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음악이다[無聲之樂]
서예는 마음의 작용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장르이다. 수백 또는 수천 개의 부드러운 털을 거느려 운용하면서 굵고 가늘게, 짧고 굵게, 빠르고 느리게,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고 오므리기도 하면서 섬세한 붓 끝에 어떤 때는 기쁜 마음을, 어떤 때는 슬픈 감정을 실어 마음의 작용을 그대로 전달한다. 만약 붓이 털로 만들어지지 않고 딱딱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면, 아마도 마음이 움직이는 바를 그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부드러운 털일수록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은 정감까지도 놓치지 않고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에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서여기인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글씨에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추사의 글씨를 곧 추사로 보는 것은 ‘형태’를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심형心形’ 즉, 정신을 보는 것이다. 글씨에는 평생 삶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나게 되어 그 사람의 글씨를 보면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마음이 기쁘면 몸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마음이 슬프면 몸은 어깨가 축 늘어지고 기운이 떨어지게 되는데, 기쁠 때 붓을 잡으면 붓끝도 덩달아 춤을 추고, 슬플 때 붓을 잡으면 붓끝 또한 침통함이 표현되는 것과 같다. 때문에 그 마음 상태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왕희지는 글씨를 전투에 비유하여 “마음은 장군이고, 그의 재능은 부장이며, 글자의 획을 배치하는 것은 전장에서 책략을 도모하는 것과 같고, 붓을 종이에 출입시키는 것은 호령하는 것이며, 획이 꺾일 때나 돌아갈 때는 전장에서 살육하는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처럼 글씨를 쓰는 것은 전쟁에서 지휘하고 통제하며 나서고 물러나는 것과 같이 마음에서 예상하고 손과 붓을 부리는 것이다. 이런 마음과 손의 주종主從관계는 오랜 기간 숙련되면, 서로 부리고 노역하는 관계를 벗어나 일체가 되어 시키고 부림을 당하지 않고도 서로의 뜻을 알아 일에 그르침이 없게 된다. 이를 두고 서예에서는 ‘심수상망心手相忘’의 단계인 ‘졸拙’의 경지라고 한다. 이 정도로 오랜 기간 숙련된 사람이라면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경지가 되는데, 추사가 쓴 봉은사 ‘판전’의 글씨가 대표적이다.
글씨에서 역사를 본다
글씨는 개인의 품격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서 유행을 탄다. 유교적 봉건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치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시대에는 글씨에 있어서도 감정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화미’를 최고의 미로 여긴 적이 있는데, 왕희지가 대표적이며 그의 글씨는 봉건사회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그는 353년 3월 3일에 지금의 중국 소흥 회계산 아래 난정을 짓고 지방의 관리 및 종친자제들과 함께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돌아가면서 시를 짓게 하고 이를 엮어 직접 서문을 썼다.
이것이 당태종이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는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이다. 그 글씨는 내용과 형식이 모두 당시의 화창한 날씨와 자연의 최적 조건을 표현하여 중화미의 최고로 평가한다. 왕희지는 “글씨를 쓸 때에는 평정과 안온함이 귀한 것이다[夫書字貴平正安穩]”라고 하여 중국에서 남북조 시기는 물론 수·당 시기까지 5~600년 동안 왕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희지의 글씨를 계승한 당나라의 글씨가 유행하였는데, 한글에 있어서는 궁체라고 하는 서체가 대표적이다. 그 글씨는 조선후기 궁중의 엄격한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어 한 올의 머리카락도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옷매무새 또한 흐트러짐 없는 궁중의 깔끔한 모습이 배어나 있다. 이러한 글씨는 나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억제한 것이다. 하지만 궁체는 개성과 자유를 만끽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크게 호평을 받지 못한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書如其人]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절제하고 오직 이성적인 ‘중中’을 최고로 여기는 시대에서 점차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개성시대로 옮겨가면서 서예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천도天道’와 사람 마음속의 희로애락과 ‘개성個性’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면서부터 다양한 형식의 감정이 표현된 글씨들이 당대 말기와 송대에 주류를 이루었다.
당나라 말기 유명한 서예가인 안진경과 그의 스승인 장욱이 이러한 개성적 글씨를 유행시킨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안진경은 안록산의 난 때, 그의 종형인 고경이 아들과 함께 상산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어 모두 참수되었는데, 안진경은 조카를 위해 제문을 짓고 썼다.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격정과 울분은 손과 일치되어 그 글씨를 보는 사람들은 침울하고 비통한 심정을 느꼈다. 반대로 그의 스승이었던 장욱은 평생 글씨를 쓰면서 술에 취한 뒤에 그의 호방한 성격에 흥취를 타고 휘호를 하여, 위로는 천 길을 뛰어올랐다가 다시 아래로 천 길을 내려가고 다시 좌우 사방으로 막힘없이 써내려가 ‘광초狂草’라는 서체를 만들기도 하였다. 광초는 오랜 숙련에서 자유를 얻은 경지로 아무런 격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연 질서의 미를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부분 글씨가 산천초목이나 강과 바다같은 자연을 그려낸 것에 한정된 것이라면 광초는 해와 달, 별을 포함한 우주적 질서를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글씨는 사람의 성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정직한 사람의 글씨는 평탄하지만 변화가 적고, 강직한 사람의 글씨는 강직하되 윤택함이 적고, 엄숙한 사람은 위엄이 있으나 구속하는 폐단이 있고,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법도를 잃어버리기 쉽고, 온유한 사람은 연약하고 늘어지는 단점이 있고, 조급하여 날뛰는 사람은 사납고 급박함이 지나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은 글씨에 답답하게 응체됨이 있고, 더디고 신중한 사람은 느리고 둔하고, 가볍고 자질구레한 사람은 글씨가 촌스럽게 나타난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글씨를 쓰는 사람은 대미大美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연을 감상하면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도전할 때와 양보할 때를 분별해 내는 수련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인문학을 표현하는 유일한 예술인 서예는 동아시아 철학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예부터 사람들은 서예를 생명 근원적 대미인 우주에서 출발시켜, 마음과 손을 ‘리理’와 ‘기氣’의 양단으로 구분하고 여기에서 ‘리’는 ‘주리설主理說’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즉, 생명이 있는 사물은 우주의 마음理이 작용을 하여 몸氣을 만든 것처럼, 글씨를 쓰는 것은 마음의 작용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심리心理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미美를 이끄는 장군이 되고, 몸의 일부인 손은 붓을 잡고 명령을 실천하는 행동대다. 때문에 마음이 없으면, 글씨도 이루어 질 수 없으며, 획에 마음을 담지 않으면, 글씨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을 알고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글·사진·이주형 경기대학교 미술·디자인 대학원 대우교수 사진·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