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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0 - 랭카스트가의 헨리 5세, 프랑스와 100년 전쟁 "아쟁쿠르 전투!"
1066년 바이킹의 후예 프랑스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으로 쳐들어가 노르망디 왕조를
열었고, 1154년 프랑스 앙주 백작 헨리 2세는 영국으로 건너가 플랜타지네트 왕조를
세웠는데.... 그 후손인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1345년 맏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하니 백년 전쟁의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1377년에는 에드워드 3세가 사망
했고 장남 흑태자는 그보다 2년전인 1375년에 죽었기 때문에 손자가 잉글랜드 왕에
오르니 리처드 2세로 열살 어린 나이라 성년이 될때까지 삼촌인 곤트의 존이 섭정을 합니다.
열살에 즉위한 리처드 2세는 아름다운 용모에 심미안적 취향이지만.... 정세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했으며, 문학에 대한 취향이 뚜렷해 제프리 초서등 시인을 후원
했고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리처드 2세” 의 이미지로 알려졌는데 섭정 존은
부족한 재정 때문에 15살 이상 국민에게 "인두세" 를 매겼다가 크게 반감을 삽니다.
수도원의 부정 축재는 은밀히 폭로되었으며... 농민의 봉기를 선동하는 문서들이 돌아 세금
징수원과 농민의 마찰을 계기로 1381년 농민반란인 “와트 타일러의 난” 이 일어났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런던까지 진격하니 국왕과 신하들은 모두 "런던탑" 에 피신합니다.
농민군 무리는 런던탑 까지 점령하고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재무장관 등 요직의 인물들을
참수하니 이때 리처드 2세는 농민 반란군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대담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와트 타일러가 리처드 2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타일러가 데리고 온 수천의 농민군이 그가 죽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었으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고 리처드 2세의 부하들마저 도망가려고 했는데, 이때 만 14세의
리처드 2세는 오히려 농민군 앞으로 말을 몰고 달려나와 자신이 왕임을 선언하면서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명령하자 놀랍게도 농민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소년 왕을 떠받들게 됩니다.
이는 중세 사회에서 신의 기름 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서의 왕의 권위가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인데 농민 반란군이 해산하자 이후 리처드 2세는
농민군들의 뒤통수를 치니.... 약속을 폐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란 가담자는
철저히 응징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이후 지배계급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커집니다.
농민 반란으로 런던이 점령되었으니 섭정인 '곤트의 존' 은 위상이 추락했고 1389년 조카 리처드
2세가 성년이 되어 직접 통치를 시작하자... 곤트의 존은 아내의 친정인 스페인 카스티야 왕가
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것을 기회로 보고는 그곳에서 왕을 해보겠다면서 잉글랜드를 떠납니다.
리차드는 15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카를 4세의 딸 앤과 결혼하니...
부부사이는 화목했고 아내를 사랑했지만 12년후인 1394년 앤은 후계자를 낳지 못한채 흑사병
에 걸려 요절하니 리처드 2세는 큰 충격을 받았으니 쉬엔 궁전(Sheen Palace)을 허물어 버립니다.
섭정 존이 영국을 떠난 후 글로스터 백작 토머스는 의회에서 국왕의 측근들을 제거해 나가는
데.... 그러자 리처드 2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1397년부터 '청원파' 에 대한 숙청에
나서 존의 아들 헨리가 상속받을 영지까지 몰수하려들자 헨리는 왕위 찬탈을 계획하게 됩니다.
리처드 2세는 1397년 프랑스 샤를 6세의 딸로 7살인 이사벨라와 두번째 결혼을 통해 프랑스
와 화해하고 세력을 키우려고 하자 프랑스에 패배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귀족과
평민 모두 반감을 사니......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한 틈을 타서 헨리 볼링브로크는
궐기해 리처드 2세를 잡아 왕위를 찬탈하니 리처드 2세는 1400년 2월말 감옥에서 죽습니다.
곤트의 존의 아들 헨리 볼링브로크가 헨리 4세로 왕위에 오르는데 그는 플랜타지네트 왕조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지만, 학계는 랭카스터 왕조로 보는데...... 생모를 일찍 여의고
가정교사였다가 아버지 존의 정부가 되었고 결국 존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캐서린에
의해 양육되었는데, 헨리 4세는 양모 캐서린 및 그의 4명의 소생들과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양모 캐서린이 휴 스와인포드경과의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토머스 스와인포드에게 헨리
4세는 폰트프랙트성의 치안 및 관리를 맡겼는데 리처드 2세는 이 성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니... 헨리 4세 즉위 후 리처드 2세의 복위를 꾀하는 반란이 일어난
직후라 토마스와 헨리 4세 사이에는 모종의 밀약 및 유대 관계가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리처드 2세가 폐위되고 헨리 4세가 즉위할 당시, 잉글랜드에는 또 다른 왕위 상속권자가
있었으니 에드워드 3세의 두번째 아들 라이오넬의 외증손자인 에드먼드 모티머
백작으로, 헨리 4세의 아버지인 곤트의 존은 에드워드 3세의 세번째 아들이었다는
점은 불리하게 작용했으나 에드먼드가 7살에 불과했던 반면 헨리는 32살의 나이였습니다.
동양에서라면 시집간 공주의 손자, 성씨도 다른 외증손자 보다는 왕의 아우가 왕위를 차지하는게
당연하지만 유럽은 외손자가 더 우선권이 있었는데.... 동양은 왕비의 소생이 아닌 서출도
왕위를 이을수 있으니, 조선의 선조 임금은 중종과 창빈 안씨의 차남인 덕흥군 이초와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삼남으로 왕자도 아니지만 왕이 되었으나..... 유럽은 서출은 불가능 합니다.
헨리 4세는 첫 왕비 메리가 죽자 1403년 나바르 왕국의 조안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했는데 조안은
브리트니 왕국 존 5세의 미망인으로 4남 4녀를 두고 있었지만 헨리 4세와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으나, 헨리 4세에게는 이미 4명의 왕자가 있었으니, 헨리 5세는 다음 왕위를 계승합니다.
헨리 4세는 탄탄한 일가를 이루어 랭커스터 가문이 왕조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으나 왕위 계승
정당성에 대한 시비로 치세기간 내내 반란, 음모를 진압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했으니.....
자신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세력들과는 협력과 균형 관계를 유지하는데 통치력을 집중 했습니다.
헨리 4세의 권위는 정통성이 아닌 의회와 교회로부터 나왔으므로 의회의 요구에 협조적이었으니
시민 권력을 대표하던 하원의 요구에 헨리 4세는 반대하지 않아고, 치세의 대부분을 크고 작은
반란을 진압하느라 전쟁 비용이 필요했는데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갖고 있던 곳은 하원이었습니다.
전쟁 비용이 필요했던 왕은 하원에 의존하는 편이었고, 하원은 과세에 동의해 주는 대신
1404년에는 의회 안에 왕에 대한 조언을 하는 자문회의를 둘 것을 요구했으며
왕에게 회계에 대한 감사까지 요구했는데.... 왕은 이를 모두 수락했으니
1407년에는 하원이 단독으로 재정에 관한 법률을 제출할 수 있는 권한 까지 확보합니다.
교회는 헨리 4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해준 또 하나의 세력이었으니 대주교는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여 대관식을 주재함으로써 위상을 높여주었고, 헨리 4세는 교회에 협조했으니
교회의 관심사는 이단 처형이었는데... 랭커스터 왕조의 치세 기간 왕들은 이단 처형
에 적극 협조했으니 교회의 사치와 성직주의에 반대하는 롤라드파가 잔존하고 있었습니다.
롤라드파는 가난하고 미천한 이들 속에서 위클리프 사상을 전파하며 지하에서 성서를 영어
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여 1390년대에 완성했으니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
했으며... 1401년 주교들은 이단자를 화형에 처할 수 있게 하는 법을 선포했고 국왕은 이에
협조해 교회가 롤라드 파를 숙청할 수 있도록 돕고 대신에 교회를 지지 세력으로 삼았습니다.
첫번째 반란은 리처드 2세가 감옥에서 살아있던 1399년 말, 리처드의 이복형인 헌팅던 백작
일파가 헨리와 그의 아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품고 일어났으니 1400년 초 윈저성
까지 점령했으나, 헨리 4세는 의회의 지지에 힘입어 군대를 파견하고 음모자들을
체포하며 반란 진압에 성공했고.... 리처드 2세는 폰트프랙트성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두번째 반란은 웨일스에서 일어났으니 잉글랜드인들이 웨일스 소작농들을 착취하면서 웨일스
인의 불만은 커지자 1400년 웨일스 귀족 오와인 글린 두어가 반란을 주도했는데...
잉글랜드 정부가 웨일스인을 더욱 탄압하는 법령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웨일스
전 지역에서 민족운동 처럼 확산되었고 잉글랜드 내부 불만 세력까지 가담하면서 확대됩니다.
반란 세력에는 에드먼드 모티머 백작 및 퍼시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모티머 백작은
헨리 4세와 함께 왕위계승권 후보자였던 에드먼드 모티머의 삼촌이었는데 글린두어
에게 체포되었을 때 헨리가 그를 적극 구명해주지 않자 글린 두어 편에 가담하게 됩니다.
퍼시 가문은 1399년 반란 당시에 헨리 4세의 지지 세력이었으나 1402년 스코틀랜드 침공에서
퍼시 가문이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퍼시 가문이 생포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몸값
을 그들이 소유하는 것을 헨리 4세가 허가하지 않자 국왕의 반대 세력으로 돌아선 터였습니다.
글린 두어, 에드먼드, 퍼시 가문등 반란 세력은 헨리 4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를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지만.... 그러나 헨리 4세의 군대는 슈루즈베리 전투에서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는 퍼시 가문의 노썸벌랜드 백작 부자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후 1405년 웨일스에서는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으며 노썸벌랜드 백작과 요크 대주교,
토머스 모우브레이 등이 헨리에게 잡혀 있던 에드먼드 모티머를 왕위에 올리고자
공모했으나 진압되었는데... 그들은 헨리 4세가 청원파였던 시절 함께 리처드 2세
에 대항했던 동지였으며 웨일스의 민족 영웅 글린 두어마저 고립되면서 소멸되었습니다.
1408년 이후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잉글랜드 전역과 스코틀랜드 일부, 웨일스까지 아우르는
지역에서 지배권을 굳혔고 의회와 교회 세력의 지지를 얻어내면서 헨리 4세의
통치 말기는 안정을 이루었으나... 말년에 쇠약해진 헨리 4세는 발작을 일으켰으며
왕세자 헨리가 반대 세력에 서서 부왕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부자간에 갈등은 심각해집니다.
특히 왕세자 헨리가 부왕의 대 프랑스 정책에 반대하자 왕은 애런들 주교의 도움으로
왕세자 일파를 자문회의에서 추방했고, 차후에는 왕세자 일파가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왕세자와의 불화가 심해졌으니... 이때 방황하는 왕세자 헨리와
방황과 야심, 권력욕에 대한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1, 2부에 묘사됩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에는 왕세자 헨리가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이상적인 군주
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이 묘사되니...... 왕세자 헨리는 국왕인 아버지 헨리 4세를
등지고 왕궁에서 나와 폴스타프를 비롯한 방탕한 친구들과 어울리지만 반란군의
소식에 주위를 기울이면서 언젠가는 이를 물리치고 명예를 회복할 것을 다짐 합니다.
결국 5막에서 헨리는 치열한 전투 끝에 성급한 퍼시 가문의 아들 홋스퍼를 쓰러뜨리고
명예를 회복하며 왕세자의 권위를 찾는데... 폴스타프는 희극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왕세자의 권위를 회복시키자 버려지는데, 본 작품은 역사적 사건과 희극적인
인물 및 당시 영국의 도시 및 변두리의 생활상을 적절히 결합하여 사실성을 표현했습니다.
작품에서 헨리는 왕세자로서의 권위 회복을 요구하는 진지한 세계와 탈권위적이며 활달한
폴스타프의 세계 사이의 경계에서 유랑을 즐기다가 결국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선택하며 이상적 군주의 세계에 입성하는데... 작품에서 헨리 4세는 거듭되는 반란과
동지들의 배신을 겪으며 초조해 하고, 아들조차 못마땅해 하는 성마른 왕으로 묘사됩니다.
헨리 4세는 1405년부터 사망하던 1413년까지 몇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발작을
일으켰으니 피부병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반란 진압후 요크 대주교
리처드 드 스크로우프와 한때 청원파 동지였던 토머스 모우브레이를
처형한 이후에 심해진 병세로 1413년 3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사망합니다.
헨리 4세는 젊은 청원파 시절부터 국왕으로 재위하던 기간까지 온갖 난관을 겪었지만 결국 랭커스터
가문을 하나의 왕조로 정착시켰고 아들인 헨리 5세에게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프랑스왕 샤를 6세가 정신질환 증세를 앓았던 탓에 특별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는게 그의 치세 안정
에 도움이 되었지만 재정적 취약성은 랭커스터 왕조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몰락한 원인을 제공합니다.
헨리 5세는 1387년 헨리 4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듬해 부친은 리처드 2세의 박해
를 피해 망명했지만 어린 헨리는 잉글랜드에 남았으니.... 음악과 독서를 좋아하는
소년으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413년에 즉위한 그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최초의 잉글랜드 왕으로 알려집니다. 영어로 대화하는 최초의 영국 왕이라?
헨리 5세의 전투실력은 청소년 시절 헨리 4세를 따라갔던 웨일스 원정에서 길러졌으니
1400년 이후 여러차례 웨일스 원정을 수행했는데.... 훗날 프랑스에서
헨리가 채택한 협공작전과 기마행군에 의한 파괴작전 및 육지와 해상을 통한
합동작전으로 왕위에 오를때 이미 10년 이상의 전투 지휘 경력이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헨리 5세는 2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거친 행동을 삼가고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탁월한 지도력을 과시했으니... 프랑스로 원정을 떠나 7년 이상을
잉글랜드 외부에서 지내도 문제가 없을만큼 안정된 왕국을 이어받았으니 통치 초기
반란을 꾸미는 무리를 포착했을때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왕권을 빠르게 안정시켰습니다.
웨일스 공의 지위로 통치와 전쟁에 대한 경험을 쌓았던 그는 유능하고 활기 넘치는 군주의 모습을
보였으니..... 프랑스에 가 있는 동안에도 확고하고 활기찬 통치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에드워드 3세 보다 뛰어난 전쟁수행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랭커스터 왕조의 절정기를 이루었습니다.
헨리 5세의 주된 관심은 내적 왕권강화 보다는 프랑스의 영토를 되찾는데 있었으니 증조부
에드워드 3세의 기개를 이어받은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망이
컸는데.... 정력적이며 용기있는 군인왕으로서 신이 그에게 프랑스를 정복할 특별한
의무와 재능을 부여했다고 자부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예루살렘 십자군원정도 공언합니다.
프랑스 원정 동기는 첫째, 부친 헨리 4세나 조부 곤트의 존에 대한 부정적 민심을 충성심으로 전환
시키려는데 있었으니.... 즉위 초부터 외국 원정을 통해 에드워드 3세 때와 마찬가지로 공동의
적을 통해 국력을 결집시켜 잉글랜드 통합을 도모하고 영광과 명성을 얻을수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둘째, 당시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파로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는 군주인 샤를 6세가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샤를 황태자가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상황이라 왕권이 약화되어 있는
기회를 노렸던 것이며.... 또 1360년대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던 프랑스의 군사력도
다시 약화되어 취약한 상태였으니 프랑스 완전 정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헨리 5세는 에드워드 3세 때와 마찬가지로 내란 상태의 프랑스 분열을 틈타 프랑스의 귀족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려 하였으니... 부르고뉴파와
동맹을 확보하고 전쟁 준비를 은폐하기 위해 아르마냑파(오를레앙 파)와 공개적인
협상을 벌였으며 넓은 영토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에 프랑스 왕위계승권 까지도 생각했습니다!
1414년 8월에 파리에 파견된 잉글랜드의 사절은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과 노르망디, 투렌, 멘, 앙주, 브르타뉴, 플랑드르, 그리고 아키텐 전체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요구했으니.... 프랑스는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거부하는
대신에 가스코뉴의 양도, 공주와의 결혼, 그리고 거액의 보상금 지불 등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헨리는 1415년 6월에 다시 유사한
요구를 내걸었고 만일 프랑스가 이를 거부할 경우 무력으로 이들 영토를
회복하고 프랑스 왕관을 차지할 것이라고 압박했는데.... 영국의 귀족과 주교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젊은 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합니다.
“헨리 5세(Henry V)”는 미국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의 1944년 로렌스 올리비에 를
주연으로 만든 영화이니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는데, 2019년에는 데이비드
미쇼 감독이 티모시 샬라메, 조엘 에저튼, 로버트 패틴슨 주연으로“더 킹 헨리 5세”
라는 영화를 출시했으니..... 몇년전에 해운대 영화의전당에서 본 기억이 떠오릅니다.
1415년 8월 헨리는 2,000명의 중무장 기병과 6,000명의 궁수 그리고 약간의 포병대를
이끌고 사우샘턴을 출항했는데.... 원정군은 5주 동안 치열한 포위전 전투를 치릅니다.
영국군은 아르플뢰르항을 점령하여 노르망디에 진격 거점을 마련했으며 오랜 전투로
병사들의 기력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칼레를 향해 북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두 당파도 집안 싸움을 멈추고 화해를 하고 집결하니 영국군 보다 5배나 많고
우월한 기병을 거느린 프랑스군은 칼레 남쪽의 "아쟁쿠르"에서 영국군의 길을 막았습니다.
10월 26일 프랑스군은 예전부터 해 오던 전투방식대로 중무장한 기사들의 전통적
방식으로 돌진해오자, 영국군은 세심하게 궁병들을 배진하고 그 앞에 뾰족하게
깎은 장대를 꽂아 돌진하는 말들을 놀라게 함으로써 프랑스 기병들을 물리칩니다.
이에 중무장한 프랑스 보병들이 진흙탕 속으로 밀고 들어오니 결국 영국 보병들
이 이들을 격퇴하자.... 궁병들이 흐트러진 프랑스군 대열 속으로 뚫고 들어가
이들을 섬멸했으니 프랑스군 5,000명이 전사했는데, 그중에는 공작 3명에
백작 5명, 남작 90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밖에 1,000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반면에 영국군 전사자는 300명이 채 못 되었으니 이 같은 대승리는 궁병의 기능과
우수한 규율 및 조직의 덕택이었는데..... 잘 훈련된 정예 보병대가 규율
없는 프와티에의 승리를 능가하는 아쟁쿠르에서의 승리는 유럽에서 잉글랜드의
위신을 되살렸으며, 헨리 5세는 영국민들에게 영광스러운 영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1415년의 원정은 탐색전이었고 "아쟁쿠르" 에서의 승리는 영국의 전통적인
전술이 프랑스 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으니....
승리에 고무된 헨리 5세는 1417~ 1420년에 노르망디 정복에 전력을 기울였고, 노르망디
는 주변 지역들과 헨리 치세 동안은 물론 그 이후에도 전쟁의 주된 무대가 되었습니다.
1417년 헨리 5세는 다시 프랑스에 침입하여 캉, 바이외, 셰르부르등 노르망디의 도시들을
공략해 노르망디의 수도 루앙을 점령하고는 여세를 몰아 일-드-프랑스까지 위협하니....
프랑스의 두 당파 중 1419년 왕세자의 추종자가 부르고뉴공을 살해하자 필립 선량공은 복수
를 맹세하고 헨리와 동맹해 1420년 정신병이 재발한 왕을 종용해 트루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인 캐서린 공주를 왕비로 맞게 해줄 것과 두 사람 사이에 난 아들이
프랑스와 영국의 왕이 되는데 서명해 줄 것을 요구하니.... 에드워드 3세가 살릭법 때문에
프랑스 군주가 될 수 없었던 전철을 밟지 않고 프랑스를 차지하려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트루아 조약으로 영국왕 헨리 5세는 샤를 6세 사후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기로 했으며
샤를의 딸 캐서린과 결혼하여 그때까지 섭정하기로 했으니, 결혼 후 캐서린은
안성맞춤으로 장차 헨리 6세가 될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하늘은 영국 편인 것 같았습니다.
프랑스는 상황이 복잡했으니 부친의 왕위를 계승하게 될 도팽 왕세자(샤를 7세) 는
모후 이사보 왕비가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공과 불륜을 저질렀던 일이
발각되어 그의 출생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왕위계승권을 헨리 5세에게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부 프랑스는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조약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니.... 훗날 도팽 왕세자는 "잔 다르크" 의 활약으로 프랑스의 왕위에 오릅니다.
1421년 헨리 5세의 동생인 클래런스공 토머스가 보제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
하고 살해되자 헨리 5세는 다시 프랑스를 침략하여 드뢰를 점령
했으며 르와르강 이북의 프랑스땅 전체가 영국왕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자만 호사다마라고나 할까요 ? 헨리 5세 영국왕은 1422년 모 시를 포위 공격하던 도중에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다가 뱅센성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서 35살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사망합니다.
헨리5세는 샤를 6세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프랑스왕이 되지는 못했는데... 이어 프랑스왕이
되어야 할 헨리 6세는 당시 강보에 싸인 새후 9개월에 불과한 어린애였기 때문에 부친
의 꿈을 실현할 수 없었고, 반면에 헨리 6세가 계승한 것은 외조부의 정신질환 뿐이었습니다.
헨리 5세는 재위 기간이 불과 9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허약한 나라를 맡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나라를 만들었으나 그가 당대에 강대국으로 만들어놓았던 잉글랜드의 영광
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나.... 그의 업적은 후세에 중요한 정신적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16세기에 잉글랜드가 당대의 가톨릭 강국이었던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르는 위급한 상황
에서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헨리 5세” 라는 희곡을 통해 과거 프랑스와의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의 대승을 이끌었던 헨리 5세의 용맹과 혁혁한 공적을 상기시킵니다!
스페인은 당시 신대륙을 발견해 아메리카대륙에서 금은을 실어와 부유해진데다가
신성로마제국과 혈통관계인지라 유럽의 대국이었으니..... 위축된 잉글랜드인
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점을 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