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새해 첫날밤, 미국 ‘음악가 노조’ 조합원들에게 음악 녹음을 모두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미국음악인연합(AFM)이 음반회사들에게 음반 판매액의 일정 부분을 실업 상태의 음악인을 돕기 위한 노조기금에 내라고 요구한 이후 거의 일년간 전국의 녹음 스튜디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1948년 12월 노조의 승리로 녹음 금지령이 철회되었을 때 음반업계는 이미 전환기를 거친 후였다. 금지 기간 중에 성인 시장을 대상으로 연주 시간이 긴 새로운 종류의 음반이 나왔고, 뒤이어 나온 두 번째 음반은 10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것이었다. 이 두 음반을 통해 재즈와 R&B 음악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며 이는 로큰롤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녹음 금지령으로 빛을 본 재즈음악인들: 존 콜트레인, 캐논볼 애덜리, 마일즈 데이비스, 빌 에반스.
지금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전문 음악인들이 힘을 합쳐 음반업계를 평정하는 일을 상상하기 어려울 테지만, 1940년대에는 음악과 영화가 미국 문화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음악인을 대변하는 노조의 영향력도 막강했다.
1948년 녹음 금지령이 선포되기 전 수십년 동안 노조는 기술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축음기, 음반, 라디오, 토키(발성영화), 주크박스 등의 등장으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능력있는 음악인도 있는 반면 공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음악인 중 많은 이들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30년대에는 토키 덕분에 영화 속에서 생음악을 연주할 필요가 없어져 수만 명의 음악인이 일자리를 잃었고, 술집과 레스토랑들은 주크박스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조가 직면한 더 큰 문제는 라디오였다. 라디오는 1920년대 이래 음악인을 가장 많이 쓴 고용주로 스튜디오에서 생음악을 연주할 전문 음악인을 고용해 왔었지만, 1940년대 초반부터 이를 음반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조는 이러한 추세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1930년대 후반 라디오 방송국들에는 음반을 한번 틀고 나서 폐기시켜버리거나 음악인을 더 많이 고용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던 수년간 이런 식의 완력은 정부의 분노를 유발했다.
1940년대 초반 노조는 전략을 바꿔 사태의 원인인 음반업계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당시 음반업계는 컬럼비아, RCA, 데카 3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1942년 노조는 첫 녹음 금지령을 내렸고, 불과 일년사이에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른 데카는 실업상태의 음악인을 고용하기 위해 설립된 신생 노조에 수수료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데카보다 자금력이 우수했던 컬럼비아와 RCA는 1944년에 기업친화적인 정부가 들어서길 희망하며 일년을 더 버텼지만 결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 항복하고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의회는 이를 반기지 않았다. 1942~1944년의 녹음 금지령 이후 의회는 노조가 자체 실업기금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고무된 음반업계는 1947년 노조에 원래 합의서를 갱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고, 노조는 두번째 금지령을 준비했다.
하지만 컬럼비아사는 첫번째 금지령 당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노조가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음반이 아니라 라디오라는 걸 알았다. 노조는 수익을 창출하는 주크박스에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 수수료도 지불하지 않고 음반을 트는 라디오는 달랐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노조가 라디오에서 트는 행위만 반대할 뿐 소비자들을 상대로 한 음반 판매를 반대하지는 않는 것이라면, 라디오는 멀리하고 확장 추세인 미국 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포맷(음반)을 개발하면 될 일이었다.
두 번째 녹음 금지령이 절반쯤 진행됐던 1948년 6월, 컬럼비아는 33 1/3 rpm(분당 33 1/3 회전)의 더 크고, 러닝타임이 긴 음반을 공개했다. 염화비닐을 주성분으로 한 이 LP(Long Player) 혹은 ‘앨범’은 기존의 78 rpm 축음기음반과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축음기음반이 한면에 3분 정도밖에 기록할 수 없었던 반면 10인치짜리 LP는 한면에 15분, 12인치짜리(원래 클래식음악을 위해 나온 제품)는 22½분까지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LP는 이미 축음기음반에 녹음돼 있던 음악들을 담았다.
1948년 12월 두 번째 금지령이 끝났을 때, 노조는 기금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통제권은 독립수탁자에게 넘어간 상태였으며, 기금 자산은 무료 공공콘서트에서 공연할 실업 상태의 음악인을 고용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라디오는 다시 78 rpm 음반을 틀기 시작했고, 매출이 오를수록 수수료도 늘어나는 관계로 노조측은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다. LP 매출도 점차 증가했다.
RCA도 1949년 1월 자체적으로 7인치짜리 비닐재질 레코드판(45 rpm)을 발매했다. 원래는 가운데 큰 구멍이 뚫린 이 음반을 LP의 경쟁제품으로 생각했지만, 주수익원이었던 자사 소속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1950년대 초반 컬럼비아로 이적하기 시작하면서 RCA도 LP 혁명에 합류했다.
45 rpm판은 78 rpm판의 효과적인 대안으로 소규모 음반사들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놀랍게도 45 rpm판은 주크박스와 라디오에서 즉각 주목을 받았다. 미 정부가 독립라디오방송국들에 더 많은 라이선스를 부여해 준 것도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50년대 초반경에는 소규모 음반사들이 휴대용 테이프 녹음기를 사용해 지역 R&B 아티스트들의 곡을 녹음하고, 이렇게 녹음된 곡들이 지역 라디오방송에서 전파를 탔다. R&B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당시의 아이팟이라 할 수 있는 휴대용 레코드플레이어가 등장했고, 10대들은 ‘싱글’ 음반의 최대 소비자층이 됐다. 1950년대 중반 록음악의 도래를 위한 길이 열린 것이다.
LP는 새로운 장르를 대중화시키는데도 공헌했다. 재즈는 1950년대 초반 10인치 LP판이 등장하기 시작해 12인치로 영역을 넓혔다. 하지만 블루노트, 프레스티지, 사보이 등 재즈음반사들은 경비를 줄일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음반이 길어졌다는 것은 고가의 저작권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틴 팬 앨리(Tin Pan Alley: 대중음악 작곡가들을 일컬음)’ 작곡가들의 재즈곡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함을 의미했다.
해결책은 아티스트들의 원곡은 더 많이 발매∙녹음하고 LP 양면에 들어가는 곡 수는 줄이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재즈음악인들이 더 오랜 시간 즉흥연주를 하게 함으로써 풀었다. 집에서 나이트클럽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소비자도 만족시킬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일즈 데이비스나 데이브 브루벡, 소니 롤린스, 존 콜트레인 등의 재즈음악인들이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키는 데도 도움이 됐다.
시장이 LP와 45 rpm판을 수용하게 되면서 음반과 33/45/78 rpm용 레코드플레이어 판매도 치솟았고 업계는 소비자들이 개선된 음반에는 기꺼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날 고전하고 있는 음반업계에도 유용할 지 모를 전략이다.
글쓴이는 ‘Why Jazz Happened(가제: 재즈의 탄생 배경)’의 저자이며, 본 칼럼은 그의 책 일부를 개작한 것이다.
2013.1.4 By Marc M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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