식입니다. 그러니 임기 내 성적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구단의 투자 계획은 그룹 회장이 세우는 게 아닙니다. 오너는 돈을 내는 사람입니다. 감독도 하지 못합니다. CEO인 사장이나 단장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구단의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봐야 하죠.
기업의 성패는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의 혜안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립니다. 경험이 쌓이면 혜안이 생깁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그겁니다. 사장 자리는 아예 없앨 수도 있어요. 모기업에서 경영 관리를 하고 단장에게 전권을 주는 식도 괜찮습니다.
현대가 프로야구에 뛰어들면서 야구판이 커졌습니다. 지금은 거꾸로 판이 줄어드는 상황인데요. 나쁜 식으로만 볼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구단들은 지나치게 성적에 집착해 왔습니다. 무리한 투자를 해서 덩치만 키워놓은 거죠.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때입니다. 선수들은 내가 과연 적정한 돈을 받고 있나, 구단들은 적정한 돈을 주고 선수들을 고용하고 있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단과 선수가 상생하는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제2의 현대 사태가 일어납니다.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제도 개선도 필요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좋은 점은 받아들여야겠지만 국내의 현실에 맞게 규약을 고쳐야 합니다. 한국은 선수 자원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면서 있는 자원도 썩히고 있죠. 선수단 60여 명 가운데 1군에서 뛰는 선수는 30명 정도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유격수라도 박진만이 1군에 버티고 있으면 기회가 오겠습니까? 미국처럼 룰 5 드래프트를 도입해 매년이든 3년에 한번이든 이런 선수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럼 감독이나 구단의 실력도 보여 줄 수 있죠.
프리에이전트(FA) 제도도 과감하게 고쳐야 합니다. 사견이지만 FA 자격 취득 연한을 현행 9년에서 대폭 줄여야 한다고 봅니다. 왜 자기 구단에서 뛰던 선수만 쓰려고 합니까. 공급이 늘면 가격은 떨어집니다. 새로운 선수들이 나타나야 팬들에게 볼거리를 줄 수 있죠. 몸값이 올라가는 건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만 지금까지 FA 자격 조건을 강화했지만 선수 몸값이 떨어졌습니까? 구단들이 비싼 몸값을 주지 않으면 됩니다. 몸값을 구단들이 올렸지 선수들이 올린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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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휘 사장은 현대의 운명이 참 얄궂다고 말했다. |
선수협회도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외국인선수를 구단당 한 명으로 줄이자는 건 설득력이 없어요. 일반 기업에서도 과장 자리 하나를 두고 대리 몇 명이 경쟁합니다. 외국인선수 수는 더 늘려야 한다고 봅니다. 외국인선수 최대 연봉이 30만 달러입니다. 국내 선수 가운데 연봉 3억 원이 넘는 선수들이 수두룩합니다.
실제론 30만 달러보다 더 주지 않습니까. 물론 더 줬죠(웃음). 이런 면도 있어요. 외국인선수 정원이 늘어나면 미국이나 일본 구단이 눈여겨보지 않은 어린 선수들을 데려다 키울 수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한국야구의 선수 자원은 부족합니다. 국내 팬들이 과연 ‘그들만의 리그’를 보고 싶어할까요.
한국 선수들만 뛰는 경기를 보라고 강요하는 건 선수나 구단의 이기심입니다. 어차피 팬들의 눈은 높아졌습니다. 국내야구가 팬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다른 나라 야구로 눈을 돌립니다.
현대가 2001년부터 어려웠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운영해 왔습니까. 2000년에 이른바 ‘왕자의 난’이 터졌고 2001년에 ‘왕회장’이 돌아가셨죠. 그리고 정몽헌 구단주도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정민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해에는 그룹에서 지원을 받지 못했어요. 정민태 이적료 60억 원으로 운영을 했죠.
김경기, 조웅천, 조규제, 최영필, 이재주, 박재홍 등을 현금 트레이드로 내보내며 받은 돈, 박경완, 박종호 등의 FA 보상금으로 운영을 했습니다. 세무조사도 받았습니다. 다른 구단들에서 수십 억 원이 흘러 들어갔는데 어떻게 썼냐는 거였죠.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어려운 구단 사정 속에서도 연봉이 지속적으로 올랐습니다. 신인, 외국인선수를 제외한 연봉 총액이 2001년 23억 원에서 2004년 43억 원이 됐습니다. 방만하게 썼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03년과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연속 우승했습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8년 동안 네 번 정상에 올랐습니다. 선수 연봉이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때는 지원도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에서 80억 원, 현대해상화재에서 40억 원, 현대그룹에서 20억 원 정도를 해마다 지원했습니다.
선수들에게 줄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연봉을 책정한 겁니다. 지난해를 제외하고는 차입금이나 빚이 없습니다. 돈이 없었으면 주지 못했겠죠. 우리 히어로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없으니까 선수들 연봉을 깎는 거죠.
현대는 현장과 프런트의 임무 분담이 명확하다는 평가와 사장이 현장에 지나치게 관여한다는 두 가지 평가가 있었습니다. 진실은 어디에 가깝습니까. 구단 일을 오래하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죠. 현장에 관여하게 되는 게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은 있어요. 현장과 프런트가 언제나 부딪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베테랑과 신인 가운데 누구를 기용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죠. 전준호와 유망 신인 외야수 한 명이 있다고 합시다. 당장 실력은 전준호가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전준호만 계속 기용하면 유망주가 클 수 없죠. 전준호가 은퇴하면 대안이 없는 겁니다.
감독은 성적이 부진하면 언제든 해고되는 자리입니다.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좋은 성적을 내야하고 당장의 경기력을 우선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베테랑을 중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프런트는 선수의 상품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새로운 선수를 키워야 하죠. 신인선수 기용의 문제에는 여러 차례 관여한 게 사실입니다.
사례를 든다면요. 김수경이 인천고를 졸업하고 1998년 입단했습니다. 연고 선수 가운데에는 괜찮았지만 특급 신인은 아니었습니다. 단장은 선수의 포장을 잘 해야 하니까 김재박 감독에게 “좋은 선수가 들어왔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선수를 써보면 실력을 금세 알잖습니까. 전지훈련 명단을 받아보니 수경이가 없는 겁니다.
“왜 빠졌냐”고 물으니 김감독이 “실력이 되지 않는다. 전훈 투수 정원이 17명인데 17번째 실력이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감독의 의견을 존중해야죠. 그래서 투수 정원을 1명 늘려 수경이를 끼워 넣는 걸로 타협을 했습니다. 김수경은 플로리다 전훈 때만 해도 그저 그랬는데 일본 전훈에서 슬라이더를 기가 막히게 던졌습니다. 그 뒤로 실력을 인정받았죠. 1998년 전지훈련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김수경은 없었을 겁니다.
이택근도 감독을 집요하게 설득해 전지훈련명단에 넣은 경우였죠. 그런 선수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건 감독의 능력 문제가 아닙니다. 감독은 실력 위주, 구단은 미래 가치를 보는 겁니다. 이게 조화가 되는 팀이 강팀입니다. 내가 좀 심하긴 했죠. ‘전횡’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구단을 위해 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팀이 되긴 했지만 기대주 한 명을 꼽아주신다면요. 황재균은 대형 유격수로 클 선수입니다. 박진만보다 유연성은 떨어지지만 100m를 11초대에 뛰고 중심 타선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도 긍정적이고 부모가 테니스 선수 출신이라 운동을 잘 이해합니다. 좋은 선수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지만 감독이 쓰질 않아요.
물론 고교를 갓 졸업한 선수가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지난해 김시진 감독도 처음엔 기용하지 않다가 선수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지니 대타로 한두 번 썼습니다. 그때부터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몇 년 뒤 한국야구에 대형 유격수가 나타날 겁니다.
현대 유니콘스의 공과를 정리한다면. 11년이라는 길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훌륭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현장과 프런트의 관계, 선수 스카우트와 관리라는 면에서 좋은 시스템도 만들었습니다. 현대가 들어오면서 프로야구판이 세 배는 성장했습니다. 이게 공입니다. 좋은 팀이었지만 팬들을 확보하지 못한 게 가장 큰 과입니다.
마케팅 면에서는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수원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로는 마케팅에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재정 지원도 부족했고 지역적인 한계도 있었습니다. 수원은 유일하게 광역도시가 아닌 연고지입니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팬을 확보하지 못했죠. 아쉬운 점입니다.
그러나 창단 뒤부터 그림은 갖고 있었습니다. 처음 태평양을 인수해 도원구장을 썼죠. 지금 SK가 쓰고 있는 문학야구장의 토대는 현대가 다졌습니다. 시공사인 현대건설과 협의해 세 번 설계 변경을 했죠. 곧 문학구장이 완공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울이라는 메리트 때문에 포기했죠.
목동구장에도 180억~200억 원을 투자할 생각이었습니다. 외야 스탠드도 만들고 소음을 막기 위해 가림막도 설치하려 했죠. 하지만 그 시점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이 돌아가시는 등 악재로 무산됐죠. 현대 유니콘스의 운명이 참 얄궂습니다.
서울 연고지 이전은 구단의 판단이었습니까, 그룹의 뜻이었습니까. 그룹 차원에서 서울로 가자고 결정을 했습니다. 물론 구단에도 양해를 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