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785년 동상례계안(東床禮禊案)
26 × 30㎝ / 필사본, 13장
[해제]
1785년 8월에 망호정(望湖亭)에서 작성한 동상례(東床禮) 계안(禊案)으로, 1843년 11월 16일의 기록까지 들어있다.
동상(東床)이란 손님을 접대하는 상[待賓之床]을 가리킨다.
내용에는 숭정후(崇禎後) 삼을사(三乙巳, 1785) 8월에 이경학(李慶鶴)이 쓴 <동상계서(東床禊序)>가 있고, 이어서 계원명단이 들어있다. 이 명단은 1785년 8월에 작성한 것부터 시작하여 임진(壬辰, 1832) 4월 17일, 을미(乙未, 1835) 4월, 병신(丙申, 1836) 4월, 무술(戊戌, 1838) 11월, 임인(壬寅, 1842) 11월 1일, 계묘(癸卯, 1843) 11월 16일 등에 입계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창설 당시 계원은 이지담(李之聃)10, 이지희(李之禧), 이지효(李之孝) 등 168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4대 정도가 올라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壬辰, 1832) 4월 17일의 입계 이전에도 서너 차례의 입계가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창설 당시 도유사(都有司)는 이지효(李之孝), 유사(有司)는 이지공(李之恭)이었고, 이후 별유사(別有司)는 이경천(李慶千), 유사는 이경상(李慶相)이 맡았다. 이밖에도 이름의 하단에 출계(出契)나 갱입(更入)한 사람의 일시 및 사유 등이 작은 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1832년 4월에는 19명, 1835년 4월에는 7명, 1836년 4월에는 12명, 1838년 11월에 11명, 1842년 11월에 2명, 1843년 11월에 6명 등 더 있다. 그런데 전체 225명 중 경주이씨가 아닌 경우는 오씨 3명, 최씨 5명, 김씨 3명, 박씨 1명일 뿐이다.
10 이지담(李之聃, 1703~1781) : 자는 내백(來伯)으로, 이주남의 손자인 이세휘(李世輝)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의인(文義人) 박상민(朴尙敏)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한 이진묵(李鎭黙)의 증조부이다.
Ⅰ. 망호정 동상계(東床契) - 43
[원문]
『東床禮禊案』 ⼄巳⼋⽉ 日
東床禊序
東床禊, 以東床禮錢, 創建亭閣, 因以作禊, ⽽名之曰東床禊. 歲在己亥之⼋月秋夕, 一門諸族, 皆會于高祖廟庭, 議建亭閣, 難於財力, 欲收東床之禮, 以充土⽊之費. 或曰, “東床禮者, 後進之所以供獻先進者也. 四⼗餘年, 此禮久廢, 誠爲慨然. 當設一宴, ⽽不可他用也.” 僉曰, “不然. 雖欲設宴, 露坐冷地, 不過一日之醉也. 高建亭閣, ⼤宴落成, 則慰先之禮, ⾃在其中矣. 作爲一禊, 春秋講信, 則久廢之禮, 一年再⾏矣. 且洞開軒窓, ⼤設盃盤, ⽽咏⼦安臨高臺之詩, 歌謫仙將進酒之曲, 則其爲樂也, 與露坐冷地者, 果何如哉?” 皆曰, “諾.” 於是定議施役, ⼄巳年秋, 竪⽴柱樑, 高閣三間, ⼩層閣⼆間, 雖不壯麗, 可謂精灑. 堂號則高祖創玆村庄名曰望湖亭, ⽽一村之⼈, 皆是高祖內外孫, 故以村號爲亭號. 因作是禊, 列書禊員, 及成造時各有司于後, 以示後⼈. 後之⼈, 庶不負今日作亭作契之好意, ⽽隨壞隨補, 世世流傳焉.
崇禎後三⼄巳⼋月日, 李慶鶴 序.
[국역문]
『동상례계안(東床禮禊案)』
을사년(1785) 8월 일
<동상계(東床禊) 서문>
동상계는 동상례(東床禮)의 돈으로 정각(亭閣)을 창건하고 이어서 계를 만든 것이며, 이름을 ‘동상계’라고 한 것이다.
기해년(1779) 8월 추석에 일문(一門)의 족인(族人)들이 모두 고조(高祖)의 묘정(廟庭)에 모여서 정각을 세우는 일에 대해 논의하면서 재력(財力)의 어려움은 동상례의 돈을 거두어서 토목 공사의 비용에 충당하고자 하였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동상례(東床禮)란 후진(後進)이 선진(先進)에게 바치는 것인데, 40여 년 동안 이 예가 오랫동안 폐지되어 있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마땅히 잔치를 베푸는 데 써야 하고 다른 용도로 쓸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잔치를 베풀고자 해도 맨땅의 차가운 자리에서 하루 동안 취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높이 정각을 세우고 큰 연회를 벌여 낙성(落成)한다면 선진을 위로하는 예가 절로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계를 하나 만들어 봄가을로 강신(講信)을 한다면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예를 한 해에 두 번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동(洞)에서 정자의 창을 활짝 열고 술상을 크게 베풀어 자안(子安)11의 임고대(臨高臺) 시를 읊조리고 적선(謫仙) 이백(李白)의 장진주(將進酒)의 곡조를 노래한다면, 그 즐거움이 맨땅의 차가운 자리에 있는 것과 비교하여 과연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자 모두가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일을 하기로 의논을 정하고 을사년(1785) 가을에 기둥과 들보를 세우니, 높다란 누각이 세 칸에 작은 층각(層閣)이 두 칸으로, 비록 장엄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미하고 깨끗하다 할만하였다. 당호(堂號)는 고조(高祖)께서 이 마을의 전장(田莊)을 창건하시면서 ‘망호
정’이라 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조의 내외손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았다.
이 계를 만들고 계원 이름과 성조할 때의 각 유사(有司) 이름을 뒤에 적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후대 사람들은 오늘 정자를 짓고 계를 만든 좋은 뜻을 저버리지 말고,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여 대대로 전해가기를 바라노라.
숭정후(崇禎後) 삼을사(三乙巳, 1785), 이경학(李慶鶴)12이 서문을 짓다.
이지담(李之聃), 이지희(李之禧), 이지효(李之孝), 이경식(李慶植), 이지협(李之協), 이지규(李之圭), 이지원(李之源),
이지태(李之泰), 이경우(李慶雨), 이경홍(李慶弘), 이경혁(李慶赫), 이경배(李慶培), 이지신(李之信), 이지공(李之恭),
이경구(李慶龜), 오덕팔(吳德八), 이익량(李益亮), 이경유(李慶囿), 이경룡(李慶龍), 이경적(李慶迪), 이경근(李慶根),
이경선(李慶善), 이경삼(李慶三), 이경집(李慶集), 이경철(李慶喆), 이경오(李慶五), 이경학(李慶鶴), 이경원(李慶園),
이경노(李慶老), 이경록(李慶祿), 이경운(李慶運), 이경린(李慶獜), 이경준(李慶俊), 이익표(李益彪), 이경호(李慶瑚),
이경직(李慶職), 이경장(李慶樟), 이경흠(李慶欽), 이경천(李慶千), 이경상(李慶相),
11 자안(子安) : 왕발(王勃, 647~674)의 자이다. 왕발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수나라의 왕통(王通)의 후손이다. 고종(高宗) 때 궁정(宮
廷)에 들어가 조산랑(朝散郞)이 되었다. 검남(劒南)으로 가서 도독(都督) 염백서(閻伯嶼)를 위하여 쓴 등왕각서 및 시는 특히 유명하
다. 노조린(盧照隣)·낙빈왕(駱賓王)·양형(陽炯)과 함께 초당(初唐)의 4걸(四傑)이라고 일컫는다.
12 이경학(李慶鶴, 1739~1801) : 자는 내술(乃述)이다. 이세량(李世良)의 손자로, 아버지는 이지강(李之綱)이고, 어머니는 인동인 장
명겸(張命謙)의 딸이다.
Ⅰ. 망호정 동상계(東床契) - 45
이재권(李再權), 이재록(李再祿), 이경실(李慶實), 이경발(李慶發), 이경박(李慶璞), 이경길(李慶吉), 이경신(李慶臣),
이경순(李慶純), 이재유(李再裕), 박몽세(朴夢世), 이재환(李再煥), 이재악(李再岳), 이재봉(李再鳳), 이경렬(李慶烈),
이경표(李慶表), 오종언(吳宗彦), 이경국(李慶國), 이경엽(李慶燁), 이재붕(李再鵬), 이재수(李再秀), 이경현(李慶絢),
이재술(李再述), 이재립(李再立), 이재현(李再賢), 이경방(李慶邦), 이쾌종(李快宗), 이재곤(李再坤), 이재추(李再樞),
이재욱(李再煜), 이재정(李再貞), 이재택(李再宅), 이재찬(李再燦), 이재익(李再益), 이재연(李再鳶), 이재란(李再鸞),
이재문(李再文), 박정록(朴挺祿), 이재암(李再巖), 이경회(李慶會), 이재향(李再香), 이재민(李再民), 이재원(李再元),
이재열(李再悅), 이재인(李再仁), 이팔룡(李八龍), 이광달(李光達), 이재경(李再敬), 이재성(李再成), 이재무(李再武),
이재종(李再宗), 이재방(李再芳), 이재검(李再儉), 이재청(李再淸), 이재백(李再白), 이경결(李慶結), 이달묵(李達黙),
이동현(李東賢), 이재극(李再極), 이재범(李再範), 이재호(李再鎬), 이재규(李再奎), 이재맹(李再孟), 이광진(李光震),
이종한(李宗漢), 이재온(李再溫), 이재기(李再機), 이종상(李宗祥), 이재악(李在樂), 오재갑(吳在甲), 이경관(李慶灌),
이재두(李在斗), 이종욱(李宗郁), 이재모(李在謨), 이재광(李在光), 이광현(李光顯), 이진박(李鎭博), 이광룡(李光龍),
이재영(李在榮), 이재우(李在祐), 이진성(李鎭聖), 김인갑(金獜甲), 이진후(李鎭厚), 이진복(李鎭福), 이재간(李在侃),
이재훈(李在訓), 이재청(李在靑), 이진억(李鎭億), 이재습(李在習), 이진국(李鎭國), 이재준(李在準), 이재화(李在和),
이진혁(李鎭赫), 최종수(崔宗壽), 이진환(李鎭寰), 최종길(崔宗吉), 이진문(李鎭汶), 이진원(李鎭遠), 이재석(李在錫),
이진묵(李鎭黙), 이진연(李鎭淵), 이재숙(李在肅), 이재윤(李在閏), 이진방(李鎭邦), 이진황(李鎭璜), 이재립(李在立),
박창규(朴昌圭), 이진업(李鎭業), 이진로(李鎭魯), 이진규(李鎭奎), 이영택(李永宅), 박학문(朴學文), 김경록(金景錄),
이진철(李鎭喆), 이진목(李鎭穆), 이재선(李在璿), 이진계(李鎭繼), 이진구(李鎭區), 이진현(李鎭玄), 이진형(李鎭亨),
이달억(李達億), 이진섭(李鎭燮), 이진덕(李鎭德), 이진우(李鎭宇), 이진영(李鎭英), 박석광(朴碩光), 이유영(李惟永),
이진기(李鎭璣).
壬辰四月十七日(1832년 4월 17일)
이진필(李鎭弼), 이재민(李在敏), 이재오(李在五), 이재회(李在晦), 이희발(李禧發), 이진식(李鎭植), 이재의(李在義),
이진엽(李鎭燁), 이진조(李鎭兆), 이재풍(李在豊), 이진동(李鎭東), 이진호(李鎭豪), 이진석(李鎭碩), 이진환(李鎭煥),
이준성(李俊成), 이천증(李千增), 이진의(李鎭宜), 이화영(李華永), 이진수(李鎭壽)
乙未四月日(1835년 4월)
이진각(李鎭恪), 이진두(李鎭斗), 이진만(李鎭萬), 이쾌철(李快喆), 이진희(李鎭曦), 이진모(李鎭模), 이진감(李鎭瑊).
丙申四月日(1836년 4월)
이재엽(李在燁), 이진홍(李鎭洪), 이진걸(李鎭杰), 이진흥(李鎭興), 이진연(李鎭淵), 최기홍(崔基弘), 최기환(崔基煥),
김상태(金尙兌), 이문영(이문영), 최종석(崔宗碩), 최진혁(崔振赫), 이시협(李時協).
戊戌十一月日(1838년 11월)
이영달(李永達), 이두영(李斗永), 이희담(李喜淡), 이수증(李壽增), 이인영(李寅永), 이지영(李祉永), 이진정(李鎭楨),
이석영(李碩永), 이기영(李基永), 이진란(李鎭蘭), 이주영(李周永).
壬寅十二月初一日(1842년 12월 1일)
이규삼(李圭三), 이준영(李俊永).
癸卯十一月十六日(1843년 11월 16일)
이세증(李世增), 이팽조(李彭祖), 이삼옥(李三玉), 이준담(李俊聃), 이영원(李英元), 이준근(李俊根)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