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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尹斗緖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조선 후기의 문인(文人) 화가이다. 본관은 해남이고, 자(字)는 효언(孝彦), 호(號)는 공재(恭齋) 또는 종애(鍾崖)이다. 겸재 정선(鎌齋 鄭敾),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그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증손자이다. 169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그는 당시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南人)계열이었고, 당시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1712년 45세 되던 때에는 전라남도 해남의 연동(蓮洞)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시.서.화(詩.書.畵)로 생애를 보냈다. 그는 경제, 병법, 천문, 지리, 산학, 의학, 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새롭게 대두되던 실학(實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화가(畵家)로서 특히 인물화(人物畵)와 말(馬)을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한 일반 회화작품은 대체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인물화와 말 그림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현재 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自畵像) "윤두서상 (尹斗緖像) ... 국보 제240호"을 들 수 있다.
윤두서의 일생
날카로운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는 윤두서(尹斗緖)는 숙종(淑宗) 연간에 활약한 선비 화가로 조선 중기에서 조선 후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새로운 회화관(繪畵觀)과 새로운 화법(畵法)에 입각한 새로운 경향의 그림을 제시한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이었다. 조선 후기는 '금강산도'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의 진경산수(眞景山水), 그리고 김홍도(金弘道)로 대표되는 풍속화(風俗畵)가 화단을 휩쓸던 시기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또는 '혜원 신윤복'의 이름은 기억할지 몰라도 그들의 선구자(先驅者)라고 할 수 있는 윤두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윤두서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그는 원대한 인간적 크기를 갖고 살아간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며 학자이고, 사상가이면서 또한 예술가 이었다. 우선 그의 집안을 살펴보더라도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가 그의 증조부이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그의 외증손이 된다. 즉 정약용의 외할아버지이다.
또한 그의 첫번째 부인(婦人)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한 이수광(李粹光)의 증손녀(曾孫女)이며, 그와 단짝을 이룬 벗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이었다. 이들 모두가 훗날 실학(實學)이라고 부르는 학문적, 사상적 경향의 한복판에 있었던 학자들이었다. 이 점이 바로 윤두서의 삶과 학문(學問)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藝術)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배경(背景)을 이루는 것이다.
윤두서의 관심은 다방면에 걸쳐져 있었다. 유학(儒學)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점술, 측량, 병법 등 다방면에 걸친그의 학문은 단순한 지적(知的) 호기심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 당시 태동하고 있던 실학(實學)이라는 학문이 갖고 있는, 몸으로 체득하고 일로 증명하는 " 실득(實得 ) "의 측면에서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그의 화풍(畵風)과도 연관되었다.
조선시대에 극심하였던 당쟁(黨爭) 속에서 실세를 잃고 몰락해 버린 남인(南人)에 속해 있던 그는 일찍이 정치적 출세(出世)와는 담을 쌓아야 했다. 이러한 정치적 출세의 좌절과 더불어 그의 나이 22세 때 부인의 죽음으로부터 연이은 친척들의 죽음 속에서 불운한 30대를 보내야 했다. 윤두서는 4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2권의 문집(文集)과 화첩(畵帖)을 남겼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瑢)에 의해 계승되었다.
윤두서의 그림세계
윤두서가 남긴 그림은 매우 많다. 동물과 식물, 풍경, 노승, 인물, 풍속 등 그가 선택한 그림의 소재(素材)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중 <유하백마도>, <노승도>, <채과도>, <석류매지도>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는 지도(地圖)도 그렸다.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는 보물 제481-3과 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때 윤두서 생존 당시 해남윤씨 문중이 지도제작을 위해 얼마간의 재산을 들여 첩자를 일본에 보내곤 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된 적도 있었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윤두서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었던 심득경(沈得經)이 죽은 후 완성했다는 ' 정재처사심공진 (定齋處士沈公眞) '은 보물 제148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당시의 일반적인 선비 영정과 달리 작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나 입체감을 내고자 의습선(衣褶線)과 의자(椅子) 부분에 음영법(陰影法)을 사용한 점 등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나물 캐는 여인>, <짚신 삼기>, <수하독서도>, <송하납량도> 등 처럼 일상과 풍경이 어우러진 작품들도 많이 남겼다. 그는 김홍도(金弘道)로 이어지는 풍속화(風俗畵)의 시작(始作)이었다. 인물은 빼고 풍경만 그린 그림들도 많다.
자화상 自畵像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自畵像)은 국보(國寶)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최고(最高)의 초상화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이 그림에서 윤두서는 한 올 한 올 생생하게 묘사된 풍성한 수염과 살짝 올라간 눈매에 약간 살집이 있고 다소 불그레한 혈기를 보이는 얼굴로 마치 용감한 장수처럼 보인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금기시(禁忌視)하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모습을 정면상(正面像)으로 그린 점에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며, 서양화법에서 유래된 음영법(陰影法)을 구사한 최초(最初)의 초상화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조선시대의 자화상
중국의 경우 이미 한(漢)나라 시대부터 조기(趙崎)라는 사대부 화가가 자화상을 그렸지만, 우리의 경우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이 "조경자사도(照鏡自寫圖 ...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를 그렸다는 것이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수記言)에 기록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시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후대에 그려진 몇 점의 자화상이 전해지는데, 때로는 "강세황 자화상(姜世晃 自畵像)"을 윤두서의 자화상 다음 가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강세황(姜世晃)의 자화상은 여러 점 전해오는데, 그 중 오사모(烏紗帽)에 옥색 도포를 입은 전신좌상(全身坐像)이 가장 잘 알여져있다(위 사진). 이 자화상은 몸은 조정(朝廷)에 있지만, 마음은 자연(自然)에 있는 자신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그 안면(顔面) 각도나 표정은 이명기(李命基)라는 직업 화가가 그려낸 " 강세황상 "과 똑같으며, 모두 면전에 있는 대상인물을 충실하게 세밀히 그려내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자화상 가운데 한 점은 임희수라는 아이에게 고쳐받았다고 할 정도로 강세황 자신이 그림 실력에 확신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썩 뛰어난 그림실력을 지니지는 못했다고 여겨진다.
이광좌(李光佐)의 자화상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탕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의 반신상(半身像)인데, 화면에 쓰인 자평(自評)에 의하면, " 콧마루가 약간 닮았을 뿐 눈도 전혀 닮지 않았고, 입술에는 반가운 기색이 없으며, 흰 동자에는 묘리가 없고, 검은 눈동자에는 정기가 없다 "는 등 자신의 자화상을 두고 신랄한 자기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윤두서 자화상
화면 가득히 박진감이 넘친다. 윗부분이 생략된 탕건(宕巾), 정면을 독바로 응시하는 눈, 꼬리부분이 치켜 올라간 눈매, 잘 다듬어져 양쪽으로 뻗힌 구렛나릇과 긴 턱수염, 약간 살찐 볼, 적당히 힘주어 다문 두툼한 입술에서 우리는 윤두서의 엄정(嚴正)한 성격과 아울러 조선 선비의 옹골찬 기개(氣凱)를 읽을 수 있다. 화법은 깔끔한 구륵(鉤勒 ... 동양화에서 윤곽을 가늘고 엷은 쌍선(雙線)으로 그리고 그 가운데를 색칠하는 화법) 선(線)으로 안면의 이목구비를 규정하는 필법이 아니라 18세기 당시의 초상화법대로 붓질을 여러 번 가하여 얼굴의 오목한 부위를 시사하고 있다. 귀로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수염은 한 올 한 올 정성을 들려 그려냈는데, 마치 안면(顔面)을 앞으로 밀어 올리듯 부각시켜 주는 형상이다. 그리고 점청(點晴)의 맑음은 고개지가 말했던 바 전신사조(傳神寫照 ... 정신을 화면에 전달해 내는 것)의 효과를 십분 거두고 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종이바탕에 엷은 채색을 한 그림으로 1710년에 제작된 것으로 전하며, 다른 자화상과는 달리 상용형식이나 표현기법에 있어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그림은 이성을 성찰하는 철학적인 짙은 훈기를 느끼게 하고, 그 털끝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정기(精氣)어린 그의 선묘(線描)된 모습에는 사실(寫實)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윤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정시(正視)하고 있는 자세로 오랜 준비 끝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윤두서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화폭 가득히 안면(顔面)만을 사출(寫出)하였는데, 자아인식(自我認識)이 매우 수준 높게 묘사되어있다. 우선 안면은 보는 사람이 정시할 수 조차 없으리만큼 화면 위에 박진감이 들어차 있는데, 자신과 마치 대결을 하듯 그려져 있다. 화법은 당대의 기법을 응용하여 안면은 깔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붓질을 가하여 그 붓질이 몰리는 곳에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게끔 하였다.또한 이 화상에서는 점정(點睛)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다지 많지 않은 연발수(蓮髮鬚) 형태의 수염이 안면을 화폭 위로 떠밀 듯이 부각시키고 있다.
이 자화상의 눈매는 상당히 매서워 첫 인상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壓倒)하고 있다. 또 활활 타오르는 듯한 수염은 내면(內面) 깊은 곳에서 기(氣)를 발산하는 듯하다. 그렇게 이 그림을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점차 으스스한 느낌이 돌고 결국은 어느 순간 섬칫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인물은 정면상으로 정확한 좌우대칭(左右對稱)을 이루고 있으며, 입체감(立體感)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극사실(極事實)로 그려진 이 그림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목과 상체도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화면 상반부로 치며 올라가 있다. 덩달아 탕건(宕巾)의 윗부분도 잘려져 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正面)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런 초상화가 무섭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자화상의 비밀
그동안 이 조선 최고의 자화상을 두고 의견이 분분(粉粉)하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초상화들은 상반신(上半身)은 물론 심지어는 버선이나 신발까지 그린 것들이 대부분인데, 윤두서가 자신을 그린 초상화는 옷은 물론 귀와 목이 없이 얼굴만 뎅그러니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증손자(曾孫子)로 명문가에서 태어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면서도 끝내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화가로 평생을 마감한 그의 삶과 연관시켜 그림의 의도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이 얼마 전에 밝혀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보존과정에서 사라진 것일 뿐, 현미경과 X선 투과촬영, 적외선, X선 형광분석법 등으로 분석해 본 결과 귀와 몸체의 옷깃, 옷 주름의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자화상을 대하는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그림의 비정상적(非正常的)인 구도(構圖)와 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생략(省略)으로 거의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이때문에 놀랍도록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아니 묘사가 사실적인 만큼 더욱 더, 몽환 중에 떠 오른 영상처럼 섬찟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이 그림에서 보이는 충격적(衝擊的)인 회화(繪畵) 효과는 결코 조선의 사대부(士大夫)가 추구하던 윤리도덕과 거기에 근거한 당시의 미감(美感)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신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터럭과 피부 한 점이라도 감히 다치고 상하게 할 수 없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당시 관념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를 떼어내고 신체를 생략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도저히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그림이 작가 윤두서가 의도(意圖)한 결과물(結果物)이 아니라 우연히 작업이 중단된 미완성작(未完成作)이라고 추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완성 작품
이러한 의심(疑心)을 품고 있던 1995년 가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집하고 조선총독부가 1937년 발행한 " 조선사료집진속 (朝鮮史料集眞續) "이라는 책의 제3집에서 윤두서 자화상(自畵像)의 옛 사진(아래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진 속의 윤두서 모습은 지금 작품과는 달리 도포(道袍)를 입은 상반신(上半身)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결과 현 작품에서 몸 없이 얼굴만 따로 떠 있는, 거의 충격적이라 부를만큼 지나치게 강하기만 하고 날카롭기만 했던 ' 자화상 (自畵像) ' 속 윤두서(尹斗緖)의 인상(印像)이 원래는 훨씬 어질어보이는 얼굴에 침착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띠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라진 귀와 옷
그러면 원래 있었던 자화상의 귀와 상반신 윤곽선이 그 후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진 것일까? 그 비밀은 유탄(柳炭)으로 그려진 것에 있다. 유탄(柳炭)이란 요즘의 스케치연필에 해당하는 것으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가는 숯이다. 이것은 화면에 달라붙는 점착력(粘着力)이 약해서 쉽게 지워진다. 그리하여 데생하다가 수정(修正)하기 편리하므로 통상 밑그림을 잡을 때 사용하였다.
그런데 자화상의 경우, 중요부분인 얼굴부터 먹선을 올려 정착시키고, 몸체는 우선 유탄(柳炭)으로만 형태를 잡는 과정에서 그 몸에 미쳐 먹선을 올리지 않은 상태, 즉 미완성(未完成) 상태로 전해오다가 언젠가 그 부분이 지워져 버린 것이다. 아마도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벗기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아예 지워버리게 된 것이다.
결국 초상화 중 유일(唯一)하게 국보(國寶)로 지정된 윤두서 자화상은 미완성 그림이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 조선 초상화의 최고 걸작(傑作)이며 파격적(破格的)인 구도(構圖)를 지닌 완성작(完成作)이라고 여기었고, 그래서 국보로 지정된 이 자화상은 미완성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귀가 없었던 것이다. 또 완벽하게 마무리된 수염에 반하여 눈동자 선(線)이 너무 진하고 약간 생경(生硬)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완성작(未完成作)임이 드러났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작품의 예술성(藝術性)도 미완성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자화상은 미완성 그 자체로 완벽(完壁)하다. 비록 미완성작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마지막 손질이 더해지지 않은, 작가 자신에 대한 심오한 상념이 전개되는 과정, 그리고 생생한 자기 성찰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미완성작 속에서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완전성(完全性)을 감지하고서 그 이상의 작업을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화상에 담긴 내면의 모습
위와 같은 삶을 살아온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에 담겨있는 내면세계(內面世界)는 무엇일까? 조선시대를 통해 전무후무한, 박진감과 극도의 사실성이 담겨져 있는 이 자화상의 구도(構圖)를 분석해 보면 그의 참된 인간상(人間像)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자화상을 처음 대하고서 그 구도(構圖)의 특이함에 우선 놀라게 된다. 이 자화상은 머리와 그 위에 쓴 건(巾) 이외에 모두를 생략한 반면 극도의 사실성으로 털 오라기 하나라도 빠트림 없이 그려낸 동시에 초상화의 표현상 그렇게 어렵다는 정면관(正面觀)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구도(表現構圖)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외국의 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윤두서가 그의 자화상에 신체의 여러 부분을 생략한 의도는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즉 장식적(裝飾的)인 요소는 모두 벗어버리고 적나라(赤裸裸)한 자신의 진실된 모습에 접근하고자 함 일 것이다.
또한 과감한 생략과 동시에 엄정(嚴正)한 좌우대칭(左右對稱)을 통한 균형 속에서 이 그림은 단순성을 최대한으로 제고(提高)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극도의 구도적 단순성 (構圖的 單純性)은 스포트라이트와 같은 효과를 주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안면에 집중시키도록 유도하고, 그 안면에 표현된 윤두서의 강렬한 내면적 정신세계가 다시금 시선(視線)을 통해 보는 이에게 전달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중후(重厚)한 용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 볼륨있는 코, 꽉 다문 두툼한 입술, 남성적이며 근엄한 수염 등 이 자화상에는 그 용모의 중후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후함은 구도를 통해 더욱 증가된다. 만약 얼굴을 화면의 중앙에 설정하였다면 사방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하여 그 무게는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면을 화면의 윗부분에 걸어 놓은 듯이 배치함으로써 그림의 무게감을 증대시키고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하여 그의 중후한 성품을 그대로 전달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자화상은 엄격한 정면관(正面觀)을 취하고 있는데, 정면관의 경우 안면(顔面)묘사의 평면성(平面性)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윤두서는 이러한 문제를 눈과 코, 볼 주변에 음영(陰影)을 가함으로써 볼륨감을 얻어내어 해결하고 있다. 또한 좌우대칭의 구도에서 오는 단순함을 구불구불한 수염의 역동적 표현을 통하여 화면 전체에 운동감(運動感)을 부여함으로써 극복하고 있다.이 자화상에 드러난 특이한 구도를 통해 학문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그 자신에게 다그쳤을 철저한 엄격성과 불운(不運)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을 꼿꼿하게 지켜나간 선비의 옹골찬 지조(志操)를 엿 볼 수 있다.
육척도 안 되는 몸으로 /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붉고 윤택하여 / 바라보는 자는 그가 도사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 그 진실되고 자신을 양보하는 기품은 / 무릇 독실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네 / 내 일찍이 그를 평해 이르기를 풍류는 옥산 고덕휘 같고 / 빼어난 기예는 승지 조맹부 같다고 하였으니 / 진실로 천년 뒤에라도 그를 알고자 하는 자는 / 다시 먹과 채색으로 닮은 데를 찾을 필요 없으리
위의 글은, 윤두서(尹斗緖)의 친구이었던 조선시대 문인 이하곤(李夏昆. 1677~1724)의 문집 " 두타초(頭陀草) "에 수록된 찬시(贊詩) .. " 윤효언이 스스로 그린 작은 초상화에 찬한다. 윤효언자사소진찬 (尹孝彦自寫小眞贊) "의 내용이다.
죽은 벗의 모습을 떠올리며
윤두서와 절친했던 친구 중에 심득경(沈得經. 1629~171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심득경은 윤두서와 친척이 되기도 하였는데, 윤두서보다 나이가 다섯 살 어린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모두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열중한 벗이엇다. 심득경의 할머니가 윤두서의 증조부인 윤선도(尹善道)의 큰딸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심득경은 38세 되던 해인 1710년 8월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계속되는 지인(知人)들의 죽음으로 심신(心身)이 지쳐있던 윤두서는 절친한 벗인 심득경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였다. 윤두서는 살아 생전의 심득경의 모습을 떠올리며 심득경(沈得經)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석달만에 친구의 초상화를 완성하였다.
당시 사대부 양반 화가들은 산수화나 감상화를 주로 그렸고, 초상화는 잘 그리지 않았다.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화공(畵工 ...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中人 계층)의 일로 천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초상화는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닮게 그려야 하는 어려운 그림이므로 왠만한 실력으로는 엄두도 못내던 분야가 초상화이었다.
사진(寫眞)이 없던 시절,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닮게 그린다는 일은 지금으로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그만큼 윤두서(尹斗緖)의 슬픔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으며, 심득경이 얼마나 절친한 벗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윤두서는 완성된 심득경의 초상화를 그의 집으로 보냈는데, 그림을 본 심득경의 가족들이 생전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이 그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온 것처럼 느껴져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물 제 1488호
이 초상화의 크기는 160.3×87.7cm의 크기이며, 동파관(東坡冠)에 유복(儒服)차림을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좌상이다. 화면의 상단에 <정재처사심공진.定齋處士沈公眞>이라고 예서(隸書)로 쓰여 있다. 동파관(東坡冠)이란 조선시대 사대부가 편복(便服)에 쓰던 관이다. 조선 전기부터 명나라에서 전래되어 한말까지 사용되었다. 관을 쓸 때는 먼저 망건을 쓰고, 그 위에 탕건을 쓴 다음 관을 쓴다. 말총으로 만든 망건과 탕건 위에 말총으로 만든 동파관을 썻기 때문에 껄끄러워 벗겨지지 앟는다.
그리고 우측 상단에는 이서(李서. 1662~?)가 지은 찬(贊)을 윤두서가 썼으며, 왼쪽 상단에 다시 이서(李서)의 찬(贊)이 적혀 있다. 그리고 우측 아래쪽에 "維 王三十六年庚寅十一月寫時.公歿後第4月也海南尹斗緖謹齋心寫"라고 쓰여 있어, 윤두서가 슥종 36년인 1710년 11월에 추화(追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이나 의복의 묘사는 다소 과장과 형식화가 엿보이고 있어서 사실적 묘사로서의 초상회의 특징과 유형화된 표현을 위주로 하는 일반 인물화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靑竹畵史)"에 이 초상화에 대하여 기록이 있는데, 친구 심득경이 죽은 후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려 심득경의 집에 보냈는데 그림을 본 그의 가족들이 생전의 모습과 너무 똑같이 그려 마치 죽은이가 살아온 것처럼 느껴져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전한다.
유하백마 柳下白馬
버드나무 아래 흰말이 한 마리 나무에 매여 있다. 말 주인은 어디 갔는지 바람만 살랑살랑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고 있다. 말은 쫑긋 귀를 세우고 다소곳이 서 있다. 짧게 손질한 갈기가 단정하고 시원하게 보인다.
윤두서는 많은 말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말 그림 중 회화적 완결미가 가장 돋보이는 작품으로 크기는 34.3×44.3cm이다. 백마의 준수한 자태도 그렇지만 버드나무의 운치있는 표현으로 화폭에 청량한 기운이 들고있다. 그가 그린 말 그림이 상당수 전하고 있다. 말 그림에 있어서 그의 사실적인 묘사력은 세심한 관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말을 매우 좋아하여 자신이 아끼던 말을 타지도 않고 잘 길렀다고 한다.
후에 그 말이 죽자 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이야기가 현재도 그의 고향의 녹우당(錄雨堂) 앞에 있는 말 무덤과 더불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배경의 버드나무와 언덕은 형식적으로 그렸다기 보다는 실제로 말이 매여 있던 현장을 그대로 묘사한 듯 사실적인 느낌이 들고 있다. 이는 그가 아꼈던 백마를 그린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마상처사도 馬上處士圖
크기는 98.2×57.5cm이다. 말의 묘사가 정확하고, 인물의 자세는 의연하기만 하다. 말과 인물 그림 모두 회화사에 이름을 남긴 윤두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수작이다. 세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묘사가 정확하고 말 위의 선비의 자세는 의연함과 함께 강건함이 느껴진다.
노승도 老僧圖
윤두서가 그린 인물화이다. 종이 바탕에 수묵화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37cm, 세로 57.5cm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면의 왼쪽에 윤두서의 호인 "공재(공재):라는 백문도인이 찍혀 있다. 왼손에 염주를 감아쥐고 오른손에는 키보다 훨씬 큰 지팡이를 든 채 맨발로 소요하듯 걷고 있는 자태에서 도(道)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섬세한 필치로 묘사된 상념에 잠긴 노승의 럴굴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긴 지팡이와 굵고 진한 필선으로 묘사된 의습(衣褶)과 강한대조를 이루어 한층 돋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배경에 보이는 잎이 크고 줄기가 가는 대나무는 조선시대 묵죽(墨竹)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굵고 활달한 필치와 대담한 묵법(墨法)을 구사한 이 그림은 그의 뛰어난 인물화 기량을 잘 입증해주고 있다. 특히 일필휘지로 화면에 내려 그은 지팡이(錫杖)의 표현은 각도의 굵기의 변화를 통하여 뛰어난 회화적 효과를 낳고 있다.
그림은 보는 이의 몫이기도 하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 그림을 감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린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과 그 시대를 관통하고 있던 철학 내지는 세계관 또는 사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림에는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품성과 그 시대를 살면서 그가 지향했던 삶의 모습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그 사람이 어느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며, 어떻게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철학의 중심에는 "陰陽五行"의 이치가 있다. 음양이란 말 그대로 陰과 陽을 의미하며, 이를 陰은 물질, 陽은 정신, 하늘과 땅, 여자와 남자, 찬 성질과 더운 성질, 나누거나 제하는 성질, 더하거나 곱하는 성질 등등의 의미로 확장할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 "음과 양"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의 "善과 惡"처럼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에게 이 둘은 善도 아니요 惡도 아닌, 각자가 가진 성질에 의해 움직여서 서로의 기운으로 향해 우주 만물을 골고루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기운이다. 이들이 가진 조화로운 기운으로 인해 만물체인 木火土金水인 五行이 생겨났으니, 우리 인간 또한 "음양오행"의 섭리 안에 있다. 그 조화와 섭리를 알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윤듀서의 화단(畵斷)에 의하면 "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 그림은 화도(畵道)가 있다. 선으로 표현되는 필법이 공교하고 색으로 표현되는 묵법이 신묘할 때 도달하는 경지가 있다. 여기에 이르려면 화학(畵學), 화식(畵識), 화공(畵工), 화재(畵才)가 갖추어져야 한다. 형상의 상징성을 터득하여 이치를 이끌어내는 것이 畵學, 온갖 사물의 형상과 성질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畵識, 자로 재듯이 그리는 것이 畵工, 마음먹은대로 손이 가는 것이 畵才이다. 이 네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그림의 길(畵道)"를 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老僧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는 인생역정을 다 이겨낸 삶의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세밀한 붓선으로 얼굴 전체를 표현한 덕분에 섬세하고 온유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옷 선은 툭툭툭 던지듯 그려 겉치레 가득한 사람에게 소박한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나물캐는 여인
채녀도(採女圖) 또는 채애도(採艾 .. 쑥 애 圖)라고도 하며, 크기는 30.2×25cm이다. 조선시대 회화사에 처음으로등장하는 俗畵다운 속화이다. 이제까지 서민의 모습이 이렇게 회화상의 주제로 당당히 그려진 일이 없었다. 다만 먼 산의 표현이 그림의 현실감을 다소 감소시키고 있다. 차라리 이를 표현하지 않았다면 더욱 속화의 박진감이 살아났을 것이다.
낙마도 落馬圖
보기에 따서는 유머가 넘치는 그림으로 크기는 110.0×69.1cm이다. 그러나 화제(畵題)의 표현대로 술에 취한 것도, 졸았던 것도 아닌데 왜 말에서 떨어졌을까? 이 또한 인생에서 좌절을 자조적인 기분으로 그린 것은 아닐까...
주감주마 酒감酒馬
윤두서와 말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그림 중에는 말 그림도 꽤 여럿이다. 이 그림은 당나라 때 詩 한 구절을 빌어, 술 취한 채 말을 몰고 가는 장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약간 제쳐진 상체와 손의 채찍에서 음주기마(飮酒騎馬)의 분위기를 내었다. 구불구불한 나무와 방사선 솔잎 그리고 각지게 꺾인 옷 주름에서 약간 중국화풍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시 귀절의 畵題는 주감백일모 주마입홍진(酒감白日暮 酒馬入紅塵) .. 술이거나한데, 해는 저물어 말을 몰고 도성으로 돌아오네...이다.
그의 풍속화들
윤두서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속화(俗畵)"라는 리얼리즘을 개척하는데 앞장을 선 인물이다. 남종문인화는 명나라 말기 중국 소주(蘇州)화단의 오파(吳派)가 중심이 되어 절파(浙派)와는 다른 맥락으로 그림을 해석하고 그림을 그린 회화운동으로, 윤두서는 당시화보(唐詩畵譜) 등 吳派의 화보집을 통하여 아무런 사승관계(師乘關係) 없이 그림에 입문하여, 오파(吳派)의 리얼리즘을 계승, 발전시켰다.
윤두서의 그림에는 말 그림이나 인물화가 산수화(山水畵)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고, 작은 화첩의 소품을 즐겨 그려 그림으로써 실학자(實學者)이면서 속화가(俗畵家)인 자신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래 그림들, 나물 캐는 여인, 목기 깎기, 짚신 삼기 등의 그림은 이전에는 변방에 잊혀졌던 서민(庶民)이 당당하게 선비나 신선의 자리에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윤두서가 그린 地圖
윤두서는 <동국여지지도> 외에 <중국여지도>와 <일본여도>도 그렸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만 남아있다. 동국여지지도(東國與之地圖)는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72.5cm, 세로 112cm의 규모로 채색 필사본이다.
강줄기와 산맥의 표시를 대부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주변 도서를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약 150년 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채색이 매우 아름다우며, 윤두서의 실학자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지도야말로 조선 중기, 조선의 영토가 어떠했는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서쪽으로는 요동지방에서 동쪽으로는 아무르강 하구까지를 조선의 영토로 하고 있다. 그리고 대마도(對馬島)도 역시 조선 영토로 표시하였다.
이 지도는 조선 전기의 조선전도(朝鮮全圖)로부터 조선 후기의 전도로 전환해 가는 과도기의 성격을 보여주는 지도로서 의의가 있으며, 세필(細筆)에 능한 윤두서의 작품답게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며 채색도 훌륭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윤두서가 직접 측량해서 그린 것은 아니지만 당시 목판화(木版畵)로 제작된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탐구하듯 채색본으로 그린 것이다.
각 군현(郡縣)의 모양을 달리하여 표시하므로써 부,목,군,현(府,牧,郡,縣)의 품계를 그려놓은 점이 조선 전기 지도와의 차이점이다. 군현(郡縣)의 채색을 도별로 달리 하였으며, 군현의 명칭 옆에 서울에서의 거리, 좌우도 소속관계를 표기하였다. 붉은 색으로 그린 육로(陸路)도 그 굵기를 달리함으로써 대로, 중로, 소로 등 도로의 크기를 구분하였고, 바닷길은 황색으로 표시하였다.
이 지도를 그린 1710년대에 조선은 압록강, 토문강을 잇는 국경선은 정계비(定界碑) 설치로 확정되었지만, 조선 측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인근지역에 청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 단속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만주가 안 들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현 요하 동부부터 송하강, 흑룡강 중류, 아무르강까지가 조선의 영토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측 상단의 섬은 아무르강 하구 남부에 있는 섬들의 명칭을 표기해 놓았다. 얼른보면 만주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한양을 중심으로 각 지역을 위치시키는 기법으로 그려져 만주쪽이 심하게 압축되어진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대마도(對馬島)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검정색이 압록강을, 빨간색이 두만강을, 파란색이 토문강을 뜻한다.
일본여도 日本與圖
윤두서가 그린 일본여도(日本與圖)는 보물 제 4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지도는 해남윤씨 종가인 전라남도 해남 녹우당(錄雨堂)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는 커다란 크기의 종이 한장을 이용하여 일본 국토 전체를 대상으로 그린 전도로서, 책자의 크기만 하게 접은 절본(折本)형식으로 되어 있다. 표지의 앞면에 "일본여도"라는 표제가 적혀 있고, 표지의 바탕에 담채로 그려진 꽃그림도 에도시대(江戶時代) 전형적인 화훼 화풍이 엿보여 원본의 표지까지 그대로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지도의 오른쪽 상단에 윤두서의 장손인 윤종(尹悰)의 수장인이 찍혀 있을 뿐, 윤두서가 그렸다는 확실한단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윤두서의 장남 윤덕희(尹德熙. 1685~1766)가 쓴 "공재공행장(恭齋公行壯)"에 윤듀서의 지도제작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은 ...
또한 중국의 지도와 우리나라의 지리서는 모두 그 내용을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해서는 산천이 흐르는 추세와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움, 성곽의 요충지를 빠짐없이 자세히 파악하였다. 公은 그때 벌써 지도를 만들고 또 기록하였으며, 지도상의 지점을 실제 다녀본 사람과 함께 책을 펴놓고 증험하면서 손바닥을 가리키듯 낱낱이 열거하였다. 또 <일본여지>를 그렸는데, 역시 빠진 것 없이 아주 상세하다. 대개 公이 군사분야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道里와 山川의 기록에 실제로 각 장의 문자를 쓴 것이다.
여기서 윤두서가 제작한 우리나라 지도란 "동국여지지도"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문인화가와 화원화가들이 왕명을 받아 지도를 그린 사례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지만, 문인화가가 개인적인 관심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지도를 모사(模寫)한 사례는 윤두서가 가장 선구적이었다. 윤두서의 증손자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인 1811년 그의 나이 50세에 쓴 편지에서 윤두서가 그린 일본여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공재(恭齋)께서 손수 베꼈던 일본지도 1부를 보면, 그 나라는 東西로 5천리이고, 南北으로는 통산 1천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도의 너비는 거의 1장에 이르는데 군현(郡縣)의 제도와 역참(驛站)의 도리(道里), 부속 도서들, 해안과 육지가 서로 떨어진 원근, 해로(海路)를 곧장 따라가는 첩경(捷徑) 등이 매우 정밀하고 상세하였습니다. 이는 반드시 임진년, 정유년의 왜란 때에 倭人들의 패전한 진터 사이에서 얻었을 것일텐데, 비록 만금을 주고 사고자 한들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1통을 옮겨 베껴놓았는데, 일본의 형세가 손바닥을 보듯 환합니다.
그러나 윤두서가 그린 일본여도는 이시카와 류센(石川流宣)이 1687년에 제작한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과 1691년에 개정판인 "일본해산조륙도(日本海山潮陸圖)"와 같은 이른바 "류센일본도"를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임진왜란 때 왜인들의 패전터에서 얻은 것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주장이나, 숙종이 임진오랜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윤두서에게 명하여 사재(私財)로 48명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3년간 지리를 조사케 하여 그린 것이라는 가전(家傳)의 일화가 근거없는 설이었음이 밝혀졌다.
해남윤씨가전고화첩 海南尹氏家傳古畵帖
이 화첩은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서화첩은 "자화상"과 "송하처사도" 尹氏家寶라 쓰여진 화첩 2권과 "가전유묵"이라고 꾸며진 서첩 3권으로 이루어졌다. 화첩 1권은 선면 (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부채의 겉면) 그림을 모아 놓은 것으로 1704년~1708년 사이에 그려진 것들이다. 다른 1권은 크기가 다양하며 내용도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 여러 종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