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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극장
평화극장이 소년에겐 놀이터였다. 정치주먹 이정재(李丁載)를 친척으로 둔 덕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었다. 영화 '세계를 그대 품 안에(The World in His Arms)'가 상영되고 있었다.
물범 가죽을 팔아 생계를 잇는 미국인 선장이 알래스카의 대지(大地)를 종횡하며 러시아 공주의 사랑을 얻는 내용이었다. 세월이 흘러 인수합병(M&A)의 제왕이 된 소년은 "그때 그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제가 처음 본 M&A이었습니다. 가난한 선장과 지체 높은 공주의 사랑보다 더 큰 인수합병이 어디 있겠어요?" 그가 만든 회사가 창립 30주년을 맞았을 때 기념식장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세계를 그대 품 안에!'
#종로4가 뒷골목
역술가 백운학(白雲鶴)이 말했다. "직장 걱정하지 마. 눈 속에 푸른 물이 가득 차 있어. 자네 같은 백만불짜리 눈은 처음 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종로4가 점집에서 20대로 성장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김종섭(金鍾燮·62·스페코·삼익악기 회장)은 군대를 갓 제대한 뒤였다. 놀러온 ROTC 동기들이 "심심한데 점이나 보자"며 들른 차였다. 넉 달 뒤 그는 대한항공 승무원이 됐다. 진짜 세계를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11월 5일
스타인웨이는 명품(名品) 피아노다. 세계적인 연주홀에 설치된 피아노의 98%가 이 피아노다. 1853년 설립된 이 유서깊은 회사 주식 16.5%가 이날 김종섭에게 넘어갔다. 내년 3월에는 나머지 16.5%가 그의 품으로 올 예정이다.
그는 세계 피아노업계의 황제다. 삼익악기, 스타인웨이, 자일러, 벡스타인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논현동 삼익악기 본사에는 노획품인 초고가 피아노들이 즐비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치열한 기업 사냥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상도(商道)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말이 있다. 맹자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이다. 김종섭은 '환경'의 중요성을 믿는다고 한다. 태어나고 자란 서울 종로4가가 그에겐 '맹모삼천'의 장(場)과 같았다.
아버지(김정규·金廷圭)는 부근 방산시장에서 면사(綿絲)도매업을 했다. 김종섭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시장을 누비며 상업의 원리를 깨달았다. 제조, 도매, 소매를 거치며 어떻게 가격이 출렁이는가를 실전 체험했다.
―상업의 도(道)가 뭔가요.
"친구들이 껌 한개를 살 때 저는 24갑이 든 통을 샀습니다. 가격이 3분의 1밖에 안 되니 이익이지요. 방산초등학교 5학년 때 반장을 했는데 전 친구들에게 밥만 싸오라고 했어요."
―왜요?
"점심시간이면 뒷문으로 아이들을 끌고 설렁탕집으로 갑니다. 100원만 교대로 가져오면 여러 명이 뜨끈한 설렁탕 국물에 밥을 말아 먹을 수 있었어요. 김치, 깍두기는 공짜였지요. 다른 아이들은 겨울에 밥 덥힌다고 난로 위에 얹느라 난리를 피울 때였어요. 당시는 밥이 더 귀해 국물값은 쌌습니다. 대학(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다닐 때도 시장의 덕을 톡톡히 봤지요."
―장사를 했습니까.
"당시 아르바이트는 가정교사밖에 없었습니다. 따분하더군요. 수학 문제 몇개 풀어주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학생도 귀찮아하는 눈치고. 전 미팅 주선을 했어요. 문리대에서 30명 모으고 이화여대 같은 곳에서 30명을 모으면 60명이 됩니다. 참가자들에게 받은 돈으로 다방을 빌려요. 몇번 해보니 학생들이 숫기가 없어 앞에 놓인 콜라, 빵, 과자에 손도 안 대더라고요. 나중에 제가 시장에서 싸게 음료수와 과자를 사왔지요. 다방은 빌리는 값만 내고."
―폭리 아닌가요.
"폭리는 아니지요. 다양한 이벤트도 제공했으니까요. 김하중(金夏中) 전 통일부장관이 대학 1년 선밴데 당시 4인조 밴드에서 리드기타를 하고 있었어요. 공연할 곳이 없어 온몸이 근질거렸답니다. 미팅 장소에 나와 신나게 트위스트곡을 연주했습니다. 물론 공짜지요. 그렇게 1년에 미팅 10번 정도 주선하니 가정교사로 버는 돈보다 많았습니다."
―점을 좋아합니까.
"동성중고를 다녔는데 한번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스님이 절 보더니 '이놈 참 잘 생겼네. 앞으로 크게 되겠다. 열심히 공부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스님을 6년 동안 세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덕담(德談)의 힘은 무서워요. 그래서 저도 어린이들에게 항상 덕담을 해줍니다."
―항공사 승무원이 당시로선 남자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직업이었지요.
"대한항공 입사시험에 합격한 뒤 적십자회담 사무국에 면접을 보러 갔어요. 그게 중앙정보부인 줄 몰랐습니다. 대학선배들이 많았는데 '여긴 상처입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며 말리더군요. 실연(失戀)한 탓도 있습니다. '실컷 연애나 하자'는 기분으로 택한 겁니다."
―누구에게 딱지를 맞았길래.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사귄 여학생이 제가 군에 입대한 지 1년 후에 이민갔어요. '헤어지자'더군요. 오기가 생겨 서른다섯살 될 때까지 결혼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1년에 반쯤은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도쿄, 타이베이, 홍콩에 미국까지,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결심은 그리 했지만 27세에 결혼했잖아요. 이런 얘기 하면 부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내도 사연은 알아요. 불문율(不文律)처럼 서로 언급하지 않는 것뿐이지요."
―항공사는 왜 그리 일찍 그만둔 겁니까.
"당시 대한항공에는 여승무원이 400명, 남 승무원은 70~80명 정도였어요. 아내가 싫어했어요. 그만두고 미국 이민을 가자더군요. 미국행을 준비했는데 그만 아내가 덜컥 임신을 한 겁니다."
―당황했겠군요.
"미국에선 여자도 일(job)이 있어야 하는데 입덧도 심하고 도저히 그냥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때 장인어른의 제의가 왔어요…."
■기업(起業)
장인 신난휴(申蘭休)는 타고난 기술자였다. 장인은 미국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위를 불렀다. 자그마한 부속 하나를 내보였다. 불도저나 탱크의 무한궤도 속 롤러에 들어가는 '플로팅 실(floating seal)'이었다.
당시 국내에선 제대로 된 플로팅 실을 만드는 곳이 없었다. 흉내내는 곳은 많았지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부품의 질(質)에 턱없이 못 미쳤다. 미제와 국산의 개당 가격이 3000원 대 600원으로 5분의 1이나 됐다.
―그것으로 장사를 한 겁니까.
"동아건설에 아는 선배가 있었어요. 부품을 들고 찾아가니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하며 놀라더군요. 중소기업 부속상에서도 같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플로팅 실 장사를 1년만 해보자고 마음먹었지요. 그래서 차린 게 신생산업입니다."
―마케팅이 쉬운 건 아니지요.
"동아건설에 찾아가니 대뜸 '몇개나 갖다 줄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부품의 수가 들쭉날쭉할 때였으니까요. 처음에 200만원어치를 납품했는데 상당한 액수였습니다."
―판로(販路)가 더 있던가요.
"국방부 조달본부에도 찾아갔지요. 거기서 두 달 동안 1200만원어치를 납품했습니다. 별것 아닌 액수같지만 '대박'이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옛 현대양행에 납품하기 시작했고요. 일이 술술 풀렸습니다."
―그때 만든 회사가 신생산업사였지요, 양평동에.
"대한항공 다녔으면 월급을 20만원 받았을 땐데 월수입이 6배나 되니 신이 났습니다. 신생산업을 키우다 1979년에 아스팔트 플랜트를 하게 됐습니다. 돌에 시멘트 섞으면 레미콘이 되지요? 돌에 아스팔트 섞으면 아스콘이 되는 겁니다. 그걸 섞어주는 기계를 만든 거지요. 전국에서 도로공사가 한창이었고 중동 붐까지 불었습니다."
―그렇게 행운을 가져다준 회사 이름을 왜 '스페코'로 바꿨나요.
"1994년 중국에 진출했을 땝니다. 무한(武漢)중공업 사장이 내한해 공장을 방문했는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묻는 겁니다. '여기서 근무하는 사람이 전부 감방에 갔다 왔느냐'고요. 중국에선 지역에 따라 신생(新生)이 갱생(更生)의 뜻이 된다는 겁니다. 깜짝 놀라 개명했지요."
―사업과 위기는 동반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80년에 2차 오일쇼크가 찾아왔을 때 고전했습니다. 그때 동서와 동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어려워지자 모 대기업에서 3명을 스카우트해 5인 동업을 했어요. 1981년 경기가 회복되자 그 사람들이 딴마음을 품은 겁니다."
―배신한 겁니까?
"사업 하다 보면 어느 회사에 언제 어떤 주문이 나온다는 일정을 훤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주문이 나와야 할 곳에서 나오질 않아요. 알아보니 동업자 중 일부가 따로 회사를 차려 우리에게 올 주문을 빼돌린 겁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주문이 나올 회사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 보니 그 사람들과 계약서를 쓰기 직전 단계였어요. 겨우 우리 쪽으로 주문을 돌려놓았지요. 그 사람들이 만든 회사는 3개월 만에 부도가 났습니다."
―IMF 때는 힘들지 않았나요.
"스페코가 1997년 10월에 코스닥 시장에 상장됐습니다. 기업인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IMF 신호는 1994년부터 왔어요. 다행히 저는 코스닥에 상장을 한 덕에 현금을 가지고 IMF를 맞았습니다. 천운(天運)이었지요."
■귀재(鬼才)
1990년 한국 제조업체들은 위기를 맞았다. 고임금(高賃金)시대가 열리면서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자연 눈을 밖으로 돌리다 보니 '중국'이란 활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종섭의 스페코도 그랬다. 한국기업들은 중국시장에서 제살 파먹기 식 이전투구(泥田鬪狗)에 열중했다. 당시 아스팔트 플랜트 1위 기업 스페코의 뒤를 한 경쟁사가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대당 100만달러짜리를 50만 달러로 후려치는 식이었다.
―그렇게 가격을 내려도 남는 게 있나요?
"김포공항에 바이어가 오면 난리가 났어요. 서로 자기네 회사 차에 태우려고요. 현지 에이전트에게 양쪽에서 오퍼가 가고 아주 엉망이 됐지요. 제가 그 회사를 찾아가 물어봤어요. '이렇게 저가 주문을 받으면 얼마가 남느냐'고요. 대답을 못하더군요. 제의를 했지요. 창구를 단일화하고 6대4로 시장을 배분하자고요."
―순순히 응하던가요.
"말로만 하면 못 믿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회사 지분의 3분의 1을 인수했습니다. 혈맹(血盟)관계를 맺은 거지요. 그런데 그 뒤 말썽이 또 생겼어요."
―무슨 일인가요.
"그 회사도 2인 오너 체제였는데 한명이 자꾸 약속을 어기는 겁니다. 그래서 저와 뜻이 맞는 오너의 주식을 인수했지요. 그러곤 약속 어기는 사람을 불러 계약서를 보여줬어요. 얼굴이 하얘지더니 '아이고 회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주식도 인수해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인수합병에 나선 겁니다."
―한라중공업 플랜트 사업부문도 인수했지요.
"당시 법정관리인이 강경호씨였는데 어느 날 점심이나 먹자더니 그 자리에 가니 충북 음성에 가자는 거예요. 조선부문은 현대중공업으로 넘어갔는데 공장이 참 멋졌어요. 우리 기술자들에게 실사(實査)를 지시했어요. '기계장이들은 이런 회사에서 일해보는 게 꿈입니다'라는 보고서가 올라왔어요."
―인수합병을 하면 필연적으로 구조조정을 하지요?
"한라중공업 플랜트 사업부문은 예를 들면 제지회사, 시멘트회사, 발전소를 세워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 분야는 중국, 인도에 안돼요. 방산(防産) 분야 등 일부 품목으로만 특화하고 많은 아이템을 정리했습니다."
―그 회사에 풍력(風力)시장에도 진출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사업에 성공한 후배가 우연한 기회에 풍력발전시장에 대해 브리핑을 해줬어요. 유가가 오르면 항상 대체에너지 이야기가 나오지요? 태양광 발전은 비용이 많이 듭니다. 풍력은 유럽에선 전체 에너지의 2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중이 큽니다. 지금은 미국이 떠오르는 시장이고요."
―얼마 전 미국 텍사스 주 바로 밑 멕시코 땅에 풍력발전용 타워를 만드는 스페코 윈드파워 공장을 준공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풍력발전소를 세우기가 가장 좋은 곳이 중앙부입니다. 다른 곳은 땅값이 비싸 안되지요. 저희는 풍력 타워만 만들어요. 멕시코 몬클라바(Monclava)지역인데 인건비가 미국의 6분의 1입니다."
―한국중공업 입찰에선 실패했지요.
"(입맛을 쩍쩍 다시며) 3000억원쯤으로 예상했는데 실제 결과도 그렇게 나왔어요. 펀딩을 담당했던 상호신용금고가 입찰 열흘 전에 부도나지만 않았다면…. 결국 두산이 인수했는데 거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뒤 캐피털 라인이라는 구조조정 전문회사를 만들었어요. 제 친구인 삼원가든의 박 회장(골퍼 박지은의 아버지)도 그 회사를 통해 삼호물산을 인수했습니다."
―기계 부속에서 아스팔트 플랜트에 한라중공업 플랜트 부문, 악기회사까지. 너무 관심이 넓은 것 아닌가요?
"(사무실 벽에 걸린 대형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저는 항상 저 지도를 봅니다.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회장께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지요? 전 지도를 보며 '세계는 넓고 좋은 기업은 널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물 반(半) 고기 반이지요."
―그러다 김우중씨는 망했잖아요.
"막무가내로 넓히면 그렇게 되죠."
■제왕(帝王)
스페코의 주 매출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부도난 삼익악기의 주 공장이 그곳에 있었다. 김종섭은 인도네시아에 출장 갈 때마다 삼익악기 공장을 둘러봤다. 그러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삼익악기는 금융사고로 좌초했다. 매출액과 자산은 의외로 탄탄했다. 김종섭은 2002년 삼익악기를 인수할 때 '경쟁력 없는 고임금의 직원 1600명이 가장 큰 문제'라는 진단을 내렸다. 한 달 간 고민한 끝에 그는 인수를 결정했다.
―원래 인수가가 3500억원이었는데 은행에서 2000억원을 탕감해줬지요? 본인의 돈은 얼마나 들어갔습니까.
"총 400억원 가운데 제 돈 230억원이 들어갔고 나머지는 펀딩을 했어요. 1100억원은 인수 후 1년 뒤에 부동산을 매각해 갚는 조건이었는데 마침 부동산 시장이 회복기로 돌아섰습니다. 타이밍이 맞았지요."
―인력을 감축할 때는 노조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노조원들을 5~6개 파트로 나눠 일일이 만났습니다. '경기가 조금이라도 좋을 때 좋은 조건으로 퇴직금 플러스 알파를 받고 새 일자리 찾는 게 좋지 않겠느냐.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근로자들도 처음엔 반발했지만 수긍했어요. 처음 800명을 감축할 때 1인당 돌아간 액수가 퇴직금과 위로금 합쳐 1억원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400명이 비슷한 조건으로 퇴사했습니다. 삼익악기는 그 후 경영이 정상화돼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피아노는 칠 줄 압니까?
"모릅니다. 전 피아노시장을 다르게 봅니다. 보통 음질(音質)을 따질 것 같지만 정작 가정에선 그렇지 않아요. 하나의 가구입니다. 거주 공간에 가장 멋있고 품위있는 '장식품'이 돼야지요. 실제로 삼익악기 맡고 보니 음질 나쁘다고 반품하는 고객은 없어요. 컬러나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반품하는 고객은 많았습니다."
―음악가들이 들으면 기절할 소리 같은데, 그럼 독일 벡스타인을 인수한 것도 디자인차원인가요?
"하도 주변에서 '피아노 소리가 어떻느니' 이런 말들을 하길래 '어느 나라 피아노가 제일 좋으냐'고 물으니 독일이래요. 저는 우리 제조업에서 가장 부족한 게 원천기술이라고 봅니다. 기술자 1~2명 데려와서는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없어요. 아예 인수하는 게 낫지요. 벡스타인에 가 '투자받을 용의가 있느냐'고 떠보니 '왜 안되냐(Why not?)'고 해요."
―그때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속으로 '어라?' 했어요. 독일도 당시 피아노회사들이 침체기였거든요. 그래서 인수했죠."
―스타인웨이 주식 인수는 2005년부터 4년이 걸렸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스타인웨이는 명품 중 명품입니다. 피아노업계에 진출한 이후 '저런 회사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2005년엔 스타인웨이 주식 100%를 인수하는데 3억8000만 달러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6000만 달러면 되지요. 그 사이 주가가 빠졌으니까요."
―스타인웨이에는 황금주(黃金株)라는 게 있지요? 그들이 인수합병을 반대하면 주식을 다 사도 불가능한 거 아닌가요.
"나름대로 해법은 있지만 밝힐 단계는 아니고요, 이런 예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베젠도르프라는 악기회사를 미국회사가 인수한 적이 있는데 20년 만에 다시 오스트리아가 되찾아갔어요. 그때 요란한 행사가 열렸어요. 오스트리아의 자존심 같은 기업이었으니까요. 스타인웨이 인수는 돈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해야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지요."
―스타인웨이로 뭘 할 생각입니까.
"그런 명품회사는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지요. 개인적으론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인웨이를 쓰는 사람은 세계적인 부잡니다. 전 그 고객들에게 '상류사회 마케팅'을 할 계획입니다. 부자들의 관심이 뭘 것 같습니까, 건강 아니겠어요? 스타인웨이를 이용한 헬스케어같은 것도 고려할 수 있지요."
―평소 도박성이 강한 성격입니까?
"골프는 싱글(핸디 6)을 치지만 도박은 근처에도 안 갑니다."
―아들이 한 분 있네요, 지금 삼익악기 전무를 맡고있는.
"(…)2000년에 대학 3학년에 다니던 둘째 아들을 잃었어요. 미국 유학 중에 귀국했는데 강남 코엑스 개장일에 사고를 당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지하 4층으로 추락한 겁니다. 설계변경을 해놓고 미처 그 문을 폐쇄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도 제조업을 하지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안전불감증이 우리 주위에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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