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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
2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 미륵동에서 출생
어린 이성순 미륵동 동네 신의주 정복기 보통학교 때부터 유난히도 일본 애들을 팼다 어린 나이에도 왜경의 감시를 받았다 |
1929년 |
불곰(친일파 긴상)과의 대결 승리 |
1932년 |
밀무역에 뛰어 듦
시라소니라는 이름 기차 - 밀수
배 - 거룻배 밀수 중국인 강도들과의 싸움
헌병대와의 싸움
명견 도비와의 싸움 |
1933년 |
정경봉(독종 꽈리 주둥이)과의 결투 승리 |
1934년 |
누님이 계신 상해를 다녀오다 - 술집 용심봉과의 싸움 승리
친구를 때린 진남포 깡패들과의 싸움 승리 백두산 훈련 호랑이와의 결투 |
1935년 |
도박장 습격 |
1936년 |
평양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찾아가 결투, 승리 평양의 이화룡 용강의 아오끼 |
1937년 |
신의주 청송회관 용심봉 장손과의 대결 신의주 도피생활 신의주 헌병대장
기차도주 때 일본 헌병 때려뉘다
7월7일 대동아 전쟁
군부반장 하야시(검도3단)와의 대결 - 결투의 의미
4개월후 신의주 일시귀국 어련공판장 중개인 보스와 시비, 항복 받아 냄 |
1938년 |
외환 관리법 사건(돈배) 8월 신마적과의 대결 승리 마약장사 야마모토 사건과 18기의 명인 북경의 마오와 대결 승리 |
1939년 |
상하이 까페에서 헌병대장과 대결 승리 새끼 손가락 사건 이상대와의 대결 승리 |
1940년 |
국제 도박장사건 상해 프랑스 조계지 미국인 탈영병과의 격투 |
1941년 |
북경 일번지 까페에서 일본여인 지혜꼬에 관한 사건 |
1942년 |
개봉 용정유원지에서 일본 특무 대원과의 결투 |
1943년 |
친구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 일본 꼬구라 형무소수감 중 일본 최고의 주먹 이즈마 누임 |
1945년 |
7월 해방 15일전 천지외교 공장에서 카네미야 패거리 40명과 대결 승리 8월 15일 해방 |
1946년 |
1월 남하 개성당도 2월 종로 우미관에서 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만남 명동파 행동대장 무억을 누름 3월 인천행 인천주먹들 정복사 - 지금도 "시라소니 떴다"라는 소문에 우는 아이들도 조용 11월 서북청년단이 조직 됨 |
1948년 |
봄 인천떠나 서울도착 서북 청년단 감찰부장이 되다 10월 동국대부근 일본인 아파트 |
1949년 |
이진옥과의 결혼 백범김구 당시 국군 장교이던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 |
1950년 |
6월 25일 전쟁(아내 임신4개월) 호림부대(비 정규부대)창설 9월 대원활약 15일 인천 상륙 작전 10월 묵호산간 대관령 적군 30명 기습섬멸 함흥까지 북진 11월 26일 중공군 대공세 |
1951년 |
1.4후퇴 봄 부산에서 10명패거리에 매맞는 이정재 구해줌 |
1952년 |
김일환과 만나 제주도로 장도영 만남 조봉암 선거 개입 땃벌 때 물리 침 아내와의 재회 |
1952년 |
8월 4일 오후 조봉암 김성주와 헤어짐 황병관 살해한 마사이찌 혼냄 3.1부대창설(현공수부대) 부부대장으로 활약 미군장교와의 대결 |
1953년 |
이정재와의 사건(린치) 종로5가 보령약국자리 반도병원-필동단칸 집-백병원 입원 |
1954년 |
초봄 백병원 나섬 북쪽으로 발길 옮김 팔당 산기슭에서 복수를 준비(칼쓰기, 사격연습, 무술연마) 몇번이나 저격권안에 들어온 이정재, 하나님이 살려 줌(HID 김일환, 내무부장관 한신) |
1955년 |
인천행 질서 부두를 바로잡다 |
1956년 |
신익희 선거운동 / 장면 박사로부터 편지 옛 소공동에서 자리잡은 경향신문 사옥에서 만남 선거운동 당선 후 헤어짐 |
1958년 |
조병옥 선거운동 |
1960년 |
2월2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 서거 이승만 3월의 대통령과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입후보자인 조병옥이 병으로 죽음으로써 쉽게 당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 4월 19일 4.19의거 4월 21일 전 국무위원 사표 제출 4월 25일 대학 교수단 데모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발표 4월 27일 이승만대통령 국회에 사표 제출 4월 28일 과도 내각 수립, 4월 28일 이기붕 일가 자살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 망명으로 끝나게 된다. |
1960년 |
7월 21일 아들 이의현 태어나다. |
1961년 |
5월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한 군인들이 반공과 부패, 부정의 일소 및 국가 재건을 내세우며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혁명 5월 21일 이정재 등 깡패 200여명, 서울 시내 가두에서 군인들이 조리돌림 명현 교회 나가 이장수 목사님에게 권총과 칼을 바침 5월 22일 최고회의, 용공분자 2천여명, 깡패 4천2백여명 검거 발표 8월 17일 이정재(李丁載)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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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
2월 25일 시라소니 이성순님 소천 |
지금처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도 없었던 배고픈 시절에
양키, 일본인, 운동 선수, 체급, 인원수에 상관없이 다 때려잡았던 시라소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
적이였던 유지광이가 최고의 주먹이라고 인정했구요.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오브레임급 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추가해서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주먹 조원섭 관련된 댓글 첨부합니다.
맞네요...제가 이해를 못한 부분이 두목은 김태촌을 만나러 가서 자리를 일찍 떠서 이해를 했는데 이왕규랑 차권이 이해를 못했어요..이해가 가네요..그런데 궁금한것이 여담입니다만. 만약에 두목이 김태촌을 만나러 갔는데 만약 김태촌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제가 알기론 김태촌이 깡으로 대한민국 그누구도 따라올자 없다고 했는데 ..안되겠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최고의 싸움꾼 조원섭이 예전 동양최고의 주먹 시라소니보다 월등할정도로 대단한 싸움꾼이라고 하였는데 시라소니 린치 사건을 보면 시라소니 이성순이 혼자서 동대문파 십여명이 넘는 연장으로 무장한 조직원들을 상대로 거의 박살을 내고 마지막에 방심한 탓에 조직원중 한명에게 도끼로 맞은게 화근이되어 다시 동대문사무실로 올라가서 전깃줄에 넘어지는 바람에 린치를 당했는데 조원섭이 같은경우엔 같은 패거리가 7명중에서 두목을 제외한 6명이나 있었고 (물론 이왕규랑 차권은 피했지만) 그 상황이면 시라소니와 버금가는 싸움실력인데 당하고만 있었다는것이 납득이 안갑니다..상황이 시라소니처럼 좁은공간이고 연장도 같고 상황도 비스무리한데 하지만 조원섭은 혼자도 아니고..방심한것도 아니고..제가 궁금한것은 정말 조원섭이가 시라소니 처럼 대단한 사람이었나해서요..비교를 해보면 게임도 안될거같고..2부가 기다려집니다.
: 조원섭은 그냥 그시절의 주먹으로 당할자가 없었다는 거지( 이것 또한 강하다는 걸 더 강조하기위해 나온 표현 같음)실제로 시라소니 같은 동물같은 사람 보다 더 잘하겠습니까.
동대문 애들도 시라소니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당시 주먹사회의 룰을무시하고 열댓명이 무기를 들고 덤볐겠습니까. 시라소니는 상해에서 칼 창을 든 범죄집단과도 20명을 상대로 단검2자루로 싸워서 이겼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건 실화 입니다. 시라소니는 상당히 단검을 잘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원섭의 전직은 헤비급 복서였는데요 권투에서는 그리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