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명당을 쓰고 번창한 반남 박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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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고개임을 알려주는 봉현(蜂峴) 표석.반남 박씨 시조 묘.(위부터)
반남 박씨(潘南 朴氏)는 조선조에서 세도를 했던 명문이다.
문과급제자만 215명을 냈고 정승을 7명을 배출했으며, 인종의 왕비와 선조의 왕비가 반남 박씨이고, 임금의 사위인 부마가 5명이나 되었다.
반남박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인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박의가 효심이 깊어 유명한 지관을 모셔다가 명당자리 한 곳을 부탁했다.
지관은 산을 둘러보고 위쪽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러나 박의가 보기에는 조금 아래쪽이 더 좋은 자리일 것 같았다. 그러나 유명한 지관의 말이라 우선 표를 해놓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지관의 뒤를 쫓아 가보았다.
지관은 자기 집으로 들어가더니 부인에게 "오늘 본 자리는 너무 큰 명당이라 그 자리를 잡아 주었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하여 내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그 자리를 피해 조금 위쪽에 자리를 잡아 주었소."하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엿들은 박의는 "그러면 그렇지"하고 그 집을 빠져 나와 이튿날 그의 선친 산소를 지관이 말해준 자리 아래에다 정하고 일을 시작했다.
다음날 지관이 와서 보니 자신이 정해준 자리 보다 아래에 묘 터를 파고 있으므로 깜짝 놀라 "어인 일로 내가 정해 준 자리에다 쓰지 않는가?"하고 묻자 박의가 대답하기를 "지관 어른이 정해준 자리는 저나 제 후손이 쓰기로 하고 이 자리가 아버님 운과 맞을 것 같아 지관님의 뜻을 어겼습니다."라고 능청을 떨며 말하였다.
지관은 사색이 되어 "이것이 모두 천운이로구나! 사실 자네가 파고 있는 그곳이 천하 명당일세.
내가 그 자리를 정해주면 천기누설이 되어 내가 화를 입으니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자네가 이를 알아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
아무래도 나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나 한가지 방법은 있네. 내가 이 고개를 넘어 가면 그때 일을 해주기 바라네."라고 하였다.
박의는 지관의 부탁이라 잠깐 쉬었다가 일을 계속하였는데 지관이 미처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묘 자리에서 새처럼 큰 벌들이 수 백 마리 나오더니 고개로 날아가 지관의 뒤통수를 마구잡이로 쏘아 결국 지관은 죽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고개는 벌고개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묘 자리는 벌명당으로 불리었다.
박남 박씨는 이 명당의 음덕으로 발복이 시작되어 수많은 정승과 왕비, 부마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지관의 말을 엿들어 그의 아버지 묘를 쓰게 된 박의는 그의 성급한 욕심 때문에 지관을 죽였다고 생각하여 지관을 성대하게 장사 지내주고 그의 가족들을 보살펴주었다. 또 매년 10월 보름날에는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참고서적 : 풍수전설, 임학섭 저, 이화문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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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로재(箱露齋)는 영조 24년인 1748년 지어진 반남박씨의 재사(齋舍)로 호장공의 묘 오른쪽 아래 호장공 묘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 |
동족마을을 찾아서 <50>나주시 반남면 반남박씨(潘南朴氏)
나주에서 영암 방면으로 길을 잡고 가다 양산삼거리에서 ‘반남고분군’으로 우회전한 뒤 10여분간을 더 달리다 보니 반남면 소재지가 나온다.
반남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이었던 것이 신라 경덕왕때 반남군으로 개명됐으며, 현재는 나주시 반남면에 이르고 있다.
반남면은 반남박씨(潘南朴氏)가 고려초부터 터를 닦고 집성촌을 이뤄 수백년 넘게 누대에 걸쳐 살아 온 대표적 동족마을이다.
반남면 흥덕리에 ‘시조 묘역’과 ‘상로재(箱露齋)’ ‘석천암(石泉庵)’ 등 반남박씨와 관련된 옛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최근 이농 현상 등으로 마을에 살던 반남박씨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면서 옛 조상들의 흔적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많은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반남면내 7개리 26개 마을에 모두 2천6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반남박씨는 30여호만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우리나라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해 여러 본으로 갈라지고 있는데 반남박씨는 고려조 때 반남호장(戶長)을 역임한 박응주(朴應珠)를 1세(世)로 하고 있고 있다.
하지만 호장공의 상계가 실전돼 그 윗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신라 국운이 쇠퇴해질 무렵 정국 혼란으로 박씨들은 수도였던 경주를 떠나 각 지방으로 흩어져 나주 반남과 고령, 죽산, 밀양 등지로 분산 거주해 오랜 기간을 지냈으며, 반남박씨 시조 응주는 반남지방에 거주하게 된다.
신라가 멸망하고 경애왕 이후부터 호장공 응주까지의 280여년간의 역사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다보니 호장공의 정확한 생존년월은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4세 밀직공(密直公) 수(秀)의 계축호적(癸丑戶籍) 등을 기초로 할 때 응주는 고려 희종(1205∼1211)대인 1200년초 반남에서 생장(生長)해 고려 고종(1214∼1259) 때에 반남 호장(戶長)으로 있으면서 반남박씨 가문을 열게 되며, 응주의 현손(玄孫)인 상충(尙衷) 대에 와서 가세가 크게 번성, 명문가로서 기틀을 다지게 된다.
이후 조선 태종 때 박은이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진봉되면서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하고 누대에 세거해 온 반남을 본관으로 삼게 된다.
박상충은 경사(經史)와 역학에 능통하고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이자 6세손 은도 조선초 방원(태종)을 도와 공신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아들 3형제와 함께 가문을 빛내 오늘날 후손들이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나주 반남에서 태어난 평도공(平度公·1370∼1422) 박은은 상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조밥을 먹고 살 만큼 청빈했으며, 은의 맏아들 규(葵)도 세종때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치사(致仕)했고 차남 강(薑)은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을 도와 좌익삼등공신으로 금천군에 봉해져 경주부윤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아우 훤(萱)과 함께 이름을 떨치게 된다.
훤의 아홉 아들 중 둘째인 8세 숭질(崇質)은 연산군때 좌의정을 지내다 왕의 실정을 개탄, 일부러 말위에서 떨어져 부상당했다며 등청하지 않아 중종반정후 매서운 정치 보복에도 화를 면해 가문의 융성을 지속시켰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세손인 미(彌·1592∼1645)는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1603년 선조의 다섯째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해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으며, 반남박씨의 첫 족보를 만들게 된다.
이후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로 15세손인 세채(世采·1631~1695)는 반남박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동국 18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돼 문묘에 배향됐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영의정 신흠(申欽)의 외손자로 태어난 박세채는 숙종조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당쟁완화에 진력했으며, 특히 예학에 밝아 육례의집(六禮疑輯)·남계예설(南溪禮說)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했으며, 문집으로는 ‘남계집’이 있다.
또 조선 실학파의 대가이자 반남박씨 20세손인 지원(趾源: 1737∼1805)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지돈령부사 박필균의 손자로 태어나 정조때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당시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의 영수가 돼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김정희, 김홍도와 더불어 문예 3대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특히 양반전과 허생전을 저술했으며, 홍대용과 더불어 태서지구설(泰西地球說)을 주장,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지원의 손자인 규수(珪壽)는 고종때 대제학과 공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평안감사 재직 당시 외국 상선이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 그 상선을 불살라 버렸으면서도 자신은 일찍부터 개혁사상에 눈을 뜨고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나라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처럼 반남박씨는 국난이 있을 때 마다 불굴의 충의정신으로 나라에 많은 공헌을 해 왔으며, 장구한 역사의 흐름속에 시대 마다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다.
/특별취재반
+세종때 평도공 박은 석천암 건립 묘역 관리 후손 인성왕후.의인왕후 교지 내려 돌보게
- 문화재 반남박씨 시조묘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에 있는 호장공(戶長公) 묘역은 반남박씨의 성지로, 일명 ‘벌명당’으로 일컬어진다.
호장공 박응주(朴應珠)의 묘역은 조선 세종때 반남 출신인 평도공(平度公) 박은이 묘역 보호를 위해 현 상로재(箱露齋) 북편 언덕에 석천암(石泉庵)을 건립했는데, 영조 15년인 1739년 10월 화재로 소실됐고 중건할 때 현재의 석천리로 옮겨 중건했다.
이후 반남박씨 후손인 인성왕후(인종·11세손)·의인왕후(선조·13세손)가 교지를 내리는 등 정성을 다해 묘역을 관리하게 된다.
광해군 때 13세 동열(東說·1564∼1622, 형조참의)이 나주목사로 부임해 와 표석(表石)을 개수했고, 숙종 35년인 1709년 박필명(朴弼明·1658∼1716, 사헌부 대사헌)이 안찰사로 와 표석을 다시 세웠다.
또 19세 도원(道源·1714∼1776, 사헌부 대사헌)이 안찰사로 와 상석(床石)을 개수하게 된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따르면 호장은 고려 성종때에는 향직(鄕職) 2품이었고 현종때에는 1품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호장은 군, 현의 으뜸가는 행정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반남박씨의 시조 호장공은 나주 반남지방 호족출신 행정관으로 그 당시의 관인이 석천암에 보관돼 있었으나 조선 영조 16년인 1740년 승려의 실화로 소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