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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24-3, 24-4번 문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4-3. 이것은 또한 10가지가 있으니, 즉 보시, 지계, 수행, 공경, 가까이 섬김, 덕을 타인에게 회향함, 타인의 공덕을 따라 기뻐함, 법을 배움, 법을 설함, 자기의 견해를 올곧게 가짐이다.
24-4. 이 [해롭거나 유익한] 20가지 업은 욕계의 업이라고 한다.
업을 과보를 주는 장소에 따라 분류했을 때 ① 욕계 해로운, ② 욕계 유익한, ③ 색계 유익한, ④ 무색계 유익한의 4가지로 분류된다.
여기서 10가지 공덕행은 욕계 유익한 업(kusala-kamma)에 관한 설명이다.
욕계 유익한 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업 마음이며, 선행 혹은 공덕행(puñña-kiriya)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이 선행, 공덕행을 3가지로 말하면 보시, 지계, 수행(명상)이고 10가지로 말하면 24-3번 문단의 내용과 같다.
24-4번 문단에서 말하는 20가지 업은 욕계 해로운 업 10가지와 욕계 유익한 업 10가지를 지칭한다.
욕계 해로운 업은 십불선업도(해로운 업의 길, akusala-kamma-patha)의 10가지를 의미하고, 욕계 유익한 업은 10가지 공덕행(puñña-kiriya)을 말한다.
열 가지 해로운 행위의 길(akusala-kammapatha)은 열 가지 해로운 행(duccarita)라고도 불린다.
유익한 행은 sucarita라고 한다.
2.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 언급된 열 가지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 vatthu)를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영어로는 Ten Domains of Meritorious Actions 라고 번역한다.
Vatthu는 site, ground, field 라는 뜻이다.
열 가지 공덕행의 토대
Ten Domains of Meritorious Actions
뿐냐puñña는 마음을 정화하는 것, 즉 유익한 행을 의미한다. 끼리야kiriya는 행해져야 할 것을 뜻한다. 왓투vatthu는 발전과 번영의 기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는 발전과 번영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이 열 가지 공덕행은 망갈라mangala라는 최고의 축복을 준다. 열 가지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vatthu는 다음과 같다.
1. Dāna 보시
2. Sīla 지계
3. Bhāvanā 수행
4. Apacāyana 공경
5. Veyyāvacca 봉사
6. Pattidāna 회향
7. Pattānumodāna 기뻐하고 감사함
8. Dhammassavana 법문을 경청함
9. Dhammadesanā 설법함
10. Diṭṭhijukamma 바른 믿음
망갈라(mangala)는 '행복'으로도 번역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축복, 길상, 행운, 상서로움, 좋은 징조' 정도로 알아야 한다.
공덕행을 통해 여러 상서롭고 좋은 과보들, 행운들이 생기는 것이다.
3.
1. Dāna 보시
Charity
보시dāna는 베푸는 것, 자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의 보시가 있다.
① 의도 보시cetanā dāna
② 물품 보시vatthu dāna
물품, 가사, 수행처 등을 헌납하는 것을 물품 보시라고 하고 이러한 보시행위에 내포된 유익한 의도를 의도 보시라고 한다. 현생과 내생에 유익한 과보를 가져오는 것은 보시한 물건이 아니라 '의도'이다. 보시물에 투영된 유익한 정신적인 태도가 다음 생에 유익한 과보를 가져온다. 보시가 유익하고 고귀하다면 의도cetanā 역시 그러하다.
좀 더 설명해보면 스님들이 탁발하는 동안 스님들께 보시할 경우에 보시하는 사람이 자기가 보시하는 음식과 승가를 알아차리고 있다면 유익한 의도cetanā의 계속되는 흐름이 그 사람의 바왕가에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한 의도cetanā는 매우 빠르게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의도에 의해서 생긴 힘은 잠재되어 있다가 나중에 그에 합당한 과보를 만든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1조 개 이상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세 시간 정도 이어지는 탁발의식 동안 일어나는 의도cetanā가 얼마만 한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보시를 통해 의도를 자극
비록 음식과 같은 보시물이나 보시를 받는 사람은 내생에 과보를 받지 못하지만 보시를 한 사람의 진실한 의도cetanā가 더 좋아지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특별히 준비한 승가 탁발 공양물은 활발한 의도를 자극하는 반면, 평범한 탁발 공양은 약한 의도를 자극한다. 다시 공양받을 만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강력한 의도가 자극되는 반면 이름뿐인 사람에게 보시하면 미약한 의도만 자극될 뿐이다. 이러한 식으로 공양물과 보시를 받은 사람은 보시자의 마음에 강렬한 의도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보시는 베푸는 것이다.
무엇을 베푸는가? 물품을 베푼다.
업과 과보의 자연법칙에는 공짜가 없다.
주는 것이 있다면 받는 것이 있다. 모든 것엔 대가가 있다.
즉 보시자는 겉으로는 주고 있으며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대가를 받고 있으며 더 큰 공덕의 이익을 보고 있다.
보시 받는 자는 물품을 얻는다.
보시자는 보시 행위로 일으킨 유익한 의도에 따라 유익한 과보를 받게 된다.
물품을 베풂으로써 타인을 이롭게 하고, 그 자신의 유익한 의도로 자신을 이롭게 한다.
마치 공덕의 회향이 보시의 이익으로 나와 무수히 많은 다른 존재를 이익되게 하는 것처럼, 보시는 나와 남을 동시에 이롭게 한다.
유익한 과보를 가져오는 것은 보시한 물건이 아니라 '의도'라고 한다.
보시물을 매개체로 한 '유익한 정신적인 태도'가 나에게 유익한 과보라는 대가를 가져다준다.
몸과 말과 마노로 짓는 의도(cetanā)와 행위(kamma)가 유익하고 고귀할수록 나 역시 고귀한 존재가 된다.
이 과보는 이것은 현생과 내생, 생이 끝나는 열반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행위는 의도를 자극한다.
반대로 의도는 행위의 결과를 결정한다.
따라서 의도와 행위는 둘이 아니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고, 다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특별한 형식은 강력한 의도를 자극한다.
특별한 노력은 강력한 의도를 자극한다.
공덕이 높고 고귀한 대상 역시 강력한 의도를 자극한다.
즉,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기뻐하고 감동하는 마음이 나의 행위를 더욱 수승한 과보로 만든다.
보시dāna의 양
... 많은 양의 보시물을 조달하려는 열성적인 노력은 강력한 의도를 일으킨다. 적은 양의 보시는 노력이 덜 필요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도도 상대적으로 작다. 많은 양의 보시물을 준비할 때는 먼저 일어나는 의도pubba-cetanā도 그에 따라서 엄청날 것이다. 그래서 많고 적은 보시를 할 때의 의도는 서로 비교할 수 있는데, 많은 보시를 할 때의 의도cetanā가 더 우세하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양의 보시를 할 때는 각각의 의도가 지속하는 시간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다. 보시dāna가 웅장하고 화려하다면 의도cetanā도 원대하다. 보시를 하는 기간 동안 보시하는 순간의 의도muñca cetanā 역시 보시에 비례한다. 보시한 후의 의도apara cetanā 역시 보시한 것을 되풀이해서 생각할 때마다 같은 크기가 될 것이다...
많은 양의 보시dāna, 빈약한 의도cetanā
어떤 보시자는 음식, 건물, 의류 등을 의례적으로 혹은 사무적으로 보시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성대하게 보시한다 해도 그 보시자의 의도는 보시물과 맞지 않는다. 즉 보잘것없는 의도로 유익한 행을 하기 때문에 큰 기쁨을 못 느낀다. 그러므로 보시물의 양과 질만으로 보시자의 관대함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둣타가마니 아바야 왕은 임종할 때 마하쩨띠 사원을 보시한 유익한 행에 대해서는 큰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숲 속에 있는 한 비구에게 음식을 보시한 작은 유익한 행을 회상하고 큰 기쁨을 느꼈다. 이 커다란 기쁨으로 죽은 후 도솔천tushit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명심해야 한다. 보시를 한 의도가 운명을 결정하지, 보시한 물건의 가치와 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의도는 어떤 성대한 보시보다 중요하다.
크고 많은 보시, 웅장하고 화려한 보시는 강력하고 원대한 의도를 일으킨다.
따라서 그 보시의 과보도 강력하고 원대하게 돌아온다.
상식, 혹은 일반적인 도덕률로 말하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시할 때 그 의도 역시 강력해지고 그에 따른 과보도 커진다.
같은 원리로 의무적으로, 기쁨 없이, 마지못해 하는 저열한 태도의 보시는 그 과보 역시 저열할 것이다.
이것은 우 실라 사야도께서 법문 때 자주 말씀하시는 '아까운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보시의 기회와 베푼 보시물을 통해 큰 선업과 공덕을 쌓을 수 있었지만, 그 자신의 저열한 태도로 그 과보를 제한적으로 만든다.
물품 보시가 크고 웅장할 때 그 과보도 크고 강력하다. 이것은 보시의 과보를 가져오는 형식이자 매개체이다.
그 속에 담긴 의도 보시가 어떤 마음가짐이었냐가 내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보시는 씨 뿌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보시를 받는 사람은 밭,
보시를 하는 사람은 농부,
보시물은 뿌려진 씨앗,
미래에 받을 혜택은 열매
「아귀사경」 Peta vatthu에는 "보시를 받는 사람은 땅과 같고 보시자는 농부와 같고 보시물은 밭에 뿌린 씨앗과 같다. 나중에 윤회saṃsārā하는 동안 축적되는 혜택은 그 식물에서 나오는 열매라네"라고 나와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농사는 땅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에 따라 수확량이 결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시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진실하고 고귀한가에 따라 선업의 과보의 정도가 정해진다.
2. 뿌린 씨앗이 얼마나 신선한가에 따라 식물의 성장과 생산성이 결정되듯이 보시물이 얼마나 청정한가에 따라 즉 그것들이 바른 생계를 통하여 구한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선업의 과보의 성격이 결정된다.
3. 농부가 농사기술과 노력에 따라 수확하듯이 보시자도 보시를 할 때의 지성과 감사에서 우러나온 기쁨 그리고 진지한 노력의 정도에 따라 과보를 누릴 것이다.
4. 수확을 잘 내려면 씨를 뿌리기 전에 농부들은 적절하게 밭을 갈 준비를 해서 쟁기질을 해야 한다. 마치 보시자가 보시하기 전의 의도pubba-cetanā를 가다듬듯이 결과는 보시하기 전의 의도가 얼마나 강렬한가에 달려있다.
5. 농부는 밭에 있는 잡초를 뽑고 물을 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식물이 잘 자랄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시자는 자기가 한 보시를 회상해서 유익한 행위를 했다는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 보시를 한 후에 의도apara-cetanā가 선업의 과보의 성질을 결정한다.
6. 만일 농부가 어리석어서 싹과 모종을 망가뜨렸다면 그들이 수고한 농작물은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보시자는 보시를 하고 나서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후회가 일어나면 약한 의도로 말미암아 유익한 과보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7. 비록 밭과 씨앗이 다 좋다고 하더라도 수확을 잘하기 위해서는 때를 맞춰 씨를 뿌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보시해야 한다. 그러한 보시는 유익한 과보를 가져온다.
「아귀사경」 Peta vatthu에 보시dāna에 관한 훌륭한 가르침이 나와 있다. 보시를 할 때는 보시 받는 사람을 바르게 선택하고 시간과 장소를 적절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보시는 더없이 행복한 마음과 즐거운 의도로 해야 한다. 더구나 세속적인 부를 얻기 위해서 보시를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바람은 탐욕과 갈애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보시하는 마음은 될 수 있으면 순수해야 한다.
보시를 받는 자도 결과를 결정한다
「아귀사경」 Peta vatthu에는 보시dāna 받는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밭과 같다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토양은 비옥한 것, 보통인 것, 좋지 않은 것, 이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마찬가지로 보시를 받는 사람도 등급이 있다. 잡초나 풀이 없으면 경작을 해서 수확을 많이 올릴 것이다. 보시를 받는 사람이 탐·진·치가 없어도 그와 같을 것이고 보시한 사람은 더 많은 수확을 누릴 것이다. 농사도 거름과 비료를 많이 주면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듯이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보시자에게 더 많은 선업의 과보가 누적될 것이다.
승가에 하는 보시saṇghika-dāna
빠알리어 상기까 다나saṇghika-dāna는 승가saṃgha나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음식이나 생활필수품을 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승가에 1짯kyat을 보시한다고 가정해 보자. 부유하든 가난하든 승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1짯씩 받은 셈이 된다. 이처럼 한 그릇의 공양, 한 벌의 가사를 승가에 보시하면 승가 전체가 그 보시물을 받은 것이다. 승가에 보시하기 위해서 세계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승가에 속하는 어떤 사람에게 보시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승가 전체에 보시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서로 나누어 쓰기 때문이다. 구성원 모두가 그런 보시를 받은 것이다.
어떻게 유익한 의도를 낼 것인가
승가에 보시saṇghika-dāna 할 때 보시자의 마음은 승가 전체로 향해 있어야 한다. 'Saṃghassa demi. 승가에 보시합니다'라고 말할지라도 마음속에 특정한 스님이나 사원을 지목하고 있다면 그 보시는 승가에 하는 보시가 아니다. 매일 탁발하는 스님께 공양하거나 승가가 지목한 특정한 스님께 보시하는 것은 보시자의 마음이 진정으로 승가 전체로 향해 있을 때만 승가에 하는 보시saṇghika-dāna로 분류될 수 있다.
보시할 때의 마음가짐·음식
부처님께 큰 신심을 지니고 가르침sāsana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며 그 가르침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유익한 승가가 출현하고 이어지길 바라는 헌신적인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음식 등을 보시함으로써 승가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막상 보시할 때는 '이분은 내가 모시는 스님이다'라는 집착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 대신에 반드시 전체 승가를 향해 마음을 내어'saṃghassa demi. 제가 이 보시물을 승가에 바칩니다. 승가에 바칩니다.'라고 여러 번 말하면서 보시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시가 날마다 행해질 때 그 공양은 진정한 상가 보시saṇghika-dāna가 된다.
공양을 청하는 것은 승가에 하는 보시saṇghika-dāna가 된다
가까운 사원에 가보면 보시자가 총무 스님께 공양청을 하면서 "스님, 내일 오전 6시에 저희 집에서 음식 공양을 하고 싶습니다. 스님 한 분(둘 혹은 셋, 경우에 따라서)을 참석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공양에 상수스님이 꼭 참석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공양을 준비하는 동안에 보시자의 마음은 특정한 승려나 특정한 사원이 아니라 승가 전체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saṃghassa demi. 이것을 승가에 보시합니다."라고 되풀이해서 말해야 한다.
다음날 아침 공양에 스님이 도착했을 때, 그 찾아온 스님이 지위가 낮거나 서열이 낮은 스님이라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보시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보시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승가 전체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된 공경심과 헌신으로 보시해야 한다.
만일 공양받으러 온 스님이 상수 스님일지라도 보시자가 지나치게 기뻐해서는 안 된다. 그 상수 스님께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승가 전체를 향하여 기울일 수 있을 때 승가에서 지목한 한 스님께 보시하는 것은 승가 전체에 보시saṇghika-dāna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보시자의 유익한 의도
옛날에 부도덕한 비구가 있었다. 그 승가에 보시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비구 스님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 보시자는 승가 전체에 보시한다고 생각하고 그 부도덕한 비구 스님께 극진한 마음으로 음식과 필수품을 보시했다. 비구 스님이 나갔다 들어오면 발도 씻겨 드리고 향기 나는 방석도 드렸다. 비록 보시를 받는 사람이 부도덕한 비구였지만 보시자의 마음이 승가 전체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 보시는 최고의 상기까-다나(saṇghika-dāna, 승가 전체에 하는 보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좀 더 살펴보자. 앞에서 말한 보시자의 그런 공경심을 알아차린 그 부도덕한 비구는 자신이 헌신적인 보시자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그 비구 스님은 자신의 사원을 수리하기 위해 그 보시자의 집으로 괭이를 빌리러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보시자가 매우 무례하게 대했다. 괭이를 비구 스님의 발치에 툭 던지면서 "여기 있소!"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웃 사람이 그에게 스님을 대하는 태도가 왜 그렇게 다른지 물었다. 그는 "아침에는 어떤 특정한 스님이 아니라 승가 전체에 공경심을 나타낸 것이고 저녁에 했던 무례한 행동은 부도덕한 비구 스님 개인에게 한 것이라 어떠한 공경심을 나타낼 필요가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보시는 승가saṃgha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승가 전체에 마음이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보시dāna에 따라 유익한 결과는 어떻게 다른가
한 명, 두 명 혹은 여러 명의 비구에게 보시를 한다고 할지라도 보시하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지목하면 개인적인 보시가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1천 명에게 보시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적인 보시puggalika-dāna이다. 특별히 부처님이나 벽지불에게 보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승가 전체에 하는 보시가 가장 공덕이 크다. 승가 전체에 하는 보시saṇghika-dāna에는 아라한도 포함된다. 개인적인 보시에는 아라한이 포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승가 전체에 하는 보시는 가장 도가 높은 스님도 포함된다고 편하게 추론할 수 있는 반면 개인적인 보시는 보시받을 스님을 까다롭게 선택해야 한다. 승가 전체에 보시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하는 보시보다 더 강력하고 더 공덕이 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 직접 올리는 공양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는 열성적인 불자들이 부처님께 직접 공양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 개인적으로 보시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먼저 한 명의 비구 스님께 보시할 음식을 충분히 준비하고 그것을 불상 앞에 두어라. 만약 가까이에 불상이 없다면 경건하게 불상을 상상하라. 그렇게 하면 부처님께 마음을 다 바쳐cetanā 공양한 것이다.
그렇게 의식을 치른 후에 공양음식은 탑의 경내를 깨끗이 청소하는 봉사자에게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출가자일 수도 있고 재가자일 수도 있는데, 마침 오후 작업시간 전이라면 팔계upsatha sīla를 지키는 봉사자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음식을 먹으리라.
격식을 갖춘 큰 보시를 할 때 부처님이 이끄는 승가에 음식을 보시하기를 원한다면 위와 같은 절차로 부처님께 보시를 하는 방법을 따른다.
부처님께 가사를 바칠 경우에도 똑같은 의식을 하면 된다. 불탑에서 봉사하는 스님들은 그런 가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꽃이나 향, 꽃다발, 물 등을 불탑에 바치고 불상 앞을 지저분하게 하지 말라. 보시는 정갈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현생이나 지금 이후에 유익한 과보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다음 생에 청정하고 티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멀리서 경의를 표하는 방법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신도들은 매일 불탑이나 사원에 갈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집에 모셔놓은 불상 앞에서 경의를 표하고 보시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지는 아직 논란이 많다. 여러분은 이미 결정적인 요소가 마음cetanā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큰 이익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여러분의 의지가 부처님께 투사된다면 그것은 확실히 유익한 의도kusala-cetanā이므로 어떤 공덕도 얻지 못할 이유가 없다.
수억 겁kappa 전에 앗타닷시Atthadassi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어느 때에 신도 한 명이 부처님과 그의 제자 아라한ārahant들이 신통력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멀리서 꽃과 향을 보시했다. 그는 이 단 한 번의 유익한 행위로 수천 년 동안 사악처에 태어나지 않았으며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는 아라한이 되었다. 그가 바로 데사뿌자까Desapujaka 존자다.
1)
어떤 밭에 어떤 씨앗을 심는지에 따라 농부가 미래에 수확할 것이 결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보시를 할 때에도 내가 가장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가장 귀한 대상에게 보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가장 원하고 좋아하는 것은 ① 준비할 수 있는 최상의 물품, 그리고 ② 그것을 보시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이다.
가장 귀한 대상은 단연 복밭 그 자체인 상가(saṃgha)이다.
상가에게 한 보시는 나에게는 광대한 과보를 가져온다.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청정하게 잇는 유익한 상가가 계속해서 유지되도록 한다.
2)
상가에게 하는 보시(saṇghika-dāna)는 어떤 개인에게 하는 보시보다 더 수승하고 광대한 과보가 있다.
상가에게 보시한 물품이나 금전은 상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상가에 속하는 어떤 사람에게 보시하더라도 서로 나누어 쓰기 때문에 자동으로 상가 전체에 보시한 것이 된다.
따라서 보시받을 스님을 까다롭게 고를 필요가 없다.
한 번의 보시로 모든 성자 분들과 계를 지키는 청정한 비구, 비구니 스님들께 보시할 수 있다.
보시자는 "saṃghassa demi(승가에 보시합니다)"라고 거듭 말하며 상가 전체를 향해 보시의 마음을 낸다.
특정 스님이나 사원에게 보시하더라도 보시자의 마음은 상가 전체로 향해 있어야 한다. 어떤 개인이 아니라 상가 전체를 위해 보시하는 것이다.
3)
부처님을 포함한 전체 비구, 비구니 승단에 보시하는 것은 상가에게 하는 보시 중에서도 제일 과보가 수승하다.
준비한 보시물을 모셔놓은 불상 앞에 두거나 경건하게 불상을 상상한다.
이로써 부처님께 마음을 다 바쳐 공양하는 의도(cetanā)를 일으킨다.
이런 의식을 치른 후 보시물을 부처님이 이끄는 상가에 보시한다.
보시의 결정적인 요소는 의도(cetanā)이다.
보시의 의도를 부처님께 투사하고, 부처님을 따르는 전체 상가에게 보시한다면 가장 큰 이익과 공덕을 얻지 못할 이유가 없다.
보시할 때의 세 가지(전pubba, 중muñca, 후apara) 유형의 의도cetanā
보시할 때는 세 가지 종류의 의도cetanā를 갖추어야 한다. 보시하기 전의 의도pubba-cetanā, 보시할 때의 의도muñca-cetanā, 보시하고 나서의 의도apara-cetanā이다.
보시하기 전의 의도pubba-cetanā
보시를 권유하고 준비할 때 일어나는 유익한 의도를 보시하기 전의 의도pubba-cetanā라고 한다. '내가 이 탑pagoda을 지은 사람이다'라든가 '내가 이 사원을 기부했어' 또는 '내가 그걸 보시한 사람이야' 등과 같은 헛된 자만심과 이기심이 없어야 한다. 보시를 준비하는 동안 여러분은 가족과 다투거나 불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일단 마음먹었으면 유익한 행을 하는 데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보시를 준비하는 동안 내내 즐겁고 기쁘다면 순수하고 정성이 담긴 보시 전의 의도가 충만하다고 안심해도 좋다.
보시 중의 의도muñca-cetanā
문짜muñca는 포기하는 것, 떠나는 것,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포기하거나 베풀 때의 의도...를 보시하는 중에 일어나는 의도muñca-cetanā라고 한다. 유익한 행위를 하는 동안 탐욕, 자만, 분노, 받는 사람에 대한 집착 등과 같은 해로운 마음에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이익에 갈망해서는 안 된다. 보시를 하는 중의 의도가 일어날 때 만일 보시받는 사람에게 앞서 일어났던 해로운 마음을 막고 보시 받는 사람에 대해서 일어날 집착을 피하고 되돌아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자유롭게 보시한다면 보시하는 중에 순수한 의도가 일어난 것이라고 안심해도 좋다.
보시 후의 의도apara-cetanā
보시를 다하고 나서 일어나는 세 번째 의도cetanā는 유익한 행을 했음을 즐기는 성취의 지복이다. 여러분은 그런 유익한 일을 한 것에 대해 기쁨을 느낄 것이고 자주 그것을 회상할 것이며 그런 일을 또 반복해서 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보시하고 나서 (유익한)의도apara-cetanā가 증폭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하고 나서 재산을 잃었다고 후회하거나 보시한 사원의 원장에 대해서 실망을 하면 보시 후의 의도apara-cetanā가 오염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시를 하지 말 것을...'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보시 후의 의도가 해로워질 뿐만 아니라 불만족의 해로운 태도akusala dosa를 확장하는 것이 된다.
경고
사원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 등은 큰 보시dāna다. 그보다 좀 더 작은 규모로는 물품, 의복, 음식, 물 등을 필요한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큰 보시를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악의뿐만 아니라 여러분 내면의 방해요소와 부딪치기 쉽다.
그러므로 큰 보시를 하려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또 친구나 학식 있는 스승에게 충고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보시dāna를 받을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보시를 받을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작은 규모의 보시를 하는 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그 나름의 유익한 점이 있다.
보시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올바른 태도다. 될 수 있으면 승가 전체에 보시saṇghika-dāna하라. 결코 보시하려고 한 물건에 집착하지 말라. 보시하려는 물건에 대해서 완전히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라.
이러한 태도를 일러 베푸는 습관이 있는 사람muttacāgī*⁹⁶이라고 한다. 집착이 없어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시자는 모두 보시를 받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보시물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빌지도 말아야 하고 또 인간계나 천상의 세속적인 화려함을 바라서도 안 된다. 오직 지고의 축복인 고귀한 열반nibbāna을 얻기만을 바라야 한다.
*⁹⁶ 베푸는 습관이 있는 사람muttacāgī : mutta는 분리, 포기를 의미하고 cagi는 관대한 습관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1)
보시 전(pubba), 중(muñca), 후(apara) 모두 지어야 할 의도는 즐거움, 기쁨, 정성을 다함과 같은 것이다.
피해야 할 의도는 탐욕, 성냄, 자만, 보시물 혹은 보시받는 자에 대한 집착과 같은 해로운 마음이다.
보시를 함에 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보시하는 것 그 자체에 감사함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과정'에 보람과 즐거움을 느낀다. '유익한 행' 그 자체에 대해 순수하게 기뻐한다.
'이 보시로 어떤 과보를 받겠다' 하는 등의 '결과'에 천착할 때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고, 보시 공덕은 저열해진다.
2)
책의 보시에 대한 설명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문짜muñca는 '포기하는 것', mutta는 '포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시에 대한 설명에서 '포기'는 '베풂'과 같은 말이다.
거머쥐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버리고 떠나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통칭하여 '포기'라고 설명하는 것일 테다.
얻으려 할 때 마음은 조급하고, 불안하고, 괴로워진다.
포기하고 놓아주고 버리려 할 때 마음은 편안하고, 걸림이 없다. 집착이 없어 자유롭다.
궁극의 자유, 행복인 열반은 상카라에 대한 집착과 갈애를 여의어 형성된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시를 통해 버리고 포기하는 연습은 수행을 통해 버리고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것과 같은 궤의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이러니하게도 버리고 떠나는 연습은 더 많은 행복과 더 고귀한 과보를 생겨나게 한다.
유익한 행kusala의 분류
<마음부수cetasika에 대한 장>에서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 어리석음없음amoha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것들을 '원인'이라고 부른다. 나무 전체를 살아 있도록 지탱하는 뿌리처럼 이 원인들은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부수를 성장시키고 계발한다. 따라서 유익한 마음kusala-citta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의 두 가지 원인dvihetuka-kusala-citta을 가진 것과 위에서 말한 유익한 세 가지 원인tihetuka-kusala-citta을 모두 가진 것이다.
(1)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dvihetuka-kusala-citta
어떤 사람이 탐욕없음alobha과 성냄없음adosa의 유익한 마음을 잘 기르면 그런 사람의 마음은 두 개의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dvihetuka-kusala-citta이다.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는 업kamma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다. 열 가지 공덕행 가운데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지혜kammassakatā-ñāṇa이다.
업kamma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나 무지한 사람이 어떤 것을 흔쾌히 보시를 할 때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유익한 일을 했다는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업이 자기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지혜kammassakatā-ñāṇa가 없으므로 그 사람의 유익한 마음kusala-citta에는 어리석음없음amoha이 없다. 두 가지 원인, 즉 탐욕없음alobha과 성냄없음adosa만 있다. 그런 마음을 두 가지 유익한 원인 마음dvihetuka-kusala-citta이라고 한다.
오늘날 많은 불자들이 업과 그 과보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관습적으로 봉사를 하고 보시를 한다. 그런 관용은 두 개의 유익한 원인dvihetukakusala-citta밖에 없다. 학식 있는 사람이라도 형식적으로 유익한 행을 하면 같은 범주의 유익한 행kusala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지혜가 없는 유익한 행은 두 개의 유익한 원인만 가진 마음dvihetuka-kusala이라고 할 수 있다.
(2)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tihetuka-kusala-citta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 어리석음없음amoha의 세 가지 원인과 결합한 유익한 마음을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tihetuka-kusala-citta이라 부른다. 업과 과보를 이해하는 지혜kammassakatā-ñāṇa를 동반하는 모든 유익한 행은 이 범주에 속한다.
오늘날 많은 학식 있는 불자들은 어르신들이나 부모님뿐만 아니라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ṃgha를 위하여 선행을 한다. 그들의 마음이 윤회saṃsāra에서 받게 될 이익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은 세 가지 원인의 유익한 마음tihetuka-kusala을 가진 것이다.
만일 이 보시가 '물질은 다만 물질의 모임rūpa-kalapa일 뿐이며 그것들은 무상anicca하고 괴로움dukkha이며 무아anatta'라는 위빳사나vipassanā의 사상으로 행해진다면 그런 정신상태는 말할 것도 없이 분명히 최고의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tihetukakusala-citta이다. 그러므로 연장자나 부모님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공덕행을 하기 전에 무상·고·무아의 성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이익을 나누기 전에 업과 과보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고귀한ukkaṭṭha 유익한 행kusala과 저급한omaka 유익한 행kusala
빠알리어 우깟타ukkaṭṭha는 '고귀하다, 높다'는 뜻이고 오마까omaka는 '저급하다, 낮다'는 뜻이다. 두 개dvihetuka나 세 개의 유익한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tihetuka-kusalacitta이 있고 보시 전pubba-cetanā, 보시 후의 의도apara-cetanā가 일어날 때 선한 상태로 둘러싸여 있다면 매우 유익한 행위ukkaṭṭha-kusala로 분류할 수 있다. 만일 해로운 상태로 둘러싸여 있다면 저급한 선행omaka-kusala으로 분류된다.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이 앞서거나 뒤따른다고 할 때 여러분은 유익한 행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태도만을 뜻한다. 유익한 마음kusala-citta과 해로운 마음akusala-citta이 행한 유익한 행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의 유익한 마음kusala이나 해로운akusala 마음의 반주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큰 보시를 하기 직전에 보시자가 보시받는 자에게 화가 나서 소송을 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이것은 성냄dosa이라는 해로운 마음이다. 그러나 그 성냄이 보시를 베푸는 것과 관련하여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공덕을 행한 후에 기쁨을 느낀다면 그의 분노에서 생긴 성냄이라는 해로운 마음dosa-akusala은 보시라는 유익한 행dāna-kusala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요약하면 이와 같다. 드높은 세 가지 유익한 원인tihetuka-ukkaṭṭha을 가졌다는 말은 유익한 행을 하기 전pubba-cetanā과 유익한 행을 하고 난 후apara-cetanā로 유익한 의도를 가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유익한 의도 중 하나가 빠지면 낮은 세 가지 유익한 원인tihetuka-omaka-kusala이 된다. 보시 전과 후의 유익한 의도가 둘 다 없으면 더더군다나 세 가지 저급한 원인을 가진 타입에 속한다. 드높은 두 가지 원인dvihetuka-ukkaṭṭha이나 두 가지 저급한 원인dvihetuka-omaka도 이와 비슷하다. 지계나 다른 선행도 하기 전의 의도pubba-cetanā, 유익한 행 중의 의도muñca-cetanā, 유익한 행 후의 의도apara-cetanā와 높고ukkaṭṭha 낮은omaka 유형의 같은 범주가 적용된다.
① 업과 그 과보에 대한 이해를 동반한 행위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유익한 행tihetuka-kusala이다.
② 만일 그러한 이해가 없다면 두 가지 유익한 원인dvihetuka-kusala을 가진 것이다.
③ 유익한 마음kusala-citta에 뒤이어 유익한 행이 일어난다면 드높은 유익한 행ukkaṭṭha-kusala이다.
④ 만일 해로운 마음akusala-citta이 유익한 행을 하기 전이나 후에 일어난다면 저급한 유익한 행omaka-kusala이다.
보시 공덕의 수준, 그리고 그에 따른 과보의 크기는 2가지 기준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3가지 원인을 가진 수승한 유익한 행(tihetuka-ukkaṭṭha-kusala)
② 3가지 원인을 가진 저열한 유익한 행(tihetuka-omaka-kusala)
③ 2가지 원인을 가진 수승한 유익한 행(dvihetuka-ukkaṭṭha-kusala)
④ 2가지 원인을 가진 저열한 유익한 행(dvihetuka-omaka-kusala)
유익한 행, 유익한 마음(kusala-citta)은 모두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의 2가지 원인에 뿌리박고 있다.
유익한 행위를 할 때 우리의 마음은 탐욕없음과 성냄없음 마음부수(cetasika)와 함께한다.
여기서 지혜가 더해진 유익한 행, 유익한 마음을 3가지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이라고 한다.
이 때 마음은 앞의 2가지 원인에 더하여 어리석음없음(amoha)이라는 원인에 뿌리박고 있다.
1)
여기서 어리석음 없음, 지혜,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는 정확히 무엇인가?
① 업의 인과법칙을 이해하여 업이 나 자신임을 아는 것, ② 정신과 물질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임을 아는 것이다.
선업을 행할 때 이 선업의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더라도 기뻐하며 유익한 일을 행할 수 있다.
이것은 업과 과보에 대한 정확한 지식, 이해 없이 관습적으로 보시와 봉사를 하는 마음이다.
이 유익한 행에는 인과법칙에 대한 이해가 없으므로 지혜가 없다.
탐욕없음과 성냄없음의 두 가지 원인만 함께한다.
업과 과보를 이해하며 행하는 유익한 행위는 탐욕과 성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도 없다.
윤회의 과정에서 선업은 이익을 가져다준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유익한 행을 짓는다. 이때 세 가지 원인이 모두 함께한다.
깜맛사까따 냐나(kammassakatā-ñāṇa)는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 '업이 자기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지혜', '중생들은 자신만의 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 이해할 수 있다.
지혜 부분 중에서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면서, 그대로 따라가면서 맨 처음에 얻는 지혜가 이 깜맛사까따 냐나(kammassakatā ñāṇa)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 거구나. 다른 어떤 누가 받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소멸하는 법은 없다.' 하는 걸 압니다. 단지 소멸하진 않고 다른 더 큰 업을 지었을 경우에는 '그것이 선한 업이든 악한 업이든 큰 업을 지었을 때는 그 업으로 인해서 가려질 수는 있구나.' 하고 판단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마만큼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고 조심을 하게끔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업을 자기로 하는 지혜라고 보시면 됩니다.
곧 깜맛사까따 냐나(kammassakatā ñāṇa) 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행복하고 불행하고 하는 것을 결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선한 행위 악한 행위를 시키는 것들은 곧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모든 행위는 자신의 마음이 명령을 하게끔 됩니다. 되도록이면 나쁜 행위들을 하지 말고 좋은 행위들을 하라고 얘기들을 합니다. 좋은 행위를 하기 위해서 삼보를 의지처로 해서 나아가고 또 오계들을 지키고 그렇게 합니다...
그 부처님의 지혜 중에 첫 번째 단계가 바로 깜맛사까따냐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업을 자기 자신으로 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 자기 자신의 행위의 결과는 자기 자신이다 하는 거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과는 자신이 지은 것으로 인해서 받은 것이다 하는 거라.
과거의 업에 의해서 받은 결과이든 또 현재의 업을 만드는 것이든 과거 현재 미래로써 계속 연결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현재 자신이 행하는 행위가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행위를 하도록 그래서 그런 공덕들을 쌓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게끔 하는 것이 깜맛사까따냐나 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점점 더 안락하고 행복한 것을 얻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를 더욱더 이해하고 실천해 나가서 그것을 증득해 나가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 말이든 행동이든 마음이든 어떤 방향으로든 우리는 그 행위를 하게끔 됩니다, 살아가면서. 그런 마음의 요소들을 선한 방향으로 자꾸 만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 선한 행위들을 하니까 선한 결과가 반드시 일어나는구나. 악한 행위를 했으면 악한 결과를 반드시 받는구나 하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업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서 그 업을 짓는 자는 자기 자신이고 그 업은 자기 자신이 받아야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업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그 업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자꾸 가지게끔 되는 겁니다. 그게 깜맛사까따냐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행위도 함부로 하지 않게끔 해야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항상 조심스럽게 바른 방향으로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나가게 되는 것들입니다.
- 출처: 깜맛사까따-냐-나(업을 자기로 하는 지혜) (20110622)
보시를 하는 마음이 '보시물은 물질의 모임일 뿐이며,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이다', '보시하는 대상은 정신과 물질이며, 무상·고·무아다'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위빳사나의 지혜가 함께한다.
이것 역시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유익한 마음이다.
업과 과보를 이해할 때 선업이 되는 선행, 공덕행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선업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를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고 있을 때 집착 없이 최고의 선업을 지을 수 있다.
2)
이렇게 지은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선업,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선업을 더욱 수승하게, 혹은 저열하게 만드는 것이 행위 전과 후의 의도다.
다른 말로 선행을 하기 전과 후 '그 선행에 대한 마음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유익한 행의 전후에 유익한 마음을 내고 있을 때 선업은 고귀해지고 수승해진다(ukkaṭṭha). 유익함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유익한 행의 전후에 해로운 마음을 내고 있을 때 선업을 저급해지고 저열해진다(omaka). 해로움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전(pubba)과 후(apara)의 유익한 마음이 무엇인가? 자신이 지은 선업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전과 후의 해로운 마음이 무엇인가? 그 선업 대상에 대해 성내거나 탐하거나 후회하는 등의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것은 단지 지은 공덕에 대한 전과 후의 마음의 태도에 따라서 그 공덕의 급이 결정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성내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이 지은 공덕행에 대해서 행위 전후에 기쁨을 느꼈다면 그 공덕행은 수승해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보시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한 지계, 수행 등 모든 선행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연습을 의도적으로라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선업을 증장시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현재 해로운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ayoniso-manasikāra의 상태에서 선업 마음으로 마음의 흐름을 되살리는 하나의 '닻'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분류법
보시dāna는 세 가지 수준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낮은 보시 Hīna-dāna
② 중간 보시 majjhima-dāna
③ 드높은(수승한) 보시 Paṇīta-dāna
이러한 분류는 보시물에 근거해서 분류한 것이다. 만일 보시물이 필요한 것보다 적다면 그것은 낮은 보시hīna-dāna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한 것이 필요한 만큼이라면 이는 중간 보시majjhima-dāna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한다면 이것은 드높은(수승한) 보시paṇīta-dāna다.
다른 방법으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다사-다나dasa-dāna는 저급한 보시hīna-dāna로 노예와 같은 보시라고 한다. 사하야-다나sahaya-dāna는 중간 보시majjhima-dāna로 친구와 같다. 사미-다나sāmi-dāna는 빤니따-다나paṇīta-dāna처럼 드높은(수승한_ 보시로 군주와 같다고 분류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
허약한 바람과 노력, 의도는 저급한 보시hīna-dāna를 하게 한다. 중간 정도의 바람과 노력, 의도는 중간 보시majjhima-dāna를 하게 한다. 열의에 찬 의지와 근면 그리고 의도는 드높은 보시paṇīta-dāna를 하게 한다.
또 다른 방법
'저 사람이 사원을 보시했다거나 탑을 보시했다.' 이러한 칭찬을 듣기 위해 하는 보시는 저급한 보시hīna-dāna다. 윤회saṃsāra하는 과정에서 미래 생에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 보시는 중간 보시majjhima-dāna다. 미래생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공덕과 지혜의 관습에 순응하여 진실한 유익한 의도로 하는 보시는 최상(수승한)의 보시paṇīta-dāna다.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고 하는 유익한 행은 미래에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고귀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이타적인 유익한 의도는 보살과 같은 고귀한 인물들만 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
세속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하는 보시는 저급한 보시hīna-dāna다. 윤회saṃsāra로부터 탈출하려는 의도로 하는 보시는 중간 보시majjhima-dāna다.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보시 바라밀dāna parami을 행하는 보살과 같은 위대한 보시는 최상(수승한)의 보시paṇīta-dāna라 할 만하다. 그러한 유익한 행의 여러 등급은 정신적인 태도에 달려있다. [지계sīla와 같은 다른 유익한 행도 비슷하다.]
1)
낮은 보시, 중간 보시, 최상 보시라는 세 가지로 분류한 보시의 분류 기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양에 따른 분류: 필요한 것보다 적으면 낮은 보시, 필요한 만큼이면 중간 보시, 더 많으면 최상 보시다.
② 질에 따른 분류: 품질이 낮은 것을 보시하면 낮은 보시, 내가 쓰는 품질의 것을 보시하면 중간 보시, 내가 쓰는 것보다 품질이 더 좋은 것을 보시하면 최상 보시다.
③ 의지에 따른 분류: 허약한 노력과 의도는 낮은 보시, 중간 정도의 노력과 의도는 중간 보시, 열의에 찬 노력과 의도는 최상 보시다.
④ 기대에 따른 분류: 칭찬을 듣기 위해 하는 보시는 낮은 보시, 미래의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 보시는 중간 보시,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 이타적인 의도로 습관적으로 하는 보시는 최상 보시다.
⑤ 목적에 따른 분류: 세속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하는 보시는 낮은 보시, 내가 윤회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하는 보시는 중간 보시, 다른 존재가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보시 바라밀을 행하는 보살과 같은 보시는 최상 보시다.
보시, 지계, 수행의 유익한 행의 등급은 정신적인 태도에 달려있다.
아낌없고,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며, 이타심으로 행하고, 출세간을 향할수록 보시는 고귀해진다.
2)
책에서는 아래 3가지의 보시 분류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① dasa-dāna: 노예와 같은 보시
② sahaya-dāna: 친구와 같은 보시
③ sāmi-dāna: 군주와 같은 보시
이것은 기본적으로 보시물의 '품질'과 관련된 분류이다.
'다사 다나'는 하인에게 적합한 품질의 보시물을 보시할 때를 말한다.
'사하야 다나'는 친구에게 줄 법한 품질의 보시물을 보시할 때를 말한다.
'사미 다나'는 주인에게 어울리는 품질의 보시물을 보시할 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내가 쓰는 물건은 좋은 재료를 쓰려하고, 하인과 같은 아랫사람에게는 낮은 품질의 물건을 준다.
이처럼 자신이 쓰는 것보다 품질이 낮은 것을 보시하면 그 보시물은 열등한 것이다. 따라서 하인에게 적합하다고 한다.
같은 의미에서 내가 쓸법한 좋은 품질의 물건을 보시하는 것은 동등한 친구에게 주는 것과 비슷하므로 친구에게 하는 보시가 된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쓰는 것보다 더 좋은 품질의 것을 보시하는 것은 윗사람에게 하는 것과 비슷하므로 최상의 보시, 주인에게 하는 보시가 된다.
3)
다사 다나(dāsa-dāna)를 다르게도 해석할 수 있다.
다사(dāsa)는 노예라는 뜻이다.
자유인은 부짓사(bhujissa)라고 한다.
보시에서도 다사 다나(dāsa-dāna, 노예가 되기 위한 보시), 부짓사 다나(bhujissa-dāna, 자유를 위한 보시)가 있다.
이 분류에 따르면 세상의 즐거움, 감각욕망을 얻기 위해 바치는 공양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보시가 된다.
무엇에 대한 노예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노예가 섬기는 대상은 '갈애'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도와 과, 열반을 얻기 위해 바치는 공양은 자유를 위한 보시, 부짓사 다나가 된다.
이것은 노예로서 섬기던 주인인 '갈애'에 저항하여 바치는 공양과도 같다.
끝없는 윤회 속에 중생들은 여섯 가지 문으로 여섯 가지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한다.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가 갈애이며, 중생은 이 갈애를 만족시키기 위해 매 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갈애의 노예가 된다.
부를 위해 일생 동안 밤낮으로 계속 노력하는 것은 최고의 음식, 최고의 옷, 그리고 가장 호화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갈망의 소망을 성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현생의 노예의 삶을 살며 호화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호화로운 삶, 세속적인 쾌락을 보장받기 위해 보시를 할 때 이것은 끝없는 윤회의 흐름에서 중생을 노예로 만드는 다사 다나(dāsa-dāna)가 된다.
끝없이 갈애의 소망과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갈애에 복종하는 삶에서 어느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기회를 얻을 때, 이 끝없는 속박의 수레바퀴를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갈애가 얼마나 강력한지, 얼마나 만족을 모르는지,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런 다음 이 갈애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그것에 저항하여 갈애를 뿌리 뽑고 근절하기 위해 공양을 바칠 때,
도와 과, 열반을 얻기 위해 공양을 바칠 때 이 보시는 자유를 위한 보시, 부짓사 다나(bhujissa-dāna)가 된다.
세속적인 즐거움이 아닌 출세간의 즐거움을 바라고 얻기 위한 보시가 시작되는 것이다.
보시의 이익
보시의 이익은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작은 동물에게 한 번의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도 이후 백 생 동안 ① 장수, ② 아름다움, ③ 번영, ④ 힘, ⑤ 지혜를 가져온다. 인간계나 천상에 태어나면 다른 존재들보다 뛰어나다.
깟사빠 부처님Kassapa Buddha 당시에 서로 친한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관대하여 보시를 잘하고 또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 두 명 모두 계sīla를 잘 지켰기 때문에 인간계와 천상계로 재생하였다. 매번 태어날 때마다 보시를 잘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뛰어났다. 고따마Gotama 부처님 당시 마지막 생에서 두 명 모두 꼬살라Kosala 궁에서 보시를 잘하는 사람은 왕자로 다른 사람은 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자는 제왕의 흰 우산 아래서 황금으로 된 요람에서 잠을 잤고 다른 사람은 나무 요람에서 잠을 잤다. 두 명 모두 마지막에는 열반을 얻었지만 각 존재로 태어날 때마다 이렇게 달랐다.
보시dāna는 윤회saṃsāra를 연장시키는가?
보시dāna가 윤회saṃsāra를 연장시킨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두 친구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보시를 즐겨하던 한 친구가 열반nibbāna을 늦게 얻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보시가 윤회를 연장시킨다는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다. 사실 보시자의 마음의 불순함이 윤회의 원인이다. 보시를 통해 인간과 천신의 욕락을 즐기려는 탐욕의 마음은 윤회의 순환에 머물게 한다.
... 이제 보시가 윤회를 연장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갈애taṇhā가 큰 영향을 주어서 여러분의 마음이 오염되고 그리하여 윤회가 연장되는 것이다. 모든 중요한 바라밀을 이룰 때까지 윤회 속에서 방황하고 나서야 보살bodhisatta들은 가까스로 일체지sabbaññutaññṇa를 얻었다. 여기에는 망고열매 이야기가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망고열매는 익어야 여문다.
두 가지 유형의 유익한 행kusala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유익한 행이 아니라 굴레 속에 있는 선처로 알려진 인간과 천상의 욕락을 즐기고자 하는 유익한 행vatta nissita kusala이 있다. 닙바나를 얻으려고 하는 유익한 행은 굴레를 벗어난 유익한 행vivatta nissita kusala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의 유익한 행 중에서 굴레 속에 있는 유익한 행vatta nissita은 보시dāna든 계율sīla이든 윤회의 괴로움을 길게 한다. 반면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유익한 행vivatta nissita kusala은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것이고 닙바나nibbāna를 얻고자 하는 고귀한 바람을 도울 것이다.
보시가 어떻게 바라밀 실천을 돕는가
관대한 보시자들은 대개 미래 생에 부유하게 되어 불편 없이 살아간다. 부유한 사람(마음이 따뜻하고 과거 생에 굴레를 벗어난 유익한 행을 행했던vivatta nissita kusala 사람)들은 계를 지니고 포살계uposatha sīla를 지킨다.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은 계를 지킬 여유가 없다. 교육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은 더 좋은 설비를 갖출 수 있다. 학비가 없는 사원학교에서조차도 부유한 아이들은 자연스레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보시를 했으면 교육도 더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
부자들은 무례함에 직면하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에도 더 쉽게 인내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지력과 자존감으로 그 순간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모욕을 당하면 자기가 가난하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는 컴플렉스complex로 괴로워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한다. 부자들은 다방면에서 존경을 받기 때문에 늘 사람들에게 자애와 연민을 보낸다. 가난한 사람은 늘 다른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해 자애와 연민 대신 분노와 허영심만 키운다. 그러므로 보시dāna는 인욕khanti이나 자애mettā와 같은 다른 바라밀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이 점에서도 보시가 정직과 약속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이 보살bodhisatta들이 먼저 보시바라밀을 실천한 이유다. 보시는 열 가지 바라밀 중 첫째다. 고따마Gotama 부처님도 보시바라밀로 시작하셨고 보시바라밀을 필요로 하셨다. 수메다Sumedha 선인이었을 때도 보시를 가장 먼저 행하셨다. 보살이 웻산따라Vessantara 왕이었을 때 모든 바라밀의 마지막 단계(수승한)로써 보시를 실천하셨다.
보시를 하지 않아도 수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보시라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현생에서 윤회saṃsāra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위대한 수행자들이다. 그들은 사마타samathā와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에 전념한다. 만일 그들이 보시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것이다. 보시는 매우 빠르게 해탈을 얻고자 전력투구하는 사람들에겐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열반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마하간다용 사야도는 그 자신이 바로 이번 생에 해탈하기 위해서 몸소 밤낮으로 수행에 매진했다. 사야도가 자신의 고귀한 목적을 이루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사야도는 그의 동굴에서 홀로 열심히 수행하면서 모든 시간을 보냈지만 보시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동굴에서 나오자 자신이 소유한 공양물을 다른 비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명상에 전념하는 사람에게는 보시가 불필요하다. 물론 보시는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다. 보시는 일반 신도가 평범한 삶을 사는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보시가 주는 즐거움
보시하는 것은 정말 즐겁고 기쁜 일이다. 관대하고 자애로운 사람은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항상 연민을 느낀다. 보시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애에 수반되는 마음이다. 그런 다음 이미 부유하고 영화로운 사람들에 대한 더불어 기뻐함muditā을 계발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모습은 평온하며 길상을 띨 것이다.
이번에는 보시를 받는 사람이 자애로 화답을 할 것이고 여러분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보시자가 더 부유한 사람일수록 받는 사람은 그들에 대해 더불어 기뻐함을 더 계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보시가 네 가지 청정범행brahmavihāra에 이르게 하는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식으로 고귀하고 심오한 보시는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더불어 기뻐함muditā, 더 나아가 수행bhāvanā에 이르는 길을 닦아 준다. 이러한 식으로 숭고하고 심오한 보시는 평온upekkhā을 계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관대한 사람은 부유하다
생계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부자는 극소수이다. 궁핍하고 곤궁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많다. 가난한 사람들은 전생에 보시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나 부유한 사람들은 반드시 전생에 보시를 많이 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부유한 사람들은 현생의 영화로움에 만족해도 될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이 가진 소유물과 부유함은 다음 생에까지 따라가지 않는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 더 이상 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들은 재산을 상속인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다음 생부터 열반을 얻을 때까지 번영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소중한 원칙이 있다. '전생에 보시를 잘한 사람이 금생에 부유하며 금생에도 보시를 실천하면 내생도 부유해질 것이다.' 부유함은 단지 일시적인 소유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유함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부유함을 여러분의 복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써야 한다.
여러분은 재산을 진실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부유한 사람은 강과 같다
<로까니띠>lokanīti라는 지혜를 밝힌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덕망이 있고 부유한 사람을 강이나 나무, 빗물에 비유할 수가 있다. 강은 비록 많은 물을 가두고 있지만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강은 오직 다른 것들에게 유익한 것을 제공할 뿐이다. 사람들은 강에 와서 무엇을 씻고 목욕하고 마신다. 마찬가지로 나무도 자기가 맺은 열매를 먹지 않는다. 열매는 다른 존재들을 위한 것이다. 비는 호수나 우물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불모지나 사막에도 내린다.
그와 비슷하게 의로운 부자들은 자기 자신이 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궁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재산을 모은다. 그 사람들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한다. 보시를 할 때는 호수와 황량한 평야에 내리는 비처럼 그들은 물이 가득 차 있는 우물과 같은(권위 있는) 사야도Sayadaw뿐만 아니라 불모지 같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데 도움을 준다.
살펴본 바와 같이 보시dāna는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더불어 기뻐함muditā이라는 고귀한 정신상태를 강화한다. 보시는 쾌활하고 빛나는 얼굴을 갖게 한다. 보시자는 현생에 유익한kusala 마음으로 복을 누리며 미래 생에도 번영을 누릴 것이다. 여러분 모두 생명 있는 존재들을 열반nibbāna으로 더 빨리 인도하는 보시의 장점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계, 팔계, 혹은 아지왓타마까 계ājīvatthamaka sīla(바른 생계samma ajiva가 포함된 팔계)를 지키며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열반을 얻을 목적으로 세 가지 고귀한 상태, 즉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더불어 기뻐함muditā을 계발하고 열반을 성취하고자 하는 확고한 마음으로(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보시를 함으로써 틀림없이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입니다'라고 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은 여러분에게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그런 다음 모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보시를 하는데 어떻게 윤회 속에 오래 붙들려 있겠는가? 윤회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다. 보시는 최단 시간에 열반을 실현하도록 할 것이다.
보시를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해로운 것을 믿고 보시하기를 그만둔다면 친근한 관계도 끝나고 자애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곤궁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죽게 내버려 둬. 무슨 상관이야?' 보시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미개한 사람이다. 물론 정신적으로 무례하면 실제 행동도 잔인해진다.
보살bodhisatta은 부와 권력, 왕위의 영광을 포기하고 수많은 보시자들의 도움과 원조로 깨달음을 얻고 여래Tathāgata가 되었다. 고따마Gotama 부처님은 고귀한 담마dhamma를 말씀하고 불법sāsana을 선양하기 위해 승가saṃgha를 세웠다. 여기에는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위사카Visākhā, 빔비사라Bimbisara 왕 같은 부유한 신도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한 관대한 보시자가 없었다면 부처님도 없었을 것이다. 고따마Gotama 부처님만이 아니라 셀 수 없는 과거의 부처님들도 보시가 없는 세상에서는 일체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비구는 다음과 같은 열망을 가진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보시라는 자비로운 행위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리라.'
여러분이 보시를 하는 관대한 행위에 의해서 받는 이익은 나열하기가 불가능하다. 보시가 없었다면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시는 부처님도 없었을 것이다. 천상이라는 최상의 세계도 보시로 인한 것임을 명심하라.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은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이 궁핍한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보시에 의지하라.
1)
보시하는 것은 즐겁고 기쁜 일이다.
나와 남을 동시에 돕는 자리이타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보시는 편안하고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수행에 적합한 마음상태를 만든다.
보시를 통해 수명이 늘어나고, 외모가 아름다우며, 풍요롭고, 힘이 세고, 지혜가 뛰어나게 된다. 이것은 세속적인 이익들이다.
최상의 보시는 열의를 키우고, 나에 대한 집착을 약화시키며,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것은 출세간의 이익으로 이어진다.
부유한 사람들은 반드시 전생에 보시를 많이 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전생에 보시에 대한 믿음이 없어 현생에 가난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지금부터라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
2)
관대한 자는 더 많은 보시를 한다.
더 많은 보시는 부유함으로 연결되어 다음과 같은 이익이 있다.
① 보시는 관대함과 연결된다.
② 관대함은 부유함과 연결되어 미래 생에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 된다.
③ 부자는 여유가 있으므로 5계, 생계 8계, 포살계를 지킬 수 있다. 이로써 악행은 멈추고 선행을 짓는다.
④ 부자는 더 좋은 교육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
⑤ 부자는 자존감이 높아 무례함, 모욕에 더 쉽게 인내하고 그 순간을 무시할 수 있다. 이렇게 보시는 인욕khanti 바라밀을 돕는다.
⑥ 부자는 존경받기 때문에 늘 사람들에게 자애와 연민karuṇā을 보낸다. 이렇게 보시는 자애mettā 바라밀을 돕는다.
⑦ 부자는 더 쉽게 다른 부자들에게 함께 기뻐함muditā을 계발한다. 이로써 보시자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평온하며, 길상을 띤다.
⑧ 보시를 받는 사람은 보시자에 대해 자애로 화답하고, 보시자의 행복을 빌어주게 된다.
⑨ 여기에 더해 보시자가 더 부유할수록 보시를 받는 사람들은 보시자에 대해 함께 기뻐함을 계발하기 쉽다.
⑩ 보시는 생명 있는 존재들을 열반nibbāna으로 더 빨리 인도한다.
따라서 부자들은 자기 재산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재산을 상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해야 한다.
이를 통해 다음 생부터 열반을 얻는 생까지 번영할 것이다.
전생에 보시를 잘한 사람이 금생에 부유하고, 금생에 보시를 실천하면 내생도 부유해질 것이다.
부유함은 일시적인 소유에 불과하니, 자신의 부유함을 자기 소유로 착각하지 않고 나와 남의 복지를 위해 쓴다.
의로운 부자들은 자기 자신이 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재산을 모은다.
의로운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공덕이 가득한 비구 승가뿐만 아니라 공덕이 모자란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한다.
이렇게 보시를 함으로써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이다.
보시는 윤회 속에 오래 붙들려 있지 않고 최단 시간에 열반을 성취하도록 할 것이다.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은 보시를 하지 않아 삶이 궁핍한 것이다.
인간 세상의 부유함, 천상이라는 최상의 세계 역시 보시로 인한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보시에 의지해야 한다.
3)
다만 바로 지금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재 열심히 수행하는 출가 수행자, 단기 수행자들은 보시를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현재의 시간과 노력을 보시에 낭비하지 않고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열반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명상에 전념하는 사람에게는 보시가 불필요하다.
인용문 출처: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법보시자 위데히(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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