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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鳴梁)‘은 한국영화 관객 수 1천7백만 명이라는 최고의 기록을 남기면서 상영도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동안 벼르고 벼르다가 오늘에서야 그것도 상영 마지막 날 극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간 만나는 사람들마다 영화평이 달라 실망을 갖지나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그동안 본 영화 중에서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하고 싶다. 만일 이번에 이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면 지극히 후회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이순신장군 이야기라면 귀가 닳도록 너무나도 많이 들어 왔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때의 시대적 상황을 더듬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첫 장면에 이순신(최민식분) 장군이 불에 달군 벌건 인두로 허벅지 살을 지지는 고통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임진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었고 일본군이 2년간 서울을 점령하였다가 일본군이 원래 해상을 통해 보급품을 운송하려던 작전이 이순신의 해전승리로 차단되자 왜군 본진이 일본으로 돌아가 3년간 사실상 휴전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정유년(1597년) 1월 일본군 수장 가토가 다시 150여척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 도착하여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나와 협상하자고 회유책을 썼으나 이순신장군은 그것이 거짓 계략임을 알고 대응하지 않았다.
선조는 가토를 잡지 않고 놓아준 이순신을 잡아들이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명한다. 이순신을 파직 한 뒤 체포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처형하려 했다. 바로 서울에 압송된 이순신은 가진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여기 영화에서 첫 장면으로 설정한 것이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선조에게 간곡히 이순신 구명을 간청하여 28일 만에 출옥하게 되고 그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기까지 4개월간 두 번째 백의종군하게 된다. 첫 번째 백의종군은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하여 원래 육군으로 함경도 국경지대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는 만호장(종4품) 직을 수행하던 때 군기검열에서 군기관리 소흘로 파직된 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정유재란 첫 번째 전투가 정유년 7월 칠천량(거제도)해에서 벌어졌는데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이 전투에서 패전한 후 추원포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원균이 죽자 유성룡의 간곡한 추천으로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4개월만의 일이다.
칠천량해전에 승리한 일본수군은 일본에서 논공행상을 논하면서 상당기단 전투는 소강상태에 있게 된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부임하자마자 선조는 칠천량해전으로 수군에 많은 손실을 가져와 수군만으로는 독자적인 전투를 할 수 없다고 보고 권율장군이 지휘하는 육군에 편입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신(臣)에게는 배가 12척 남았고, 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상소를 올린다. 이렇게 강한 의지를 보인 이순신 으로서는 심히 걱정이 많았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찬 백성 그리고 거북선마저 불타고, 잔혹한 성격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일본 장수 구루시마(유승룡분)와 싸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화 중에서 수군의 패전으로 인한 장수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용기로 바꾸는 사기진작책이 필요했다. 전 수군을 모여 놓고 “死必卽生, 生必卽死” 강경하게 주창했다. 즉 “반드시 죽고자 하면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병법에 나오는 말을 했으며 ”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1000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법으로 다스려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두세 번 약속 다짐한다. 영화에서 이 대목에 가슴이 찡하여진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정을 이토록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오늘날 우리들에게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정치인 지도자며 정부관료들이 어려운 시국을 어떻게 타계해 나가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 해 음력 9월 명량해전 하루 전날 이순신은 진영을 벽파진(진도)에서 우수영으로 옮긴다. 이유는 벽파진 뒤편에 있는 명량(鳴梁:울돌목) 때문이었다. 울돌목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바닷물이 소용돌이처럼 빙빙돌아 흐르는 골목 같은 길목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량해협은 길이가 2km, 폭이 300m. 최저수심 1.9m 조류속도 최대 11.5노트 이다. 1597. 9. 16.아침 일찍 적선이 명량을 통과하여 우리함대가 결진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일본함대가 해남에서 목포방향으로 흐르는 민물을 타고 우수영을 향해 출전 이순신함대가 일본선 330척 중 133척을 곧 바로 포위해 우리함대 12척이 일본군선 31척을 분멸하고 나머지 적군 함에 큰 손실 가하는 등 이 과정에서 일본 해적출신 구루시마 장수가 전사한다. 지휘 장수를 잃은 일본함대는 때마침 조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빠져 후퇴했다. 불과 3시간만의 전투 상황이 끝났다. 그러니까 오전 밀물이 들어왔다. 오후 다시 썰물로 빠지는 한나절의 시간동안 일어난 전투를 본 영화 2시간 중 꼬박 한 시간동안이나 전투장면에만 전력 집중하여 영화를 구성하고 촬영 하였다.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다시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머물었고 이순신 수군은 고군산열도에서 겨울을 맞으면서 군 조직 및 함대를 재정비 강화하고 있었다. 그 다음해인 1598년 봄부터 일본 히데요시가 병석에 누었고 8월에 사망함에 따라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하라는 명을 받아 돌아가는 일본수군과 11월 노량해전을 벌리게 되며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맞아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 54세 장년이었다.
이처럼 영화 스토리는 간단하다. 그러나 한 시간 동안 계속되는 전투 장면이 지루할 것 같아도 영화내용은 실전과 같은 컴퓨터그래픽이 관람자의 혼을 쏙 빼간다. 사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명량해전에 관한 기록이 한 장 반뿐이다. 왜적을 무찌르느라 일기를 쓸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군전투사상 전쟁발발에서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빠짐없이 그것도 지휘 장군이 직접 쓴 역사일기는 없다고 한다. 해전사상 백전백승의 전쟁사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순신도 한 번도 전투에서 진일 없다는 것도 우리역사에 빛나는 대기록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이용하여 위나라 군사들을 완전 섬멸했듯이 이순신은 울돌목의 소용돌이 물살을 이용하여 일본수군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운 지략이야말로 우리가 두고두고 높이 살만하다.
“명량” 영화가 관격 1700명을 넘겼다. 이 영화가 왜 영화관람 역사의 기록을 갱신하도록 인기가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로 이 영화가 시대적 요구에 갈망하는 이 시점에서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다시 등장시켜 대리만족을 시킨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지금 이 시대의 시국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의 정치상황 즉 다시 말해서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안위는 뒷전이고 파벌별로 당리당락에만 혈안이 섬뜩할 정도로 극한에 달한 상황이 지금 여. 야당이 끝이 보이지 않는 평행선의 대각으로 국민들이 불안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때에 이순신장군 같은 시대적 영웅이 나타나 애국충정으로 나라를 바로 잡아 세울 수 있는 지도자출연을 갈망하는 국민들 앞에 이 영화는 타이밍을 잘 맞추었다고 본다.
두 번째로 이순신 장군이 영웅적 지위에 있으면서도 장수와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에까지 권위와 위엄으로 다스리는 지도자가 아닌 오로지 나라와 백성만을 위한 헌신하는 서민적인 지도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영화 중에 사기를 잃고 공포와 두려움에 쌓인 장수들과 극한적인 대립국면까지 이르게 되나 장군이 설득 설득하며 솔선하여 사기를 돋구고 해전 출정식에 앞서 죽음의 결의하는 장면으로 병사들의 진영막사를 불태우는 등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리더쉽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셋째 이순신 장군의 임금 및 나라에 대한 충정이다. 이순신은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하였으나 집안이 넉넉지 못해 충청도 아산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같은 시대 라이벌격인 원균과는 아주 대조적인 가정배경을 가졌다. 선조는 가정적 배경이 좋은 원균을 훨씬 더 신뢰하고 원균에게 승진의 기회를 많이 주었지만 가정적으로 내보일 것이 없는 이순신에게는 관심조차 없었고 영의정 유성룡이 서울 이웃에 함께 성장한 지역적인 배경으로 선조에게 간곡히 추천하여 나라위기 때마다 이순신이 큰 공원 세워도 선조는 그를 탐탁치않게 여겼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해전에서 백전백승으로 승전하면서 수군의 사기가 높아지고 수군지역의 백성들은 이순신의 승리에 신뢰를 보내며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면서 추종자가 많아졌다. 임진난이 나자마자 나라의 안위를 제쳐두고 도망 먼저나선 선조로서는 두려움과 공포로 자신의 무능함으로 왕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죄책감이 이순신의 백성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자신에게 도전을 하는 것 아니냐 등 군왕으로서의 기질을 발휘하지 못한 임금으로서 이순신을 견제하고 있었을 런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을 두 번이나 백의종군하면서도 한 번도 임금에 대한 충정에 배신하는 일이 없었고 오히려 임금을 비롯한 나라를 제대로 잘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 잡혀있었다. 지금 이 시대에 이순신 같은 정치적 여건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임금과 나라에 충성하는 지도자가 몇이나 될까 감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들 시청자들은 비록 작은 공간 극장 내에서 이순신같은 영웅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넷쩨 영화는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 단순한 이순신 이야기를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하여 광대한 해전을 펼쳐 시청자로 하여금 눈을 크게 뜨게 하였고 영화감독 김한민은 장수에서 말단 병사, 노를 젖는 민간수병에 이르기 까지 표정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감독 촬영함으로서 시청자들이 2시간짜리 영화 중 한 시간동안이나 전투장면을 펼쳐가는 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스크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감독의 독특한 능력이 덧보였다.
끝으로 김한민 감독이 내 고향후배(순천고 출신)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안드라도 이 시대에 이순신이라는 명량해전에서의 단순한 영웅스토리를 가지고 기록적인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것은 김 감독이 의도하고자 하였던 영화 중 메시지를 관객에게 충분이 전달했다는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지 않고서는 이 영화에 대해서 논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최종 생각이다.
<자료출처 ; 청목회8인 카페, , 글쓴이;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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