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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한국시인협회 회원 단체 기념사진.조병화 선생님 문학관 정원에서-맨앞줄 우측 세번째 어깨 붉은 줄 티가 본인 김윤자 |
* 칠장사
안성의 시골길을 따라 산중에 있는 절, 칠장사에 도착한 것은 11시 30분이다. 한낮의 햇살이 더웁다고 느껴지는 시간이다. 먼저 입구에 지어진 커다란 정자에서 문화 해설사로 나오신 분으로부터 칠장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안성에는 모두 26개의 문화재 보물이 있는데 그중 12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입석 불상과 나한전, 인목대비가 바친 탱화, 인목대비 친필 족자, 임꺽정의 목불상 등 훌륭한 역사 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곳에서 유숙하며 현몽하여 장원급제를 했다고 한다.
규모가 그리 큰 절은 아닌데 대웅전과 그 곁에 입석 불상 2개가 있고 가파른 언덕 계단을 올라가니 가장 소중한 보물인 나한전이 있었다. 조그맣고 하얀 부처가 앉아 있다. 작은 집 뒤의 소나무가 오랜 연륜을 말해주며 서 있다.
큰 행사 때만 열어서 공개한다는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와 임꺽정이 스승 갖바치에게 바친 목불상이 있는 전에도 들어가서 자세히 보았다. 선조의 부인 인목대비가 당쟁으로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해 칠장사를 원찰로 삼고 자주 찾아다녔다고 전해진다. 눈물겹게 읽은 역사소설 〔인목대비〕가 떠올랐다. 빼어난 글씨체는 아니지만 똑고른 글씨체로 불경을 옮겨적은 글이 한쪽 벽면을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그리고 친필 족자가 한 개 걸려 있다.
1983년 경기도 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절이다. 고려시대 1014년 혜산국사가 왕명(현종의 명)으로 중건했고, 이곳에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사찰의 이름이다. 안성에 이런 유명한 절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역사적 향기가 물씬 배인 절이기에 더욱 뜻깊은 걸음이다.
사진:칠장사 대웅전 전경-한국시인협회 회원들 자유로운 관람 시간 |
* 곰솔 마루 점심식사
칠장사에서 조금 내려오니 곰솔마루라는 상호의 깨끗한 식당이 도로변에 있었다. 한국시협 회원이 서울에서 130명, 안성에서 20명 총 150여명인데 모두 수용하는 너른 식당이다.
메뉴는 해물 버섯 전골이다. 네명씩 한 테이블에 앉아 해물과 버섯, 만두, 국수까지 넣어 끓여먹는 음식인데 담백하고 맛이 좋다.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음식을 먹으며 문우의 정을 나눴다.
잠시 시간을 내어 신임 오세영 회장님의 말씀이 있었고, 전임 회장님 김종해 선생님께 감사패를 증정했다. 새로 바뀐 사무국 직원들의 인사소개도 겸했다. 한국시협을 이끌어 가는 일꾼, 고마운 분들이다. 오세영 회장님은 시인들에게 직접 술잔을 건네며 술을 따라 주셨다.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회장님의 술잔은 감사함으로 받아 조금 마셨다.
상당히 더운 날씨다. 선풍기를 다 틀어도 땀이 많이 난다. 뒤늦게 나온 수육보쌈은 다 먹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풍성한 식단이기에 아쉽지만 일어서야 했다. 이미 해물전골로 배부르게 먹었으니 괜찮다.
안성 출신 시인 김유신님은 5월 31일 지방자치의원선거로 군수님이 나오시지 못함을 알렸다. 유감스러운 일이며 식사를 대접하려 했는데 선거법에 위배되어 그마저도 못하여, 본인이 동동주를 산다고 했다. 우리 한국시협은 어느 지방에 가든 환영 프랭카드와 함께 훌륭한 대접을 받는다. 군수님 또는 시장님이 나와 함게 동참하며 식사를 대접한다. 선거일을 피하여 왔다면 이번도 그리 대접받았을 것이다.
시인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이다. 그만큼 시인은 영롱한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 아름답고,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박두진 문학관으로 이동했다.
사진:곰솔 마루 해물전골 점심식사-(우)김남조 시인님과 허영자 시인님,그리고 모자 쓴 신수현 시인 |
* 박두진 문학관
안성시립도서관 3층에 마련되어 있다. 도서관 입구에는 박두진 선생님의 시 〔고향〕이 커다란 시비로 세워져 있다. 안성이 고향이시기에 이곳 땅을 노래한 시다.
주차장을 지나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생시에 쓰시던 육필 원고지와 문구가 있고, 모아오신 시집들, 시들이 잘 진열되어 있다. 활동하시던 전성기 때의 사진도 있어 생시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두진 선생님과 나는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깊은 인연이 있다. 나의 시 〔고목〕을 평설해 주시고, 시인으로 등단하길 권해 주셨다. 내 나이 이십대 후반, 한참 교직에 전념할 때다. 2번의 편지가 왔는데 애석하게도 참석치 못하여 시인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 뵈오니 그때의 회억으로 감회가 깊다. 훌륭한 작품들이 시인들의 가슴을 채우고 가신 님의 넋을 기리고 있다.
사진:안성시립도서관 입구 박두진 선생님 [고향] 시비 앞에서-가운데줄 우측 둘째 어깨 붉은 줄 티가 본인 김윤자 |
* 박두진 선생님 집필실
선생님께서 글을 쓰시던 집필실은 따로이 한적한 곳에 있었다. 도로에서 한참을 걸어올라가니 울창한 숲 향기 그윽한 곳에 님의 시 혼이 살고 있다. 방안 가득 채워놓은 수석과 문인들과 담소를 나누시던 다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0여년을 남한강변에서 채석했다는 기묘한 돌들이 장관이다. 정원에도 놓여있다. 셋째 아들 박영하 홍익대 미대교수님이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주방에서 직접 받아먹은 물은 달고 시원했다. 님이 머무신 곳이기에 그러했으리라. 님이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나신 집, 어딘가에서 선뜻 걸어오신 것만 같은데, 우린 이제 만날 수 없는 님이기에 돌아서야 한다. 상큼한 시골 향기를 맡으며 내려왔다.
사진 1:박두진 선생님 집필실 정원에서 한국시협 회원들 기념사진-두번째줄 우측 두번째 어깨 붉은 줄 티가 본인 김윤자 사진 2:박두진 선생님 집필실 전경 |
* 편운 조병화 문학관
조병화 선생님은 생시에 땅과 집을 마련하여 문학관을 지어놓고 떠나셨다. 산자락 아래 아늑한 곳에 넓은 밭과 문학관, 그리고 곁에는 조상, 어머니, 아내와 함께 묻힌 묘소가 있다.
우리 일행은 먼저 묘소에 들러 오세영 회장님의 대표 헌화가 있고 잠시 묵념으로 님의 명복을 빌었다. 유난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셨던 님은 묘소 입구에도 문학관 뜨락에도 모자상을 세워 놓았다. 〔어머니〕란 시를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문학관은 1층과 2층으로 유년시절부터 모아오신 사진, 글, 외국여행시 그려온 그림과 글, 유품 등이 고스란히 진열되어 있다. 금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유럽기행에 관계되는 유품과 글을 전시해 두었다. 다음에는 또 다른 주제로 유품을 바꿔서 전시한다는 것이다.
역시 조병화 선생님의 아들이 안내해 주었다. 관리하며 이곳에서 사는 것 같다. 사후에 문학관을 만드는 것이 상당히 힘드는 것으로 아는데 조병화 선생님은 치밀한 계획으로 미리미리 문학관을 세워놓고 떠나심에 더욱 존경스럽다.
나오는 입구에는 '조병화 생가지' 라는 문구를 붙여놓은 2층 집이 있다. 지금은 딴 사람이 집을 고쳐서 짓고 사는데 어린 시절 사시던 집이란다. 세월은 사람을 이 땅에서 데려간다. 꼭 어느 곳엔가 살아 계실 것 같은데 영영 다시는 뵙지 못하는 님들이다.
오늘 한국시협 봄 문학기행은 뜻깊은 행사다. 두 분의 문학관에서 시혼의 봄꽃을 보았고 어떻게 시인의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큰 도움을 얻었다. 작은 유품 하나도 떨구지 말아야겠다는 것과 훌륭한 시를 생산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도 후일에 문학관을 세울 수 있길 빌어본다.
사진:조병화 선생님 가족 묘소와 문학관 외경 |