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LPGA투어 골퍼 김송희는 불운과 부담감을 떨쳐 일어나 자신의 가능성을 터트리려 준비 중이다. 그의 가능성이 폭발한다면 '잭팟'이 따로 없을 것이다(사진=골프스타일 제공) |
만년 유망주의 ‘가능성’이 터지는 것만치 극적인 일도 없다. ‘로또’는 저리가라다. 농담이 아니다.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3루수 김상현은 30살이 되도록 ‘만년 유망주’ 소릴 들었다. 미국남자프로골프협회(PGA)투어에서 뛰는 양용은 역시 38살 때까지 ‘만년 우승후보’였다. 그러나 올 시즌 김상현은 연일 홈런과 타점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 후보이자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흥행 메이커로 우뚝 섰다. 양용은도 지난 8월 PGA 챔피언십에서 타이거 우즈를 꺾고 역전 우승하며 명실 공히 ‘아시아의 우즈’로 등극했다.
자, 다음은 누굴까. 어느 만년 유망주가 자신의 가능성을 폭발하며 대박을 터트릴까.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이 선수는 어떤가.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의 김송희(21) 말이다.
넵스 마스터스의 빅(Big)조
8월 21일 제주 서귀포시 더 클래식 골프장에서 열린 넵스 마스터피스 1라운드에 출전한 35조는 그야말로 ‘빅(Big)조’였다. 올 시즌 한국여자골프협회(KLPGA)투어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유소연, 서희경과 미 LPGA투어에서 맹활약 중인 김송희가 함께 라운드를 하기 때문이었다.
대회 대행사인 스포티즌은 “미 LPGA투어에서 뛰는 김송희와 국내 최고의 골퍼 2명이 함께 라운드를 한다면 그보다 멋진 그림이 없으리라 판단했다”며 “1라운드부터 흥미진진한 대결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맞는 말이었다. 국내 여자 골퍼 가운데 가장 마인드가 뛰어나다는 유소연과 ‘퍼팅의 귀재’ 서희경 그리고 국외파 김송희의 대결은 골프팬들의 관심을 끌 만했다.
김송희의 스윙은 부드럽고 우아하다.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가 원상태로만 돌아온다면 김송희는 미 LPGA투어에서 가장 강력한 골퍼가 될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홍지철) |
많은 골프관계자가 우승과 관계없이 1라운드 35조의 경기에 집중했고 저마다 주관으로 이날의 승자를 점쳤다. 그 가운데 어느 골프인은 “유소연과 서희경이 김송희 때문에 흔들리지 않겠느냐?”라는 전망을 했다. 미국 프로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김송희의 빠르고 힘있는 경기진행에 국내파인 두 선수의 페이스가 자칫 휘말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모 골프 해설가도 “김송희가 두 선수보다 성적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7월 이후 김송희가 미 LPGA투어에서 줄곧 ‘톱10’ 주위를 맴돌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 흔들린 건 김송희였다. 드라이버 샷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중요할 때마다 퍼팅이 흔들렸다. 결국, 서희경이 70타를 친 가운데 유소연과 김송희는 각각 72타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김송희는 다음날 2라운드에서 69타를 치며 회생하는가 싶었지만, 마지막 3라운드에서 6오버파 78타로 종합 공동 32위를 기록했다.
2007년 미 LPGA투어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망주로 꼽혔던 김송희가 이번에도 좌절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아마추어 여자 골프의 절대강자였던 김송희
KLPGA투어 넵스 마스터피스에 출전한 김송희는 경기 내내 제 컨디션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갤러리 앞에선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김송희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태권도를 했다. 실력도 좋아 금세 2단까지 땄다. 골프는 이듬해인 3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축구와 병행했다. 아버지 김춘배 씨는 “아이가 공이면 사족을 못 썼다”고 회상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취미삼아 골프를 한 까닭인지 발전은 더뎠다. 초교 6학년 때까지 최고 기록이 110타였다. 그러나 서문여중에 진학하며 사정이 달라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선수생활이 시작됐다.
“중학교 때부터 고1 때까지 하루에 공을 1천 개씩 치곤 했어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골프에만 매달렸어요." 김송희는 오히려 이때 연습량이 프로가 된 지금보다 많았다고 말한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중등부 랭킹 1위는 언제나 김송희 차지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기량은 한층 늘었다. 서문여고 1학년 때인 2004년 아마추어 골프 최강자를 가리는 송암배에서 우승하며 그해 국가대표상비군에 뽑혔다.
“송암배 전까지는 주로 작은 대회에만 출전했어요. 처음으로 나간 큰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김송희는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벅찬 감정을 느낀다. 학교에서는 그의 우승을 축하하려고 교문 앞에 커다란 현수막을 걸었다고.
탄탄대로일 것 같던 김송희의 앞에 그즈음 동갑내기 맞수가 등장한다. 신지애(하이마트)다. 신지애의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였다. 2005년부터는 아예 신지애가 김송희를 앞섰다. 그해 6월에 열린 한국여자 아마추어골프대회를 시작으로 송암배,한국 주니어대회에서 연달아 우승컵을 안은 것도 신지애였다.
신지애는 여세를 몰아 KLPGA투어 SK엔크린인비테이셔널에서 쟁쟁한 프로선수들을 제치고 정상에 오르며 KLPGA 정회원 자격을 획득했다. 그에 반해 김송희는 그해 열린 송암배에서 3위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국내골프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더 큰 무대로 간 골프 천재
'로버트 태권 V' 예술품과 MBC ESPN 카메라맨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홍지철) |
국내골프계에선 자취를 감췄지만 그렇다고 김송희가 골프채를 놓은 건 아니었다. 새로 둥지를 텄다. 미국이었다. 2005년 조용히 미국으로 떠난 김송희는 퓨처스투어 Q스쿨에 도전했다.
“또래 선수들처럼 저도 2006년에 열리는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차피 미 LPGA투어에 도전할 거면 조금이라도 빨리 미국으로 건너가 적응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송희의 말이다.
그러나 김송희와 그의 가족은 미국 골프계의 환경이나 룰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막연한 도전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나 퓨처스투어에 대해서도 막연한 환상만 있었지 잘 알지 못했어요. 그저 첫해는 영어공부나 하면서 퓨처스 Q스쿨에 10위 정도에만 들자고 다짐했어요.”
그러나 미국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영어도 부족하고 문화도 다르다 보니까 적응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말이 없는 편이라 친구들 사귀기도 쉽지 않았고요.”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투어 때문에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꼬박 하루 15시간을 차 안에 앉아 이동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투어는 일주일을 간격으로 쉴 새 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쉬는 날이 없었다.
우승을 해도 퓨처스 투어의 상금은 많지 않았다. 대회 평균 우승상금이 고작 1만 달러(약 1천2000만 원)였다. 상금만으로는 미국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당연히 아버지 김춘배 씨 지갑에서 생활비가 나왔다.
“골프 선수를 자식으로 둔 다른 아버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이 뒷바라지에 엄청난 돈이 들어갑니다. 레슨비나 라운드비 그리고 투어 생활비를 모두 합친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돈을 쏟아부어야 해요.” 김춘배 씨의 하소연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딸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는 간단했다. 딸을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한창 힘들 때는 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도 했어요. 그러다가도 온 힘을 다하는 아이를 보면 힘이 솟더군요. ‘송희야,힘내라. 굳게 마음먹고 한번 할 때까지 해보자’하고 말하며 돌아서곤 했는데 다행히 송희가 열심히 해줬습니다.” 순간, 아버지의 눈에 충혈된 달이 떠올랐다.
뜻하지 않은 불행과 만나다
그간 김송희는 중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앞으로는 보다 여성스러운 자기만의 개성을 발휘할 생각이다(사진=골프스타일 제공) |
가족의 헌신적인 지원과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 김송희는 2005년 11월 퓨처스투어 Q스쿨을 1위로 통과하는 감격을 맛봤다. 그리고 2006년 퓨처스 투어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퓨처스투어 18개 대회에 출전해 5승을 거머쥐며 상금랭킹 1위를 차지한 것이다. 17세 10개월 24일의 나이로 루이지애나클래식에서 우승했을 땐 ‘한국인 소녀가 퓨처스투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다’며 미 골프계가 들썩했다. 이윽고, 김송희는 퓨처스 투어 상금랭킹 5위까지만 주어지는 미 LPGA투어 풀시드권을 따냈다.
2006년 12월 미 스포츠 전문사이트 ESPN이 발표한 ‘2007년에 도약할 골퍼 18명’에 그의 이름이 올려진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ESPN은 “퓨처스 투어 상금왕 출신으로 2005년 미 LPGA 투어 신인왕에 오른 이선화(27, CJ)의 길을 김송희가 그대로 따라갈 것”이라며 가장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김송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김송희의 주가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2007년 19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9번이나 컷오프됐다. 최고 기록은 그해 세이프웨이 클래식에서 거둔 22위. 총상금도 7만 8천660달러(약 7천만 원)에 불과했다.
미국 골프전문가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당황했다. 일각에선 “경험을 쌓는 단계”라며 평가를 유보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알던 김송희가 아니다”라며 부진의 이유를 찾고자 노력했다.
시즌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쩍 떨어지는 체력이 문제였다. 그 때문에 드라이버 샷의 위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여기다 라운드 중간에 배를 움켜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등 기이한 행동도 자주 나왔다. 병원에 갈 만도 했지만 매주 열리는 투어를 빠질 수 없었다.
“하루는 일어났는데 목이 많이 부어 있더라고요. ‘이상하다’하면서 필드에 나갔는데 아는 분이 다가와 '나도 너처럼 목이 부은 적이 있다'라면서 ‘어서 빨리 병원에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길로 병원에 갔는데.”
의사의 진단은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었다. 이 병은 만성 피로, 식욕 부진, 체중 증가가 특징으로 신체활동이 많은 운동선수에겐 피로가 일찍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여자선수들은 더하다. 이 병이 생리 주기의 변화를 가져오고, 월경 과다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의사는 김송희에게 “일반인 같았으면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발병한 지 1년이 되도록 어떻게 모르고 있었는지 신기하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엔 제가 아픈지도 몰랐어요. 몸이 좀 흔들고 샷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속으로 ‘내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때면 새벽에 혼자 라운드를 돌며 더 몸을 혹사했어요. 그 때문에 몸이 더 피곤한가 보다 생각했지 제가 갑상선 기능 저하증에 걸린지는 꿈에 생각하지 못했어요.”
병원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며 김송희는 조금씩 회복됐다. 3개월도 지나지 않아 갑상선 기능은 정상으로 회복됐다. 이때부터 새로운 도전에 들어갔다.
“2008년 초부터 트레이너를 두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어요. 바닥난 체력을 보강하는 게 급선무였거든요.”
김송희의 골프백엔 커다랗게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김송희는 이 백을 들고 미 LPGA투어에서 뛴다. 현재 김송희는 메인 스폰서가 없다(사진=스포츠춘추) |
김송희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2008년 김송희는 25개 대회에 출전해 7번이나 '톱10'에 드는 쾌거를 이뤘다. 이 가운데 5번은 5위권이었다. 컷오프는 4번에 불과했다. 특히나 그해 4월에 열린 코로나 챔피언십과 10월에 개최된 삼성 월드 챔피언십에서는 막판까지 접전을 벌이며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8년 김송희의 총상금 98만 달러는 전해보다 10배가 넘는 액수였다. 미 LPGA투어 2년 차의 김송희가 2009시즌 가능성을 폭발할 것이라 예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아쉬운 두 번의 우승 기회
올 시즌 첫 출전대회였던 혼다 LPGA 타일랜드에서 46위에 그친 김송희는 3번째 대회였던 마스터카드 클래식에서 4위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어 열린 J골프 LPGA 인터내쇼날에서도 6위에 오르는 등 고른 활약을 펼쳤다. 5월 10일 개막된 미켈롭 울트라 오픈은 생애 첫 미 LPGA투어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3라운드까지 선두에 2차 차로 뒤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 4라운드에서 2, 3, 4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고 15번 홀에서도 버디를 기록하며 단독선두로 올라섰지요. 그때 (김)인경이가 저랑 1타 차로 2위였어요. 16번 홀에서 버디만 잡는다면 우승도 가능하다 싶었지요.”
16번 홀 티샷을 페어웨이로 잘 보낼 때까지만 해도 행운의 여신은 김송희를 보며 미소 짓는 듯했다.
“2번째 샷에서 6번 아이언으로 공략하면 되는데 5번 아이언을 들고 말았어요. 아니나다를까 훅이 나면서 공이 그린을 15야드(약 13m)나 넘어갔어요. 세 번째 샷을 할 땐 캐디에게 조언을 구했어요. 물론 저도 라이를 볼 순 있었지만, 긴장이 많이 됐거든요. 그런데.”
캐디는 라이를 거꾸로 읽고 있었다. 김송희와는 정반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러 생각을 하기에 김송희는 여유롭지 못했다. 캐디를 믿기로 했다.
“캐디의 조언대로 스윙했죠. 결과요? 세 번째 샷마저 그린 위에 올리지 못했어요.” 김송희의 입에서 얇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4타 만에 공을 그린에 올렸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짧은 퍼트마저 실수하며 김송희는 더블보기를 범했다. 결국, 우승컵은 16번 홀에서 파를 기록하며 최종 합계 16언더파 268타를 기록한 크리스티 커(미국)에게 돌아갔다.
7월에 열린 제이미 파 오웬스 코닝 클래식에서도 우승 기회는 있었다.
“1라운드에선 선두를 달렸어요. 하지만, 2라운드에서 주춤하며 선두와 7타 차나 벌어지고 말았어요. 그때 주변에서 ‘넌 뛰어난 골퍼니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1위를 쫓아갈 수 있다’라고 격려해주셨어요. 그래 이를 악물고 쫓아갔어요.”
김송희의 추격은 대단했다. 3라운드에서 64타를 치며 공동 2위로 4라운드를 시작했다.
“저도 열심히 했지만, 우승자인 (이)은정 언니가 정말 잘 쳤어요. 17번 홀까지 잘 따라갔지만 18번 홀에서 버디를 놓치며 2타 차로 공동 3위에 만족해야 했어요.” 온 힘을 다한 김송희의 얼굴에서 아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삼성 월드챔피언십을 기대하라’
김송희의 퍼트는 이제 세계 정상급이다(사진=스포츠춘추) |
김송희의 가능성은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첫 우승 가능성은 더 커졌다. 올 시즌 김송희의 평균타수는 70.70타다. 평균 퍼팅 수는 28.78개다. 다 같이 투어 9위에 해당하는 좋은 기록이다. 여기다 그린 적중 시 평균 퍼팅 수는 1.75로 2위다. 퍼트만은 투어 정상급이란 뜻이다.
그러나 아직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많다. 페어웨이 적중률이 지난해 70%였던 데 반해 올 시즌 71%로 다소 높아졌다고 하지만 투어 6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린 적중률 68.6%도 문제다. 리그 정상급으로 발돋움하려면 적어도 75%를 넘어야 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줄어든 드라이버 샷 비거리를 늘리는 게 급선무다. 김송희는 부드럽지만 강력한 스윙으로 유명했다. 김송희를 지도했던 게리 길 크리스트는 “프레드 커플스를 연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하다”라며 제자의 스윙을 극찬한 바 있다.
미 골프계에서도 김송희의 스윙이 “바이올린을 켜는 것처럼 부드럽고 우아하다”고 해 ‘필드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부드러운 스윙에서도 드라이버 샷 평균 비거리가 270야드를 넘었던 김송희였다.
그러나 2007년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가 257.6야드로 다소 줄어들더니 지난해엔 247.0야드로 떨어졌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의 후유증이었다. 올 시즌은 258.5야드로 1부 투어 진출 이후 가장 높아졌다. 드라이브 비거리를 조금 더 늘린다면 페어웨이, 그린적중률 향상은 언제든 기대할 수 있다는 게 골프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연세대에 재학 중인 김송희는 "학업과 골프를 병행하는 게 힘들다"며 "연세대는 공부를 우선하는 곳이라 애로가 많다"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학업과 골프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게 김송희의 다짐이다(사진=스포츠춘추 홍지철) |
무엇보다 김송희는 현실에 안주하는 골퍼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연습하는 것과 기회를 기다리는 것의 가치를 아는 이다.
“많은 분이 여쭤보세요. ‘아직 우승 경험이 없어 아쉽지 않으냐?’라고. 물론 아쉽지요. 제 또래 선수들 보면 가끔 ‘정말 쉽게 우승한다’는 생각을 해요. 그럴 때면 속도 많이 상해요. 사실 열심히 훈련한다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찾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열심히 훈련하지 않으면 그 작은 기회마저 놓칠 수 있어요. 지금처럼 제 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기회가 올 거라고 믿어요.”
김송희는 그동안 부진의 이유로 부담감을 꼽았다. 유소년 시절 다른 선수보다 기량이 월등했던 게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작용했단다.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경기 도중 생각이 너무 많았어요. 뭐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복기하기 바빴거든요.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요. 달력 보세요. 오늘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요. 내일도 있어요. 오늘 못하면 내일 잘하면 된다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어요.”
김송희는 9월 17일 미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삼성 월드 챔피언십을 생애 첫 우승의 기회로 삼고 있다. 지난해 2위에 그친 한을 풀겠다는 다짐이다.
갓 뽑아낸 밀크커피처럼 가을 햇볕이 따뜻한 9월 우리는 어쩌면 ‘필드 위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첫 우승을 따내는 장면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김송희의 가능성이 터진다면 스스로 길을 내는 물처럼 그 상승세는 끝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