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Struggle)
김소연 시인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와 산문집 <마음사전> 등을 출간했습니다. 이 연재를 통해, 언제나 고민거리며 골치거리인, 그러면서도 눈물겹도록 가녀린 가능성이 배면에 배여 있는, 세상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람의 사랑과 사람의 삶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시인의 사유에는 언제나 끄트머리에 시가 놓이게 됩니다. 세상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래서 연재의 제목은 '시옷의 세계'가 됐습니다. 대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십대 때 나 혼자 조용히 국어사전을 펴들고 ‘사랑’이라는 말을 찾아보았다.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포켓국어사전에는 “중히 여기어 아끼는 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히’의 무게감과 ‘아껴’의 애틋함이 전해져서, 그 뜻을 지금껏 중히 여기어 아끼고 있다. 이십대 때에는 대학 도서관으로 저벅저벅 들어가서 ‘투쟁’이라는 말을 국어대사전에서 뒤졌다. “①목적을 이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는 것 ②상대편을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라 적혀 있었다. 싸움 투. 다툴 쟁. 그 풀이는 장차 시인이 될 어느 청춘에게는 너무 거칠었다. 그래서 다시 한영사전을 꺼내 들고, 투쟁을 영어로는 무엇이라 표기하는지를 찾아봤다. ‘conflict’ 혹은 ’struggle’, 두 개의 낱말을 만났다. conflict에는 갈등과 충돌이라는 상(호)충(돌)의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었고, struggle이라는 말에는 안간힘을 쓰는 상태라는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나는 struggle에다 연필로 밑줄을 긋고 페이지 귀퉁이를 접었다.
struggle은 ‘투쟁하다, 고투하다, 몸부림치다, 허우적거리다, 힘겹게 나아가다, 나쁜 결과를 막기 위해 싸우다, ~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 힘이 들다’ 등으로 사용된다. 부조리한 상황에 대하여 지치지 않고 안간힘을 쓰는, 고귀한 삶에의 의지. 여기엔 포기하지 않는다는 억척스러움이, 꼿꼿하고 굳세지만은 않다는 인간다움이, 낑낑대는 듯한 근근함이 포함돼 있다. 뻘 냄새도 나고, 살 냄새도 나고, 땀 냄새도 난다.
‘투쟁’이라는 게 반드시 패기와 결기로 똘똘 뭉친 지사의 행동양식만을 뜻하진 않는다. 몸부림치고 허우적거릴 뿐인 패자의 눈물나는 행동양식도 투쟁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연필을 집어던지는 십대의 책상머리도 투쟁이고, 세상에 되는 일 하나 없다며 절망에 찬 보고서를 촘촘하게 적는 이십대의 일기장도 투쟁이고, 비정규직을 자처하며 하고 싶은 일만 골라하는 삼십대의 통장잔고 제로 상태도 투쟁이고, 포장마차에서 4인분 족발을 쌓아놓고 홀로 소주잔을 움켜쥔 사십대의 고독도 투쟁이고, 사표를 내던지곤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꿈꾸며 창업교육센터를 찾아가는 오십대의 용기도 투쟁이고, 인문학이 뭐냐며 공공 도서관의 무료 강좌를 찾아가는 육십대의 발걸음도 투쟁이다.
공짜 자전거를 주겠다는 유혹을 거절하며 신문구독을 끊는 것도 내겐 투쟁이었고, 감옥에서 쉽사리 풀려나오는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 제품을 일부러 사지 않는 것도 나에겐 투쟁이었고, 차를 팔고 낑낑대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느라 핸드백을 버리고 배낭을 선택한 것도 나에겐 투쟁이었다. 관객 없는 진지한 영화에, 주목받은 적 없는 먼지 쌓인 시집에, 텔레비전에 얼굴 비칠 일 없는 가수의 앨범에, 진지한 고전보다 천박하고 조야하고 거침없는 새 문화에 ‘잘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마음으로 투자를 하고자’ 지갑을 여는 것도 내겐 투쟁이었다.
빨리 걷는 출근길 인파 속에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걷는 걸음도 투쟁이고, 남들이 땅을 보는 법을 공부할 때 하늘의 별자리를 보는 법을 공부하는 것도 투쟁이고, 모두가 식도락을 즐길 때 소박한 풀밭 밥상에 만족하는 것도 투쟁이고, 금전출납부를 쓸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것도 투쟁이고, 궁리를 할 시간에 몽상을 하는 것도 투쟁이고, 판단을 할 시간에 사색을 하는 것도 투쟁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봄날에 내렸던 어이없는 폭설들도 극렬한 투쟁임을, 개발 공사 중인 금강에서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발견된 물고기떼의 말없는 죽음도 더없이 극렬한 투쟁임을, 아스팔트의 균열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풀들도 투쟁하는 중임을. 엉뚱한 행동, 기괴한 상상력, 불편한 공간, 까칠한 성격 등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우울하고 슬프며, 서럽고 괴로워 흐물대는 우리의 실상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이 괴기함을 지닌 텍스트, 이 우울한 모습을 한 사람에게 매혹당할 때에도 우리는 투쟁의 일부가 된다. 여기엔 싸워서 이기고 쟁취할 거란 의지 따위는 없다. 낙오를 각오한다는 의지 또한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다는 천성과 이렇게 해야만 내가 조금은 행복해진다는 진심이 있을 뿐이다. 내팽겨쳐진 인간의 천성과 인간의 진심을 사모하기 위해 삶을 낭비해도 괜찮다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간밤에 ‘중히 여기어 아끼고 싶은 마음’을 애써 표현하려 허우적거렸던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표현의 분열과 균열 속에서 낭패감을 맛보며, 밤새도록 눈물을 흘린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허우적거렸고, 분열했고, 울었던 한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은 어쩌면 뻘 냄새, 살 냄새, 눈물 냄새를 풍기며, 이전에 있던 자리와는 다른 곳을 향해 환형동물처럼 조금씩 이동을 하지 않았을까.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떨림이나 울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의 보이지 않는 둘레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둥그런 무늬가 일그러지거나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것을
만약 당신이 선택하는 자라면 옆에 있거나 떠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그 여자는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는 것을
- 하재연,「이동」,『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