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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자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큰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주님 때문에 불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큰 능력을 행하는 자들도 불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위에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는 큰 능력을 행하기 전에 불법을 행하지 않는 자가 되기를 더 갈망해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불법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만으로는 불법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자만이 불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불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요셉이 생각났습니다. 성경은 노예로 팔려가는 요셉을 가리켜 그가 '형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노예로 팔려와 시장에서 짐승처럼 홍정거리가 되었다가 한 애굽 사람의 집에 끌려온 요셉을 형통한 사람이라고 하다니, 정말 이해가 안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39:2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가지 조건으로 요셉을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처지나 형편을 보면 도저히 자신이 형통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실제로는 형통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편과 처지에 대하여 원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님만 24시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기만 힘써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에 인생 전체를 걸어보십시오.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삶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받는 기회일 뿐입니다. 이것이 준비되면 그다음은 주님이 쓰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교회 성장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과 동력은 주님이 교회와 함께하시고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을 온 교인들이 아는 것입니다. 교회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교회 성장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가라" 하시면 오직 "예"라고 대답할 뿐입니다. "개척하라!" 하시면 오직 "예" 할 뿐입니다. “교회를 분립하라!" 하시면 오직 "예"라고 할 뿐입니다. 지금 제게는 신학생 때 알지 못했던 사역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주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데 더 유익하다면 오직 "예"라고 할 뿐입니다.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은퇴할 때 허탈할 것입니다. 추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다른 교회나 목회자를 경쟁의 대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교만과 좌절감을 왔다 갔다 하며 평생 헤맬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만 매이면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주 예수님을 분명히 알고 주 예수님과 친밀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떠나가더라도 주님의 인도함을 받았다면 기쁜 일입니다. 건강한 목회를 하는지 점검하는 기준은 “교인이 느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 예수님'입니다.
*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 필립스 아카데미 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에 나가 큰 영향력을 끼치는데, 그 학교의 교훈이 "논 씨비"(Non Sibi, not for self의 라틴어, 나를 위하지 않는'이라는 뜻)라고 합니다.
Non sibi,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ierich Bonhoeffer)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서로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위해 사는 존재들입니다.
셋째, 어느 날 아침 하나님은 앤드류 머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앤드류 머리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님은 저에게 있어서 항상 첫째이십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같지 않다고 느끼고 이로 인해 하루 종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 대답했는가?”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시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님은 저에게 있어서 모든 것입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의 마음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첫째가 되신다는 말에 기뻐하지 않으신 걸까요? 처음에는 작은 문제로 여겼던 이 생각이 제게 점점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앤드류 머리의 이야기가 옳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라는 말은 둘째, 셋째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 사랑은 안 해도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같은 주제이지만 삶의 주도권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첫째이고 이웃은 둘째이고 나는 셋째라는 생각은 한 가지 문제만 빼면 매우 훌륭한 생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란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이론적인 생각입니다. 실제 삶에 부딪히면 이렇게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이웃을 그다음에 사랑하고 그러고 나서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는 《제자도>에서 생명을 얻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자아'에 대하여 죽는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구'에 대해 죽은 것이고, 박해와 순교를 경험하며 '안전'에 대하여 죽는 것이고, 우리의 궁극적인 영생을 위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11
그러므로 우리는 살고자 하면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안내하는 생명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영광을 모르면 우리는 큰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막연하게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에서 실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드릴 때는 얼마나 황홀할까요?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가 다 밝혀지는 하나님나라에서는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요? 일출이나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흥분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을 볼 때는 어떨까요? 지금 교인들끼리 나누는 교제에도 감동과 감사가 있다면, 모든 족속과 언어로부터 온 큰 무리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요?
*우리 마음은 자유가 있는 곳입니다. 왕도 그 영향력을 행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질지는 전적으로 자유가 아닙니까?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조종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반항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마음은 주님이 임하시는 곳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버려둡니다. 주님을 만나는 곳인데, 왜 아무것이나 마음에 쌓아두는 것입니까? 마음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에 아무것이나 받아들이거나 오히려 쓰레기 같은 것을 찾아다닙니다.
우리 마음을 불평으로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1
불의 행하는 자를 시기하는 일로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악한자를 불평하거나 시기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악한 자를 속히 처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 37:2
세상이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풀과 같은 존재입니다. 돈 많은 사람,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진정한 영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시기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선(善)을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시 37:3
선은 옳은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옳은 생각이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면 무서운 것이 됩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만 따지다가 잔인하게 변해버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사랑도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죄가 됩니다. 우리는 자기편이라는 것 때문에 쉽게 정의로움을 외면합니다. 선은 100퍼센트 옳은 것이며 100퍼센트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정의를 따르면 사랑을 버리고 사랑을 따르면 정의를 버립니다. 하나님의 선(善)이 드러난 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는 100퍼센트 정의, 100퍼센트 사랑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실을 기대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성실을 의지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합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때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주시리로다” 시 37:4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능력, 은사를 기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좋아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무관심합니다. 세상은 돈이 전부인 줄 압니다. 당신은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찾았습니까? 돈보다 하나님이 더 기쁘다면 그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 37:5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십니다. 세상을 덮은 캄캄한 밤이 물러가고 밝은 아침이 올 때 아침이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까? 조용히 옵니다. 아무도 모르게 순간에 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임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립니다.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 37:6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 우리 피부, 우리 키, 우리 재산, 우리 지식, 우리 지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우리 마음입니다.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마음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뿐 아니라 마음에 있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한 것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것도 우리 자아가 너무 강한 증거입니다. 낙심도 좌절도 우리가 너무 강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내가 아직도 약한 것은 내가 아직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한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못할 정도로 강할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유독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너무나 강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 마음대로 못하시는 것이 우리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강한지 아닌지는 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라'. '성경 읽으라', '용서하라' '전도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말씀대로 했습니까? 믿음은 좋아 보이는데 영적으로는 완고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후에는 회개하고 순종하기를 기다리실 뿐 입니다. 아담과 하와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보다 죄를 더 좋아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이처럼 강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스스로 속고 삽니다. 영적인 완고함입니다. 강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우리는 "안 돼요", "못해요", "힘들어요", "죽겠어요", "왜 나만 하라고 하세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 자아가 죽은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를 통하여 말씀하고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사도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이루고 싶었던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 믿는 남편을 볼 때마다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까?"
남편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 믿는 아내를 볼 때마다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까?"
자녀들은 예수님 믿는 부모에게서 예수님을 보는 것 같을까요? 부모들은 예수님 믿는 자녀에게서 예수님을 보는 것 같을까요? 주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신데, 어떻게 아내나 남편이 모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녀와 부모가 모를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 15:18
어떻게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그렇게 역사하셨을까요? 그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주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셨다고 믿기만 한다고 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면 예수님은 포로 신세가 될 뿐 입니다. 내가 하는 대로 내가 가는 대로 주님은 꼼짝없이 따라오셔야만 하는 동행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4절에 우리가 먼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분명한 결단입니다.
사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마음을 열어보았습니까? 또 열고 싶다고 되는 일이었습니까?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 마음을 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마음에 임하시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입니다.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4절에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단순히 함께하는 것 이상의 깊은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고백한 다음에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님이 진정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왕이셔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 안에 임하셔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을 믿어도 왜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아직 마음을 열고 주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른이 된 후 왕이 없었습니다. 왕을 두는 것을 싫어합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왕이라 여기며 살아보셨습니까?
주 예수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왕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말만 그렇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은 가장 큰 복은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상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행복하게 동행하시는 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을 믿고도 왕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허랑방탕한 죄보다 더 큽니다. 허랑방탕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줄은 압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역사해주지 않으신다고 하나님만 원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주님으로 일하지 못하시게 하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왕이 되실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시려면 우리에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하는 분명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하시기 전에 "내 안에 거하라"(요 15:4) 하고 먼저 요구하셨던 것이고,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나는 죽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받은 자라는 증거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간단명료하게 답을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이것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조차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크고 부담스러우신 분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늘 죄책감이 눌려 지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랑의 교제를 원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용납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잠잠히 왕이신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순간 마음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생각만 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유는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은 수도 없이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왕의 체통이 깎일정도로 덩실덩실 춤도 추었습니다.
*시골집에서 불이 나면 외양간의 소를 끌어내는 것이 큰일이랍니다. 소가 절대로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센 장사가 끌어내도 말입니다. 그러나 꿈쩍도 않는 소를 밖으로 신속하게 끌어내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소의 여물통을 엎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가 이제는 이곳에 소망이 없구나, 이곳에는 더 이상 내가 먹을 것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는지 제 발로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려고 하실 때 고난을 사용하시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외양간의 소 같아서 살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순순히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하고 고백하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찬송하지만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생각과 말로는 모두 다 버리고 내려놓은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틀랜타 한인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서 정말 행복한지 도전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진정 행복하다고 여기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여물통을 엎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영적으로 무너진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물통을 엎지 않으면 불에 타 죽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여물통을 엎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 하는 것입니다.
여물통이 엎어지지 않았는데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물통이 엎어지지 않았는데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볼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물통을 그대로 놔둔 채 “예수님은 나의 왕!"이라고 외칠 사람이 있을까요? 여물통이 엎어졌으니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여물통을 내어놓으라" 하십니다.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세요" 하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는 여물통을 건드리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여물통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여물통이 엎어져도 행복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너무나 무료하기 때문에 감방을 장식하는 일에라도 마음을 쏟기 원합니다. 그러나 찰스 듀튼은 자신의 감방을 장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감방은 자신이 살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책을 읽었고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는 감방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꾸민 것입니다.
우리가 꼭 교도소에 가야만 감옥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감방에 갇혀 있지는 않지만 감방이나 장식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의 가정이나 직장이 감방일 수도 있습니다. 미움과 불평, 분노와 좌절에 빠져 사는 것, 깨어진 관계나 과거의 학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 스스로 자초한 상처, 술, 담배, 음란 동영상, 도박, 인터넷, 스포츠 중독 등 우리 마음을 가두어놓는 것은 다 감옥입니다.
그러나 꼭 고통스런 삶을 사는 사람만 영혼의 감방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사는 것 같아도 감방이나 꾸미고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감방이나 장식하고 사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세상이나 원망하고 낙심하고 분노하며 살다가 죽으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것만 찾아다니며 실컷 먹다 죽으려고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 영혼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감옥에 갇혀 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주님이 허락하신 복된 하루를 감방이나 장식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 예수님이 왕이신 놀라운 나라의 삶을 살아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중동에 선교사로 나간 젊은이교회 자매가 힘든 시절을 보내는 중에 쓴 메일입니다.
“깊은 기도 가운데 울부짖는데, 주님이 제게 물으신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도 네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와도 나를 사랑하겠느냐? 어느 누구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그렇게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잘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그려졌습니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힘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신 그분 말입니다.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의 영역 속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바라는 이 세대로 인하여 슬퍼하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동안 힘들다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제가 원하는 주의 모습으로 저를 도와주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주님의 형상이 아니라 그분 그대로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제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선교사님은 주님을 바라보았기에 그 어려움 중에도 기다릴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고 난 다음이나 주님이 재림하신 후가 아니라, 지금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기쁜 일만 있고, 주위에 좋은 사람들만 있고 따뜻하고 풍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이 왕이 되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과 공동체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분이 있습니다. "왜 나는 안만나주시는 건가요?" 하며 눈물 흘리며 기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울며불며 기도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우리가 아무 때나 우는 사람이 아니며, 별일도 없는데 간절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는데 마음이 간절해질 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역사하지 않았는데 눈물이 날 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지 않았는데 교회에 가서 앉아 있을 리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당신의 영혼을 만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위험한 죄는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예배당을 나가면서 주님과 이런 대화를 합니다.
"예수님, 왜 이러세요? 왜 자꾸 따라오시려고 하세요?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여기 잠잠히 계세요. 세상으로 따라오시는 거 아니에요"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죄를 안 짓고 살려는 것은 더 깊은 좌절에 빠져드는 일입니다.
워싱턴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이 설교 중에 미국에 있는 어느 식당 벽면에 그림과 함께 씌어진 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구덩이에 빠졌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더 파고들어가기를 멈추는 것이다 (If you find yourself in a hole, the first thing to do is stop digging).
'마음'이라는 구덩이에 빠지면 우리는 더 깊이 파고들어가 앙심'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외로움'이라는 구덩이에 빠지면 더 깊이 파고들어가 고독과 '소외'를 자초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면 자신을 '저주하고 심판하기까지 구멍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가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주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몸이 성전이니 우리가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주님과 더 친밀해졌습니까? 노력해서 죄를 이겼습니까? 죄 죽이기를 하면서 죄가 죽어졌습니까? 자신은 압니다. 노력해서 변화되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고백했을까요? '내가 죽었다는 것은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까?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성품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다 경험해서 알지만 성품이 변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의의 열매나 구원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력으로 된다면 성령의 열매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 5편에서 다윗은 주님만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사람의 면면으로는 부족함이 많지만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가 주님만 바라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는 것이 노력해서 되는 것입니까? 계속 생명이 유지되면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장을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면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5:4
*저는 부흥되는 교회를 목회하다가 건강하게 은퇴하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암 수술을 겪으면서 언제든 그만둘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니 교회 부흥, 목회 성공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게 고민이 되고 스트레스를 주던 많은 것들이 너무나 분명히 정리되었습니다. 한 길만 뚜렷이 보였습니다. 오직 한 길이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하고 사랑만 하다가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명한 것을! 다른 것들은 다 가지가 쳐졌습니다. 우리가 복된 인생을 살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할 때, 아내로부터 가장 많이 지적당하는 것이 설교를 좀 더 짧게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늘 후회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짧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실제로 교인들은 설교를 짧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긴 설교는 설교 준비를 한 시간이 부족한 설교인 것입니다.
…가지치기가 잘되십니까?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입니다!"
이런 고백들은 가지치기가 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솔직히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용서입니다. 생일을 맞아 지난 한 해 제가 잘못한 것, 마음 아프게 해드린 것, 실수한 것들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용서받고 싶은 분은 주님이십니다.
누가 썼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유난히 생각나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셨다>라는 글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곁에 둘러앉히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통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의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이 말씀을 글로 적어놓고 싶습니다.”/그리고 안드레아가 말했다./"이 말씀을 외워야 하지 않을까요?"/그러자 야고보가 말했다./"그걸 갖고 우리끼리 시험 쳐보겠습니다."/그리고 빌립보가 말했다./"이 말씀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참고 서적이 있습니까?"/그리고 바돌로매가 말했다./"이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할까요?"/그러자 요한이 말했다./“다른 제자들한테는 이런 걸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그러자 마태오가 말했다./"이제 하실 말씀이 다 끝나셨나요?"/그리고 유다가 말했다./“이 말씀이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는 예수에게 앞으로 하실 수업 계획서를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가르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셨다.
제가 꼭 이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지나고 보니 주님을 우시게 해드린 일만 많이 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았을 때 교인들에게만 설교한다. 가르친다. 제자훈련시킨다 했지, 정작 제 자신에게는 말씀을 적용하고 살지 못한 것 같아 너무 나 죄송하였습니다. 자격 없는 자임에도 또 한 해를 허락해주셨으니 말쟁이가 아니라 한 가지라도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황대연 목사님의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라는 글을 읽고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너 없으니까 일이 안 된다”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에 기분 좋았던 말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없으면 공동체가 무너질 정도로 공동체를 나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은 나의 이기적 만족일 수 있습니다.
“너만 있으면 된다.”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아주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했던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독재를 하고 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야! 너 천재구나!"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풍부한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코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잘하네!”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말 잘 듣고 착한 천사와 같다는 생각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새 생각을 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같이 되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야! 너 천재구나!"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풍부한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코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잘하네!"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말 잘 듣고 착한 천사와 같다는 생각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새 생각을 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진정한 리더로 나아가기 위해서 저는 칭찬을 다시 한 번 새겨 듣습니다. 우리는 참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주장도 많고, 너도나도 다 주님으로부터 온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악한 영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만큼 악한 영의 역사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혼란케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 속고 사는 것입니다. 악한 영에 휘둘려 살면서도 자신은 성령으로 말하고 행한다고 여기는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평소에 성령님의 역사를 잘 분별하여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원망, 불평, 미움, 두려움, 염려가 있으면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기도가 어떻게 시험을 이기는 방법일까요?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과 계속 접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실제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시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은 정확히 "깨어 주님과 함께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26:36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이 주님 곁에 앉아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하는 행위 자체에 만족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시험이 닥쳤을 때는 누구나 허둥지둥하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24시간 주님과 동행하게 된 사람에게 시험이 오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하기 전에 다 아시는 하나님(마 6:8)께서 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의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라고 권할 때, 예수님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기도를 계속하고(골4:2),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하십니다. 이것은 24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라는 의미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은 선물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도에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허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선물을 목적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바라보면 그렇게 귀한 부모님에게 늘 불만족이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허탈해졌다면, 우리가 응답받으려고 기도했지 주님과 하나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따지고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 위험해 보이는 약속은 실제로 어떤 조건을 충족할 경우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14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는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여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3:22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 안에 거하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어 예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예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365일 24시간 사람만 상대하고 세상만 바라보며 살면 우리의 영은 숨이 막혀 못 삽니다. 답답해서 못 삽니다. 사람과 세상만 보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천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24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영이 소생하게 되고 계속 깨끗합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의 복을 주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김용의선교사님에게 어떤 교인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도 할 만큼 했어요”
그래서 선교사님이 되물었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도 너에게 할 만큼 했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행복한 결혼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면 결혼생활은 충분히 행복해집니다. 진작 이것을 알았다면 많은 부부가 좋은 사람을 찾기보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는 일에 더 힘썼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언제 응답하시고 언제 복을 주실지 기다리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이 왕이신 삶을 사는 데 더 힘썼으면 훨씬 복된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처음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존귀한 성도들은 희생의 증거를 가지고 주님을 맞이하러 나올 텐데, 아무것도 잃거나 포기한 것이 없으면 어찌 그 영광된 무리들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난보다 더 크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아무리 고난이 축복임을 알아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축복하며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광야와 같은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시련의 기간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가 넉넉해지고 편안해질 때를 걱정하셨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신 812-14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만드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한두 번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동행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실패도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는 이기심, 음란, 탐심, 명예욕, 당을 짓고 분열하는 것 복음을 변질시킨 죄 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깨달아지는 것은 우리가 회개할 죄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많은 죄는 한 가지 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6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한 죄는 모든 죄들보다 더 크고 악한 죄입니다.
*사람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삽니다. 그래서 성공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좌절하거나 겉으로만 성공했을 뿐, 실제로는 실패의 삶을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성공이라는 신기루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 저는 이왕 목사가 되었으니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때의 성공은 큰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목회하면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교회는 성장하는데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점점 더 불만이 커지고 짜증이 많아지고 낙심도 커졌습니다.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더 성장하기를 원했고, 교회 건물이 더 커지기를 원했고, 교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것었습니다. 결국 그런 나를 보면서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잘하는 것인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교회의 성장보다 24시간 주 예수님 바라보기를 힘썼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은 제 눈을 열어 주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목회 성공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자유해졌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성공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성공과 실패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주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의 본질이 교만이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갈망을 품었을 때, 인간의 영혼과 피와 생명 속으로 교만이라는 독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이 저주받은 지독한 교만에서 세상의 모든 비참한 상황, 인류의 불행이 비롯되었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과 유혈 사태, 온갖 고통, 욕심과 질투, 낙심과 적의를 품은 삶, 그리고 매일매일의 불행은 그 기원이 교만에 있습니다.
교만의 근원이 사탄에게 있음을 알아야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심각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즉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어린양께로 향할 것입니다. 사탄과 그의 교만을 몰아내고자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천국의 겸손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든 성품의 근원과 본질은 단 한가지 겸손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신 것, 이 땅에 사신 그분의 삶, 종의 형태를 취하신 것, 그분의 속죄하심 등 그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으로 육화(肉化)된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예수님의 성품이자 우리가 그분께 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너무나 연약하고 메마르고 열매가 없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겸손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발견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겸손을 가져오셨지만, 정작 겸손을 구하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기쁨을 느끼는 이 또한 거의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넓은 품으로 세상을 감싸 안기를 바란다면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자아의 최후이자 자아의 죽음에 근거한 겸손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으로 비롯되는 영광을 구하고자 인간의 모든 명예를 포기하는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앤드류 머리
*어느 청년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데 어떻게 해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까?" 하고 물어왔습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인격적인 교제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며 자신이 주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지에 대하여 확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란 아브라함이나 모세 등과 같은 성경 인물들처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하고 대화하고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거나 예수님이 나의 구주요 주님이심을 아는 것뿐 아니라, 주님이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며 주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주님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때부터 신앙생활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속죄함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이시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것에 대하여도 약속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이 임마누엘이심이 곧 인격적인 교제에 대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교리로만 알면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제이고 현실이고 누려야 할 축복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자신에게서 떠나신 것같이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다면(고전 12:3),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롬 8:15,16),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진다면(고전 2:12), 성령의 근심을 느낀다면(엡 4:30),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있다면 (빌 2:13),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임하셨다면 이보다 더한 인격적인 교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배 때나 설교를 들을 때, 기도 시간이나 큐티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경건서적을 읽거나 그저 길을 가다가 실패나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분명히 주님이 자신에게만 주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느낀다면 그는 이미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진 것입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미국의 많은 대형 교회들과 유명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크고 편리한 교회 건물, 세련되고 감동적인 설교, 수준있는 음악회를 감상하는 것 같은 찬양, 희생이나 고난을 요구하지 않으며 양심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자선 행위만으로 충분한, 그래서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외적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이런 교화를 일으킨 목회자들이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아 너도 나도 목회를 배우려 몰려드는 현상을 캘리포니아 복음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곤혹스럽게도 저 또한 한동안 이것이 진정한 목회 성공이라 여기고 이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을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로 인해 지금 한국 교회는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교회 성장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진정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고난의 복음, 순교의 신앙으로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 생명의 복음이며, 그럴 때 한국 교회가 정결한 교회,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로 설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유럽 교회가 몰락하는 것은 바로 고난의 복음을 거부하고 문화적인 기독교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20세기 유럽 교회의 세속화를 연구한 종교사회학회 회장 데이비드 마틴은 교회의 세속화에 두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일차적 세속화는 교회가 윤리적 수준을 낮춤으로써 교인들이 부담 없이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인데, 이때 교인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차적 세속화가 이어지면서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면 교인들이 신앙의 의미를 상실하고 급격히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 역시 유럽 교회가 박해받지 않는 것을 탄식했습니다. 박해할 만한 것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으면 고난당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께서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힘들어 못 살겠다" 하는 말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를 못 살게 하는 것이 힘든 일일까요? 힘든 일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잘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자식도 없고 배우자도 없고 직장도 없고 교회 일도 없으면 살 만할까요? 아닙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2.13
이것이 우리가 이수해야 할 과목들입니다. 어느 과목까지 이수하셨습니까? 높이 떠오른 비행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름이 깔려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구름이 얼마나 부드러워 보이는지, 뛰어내리면 솜이불처럼 사뿐히 받아줄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사람이 뛰어내려도 비행기가 내려앉아도 구름은 받아주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학력, 돈, 명예, 권력 또는 어떤 사람이 나를 받아줄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한낱 구름과 같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버나드 쇼가 말하길 "인간의 실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패했을 때 오는 실망이고 또 하나는 성공했을 때 오는 실망인데 참으로 무서운 것은 성공했을 때 찾아오는 실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정말 붙잡아야 하고 우리 인생을 투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당신은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까? 지식으로 아는 예수님, 지식으로 아는 복음으로는 결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나면 누구나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결과와 열매를 혼돈합니다. 흔히 '주님의 뜻대로 했다면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좋은 결과가 없다면 주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성장 시켜서 자신이 올바른 주(主)의 종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저는 재능 있고 사역 현장에 부흥을 일으키는 젊은 목회자가 위험스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능도 없고 결과가 아직 신통치 않아도 중심이 신실한 목회자가 더 눈에 띕니다. 저는 여러 부교역자들에게 사역을 맡겨보지만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살펴보게 됩니다. 과정이 좋았다면 결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결과는 기다리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정에 문제가 있는데 결과가 좋으면 오히려 걱정이 됩니다. 그것은 어쩌다가 요행으로 잘되었거나 그 사역자가 아닌 다른 요인으로 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역자가 착각하여 다음에도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바른 과정에 소홀히 하게 된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성장시키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성장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화려하고 크고 놀라운 사역 역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성공적인 결과가 아니라 '불법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충성과 온유와 절제였습니다.
바르게 했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르게 하지 않았는데도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미처 영적 눈이 뜨이지 않아 활짝 열린 축복의 문 앞에서 머뭇거렸던 적이 많았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 목사 안수 받을 때, 군목훈련을 받다가 부상당한 후 오른쪽 다리를 포기할 때, 대학원 학위를 포기할 때, 선한목자교회로 부임해 올 때 그때가 한결같이 나는 죽고 예수님께 모든 삶을 맡겨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세를 뒤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야 할 여호수아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여겨 두려워 떨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그 여호수아의 권위가 모세와 같아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 졌을까요? 바로 요단강을 건넌 일 때문이었습니다.
강둑까지 넘쳐흐르는 요단강 앞에서 여호수아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요단강을 건너게 할 아무런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막막한 상황이 오히려 여호수아가 모세와 같은 지도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하나님만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24시간 주님만 바라본다면 난감하고 막막한 상황이 오히려 복이 될 것입니다.
모세 앞에 펼쳐진 홍해는 모세에게 좌절을 가져다주는 장애물이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임을 증명하는 기회였습니다. 모세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을 만난것 역시 다윗에게는 복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다윗은 사울 왕보다 더 큰 지도자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리므로 우리를 집어삼킬 만큼 두렵게 하는 어려움이 사실은 변장하고 오는 복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지옥에 갈 죄인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라는 말씀은 제게 교리였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세상에 정말 나쁜 사람도 많았고 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저는 선한 사람 편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 실상을 보게 하실 때 저는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장 먼저 제 눈을 열어주신 것은 제안에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저는 먼저 아버지를 찾았지 주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되었는데도 저는 주님을 믿는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죄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깨닫는 순간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부림치며 통곡했습니다.
그다음에 깨닫게 하신 것이 혼자 있을 때 지은 죄입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완벽하게 감추고 꾸미며 살았지만 혼자 있을 때 은밀히 지은 죄들은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은밀히 죄지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주님이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니 밤을 새며 그 일들을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다음에 열어주신 것이 '마음으로 지은 죄'였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속이고 살았습니다. 착하게 생긴 것과 착한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저는 단지 착하게 생겼을 뿐이지 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속이고 살았습니다. 온갖 더럽고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과 감정이 제 안에 있습니다. 음욕을 품은 것은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며, 마음으로 미워한 것은 살인한 것과 같은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런 제가 너무 가증하게 여겨져서 목사직을 그만두려고 마음먹을 정도였습니다. 슬쩍슬쩍 거짓말한 것이 큰 죄인 줄 몰랐다가 마귀가 거짓의 아비임을 알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믿는다면서 사랑이 없으면 죽은 믿음임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은 오직 두 가지,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도무지 그렇게 살았다고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몰랐기에 수도 없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것이 교만의 죄였습니다. 파렴치한 윤리적인 죄 죄라고 여겼지 교만이 가장 큰 죄인 줄을 몰랐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정리한 큰 죄의 목록 중에 가장 먼저 손꼽히는 죄가 교만입니다. 마귀의 속성이 교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자한 교만 때문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임에도 나는 괜찮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세상에 나쁜 사람이 참 많다고 뻔뻔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다닌 것이 바리새인의 죄임을 몰랐습니다.
*목회자 워크숍에서 부교역자들에게 전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졌습니다. 오직 하나만 목표로 살며 사역하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설교 잘하려고, 목회 잘하려고, 사역자로서 능력을 보여주려고 몸부림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평생을 걸고 붙잡을 목표가 아닙니다. 나중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가 아닌 것이 드러나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자신이 가지임이 분명해지는 것, 그것만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목표입니다. 주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님을 더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가 되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결론이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결코 갈망하지 않으며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결단도 필요하고 함께 주님을 바라보는 공동체도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워낙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 결국 남는 한 가지가 무엇인가?"
주님과 하나 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를 붙잡으니 곁가지가 보이고 가지치기가 됩니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고 어떤 말이 있더라도 붙잡아야 할 것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한눈팔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답답합니다. 음란 동영상이나 도박, 주식, 사치와 낭비벽이 있는 사람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마치 공부에 마음을 잡지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처럼 안타깝습니다. 마음만 바꾸면 될것 같은데,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꼭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만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따분하고 재미없고 희생과 고난의 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복음을 결론으로 삼는 결단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쁜 세계가 있습니다. 주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상담할 때 있는 그대로 말씀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는 합니다.
그러면 많은 분들이 두려워합니다!
“목사님, 이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큰일 납니다.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기뻐하기는커녕 진리를 직면하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실제로 진리를 밝히면 어려움을 겪게 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니 비난과 벌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리를 드러내지 않을 때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길게 보면 사실대로 말해서 그 결과가 나빠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교인들 사이에 거짓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나쁜 의도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거짓말한 것이 드러나면 스스로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사업 실패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도 ‘부정직’입니다. 정말 진리를 기뻐하십니까? 진리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형록 목사님이 오바마 행정부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받을 때, FBI로부터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의회에서 청문회를 하는 날, 변호사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질문에 철저히 정직하게 대답하십시오. 그것이 훨씬 낫습니다.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드러나게 되면 당신도 임명권자도 결정적인 상처를 받게 될 테니 말입니다.“
*제 비밀 중 하나는 제 마음 안에 분노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 때문에 마음의 분노를 억누르고 살았습니다. 저와 가까운 분들은 이미 많이 알지만, 제게 분노가 많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을 저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제게 사랑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전에는 분노를 억누르고 살았지만 지금은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성일기를 쓰면서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음이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부목사님들과 영성일기를 나눈다는 것이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마음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이미 제 마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영성일기를 통하여 주님께 제 내면의 진리를 드러내고, 부목사님과 장로님들께도 끊임없이 제 마음을 드러내면서, 제 마음이 다스려지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실상을 공개하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커진 것입니다.
*목회자 워크숍에서 한 사역자가 질문했습니다.
“목사님의 강조점은 영성일기를 쓰고 21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입니까?"
작년부터 계속해서 주신 주님의 마음이 있었기에 저는 이 질문에 금방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다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금은 우리에게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시키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는 귀를 열어주시려고 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믿음을 길러주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으며, 주님의 뜻을 깨달아도 순종할 믿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고 찬송은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 뜻대로 살 믿음이 생길까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생깁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주님의 계획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필요한 때만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자만이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온전한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자신은 가지라는 사실이 분명히 믿어지고,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었음이 믿어지는 사람은 주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한 순종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멸망할 죄인이라는 사실은 성령님만이 깨닫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회개는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양심이 깨어났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경건하여 성인(聖人)으로 추대받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사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것은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7가지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을 큰 죄로 꼽습니다. 우리는 흔히 간음, 도적질, 폭력 같은 윤리적인 죄를 가증히 여깁니다. 그러나 정말 큰 죄는 교만, 곧 자기 의입니다. 이 죄는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이유는 죄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보다 바리새인을 더 큰 죄인이라고 보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도 모범적으로 생활하지만 바리새인처럼 마음이 완악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 판단하고 반대로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루는 어떤 신사가 무디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내가 왜 죄인입니까?"
무디는 성경을 펼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하는 구절을 찾아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까?”
그 신사는 무디의 손을 잡고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큰 죄인입니다.“
*성령으로 양심이 깨어나면 누구나 이와 같아집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다 용서합니다. 남이 뭐라 지적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인데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임종의 자리에서 비로소 양심이 깨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양심이 깨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죽은 다음에라도 양심이 반드시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부터 31절까지를 보면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가서야 그의 양심이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즉시 주님께 나아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뵙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정말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입니까?
*"마음을 비우라"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마음을 비우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음은 결코 비워지지 않습니다. 무언가로 채워져야 이전 것이 나가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바뀌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마음이 바뀐 사람입니다. 바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다툼과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같은 생각,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이 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만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인이 50명 정도 되는 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설교했더니 교인들의 마음이 전도사에게 전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전도사님을 부르더니 교회에서 나가달라고 하였답니다. 전도사님은 그 말을 듣고 '담임목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니 참 불쌍하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당뇨 합병증으로 시각장애를 가지신 장로님 한 분이 전도사님을 찾아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전도사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 교회는 교인도 적고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평화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이 오신 후 그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무능한 담임목사 한 분도 섬기지 못하고 행복하게 하지 못하시는 분이 어떻게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좋은 목회자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전도사님은 똑똑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네요."
그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용서를 구한 다음 그 교회를 떠나 개척했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 유난히 주위 사람들에게 비판적이고 모든 일들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말이 거칠어졌다면 말을 그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신앙생활에 변화를 경험합니다.
첫째, 주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것은 정말 주목할 만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교리로만 믿는 사람에게는 이 거룩한 두려움이 거의 경험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친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떨기나무에 붙은 불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후,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도 이미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뵙고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후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으며, 그 핵심은 그가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어느 날 아침,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거룩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엄청난 양의 고기를 잡게 되는 순간, 그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고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가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도 이 거룩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교만해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