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는 왕이다.>라는 말이 있다. 한국 사람은 이말을 자기 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한 갑질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주유소와 편의점의 종업원에 대한 갑질, 대리기사나 택시기사에 대한 갑질, 콜센터 직원에 대한 하대와 무시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밑바닥에 흐르는 서열문화는 갑을 관계를 당연시 하고, 갑을 관계에서 갑이 되고자하는 열망과 한이 한국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해서 교정도 쉽지 않다.
이런 갑질 문화의 소비자가 아닌 <정의>와 <윤리>를 추구하는 소비자 운동을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체계적인 <소비자 운동>이라기 보다는 정치성이 두드러지고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약하게라도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사립유치원 비리'를 고발한 <정치하는 엄마들>의 활동이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힘을 두려워 하여 정부, 진보교육감, 여야 정치인들 모두가 사립유치원의 비리를 외면하고 있을 때, 사립유치원의 소비자인 엄마들의 단체 <정치하는 엄마들>들이 1년 넘게 끈질지게 매달려온 덕분에 "국공립 유치원의 비율을 40%로 확대하고 모든 사립유치원에 '에듀파인'을 적용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을 이끌어 냈다.
반면에 '잔인한 국가의 끝장'을 보여주는 사건이고, '세월호' 보다도 더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더 중요한 사건임에도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아무런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사망한 사람이 1,528명이나 된다. 전체 피해가구인 4,953가구 중에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피해 인정율은 8.2%에 지나지 않는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드러난 것은 2011년이고, 정권이 바뀐 다음에 문재인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사과했지만, 단지 말 뿐이었고 그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정부만이 아니라 언론과 시민 단체의 냉담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1,528명을 '통계'로만 여기는 이 무감각한 사회의 시민들 역시 깊은 통찰을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소비자 운동>으로 볼 수 있는 집단 행동 중에서 온라인 게임 업계에서 벌어진 여성혐오 사건이 있었다. 2016년 7월 18일 넥슨 게임 <클로저스>의 캐릭터 '티나' 역을 맡은 성우 김자연이 자신의 트위터에 '소녀들은 왕자님이 필요없다'라고 적혀있는 티셔츠를 입은 인증샷을 올리자, 일련의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넥슨 측에 해당 성우의 하차를 요구하면서 해당 성우가 입은 셔츠는 메갈리아가 만든 것이고 메갈리아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증오발언을 일삼는 혐오 집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다음날 넥슨은 해당 성우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이에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는 "정치적 의견이 직업 활동을 가로막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논평을 발표했다가 당원들의 비난과 탈당 사태에 굴복해 논평을 철회했다. 정의당을 굴복시킨 남성들의 분노는 그 티셔츠를 입은 여성 가수 안예은에게 까지 온라인 폭격을 하여 기어코 사과문을 올리게 했다. 게임업계에서는 페미스트의 글을 리트윗 했다는 이유로 원화가를 퇴출시키는 운동을 벌이는 등 많은 여성 작가들이 게임업계에서 강제로 퇴출당했다. 게임업계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사상 검증' 사건들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강자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탄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갑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계에서 이색적인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보수 언론은 이념 당파성과 무관하게 구독하므로 정치적 불매운동이 일어나지 않지만, 매출액 규모로 조선일보의 사분의 일 수준인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진보 언론에서는 불매 위협이 자주 일어난다. 2010년 한겨레 <한홍구-서해성의 직설>난에 쓰인 '놈현관장사'라는 표현을 문제 삼아 유시민은 <한겨레> '절독'을 압박하여 <한겨레>1면에 사과문을 게재케 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2016년 부터 진보언론에 대한 불매 위협은 일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정희진의 컬럼을 실었다는 이유로 한겨레 절독 운동이 일어났고, 또 이 컬럼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수십명의 회원이 탈퇴했다. <시사IN>은 메갈리아에 분노하는 남성들을 분석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몇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구독자가 해지하였다.
2017년 유시민은 "기득권 권력이 사방에 포진해 대통령을 괴롭힐 것이므로 범진보 정부에 대한 어용 지식인이 되려한다."고 말했고,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를 절대적인 지표로 활용하여 '어용'이라는 말 안에 녹아있는 수치심을 지워버리고 <진보 언론>에게도 어용언론이 될 것을 강요하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어떤 비판이라도 나오면 절독 불매 위협을 진보 언론에 가했다.
공정 보도를 실천하려다 부당해고된 기자들이 모여 만든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문재인 후보 캠프 검증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2000명의 후원자가 탈퇴했고, <한겨레21>은 표지에 문재인 대통령 사진을 악의적으로 올렸다면서 2000명의 구독자가 해지했다. 이를 기사화한 <미디어 오늘>도 결국 사과문을 게재하고 이를 쓴 기자에게도 징계를 내렸다. <미디어 오늘>은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조중동에 맞서 '우리 편이 돼주는 언론' 따위를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에 바라는 것은 이 신문들을 죽이는 길이다......그러나 우리가 언론에 요구할 수 있는 건 최선의 진실을 말하라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가난한 조중동'이라고 비난하면서 '우리들의 조중동'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걸핏하면 <한겨레>절독을 부르짓는 '어용시민'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미투>운동에 대한 '공작설'을 제기한 김어준에 대한 비판 컬럼이 실리자 또 불매 위협에 시달렸고, 성추행 의혹으로 공적 활동 중단을 선언한 정봉주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컬럼이 실리자 또 절독을 들고 나왔다. 안철수 후보를 비판한 성한용 기자에 대한 온갖 욕설을 퍼붓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한겨레와 경향도 기득권 세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어용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어용파들이 벌이는 코미디 같은 행태의 압권은 <윤석열 사건>일 것이다. 2019년 7월 <뉴스타파>는 윤석열 검찰종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말미 '위증'과 관련된 통화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문재인-윤석열 지지자들은 <뉴스타파>와 자유한국당이 야합했다면서 3000여명이 후원을 끊었다. 그러나 이 어용파들의 태도는 '조국 사태' 이후 윤석열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 지목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뉴스타파>가 옳았다면서 반성의 글을 올리고 다시 후원하겠다는 글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이 무엇을 반성했을까? 이들의 태도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어용> 언론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있다. 진보 언론 불매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어용 저널리즘'이 과연 문재인 정부의 성공에 도움이 되겠냐는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문빠의 정치적 판단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만을 기준으로 움직일 뿐, 그들 이외의 이질적 타자를 고려하거나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관용하지 않는다.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의 문제점은 오히려 지나치게 친 민주당이라는 것이다. 한경오는 문재인 정부를 하나의 정치권력으로 보며 그것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려고 하며 이는 언론의 당연한 시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진보 언론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말기에 민심 이반은 심각한 것이었다. 지지율은 한자릿 수로 떨어졌고, 지금 진보 언론의 책임을 묻는 사람 조차도 그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당시 진보 언론은 민심의 큰 줄기를 따라간 것 뿐이다. 물론 혜안을 발휘하여 노무현 대통령을 보호하지 못했냐고 탓할 수는 있지만, 진보 언론에만 온전히 책임을 돌리는 것이 정당한 일이냐는 것이다.
가장 성공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촛불 집회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촛불 집회에 대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위대한 시민 혁명'이라고 예찬했지만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분열을 타파하라는 촛불 정신>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시민 단체와 언론 개혁에 대한 후원은 줄어들었고 <그 많던 시민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개탄이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촛불 집회 때 <박근혜 퇴진>이라는 목표를 빼고는 모두 달랐다.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참여했으며 자유한국당과 국민의 당 의원들이 동참하지 않았으면 탄핵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을 인정해야 한다. 촛불 집회는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을 경유하는 제도적 차원의 참여가 아닌 이슈 중심의 개별적 참여이기 때문에 휘발성이 높다.
우리가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촛불 집회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수준에나마 상응하는 '상도덕'을 지켰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고, '분열과 갈등의 정치',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끝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국 사태>가 대표적인 증거다. 사태 초기에 조국 법무장관 임명 반대 의견이 찬성 의견보다 2배 이상 많았다는 건 반대에 문재인 지지자들의 상당수도 가담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문재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자 지지자들은 '조국 사태'를 '문재인 사태'로 인식하고 이 희대의 <국론 분열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국민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고, 나름의 소신을 갖고 밀어붙였다면, 그 실패에 대한 정직한 해명을 했어야 했다. 이게 최소한의 상도덕이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결국 참여의 문제로 귀결된다. 비판자들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정치적 참여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하지만, 옹호자들은 참여의 유인 효과를 가져온다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약한 연결을 전제로 해서 그런 힘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비판하지만 운동권과 같은 '강한 연결'이 오늘날에도 가능하겠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최선은 차선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리처드 로티의 경고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차선은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지만, 최선은 그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떠들기만 해도 자신이 빛나 보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를 열거해보면, 전체가 10개라면 9개에 대해서 거의 같은 의견을 같고 있으면서 단 하나의 차이 때문에 싸운다. 정치는 사회적 문제 해결의 수단일 뿐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과 욕설을 불사하고 혐오의 감정마저 느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국민적 패싸움이 아닌 <민생 개혁>의 내실을 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민생의 절박한 문제 해결을 위해 써야 할 힘을 엉뚱한 정치적 투쟁에만 탕진하는가? 왜 우리는 민생이야말로 소비의 영역임에도 소비를 자본주의의 죄악과 연결시켜 백안시하는 위선과 오만의 수령에 빠져 있는가? 우리가 빠진 재난의 수렁 속에서 '희망과 관용과 연대의 힘'이라는 별을 보면서 극복의 의지를 다져나가면서 동시에 새로운 정치와 삶의 방식도 찾아나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