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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곡 류공선생 묘갈명 병서(壺谷柳公先生 墓碣銘幷序)
정조께서 문(文)을 숭상하여 덕망과 학문을 갖춘 선비를 가려 뽑을 때, 호곡(壺谷) 류 선생(柳先生)이 가장 먼저 정초(旌招 : 초빙하여 벼슬을 시킴)를 받았다. 일찍이 제관(祭官)으로 태묘(太廟)에 들어갔을 때 임금이 납시어 품목을 두루 살펴보는데, 그때 마침 선생이 희생(犧牲)을 덮은 보자기를 들추다가 용작(龍勺, 01)이 땅에 떨어져 그 소리가 종묘 안에 진동하였다.
선생은 조용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수복(首僕, 02)은 용작을 바로 놓으라.’라고 하니, 주상이 눈여겨보고 마음에 담아 두었다. 얼마 뒤에 창의하였던 옛 간지(干支)가 돌아온 것에 감동하여 용와공(慵窩公, 03)에게 관작을 높여 추증하고, 노애공(蘆厓公, 04)은 관직을 제수하고, 선생을 조정으로 불러 면전에서 유(諭旨)를 내리기를 “그 조부의 손자이고 그 아비의 자식이니, 독서에 힘쓰고 행실을 닦아 훌륭한 가풍을 계승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능묘(陵墓)의 나무가 바람에 꺾이는 일이 발생하여, 사건을 심리하고 의금부에서 법대로 밝히려 하자, 임금이 말씀하기를 “류범휴(柳範休)는 사실을 속이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고, 특명으로 방면하였다. 또 채 상공(蔡相公)에게 말씀하기를 “짐이 독서인을 얻어 궁관(宮官, 05)에 보임코자 하는데, 류범휴가 어떻겠소?”라고 하자, 채 상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임금과 재상이 주목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선생의 도(道)는 이 세상에 거의 쓰일 뻔 했는데, 임금께서 갑자기 승하하여 상황이 일거에 바뀌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도다.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70여년 뒤에 증손 건호(建鎬)씨가 나에게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돌아보건대 아득한 말학이라 어찌 감히 성덕(盛德)을 비슷하게나마 그려내겠는가 하고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는 범휴(範休)이고 자는 천서(天瑞)이며, 영조 갑자년(1744, 영조 20)에 태어났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부 용와옹(慵窩翁)의 괴걸(魁傑)함을 닮았다.”라고 하였다. 겨우 걸음마를 배울 무렵 밖에 나갔다가 큰 우레와 번개를 만나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사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무슨 소리이며 무슨 불인가? 『何聲何火』”라고 하였다.
7살에 서당에 들어가서는 사색하여 의문 나는 점은 물어 그 이치를 끝까지 따져보기를 좋아하였다. 10여 세에는 스스로 독서하는 방법을 알아,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르지 않았다. 17세에 난곡(蘭谷, 06) 김 선생(金先生) 가문에 장가를 들어 관감觀感, 07)의 도리에 삼가고 힘썼다. 정해년(1767, 영조 43)에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낙방하였다.
무자년(1768, 영조 44)에 선부인(先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임진년(1772, 영조 48)에 선부군(先府君)의 서찰을 받들고 호상(湖上, 08)에 나아가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한결같이 사문(師門)을 본보기로 삼았다.
계부(季父) 동암 선생(東巖) 선생이 기뻐하며 “아무개는 선생의 걸음을 따라 걷는 자, 09)라고 일컬을 수 있다.”라고 하였고, 이 선생(李先生)은 손수 “뜻을 세우고 경에 거하여, 앎을 이루고 행실에 힘쓰라. 강건하고 중정하며,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빛나고 광대하라. 『立志居敬 致知力行 剛健中正 含弘光大』”라는 16글자를 써서 주었으니, 공에게 기대하는 중망이 이와 같았다.
경자년(1780, 정조 4)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붙었다. 신축년(1781, 정조 5) 대산(大山)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은혜가 깊고 의리가 중함을 애통해하면서 건대(巾帶)로 석 달의 상기를 마쳤다.
을사년(1785, 정조 9)에 관찰사의 천거로 태릉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마지못해 나아가 받들었다. 입직을 하면서도 책상을 마주하고 서책을 보니, 동료들이 알아서 공경하였다.
병오년(1786, 정조 10)에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자리를 옮겼고, 무신년(1788, 정조 12)에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으로 승차하였다. 기유년(1789, 정조 13)에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자리를 옮겼고, 경술년(1790, 정조 14)에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791, 정조 15)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부군의 상을 당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식은땀을 흘렸던 검루(黔婁, 10)의 일에 견주었다. 갑인년(1794, 정조 18)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올랐고, 얼마 후에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었다. 또 창릉 영(昌陵令)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의금부(義禁府)에서 심리(審理)를 받았고 바로 후릉 영(厚陵令)에 복직되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에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음날 고성군수(高城郡守)에 제수되었다. 정사년(1797, 정조 21)에 체직되어 돌아왔다가 얼마 뒤에 공릉 영(恭陵令)에 복직되었다. 안변(安邊) 고을에 수령 자리가 비었을 때, 임금은 두 번이나 의망(擬望)을 물리치고, 친히 선생의 성명을 써서 비답을 내리고 면려하는 유서(諭書)를 보냈다.
경신년(1801, 순조 1)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승하하였다. 신유년(1801)에 관찰사가 무고한 장계를 올려 파직을 당했는데, 암행어사가 장계를 올려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였지만 임금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고을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백성들은 아전을 보지도 못하였고 개도 밤에는 짖지 않았습니다.
지아비는 들에 있고 베짜는 여인들은 베틀에 있으니, 사또께서는 얼마나 덕정(德政)을 베푸셨는데 바로 이렇게 되셨습니까.”라고 하였다. 기사년(1809, 순조 9)에 군의 공조(功曹)를 불러서 환정(還政)의 폐단을 정리하니 온 고을이 다시 살아난 듯하였다.
계미년(1823, 순조 23)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3월에 병석에 눕더니 8월 27일에 정침에서 세상을 떠나 사월(沙月)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류씨(柳氏)의 관향은 전주(全州)로 고려(高麗)에서 장령(掌令)을 지낸 습(濕)이 실제로 비조(鼻祖)이다.
2세가 지나 의손(義孫)은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으로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소와정(笑臥亭)을 짓고 그곳에 머물다 세상을 떠났고, 호는 회헌(檜軒)이다. 중세(中世)에 이르러 복기(復起)는 호가 기봉(岐峯)으로 예빈 정(禮賓正)을 지냈는데 비로소 수곡(水谷)에 터를 잡았다.
그 3세(世)를 내려와 진휘(振輝) 진사(進士)가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봉시(奉時)로 인륜에 돈독하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조고는 즉 용옹(慵翁) 승현(升鉉)으로 관직은 참의(參議)였다. 계조(季祖)는 관현(觀鉉)으로 역시 관직이 참의였으며 호는 양파(陽坡)이다.
용옹이 아들이 없어 양파공의 중자(仲子)인 도원(道源)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분이 노애(蘆厓)로 벼슬은 감역(監役)을 지냈으며 선생의 부친이다.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참봉 경온(景溫)의 딸이다. 부인은 의성김씨 난곡(蘭谷) 강한(江漢)의 딸이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노문(魯文)과 참봉 정문(鼎文)이고, 딸은 생원 김현규(金顯奎)․ 장석경(張錫慶)․ 김양관(金養觀)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는 8명으로, 치임(致任)․ 치검(致儉)․ 치엄(致儼)․ 치효(致孝)․ 출계한 진사 치교(致敎)․ 치후(致厚)․ 참의를 지낸 치호(致好)․ 진사 치유(致游)이고, 손녀는 김하수(金夏壽)․ 승지 김진우(金鎭右)에게 각각 시집갔다.
외손은 5명으로 김용건(金龍鍵)․ 봉건(鳳鍵)․ 원건(元鍵)․ 장성원(張聲遠)․ 김영유(金永裕)이다. 증손은 17명으로 건호(建鎬)․ 출계한 군수 지호(止鎬)․ 정호(廷鎬)․ 영호(永鎬)․ 기호(基鎬)․ 재호(在鎬)․ 현감 긍호(肯鎬)․ 서호(胥鎬)․ 출계한 주호(胄鎬)․ 응호(膺鎬)․ 경호(敬鎬)․ 달호(達鎬)․ 익호(翼鎬)․ 철호(哲鎬)․ 석호(石鎬)․ 벽호(璧鎬)․ 출계한 규호(奎鎬)이다.
우리 선사(先師) 정재(定齋) 선생이 다음과 같이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선생의 자품은 자애롭고 선량하였으며 모습은 단정하고 엄중하였다. 기상은 온화하고 점잖고 정밀한 빛이 넘쳤으며, 체구는 작아도 뜻은 담대하고 얼굴색은 온화하나 말씀은 위엄이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고 나가서는 장인의 훈육에 흠뻑 젖었다. 대방가(大方家)에게 귀의해서는 도는 인륜을 벗어나지 않음을 알고 이 학문은 평상(平常)에 있음을 알았다. 강학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고자 하였고, 공경을 유지함은 반드시 용모에서부터 하였다.
그 처음에는 애써 지키려는 신고(辛苦)함이 있었지만 길들여지면 원만하게 융화되어 안정되고 굳건한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학문을 함에 뜻을 나누지 아니하고, 오로지 정밀하여 한결같이 하기를 힘썼다. 경전(經傳)․ 염락(濂洛)․ 주퇴(朱退, 11)의 말이 아니면 앞에 펼치지 않았으며, 시詩)․ 문장․ 글씨․ 편지 등도 뜻을 잃을까 경계하였으며 마음을 쓰고 생각하는 것이 오직 자신을 반성하는 데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속무(俗務)에 막히고 빼앗기는 것을 병으로 여겼지만 스스로는 “일에 따라 살피고 반성한다.”라고 하였고, 급히 하고 골몰하다가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지만 스스로는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힘을 붙이기에 좋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일용(日用)은 문자 없는 방책(方冊)이요 방책은 문자 있는 일용이다. 만약 책상에 앉아서는 공부를 하고, 책을 덮고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심학(心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정성과 물질의 봉양을 다하였다.
잠시 떨어져 있어도 효도를 잊지 않아, 천 리 먼 벼슬길에 나가 있어도 하루라도 서신을 부치지 않음이 없었다. 기일(忌日)에는 하루 종일 슬퍼하였기에 애통함이 주위를 감동시켰고, 성묘를 가서는 눈물로 잔디를 적셨다.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숙부모(叔父母)를 섬기니 사랑하고 공경함에 차이가 없었고, 두 아우와도 우애롭게 지내어 내 몸과 다름없이 여겼다.
외롭고 빈한하여 의지할 곳을 잃은 사람은 거느려 보살펴 시집보내고 장가를 보내주었다. 종족(宗族) 중에 항렬이 높은 이는 비록 우매하고 또 나이가 적더라도 공경하며 동등하게 존중하였고, 빈객을 접대함에 공경을 다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 눕고 앉는 데에 정해진 곳이 있었다. 잠자리는 반드시 바로 하고, 의관을 반드시 바르게 갖추어, 무릎을 단정히 모으고 팔을 단정하게 하여 마치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하였다. 모든 일마다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여 움직일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정사를 볼 때는 자신을 바르게 하여 남을 이끌었고, 아전을 부릴 때는 간결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임할 때는 엄숙하게 하였다.
은혜와 사랑에 근본을 두고 위엄을 갖추어 일을 이루었고, 절제에 삼가 하면서도 은혜를 베푸는데 여유가 있었다. 공정하게 법을 적용했고 간악한 이를 명료하게 벌하였기에, 대문을 지키는 친졸(親卒)일지라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명령할 것이 있으며 단지 한마디뿐이었으니, ‘거듭 경계하고 신중하라.’라고 하였다. 자신은 가볍게 여기며 근검하고 단속하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고 거만하고 게으르고 사치하고 함부로 하는 것을 지극한 경계로 삼았다.
초년에 궁핍하여 끼니를 걸러도 편안하게 여겼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도 예전처럼 담박하였다. 한 개의 관모(冠帽)로 세 고을을 다스렸고, 한 개의 인끈을 십 년 동안 사용하였으며, 거처가 협소해도 조금도 넓히지 않았다. 그만둘 때가 되어서는 지난날이 이미 어긋났음을 애석해하고 늘그막이 얼마 남지 않음을 서글퍼하면서, 한결 같은 마음으로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단속하였다.
체인한 바는 내 마음의 성명性命에 대한 이치이며 삼가는 바는 일용의 사물의 법칙이어서, 안팎이 일치하고 본말이 모두 갖추어졌다.
또 다음과 같은 뇌문(祭誄)의 글이 있다.
나아가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였으니 / 出而瑞世。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이고 / 彩鳳祥麟。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덕을 길렀으니 / 入而養德。
영험한 거북과 학이었네 / 靈龜臯鶴。
또 말하였다.
얼굴 가득 정신이 드러나니 / 滿面精神。
온 몸이 바로 그 법도였네 / 全體規矩。
또 말하였다. 지조는 외로이 선 나무 같고, 12) / 操獨木心。
지킴은 처자의 몸가짐 같았네 / 守處子身。
또 말하였다.
담박하지만 싫어하지 않고, 간결하지만 문채가 나고, 온화하지만 이치에 맞는 것을 선생께서 말미암았다.
여러 말들은 당시 덕망 있는 이들이 잘 보고 잘 말한 것으로, 오늘과 후세에 징험하여 믿기에 충분하다.
아! 대산(大山) 선생은 근세 우리 유림의 종주(宗主)인데, 선생이 그 전수의 막중함을 받아서 독실하게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물이 얼어 바위를 쪼개듯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덕이 이루어지고 도가 높아졌다. 그리하여 받들어 배우는 무리들로 하여금 지키고 따르는 곳이 있어 쫓아가는 바에 미혹되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다행스럽지 아니하겠는가.
일찍이 정재(定齋) 선생에게 들으니 “처음에 손재(損齋, 13) 남 선생(南先生)을 찾아뵙고 학문을 하는 방도를 물었고, 또 배우기 시작한 초년에 는……”이라 하였는데, 대개 선생을 가리킨 것이다. 뒤에 태어나 몽매하고 비루한 내가 남은 가르침에 미치어 은택을 입었으니 오래도록 앙모함이 절실하였다.
이에 감히 외람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도 않고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우뚝하게 높은 기산 / 岐山有嶪。
그 기운 맑고 깨끗하여 / 其氣淑淸。
독실하게 철인을 낳으니 / 篤生哲人。
세상에 드문 걸출한 분이셨네 / 間世精英。
기구, 14)의 가업 잇고 / 箕裘之業。
의발을 전수 받았으니 / 衣鉢之傳。
우리 도의 적실한 근원으로 / 吾道的源。
열여섯 글자, 15)의 진결을 받았네 / 十六眞詮。
걸음마다 평정하고 / 步履平正。
수촌, 16)으로 이루어나가 / 銖寸乃成。
정성이 쇠와 돌을 뚫어 / 誠透金石。
실천은 신명에 통하였네 / 行徹神明。
얼굴은 환하고 등은 펴지며 / 面睟背盎。
승직과 준평, 17)으로 행동마다 법도에 맞으니 / 繩直準平。
마침 좋은 때를 만나 / 際會昌辰。
밝고 융화된 성상의 뜻에 계합하였네 / 契合昭融。
대궐의 보살핌이 한참 높아질 때 / 宸眷方隆。
유궁, 18)의 아픔을 겪게 되어 / 痛纏遺弓。
고향 집으로 돌아와 자취를 감추고 / 歸掃先廬。
삼 년을 고비, 19)에 앉으셨네 / 三世皋比。
산림에서 덕을 닦은지 / 養德林樊。
이에 팔십여 년 / 八十年斯。
온전하게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 是謂歸全。
살아서 순응했고 죽어 편안하리 / 存順歿寧。
달이 비치는 차가운 사월에 / 寒沙照月。
깊이 영령을 모시었네 / 深秘英靈。
빗돌에 새겨 / 刻之貞珉。
천년토록 밝게 드리우네/ 昭眎千齡。
<끝>
[주해]
01) 용작(龍勺)
용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국자를 말한다. 작헌(酌獻)과 관세(盥洗)를 할 적에는 모두 작(勺)을 사용하여 술이나 물을 뜬다.
02) 수복(首僕) : 조선 시대에 묘(廟)·사(社)·능(陵)·원(園)·서원(書院) 따위의 잡직(雜織)을 맡아보던 구실아치의 수장을 말한다.
03) 용와공(慵窩公)
용와는 류승현(柳升鉉, 1680∼1746)의 호이다. 자는 윤경(允卿), 본관은 전주이다. 1719년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영해 부사,
풍기 군수 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토벌할 의병을 일으켰는데, 류승현이 의병대장으
로 추대되었다.
종성부사로 임명될때, 왕이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던 일을 칭찬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용와집이 있다.
04) 노애공(蘆厓公) : 노애는 류도원(柳道源, 1721∼1791)의 호이다.
05) 궁관(宮官) :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 동궁은 왕세자(王世子)의 궁을 말한다.
06) 난곡(蘭谷)
난곡은 김강한(金江漢, 1719∼179)의 호이다. 자는 탁이(濯以), 본관은 의성이다. 김성탁에게 수학하였고 류도원(柳道源)‧ 이상정
(李象靖)· 김낙행(金樂行) 등과 교유하였다. 김성탁이 호남의 광양에서 귀양살이 할 때 그곳에 따라가서 대학 ·중용 등을 공부하였다.
평생 동안 성리(聲利)를 멀리하고 세상을 사절하여 존양하는 학문에만 힘썼다.
07) 관감(觀感)
부부 또는 남녀가 서로 감동하는 의미로, 주역 「함괘(咸卦)·단사(彖辭)」에 “감동하는 바를 보면 천지 만물의 정을 볼수 있으리라.[觀
其所感而天地萬物之情 可見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08) 호상(湖上) : 안동 소호리(蘇湖里)에 있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를 의미한다.
09) 선생의……자 『공보역보(孔步亦步)』’ 스승을 모방하여 그대로 따르는 자를 일컫는 말로,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선생
님[孔子]께서 걸으면 저도 걸었고, 뛰어가면 저도 뛰었습니다.[夫子步亦步 夫子趨亦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0) 식은땀을 흘렸던 검루(黔婁)
효성으로 조짐을 알아 먼저 돌아옴을 말한다. 중국 남제(南齊)의 효자(孝子) 유검루(庾黔婁)가 잔릉(孱陵) 고을의 현령이 되어, 도착
한 지 열흘도 안 돼 아버지 유이(庾易)가 고향집에서 병에 걸렸다.
검루는 갑자기 마음이 놀라면서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 그날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날마다 북극성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면
서 자신이 아버지의 병을 대신하기를 빌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南史 『庾黔婁列傳』)
11) 염락(濂洛)‧주퇴(朱退)
중국 송나라의 학자인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와 낙수(洛水)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 그리고 주자(朱子)와 퇴계(退溪)
를 일컫는 말이다.
12) 지조는……같고
곤궁한 처지나 난세(亂世)에도 변치 않는 군자의 지조를 일컫는 말로,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
음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3)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174∼1810)의 호이다. 자는 종백(宗伯), 본관은 의령이다. 이상정의 문인이다. 벼슬에 뜻이 없었고, 오직 초야에 은둔
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다. 여러 번 도백(道伯)과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손재집이 있다.
14) 기구(箕裘)
가업(家業)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먼저 갖옷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먼저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한 데서 온 말
이다.
15) 열여섯 글자
이상정이 호곡에게 손수 써준 “뜻을 세워 마음을 경건히 하고, 지식을 닦아 힘써 행하고, 강건하되 도리에 맞으며, 넓은 도량으로 크게
빛나리.[立志居敬 致知力行 剛健中正 含弘光大]”라는 16글자를 말한다.
16) 수촌(銖寸)
매우 작은 것을 뜻하는 말한다. 수는 무게의 단위로 1냥의 24분의 1에 해당되고, 촌은 길이의 단위로 한 자의 10분의 1에 해당된다.
17) 승직(繩直)과 준평(準平)
행동이 곧고 올바름을 비유하는 말로, 먹줄[繩]은 곧게 만들고 수준기[準]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평평하게 만들므로 이르는 말이다.
18) 유궁(遺弓)
임금이 승하함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 고대 제왕인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하였는데
솥이 완성되자 용이 수염을 내려뜨려 황제를 영접하니 황제가 용에 올랐다.
남은 신하들이 모두 따라가고자 용수염을 붙잡고 매달리니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과 검이 함께 떨어졌다. 이에 남은 백성들
은 그 유품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고사에서 전하였다.(史記 『孝武本紀』)
19) 고비(皋比)
호랑이 가죽으로, 강학(講學)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중국 송(宋)나라의 장재(張載)가 항상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서 주역을 강론했
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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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壺谷先生柳公墓碣銘 幷序
健陵右文。掄選德學之士。時則壺谷柳先生。首膺旌招。嘗以祭官入太廟。上視品。先生擧犧尊羃而龍勺落地。響震廟內。先生徐厲聲曰。首僕正勺。上注目心識。已而上感倡義舊甲。贈慵窩秩。除蘆厓官。命先生入侍。面諭曰。乃祖之孫。乃父之子。讀書修行。繩家善俗。其以陵木風落。就理也。禁府照律。上曰柳範休非瞞報。特命白放。又語蔡相公曰。吾欲得讀書人。補宮官。柳範休何如。對曰臣意也。方是時。君相之注意如此。先生之道。其庶幾乎斯世。而宮駕遽晏。時事一變。可勝歎哉。先生歿後七十餘年。曾孫建鎬氏。責興洛以顯刻之辭。顧眇爾末學。何敢摸擬盛德。而屢辭不獲命。謹按先生諱範休字天瑞。以英宗甲子生。人謂肖慵翁魁傑。甫學步。出遇大䨓電。仰天四顧曰。此何聲何火。七歲入學。喜思索請問。直竆到底。十餘歲。自知讀書。終日端坐不倦。十七委禽于蘭谷金先生門。尤觀感飭勵。丁亥中鄕解。省試報罷。戊子丁先夫人憂。壬辰奉先府君書。稟學湖上。一以師門爲矜式。季父東巖先生喜曰。某可謂孔步亦步者矣。李先生手書立志居敬。致知力行。剛健中正。含弘光大十六言以畁之。其期倚之重如此。庚子春。中生員試。辛丑大山先生易簀。痛念恩深義重。巾帶終三月。乙巳因道臣薦剡。除泰陵參奉。爲親養。黽勉出膺。入直。對案看書。諸僚知敬。丙午遷司饔奉事。戊申陞平市直長。己酉移禁府都事。庚戌除松禾縣監。辛亥棄歸。未幾遭先府君喪。人擬之黔婁汗身事。甲寅陞司僕主簿。尋除掌樂主簿。又換昌陵令。就理。旋復厚陵令。乙卯遷司䆃寺僉正。翼日除高城郡守。丁巳遞歸。尋復恭陵令。安邊缺守。上再退望。親書先生姓名下批。勉諭以遣。庚申正宗大王昇遐。辛酉被道伯構誣狀罷。繡衣啓請拿鞫。上皆不允。將歸。府民遮道曰。民不見吏。狗不夜吠。夫耕在野。婦織在機。明府行何德政而乃爾。己巳辟府功曹。整理還弊。一境若甦。癸未陞通政。三月寢疾。八月二十七日。考終于寢。葬沙月負亥原。柳氏貫全州。麗掌令諱濕實▼(自/四/又)祖。二世諱義孫集賢提學。端廟遜位。築笑臥亭以終。號檜軒。中世有諱復起號岐峯。官禮賓正。始家水谷。三世諱振輝進士。先生高祖也。曾祖諱奉時。敦倫好義。祖卽慵翁諱升鉉。官參議。季諱觀鉉。亦官參議。號陽坡。慵翁無子。以陽坡公仲子諱道源后之。卽蘆厓官監役。先生考也。妣義城金氏。參奉景溫女。配義城金氏。蘭谷江漢女。生二男魯文,鼎文參奉。三女金顯奎生員,張錫慶,金養觀。孫男八人。致任,致儉,致儼,致孝。致敎進士出。致厚,致好參議,致游進士。孫女二人。金夏壽,金鎭右承旨。外孫五人。金龍鍵,鳳鍵,元鍵,張聲遠,金永裕。曾孫十七人。建鎬。止鎬郡守出。廷鎬,永鎬,基鎬,在鎬,肯鎬縣監,胥鎬。胄鎬出。膺鎬,敬鎬,達鎬,翼鎬,哲鎬,石鎬,璧鎬。奎鎬出。吾先師定齋先生狀其行曰。先生資稟慈良而儀貌端重。氣象雍容而精采發越。體小而膽大。色溫而言厲。入而服襲家庭。出而擩染甥館。及夫依歸大方。知此道不外彝倫。此學只在平常。講學必要踐行。持敬必自容體。其初儘有辛苦矜持。而馴致乎圓融安固之域矣。其爲學也。用志不分。專精一力。非經傳濂洛朱退之言。不列於前。詩章筆翰。亦惟喪志是戒。心心念念。只在反躳上。人皆病俗務妨奪。而曰隨事觀省。急滚蹉過。而曰政好著力。嘗以爲日用是無文字底方冊。方冊是有文字底日用。若對案有工夫。掩卷無工夫者。非所謂心學也。事親盡志物之養。跬步不忘孝。千里旅宦。無日不付信。忌日悄然終日。哀動左右。省墓淚漬宿草。推而事叔父母。愛敬無間。友愛兩弟。形骸不隔。弧寒失依者。率養嫁娶。宗族屬先行者。雖愚且少。敬之同所尊。賓客接之盡敬。平居坐臥有常處。牀袵必正。衣冠必整。斂膝端拱。如對神明。件件事事。微微細細。動必責之於心。爲政也。正己以率人。御吏以簡。臨民以莊。本之惠愛而濟之以威。謹於制節而裕之以恩。公以秉法。明以懾奸。鈴下親卒。非公事不交語。有所令。只一言而已。曰申申戒勑。便自見輕。以勤儉拙約爲家計。傲惰奢濫爲至戒。初年竆約。幷日晏如。及其居官。依舊淡泊。一冠三邑。一纓十年。室廬狹窄。不增一椽。迨其謝事。悼前時之已蹉。慨晩景之無多。一意兢惕。早夜提掇。所體認者。吾心性命之理。所致謹者。日用事物之則。庶幾內外一致。本末俱擧者矣。其祭誄之文。有曰出而瑞世彩鳳祥麟。入而養德靈龜皋鶴。有曰滿面精神。全體規矩。有曰操獨木心。守處子身。有曰淡而不厭。簡而文。溫而理。先生以焉。之數語者。皆當世有德。善觀而善言之者。足以徵信於今與後也。於乎大山先生。近世宗儒也。先生受傳付之重。篤信服膺。滴水滴凍。卒之德成而道尊。使承學之徒。有所持循而不迷於所從。寧不幸哉。嘗聞師門。初拜損齋南先生。問爲學之方。曰且學某初年。葢指先生也。晩生蒙陋。與被餘敎之及。久切高山之仰。乃敢不揆僭妄。敍次如右。爲之銘曰。
岐山有嶪。其氣淑淸。篤生哲人。間世精英。箕裘之業。衣鉢之傳。吾道的源。十六眞詮。步履平正。銖寸乃成。誠透金石。行徹神明。面睟背盎。繩直準平。際會昌辰。契合昭融。宸眷方隆。痛纏遺弓。歸掃先廬。三世皋比。養德林樊。八十年斯。是謂歸全。存順歿寧。寒沙照月。深秘英靈。刻之貞珉。昭眎千齡。<끝>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八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